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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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에서 확신으로 50 - 참 신앙과 거짓 신앙 (4) -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욥기 1:9-1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4-06-15

말씀내용
<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 욥 1:9~10


가디너 스프링은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는 것은 회심한 마음의 결정적인 증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오늘 참 신앙과 거짓 신앙에 관련하여 세 번째 질문을 여러분에게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하는 질문입니다. 교회에서 부르는 찬송들 중에는 “주님 사랑해요” 혹은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와 같은 찬송들이 적지 않습니다. 대다수가 이 찬송을 부르고 고백할지라도, 그것으로 신앙의 진위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디너 스프링은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는가 하고 물었던 것입니다. 즉 그 어떤 것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회심의 결정적 증거입니다.

1. 하나님을 왜 사랑하는가?
본문은 사탄이 욥의 신앙에 대하여 하나님께 한 말입니다.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을 믿고 경외한다고 할 때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경외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고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을 온전히 드리는 신앙의 모든 행위가 함축된 표현입니다. 여러분은 왜 하나님을 경외하십니까? 여러분은 왜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대답이 가능하겠습니까? 유치한 대답부터 고상한 대답까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상하고 유치한 것을 떠나 대답은 자기 자신 때문이냐 아니면 하나님 자신 때문이냐 하는 두 가지 범주 중 하나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한 것은 자기 자신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자기 소유물에 복을 주시니까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입니다. 사탄의 말이 옳다면 욥의 신앙은 결국 자기 사랑에 지나지 않는 거짓 신앙일 뿐입니다. 사탄은 이것을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욥기의 결말은 사탄의 가정은 틀렸고 욥의 신앙은 참 신앙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욥은 자신에게 어떤 유익이나 주어지는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또는 자기의 어떤 조건들을 걸고서 하나님을 경외했던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경외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처음에 욥의 자녀들이 몰사하고 욥의 모든 재산이 다 날아가버렸을 때 욥이 보였던 반응은 욥기 1장 21절에 나타납니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그는 이 일로 범죄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욥 1:22). 사탄이 한술 더 떠 욥의 몸을 치자 욥의 아내는 견디지 못해서 말합니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 물론 욥 만큼이나 욥의 아내도 자식들을 잃은 상실감과 모든 재산을 잃어버린 슬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도 모자라서 이제 남편의 몸에는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서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는 모습을 보다 못해서 그 아내는 이 말을 한 것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욥의 아내를 동정하고 싶습니다. 그녀는 정말 믿음 좋은 남편을 만나서 고생을 한 경우가 아닙니까? 욥기의 결말은 욥이 그녀와 계속되는 결혼 생활 속에서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더 낳고 손자 사대까지 보도록 복된 노년을 보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욥 42:13~17). 욥은 아내의 이 말에 대답했습니다.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욥 2:10)?” 욥은 이 정도의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입술로 범죄치 않음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어떤 이득을 보려는 이기적 자기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아직 욥의 고난이 깊지 않아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라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누가 과연 이렇게 말할 수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런 반론에 대해서도 성경은 대답합니다. 욥기의 마지막 장인 42장은 욥의 말로 시작합니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2~6).” 욥의 이 말은 매우 이상하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는 알지만, 욥은 지금까지 자기가 그 극심한 고난을 겪어야 했던 뚜렷한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셔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제가 욥의 이 말이 이상하다고 하는 것은 회개하고 자기의 죄를 인정하는 사람은 욥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의 시금석이 있다는 사실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만 합니다. 이 부분이 이해가 되고 받아들여지고 은혜로울 수 있다면 그것은 참된 신앙만이 가질 수 있는 모습입니다. 거짓 신앙과 참 신앙의 구분점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외적 모습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자기 사랑에 근거한 하나님 사랑은 거짓 신앙입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에는 근본적인 불만이나 근본적인 원망이 없습니다. 제가 ‘근본적인’이라는 형용사를 쓴 것은 이것이 극단적인 판단의 근거가 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욥의 아내에게 잠깐 우리의 시선을 돌릴 수 있습니다. 이 기준에서 볼 때 그녀의 신앙은 참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녀가 욥과 함께 복된 노년을 보냈다는 것은 연약한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격려가 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일상적이고 자주 행해지는 원망과 불평들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이 원망과 불평의 문제를 대부분 심판과 직결되는 문제로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보여줍니다(고전 10:10; 약 5:9; 벧전 4:9; 유 1:16).

