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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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에서 확신으로 51 - 참 신앙과 거짓 신앙 (5) - 하나님을 아십니까?

로마서 10:2-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4-06-22

말씀내용
<하나님을 아십니까> 롬 10:2~3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호 4:1).”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했던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을 향해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 8:44).” 물론 오늘날 교회를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들은 두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자손이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도덕적인 붕괴를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뒤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라는 말씀이 바로 성경이 일관되게 지적하는 바, 도덕적 붕괴의 근본적인 원인인 것입니다. 이것은 4절에서 그리고 6장에서 계속 지적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미디어에서 떠드는 사건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드러나지 않은 문제는 더욱 심각합니다. 성경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그렇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범죄하지도 않고 도덕적 잘못에 빠지지도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윗도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었지만 범죄하였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것은 도덕적 붕괴가 도덕적 습성이 되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회개할 줄 모른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분명한 증거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하나님을 아는가’하는 관점에서 참된 신앙이란 과연 무엇인지 성경의 교훈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 신앙은 열심의 문제가 아니다(갈 1:14; 빌 3:6 갈 4:17).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열심을 말합니다. 그들의 열심을 부인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가졌던 태도를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갈 1:14).” 자신의 열심은 교회를 박해하게 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 살게 하였습니다(빌 3:6). 이런 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기록할 때 생각한 유대인의 열심이었습니다. 사도는 열심 자체가 나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곳에서 성경은 신앙의 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딛 2:14). 로마서 12장 11절에는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했습니다. 신앙의 열심과 관련하여 무서운 말씀은 주님께서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신 경고입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9).” 미지근한 자리에 있는 자들을 향한 주님의 엄중한 경고입니다. 열심은 이처럼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그 열심이 지식이 없는 열심일 때 위험하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열심을 신앙의 참된 증거라고 말하려고 한다면 그 열심은 반드시 지식이 있는 열심이어야 하고 그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어야 합니다. 단순히 열심 자체를 신앙의 미덕이라거나 참된 신앙의 증거로 볼 수는 없습니다.
저는 오늘날 많은 교회와 영적 지도자들이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경고를 거의 무시하고 있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지식이 없는 열심을 부추기는 행위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조직도 인간들로 구성된 조직이기에 조직 자체가 유지되고 강화되려면 누군가의 열심과 희생이 요구됩니다. 단지 인간적인 차원에서 생각한다면 조직의 지도자들은 사람들의 열심을 부추겨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지식 없는 열심을 받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결국 자기 의를 쌓는 종교 행위이고 그 교회는 바벨탑과 조금도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2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자기 의를 쌓는 것은 결국 적극적으로(‘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는 반역 행위이기 때문에 악하고 그 열심은 악한 열심입니다. 바울 사도가 주님을 만나기 전에 그랬던 것과 같습니다. 한 때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공부를 열심히 했고 기도도 열심히 했으며 교회의 봉사에도 앞장을 섰습니다. 그러나 정작 지금은 교회를 떠나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지식이 없는 열심인 것입니다. 그 열심은 참된 신앙의 증거라고 볼 수 없는 이유입니다. 물론 그들 중에는 계속 열심을 가지고 교회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식이 없는 열심은 결국 사탄에게 이용당하여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할 뿐입니다. 자기 영혼을 피폐하게 하고 또 교회를 세상처럼 만들어버림으로써 교회를 허무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신앙은 단지 열심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비록 열심은 중요한 것이지만, 저는 “열심이 있습니까?”라고 묻는 대신 “하나님을 아십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여러분이 참으로 하나님을 안다면 그 영적인 지식은 여러분 안에 어떤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열심을 하나님과 교회를 향해서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2. 올바른 지식이 아닌 것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하나 더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본문은 유대인들이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지식을 추구했다는 말입니다. 잘못된 지식, 거짓된 지식도 열심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A. 성경을 아는 지식, 교리/신학을 아는 지식(고전 13:2)
먼저 잘못된 지식은 성경을 아는 지식, 교리와 신학을 아는 지식일 수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어서 많이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또 신학교에서 가서 혹은 개인적으로 신학 책들을 공부하고 신학과 교리에 정통할 수도 있지만 이것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의 바울 사도가 그랬고 유대인들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제임스 패커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서론에서 이 문제를 잘 다루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많이 알지 못하면서도 경건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기도하는 법, 전도하는 법, 성경을 읽는 법,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법, 헌신하는 법,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법 등등을 잘 알 수 있다.” 이 말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목사가 많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약간의 지식이 하나님에 대한 많은 양의 지식보다 값지다”고 그는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2절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여기서 사랑은 거룩한 감정에 속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당신의 성경 지식과 신학 지식이 당신 안에 거룩한 감정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헛된 지식일 뿐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 지식과 신학 지식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올바른 지식이 되려면 우리 안에 거룩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B. 복음과 하나님에 대한 부분적 지식
올바르지 않은 지식은 또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성령님께서 주신 구원의 은혜가 없이도 그럴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까요?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은혜 베푸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서 위대하고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실 뿐 아니라 그것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누가 싫어하겠습니까? 이런 복음 제시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거기 마음이 끌리는 것은 본성적이고 자연스러운 태도일 뿐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기뻐할 수 있고, 마음이 뜨거워질 수도 있습니다. 결국 자기에게 잘 대해주는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중생한 사람만 볼 수 있는 하나님의 거룩함의 아름다움은 없는 것입니다. 위의 설명들은 다 옳습니다. 하지만 십자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라는 개념과 함께 갈 때에만 그 진정한 의미가 드러납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오늘날 많은 교회의 강단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그리고 지옥 교리는 잊혀졌습니다. 복음과 하나님에 대한 부분적 지식을 확신하고 기뻐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C. 신앙에서 오는 세상적 유익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믿는 신앙 지식(마 13:21)
이처럼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믿음이 아닐 수 있습니다. 자기가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천국과 지옥의 실재에 대해서 더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신앙을 통해서 내게 주어지는 유익이 있다고 생각할 때 그 사람은 말씀을 더 믿는 경향이 있는데 성령님께서 주시는 구원 얻는 믿음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이것 역시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거짓 신앙인 것입니다. 씨 뿌리는 자에 대한 주님의 비유에서 흙이 얇은 돌밭에 씨앗이 떨어진 경우와 같이 이 마음은 피상적인 마음이라서 당장은 그 말씀에 대해서 좋아하고 기쁨으로 반응하지만 실제 삶에서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신앙을 부인하고 맙니다(마 13:21).