2. 본능적 사랑은 거룩한 감정이 아니다.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어떻게 자기 사랑에 근거하지 않은 사랑이 가능할까?’ 하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사랑에 근거한 사랑은 본능적이고 본성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사람은 본성적이고 본능적인 사랑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신앙 생활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사랑에 지나지 않는 동기에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고, 이것은 참된 신앙일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사람의 이기적 욕망을 부추기는 번영 신학은 위험하고 거짓된 것입니다. 그렇게라도 교회에 와서 믿으면 되지 않는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복음과 하나님을 왜곡해서 시작되는 신앙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이 아닐 뿐 아니라, 참된 진리 앞에 굴복하지 않는 왜곡된 신앙으로 굳어져 결국 자신과 교회를 해롭게 하기 때문에 피해야 하는 일입니다. 번영 신학은 자기 사랑의 또 다른 형태일 뿐입니다.
본능적 사랑에 대해서 조금 더 살펴보지요. 본능적 사랑은 개가 자기에게 잘 해주는 주인에게 달라붙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사랑입니다. 또 사람들은 누가 자기에게 베풀어준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로 여깁니다. 감사해야 할 상황에서 감사하지 않는 것을 사람들이 비난하는 것도 이런 감사를 아주 당연하고 본능적인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지 본성적이고 본능적인 반응일 뿐입니다. 때론 이런 사랑이 거룩한 감정에서 흘러나오는 사랑 이상으로 뜨겁고 흥분되기도 합니다. “내가 이런 저런 복을 받고 있고 지금까지 잘 살아오는 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저는 이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여러분은 주변에서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런 것을 나쁘다고 비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런 말이 그가 하나님께 대한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거나, 그가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능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를 아실 것입니다. 가사 내용은 이렇습니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열매를 맺고 / 당신이 이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이 노래의 가사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가사는 굳이 하나님을 깊이 알지 않고 복음의 내용을 알지 못해도 본능적으로 좋아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얼마든지 이기적 욕망 때문에 그리스도가 사랑스러워 보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거의 모르고 있을지라도 최소한 모든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할 때 얼마든지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실제로 이런 기초 위에 신앙을 세워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여기서 정말 심각한 문제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가 성경이 계시하는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고 또한 알려고 하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과 행하시는 일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알고 싶지 않고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다수가 되게 되면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복음의 영광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관심을 가지는 영역은 오직 자기 필요를 채우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열심히 할 수 있지만 이것은 참된 신앙의 증거가 아닙니다. 본능적 사랑은 아무리 뜨겁고 열광적이라고 해도 거룩한 감정 곧 참된 신앙은 아닙니다.

3. 참된 신앙은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면 참된 신앙은 어떤 특징을 가집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 사이의 사랑도 참되고 깊은 것이라면 그것은 내가 얻고 누리는 조건들을 넘어서서 그 사람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야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감사도 참된 신앙에 근거하는 감사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감동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 당장에 내게 어떤 이익이 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속성이 내게 당장 유익을 주어서라기 보다, 하나님의 속성의 아름다움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가 할 때,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향하신 형용할 수 없는 사랑을 십자가에서 보여주셨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결국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하는 사랑이므로, 이기적 사랑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지 않은가 라고 반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의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은혜를 입게 되었을 때, 즉 성령님께서 그 사람의 영혼을 거듭나게 해주셨을 때 그 영혼은 더 이상 이런 저런 자기의 이기적 이유들로 인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조건에 묶이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참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인하여 구원의 은혜를 입었는데, 여전히 이기적인 자기 사랑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채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면 거기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는 참으로 내 신앙이 참된 신앙인가 하는 확신에 이를 수 없습니다. 거듭난 신자는 이제 하나님의 모든 속성이 아름답고 탁월하다는 것을 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이 합당하고 의로우며 선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판단할 수 있는 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대하여 그 말씀은 옳고 참되고 의롭다고 말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모든 속성과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이 그에게는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하듯이, “이 사람은 이 점은 좋은데 저 점은 좀 안 좋은 것 같아”라고 하나님께 대하여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자는 이것을 알게 된 사람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말을 조금 인용하겠습니다.
성도의 사랑과 마찬가지로, 성도의 기쁨과 영적인 즐거움과 희열도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 자체가 탁월하기 때문에 생긴다. 성도가 느끼는 기쁨과 영적인 즐거움과 희열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이 성도에게 가져다 줄 어떤 유익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거룩한 아름다움을 보게 되거나 묵상할 때 성도의 마음 속에 달콤한 즐거움이 생기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위선자의 기쁨과 참된 성도의 기쁨의 원천이 다른 이유다. 위선자는 자기를 즐거워한다. 자아가 기쁨의 가장 주된 기초다. 참된 성도는 하나님을 즐거워한다. 위선자의 마음은 우선 자신의 특권과 자신이 누리거나 누릴 행복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자아가 기쁨의 가장 주된 기초다. 참된 성도의 마음은 우선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 가운데서 볼 수 있는 영광스럽고 사랑할만한 하나님의 성품이 너무 달콤하기 때문에 말할 수 없이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이것이 바로 성도가 가진 모든 기쁨의 원천이며, 성도가 가진 모든 즐거움의 정수다. 『신앙감정론』 p.359
이 모든 것이 말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어떤 이익을 생각해서 가지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니며,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참된 신앙의 증거입니다.