D. 지식 자체를 추구하는 태도
제가 여기에 더 추가하고 싶은 경우는, 지적인 것을 추구하는 태도입니다. 성경과 복음의 진리는 매우 논리적이고 정교합니다. 그저 닥치고 믿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이성적인 존재로 창조하셨기에, 사람의 이성과 무조건 반대되는 것을 제시하시고 믿으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이성으로 납득한 것이 곧 믿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충분히 설득하십니다. 그래서 이성적 추구와 논리를 중시하는 사람이 복음의 말씀이 매우 논리적이라고 생각하면서 듣게 될 때, 그는 자신이 참된 복음의 지식을 가졌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올바른 지식이 아닙니다. 그저 그 사람의 기질적 본성이 만족되고 즐거워하는 것일 뿐입니다.

3. 올바른 지식

A. 하나님을 아는 지식(요 17:3; 빌 3:8; 고전 2:12,14; 골 1:9; 시 34:8; 119:18).
그렇다면 바울 사도가 가리키는 올바른 지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과 그 방법을 아는 참된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요 17:3), 이 앎은 단순한 지적 욕구를 채워주는 것을 넘어 경험적이며 관계적인 지식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지식은 삶과 죽음을 가르는 지식이고 인간의 영원을 결정짓는 지식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중요한 지식입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이 공부를 했는가 하는 것이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데 중요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너무 고상해서 다른 것들은 해로운 것이고 쓰레기에 불과하다고 말한 것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빌 3:8). 이것은 중생한 사람들만이 아는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지식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 성령을 받은 사람만 아는 지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분별하는 지식입니다. 거듭난 사람의 눈에 아름다운 것이 육에 속한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게 보이는 것이 당연합니다(고전 2:14). 이런 지식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던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위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골 1:9).”
이 지식은 하나의 미각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영적 미각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 34:8)라고 말했는데, 맛보아 안다는 말이 그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중생한 자녀들에게 주시는 새로운 미각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놀랍고 기이한 것들을 보게 됩니다(시 119:18). 이것은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들이 아름답고 귀하고 선하게 보이는 감각입니다. 이 미각은 논리적인 추론을 거쳐서 내리는 결론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느끼고 즉각적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미각이 생긴 사람은 전과 같이 사물들을 바라보고 살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고 하나님 중심의 관점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말하는 올바른 지식은 이런 것입니다.

B. 사람의 영혼에 영향을 미치고 거룩한 감정을 일으키는 지식
여러분, 이런 올바른 지식은 반드시 그 사람의 영혼에 영향을 미칩니다. 영혼에 은혜로운 감정, 거룩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이것은 단순히 어떤 성경구절이 문득 떠오르거나 꿈에서 나타났다 하는 현상이 아니고, 그 말씀을 통해서 참으로 영광스럽고 선하시고 존귀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진 사람은 비로소 하나님을 즐거워하게 됩니다.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을 떠난 가족을 생각해보십시오. 아이들은 그저 놀이기구가 있는 곳이거나 동물원과 같은 곳을 더 좋아할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불란서의 루브르 박물관이나 이곳 워싱턴에 있는 링컨이나 제퍼슨 기념관에 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혹은 그랜드캐년 같은 자연의 장관을 보여준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아이들이 얼마나 그것들을 즐길 수 있을까요?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전문가가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졌다면 아는 만큼 더욱 그 대상들을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들을 더 즐기고 싶어집니다. 경탄하고 때로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내지를 지도 모릅니다. 세상의 아름다움도 그렇다면 그 모든 아름다움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 영혼에 얼마나 놀라운 영향을 미치겠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참되고 올바른 지식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그 영혼 안에 만들어내고 더욱 더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C. 확신을 주는 지식(딤후 1:12; 요일 4:13)
올바른 지식은 또한 진리에 대한 확신을 줍니다. 그는 복음이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되고 성경의 모든 증거들을 사실로 믿게 되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성경에는 ‘안다’는 표현들이 적잖이 나옵니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일 4:13).” 여기서 ‘안다’는 말은 확신한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이 지식은 긴가 민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내 안에 계심을 그리고 나를 지키시고 모든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하나님이심을 확신하도록 인도합니다. 그는 더 이상 어떤 권위자가 그렇다고 증거해주거나 믿을만한 증거가 있어야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 그 자체가 자기 인생을 온전히 의탁할 수 있는 권위가 되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놀랍고 크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리고 깊은 감동 가운데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이 경험이 성경 진리에 대한 확신을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지식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4. 지식이 없는 열심을 조심하라.
그러므로 여러분, 본문이 경고하는 것은 이런 지식이 없는 열심, 유대인들의 열심과 같은 종교적 열심이 신앙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교회 안에 이런 열심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람이 강력한 체험적 회심을 했다고 할지라도 그가 계속해서 진리 안에서 성장하지 않는다면 그 감정은 곧 메마르게 되고 위선자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토머스 쉐퍼드의 말입니다. “처음 회심 때 매우 강력한 감정을 체험한 많은 사람들이 얼마 후에 마르고 시들며 기력을 잃게 되고 여위어 죽어간다. 그러면 그들의 위선은 형식적이고 메말라 있고 무감각하며 열매 없는 마음과 삶에서 드러나게 된다. 비록 공공연한 무례함으로 세상 모든 사람에게 드러나지는 않더라도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의 통찰력있는 눈에는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까지 죄를 자각하기에 충분한 빛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조나단 에드워즈 <신앙감정론> p.383 재인용).” 은사나 어떤 현상을 추구하는 것은 종종 ‘열심’ 혹 뜨거운 신앙으로 인식되지만 올바른 진리를 깨닫는 것과 함께 가지 않을 때 그것은 위험합니다. 기억하십시오. 그 사람 안에 지식이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추구하지 않고 단지 어떤 현상들만을 추구하는 사람을 마귀가 상상력을 통해서 속이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하나님을 더 알고 바르게 알기를 추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존해서 살아가지 않는다면 우리가 넘어지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참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 위에 세워진 신앙인지, 그런 방향으로 점점 더 움직이면서 견고해지는지 돌아보십시오.

5. 올바른 지식이 올바른 열심을 만든다(빌 1:9; 요일 4:7~8; 눅 24:32)
지금까지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에 대해서 저는 설명했습니다. 그 지식은 영혼 안에 거룩한 감정을 만들고 그 거룩한 감정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으로 드러납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지식 없는 열심이 아닙니다. 거룩한 감정에 속한 열심은 진리의 빛을 받아서 발생하게 되고 뜨거워지는 성질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위해서 기도한 내용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빌 1:9).” 여기서 사랑은 거룩한 감정입니다. 이 거룩한 감정은 지식과 모든 총명을 통해서 점점 더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여기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거룩한 감정은 함께 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면 그는 형제를 사랑하는 자이고 형제를 사랑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아는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지식과 올바른 열심은 함께 갑니다. 왜 우리의 열심이 잘못되는가 하면 지식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잘못된 지식이 잘못된 방향을 가리키기에 그 열심이 인생을 잘못된 방향으로 몰고 가는 것이고 여기에는 언제나 거짓의 아비인 사탄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지적하는 바, 당시 유대인들이 가진 치명적인 문제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 그들에게 일어난 일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 24:32).” 바로 이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압니다. 말씀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고 그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봅니다. 그리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이 때 영혼은 뜨거움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이 뜨거움이 주님을 섬기는 열심이 됩니다. 어떻게 이런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을 뜨겁게 열심을 다해서 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6. 하나님을 정말 아십니까?
이제 여러분에게 다시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십니까? 이런 하나님을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는 참되고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의 말씀인 성경 말씀들을 깨닫고 그 속에서 살아계신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고 놀랍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성경의 말씀 속에서 경험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사랑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지식과 총명에 의해서 더욱 더 부추겨지는 것을 경험하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열심으로 섬기고 싶게 만들고, 전심으로 일평생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 싶게 하는 것을 경험하십니까?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을 아십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 이것은 참된 신앙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오, 일평생 하나 밖에 없는 인생을 온전히 영광을 받으시기 합당하신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열심으로 드릴 수 있도록, 하나님을 참으로 알게 해주시고 더 알게 해주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구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