4. 하나님의 도덕적 탁월하심을 사랑하는가, 본성적 탁월하심을 사랑하는가?
지금까지의 논리를 따를 때, 여러분 중에 의아하게 생각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하나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나 탁월하심 혹은 아름다움 자체에 끌려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질문 자체는 우리 자신 그리고 우리 시대가 얼마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멀어져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물론 하나님을 충분히 잘 알았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않습니다. 복음에 대한 너무나 작은 지식을 가지고도, 그 복음이 깨달아지고 자기의 죄인됨을 알게 되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하시는 그 놀라운 방식을 알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회개와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은 자기에게 은혜를 베푸신 그 하나님을 더 알기를 소원하고 그런 갈망이 그 안에서 커져가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중생을 통하여 그 사람 안에 생긴 새로운 본성의 작용인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인의 본성이 아닙니다. 이것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탁월하심이 두 가지로 설명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덕적 탁월하심은 하나님께서 도덕적 행위자로서 발휘하시는 속성들 가운데 있는데, 가령 선하심, 의로우심, 사랑, 진실하심, 신실하심 등을 말합니다 이런 속성들을 조나단 에드워즈는 한 마디로 ‘참된 미덕’이라고 했고, 그 총체는 거룩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본성적 탁월하심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이나 능력과 관련된 속성들을 가리킵니다. 가령, 하나님의 능력, 전지하심, 영원하심, 편재하심 그리고 위엄과 같은 속성들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적 탁월하심과 도덕적 탁월하심은 구분은 가능하지만 분리될 수 없는 하나님의 속성들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도덕적 탁월성이 없는 본성적 탁월하심을 가지고 계시다면 그 하나님은 사랑스러운 존재일 수 없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랑스러울 수 있는 것은 본성적 탁월성이 도덕적 탁월성과 함께 완전하시기 때문입니다. 가령, 천사와 마귀의 존재를 비교해 보십시오. 두 존재는 전능하지 않지만 큰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천사는 거룩함 즉 도덕적 속성을 가지고 있기에 그 능력을 가진 것이 사랑스러울 수 있지만, 마귀는 도덕적 속성이 결여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혐오스럽고 무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중생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본성을 지니게 된 사람들은 비로서 하나님의 도덕적 탁월하심인 거룩하심을 보고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을 알게 된 까닭에 그들은 하나님을 참되게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거룩한 본성이 없이도 자연인은 본능적으로도 하나님의 본성적 속성들을 얼마든지 좋아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유리하고 좋은 것이면 얼마든지 좋은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 하나님께서 내 병을 고치실 수 있고, 날 부유하게 만드실 수 있다는 것이 아름답고 좋아 보이는 것은 굳이 참된 신앙을 필요로 하지 않는 본능적인 반응인 것입니다. 중생한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기에, 그는 점점 더 하나님의 탁월성과 영광을 알아가는 만큼 자기의 어떤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5. 욥의 신앙과 우리의 신앙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욥의 신앙에 대한 일단의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욥은 사탄이 말한대로 하나님께서 그의 집과 소유를 축복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했던 것입니까? 욥의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신앙은 고난의 초기에 그가 고백한 그대로입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욥 2:10).” 비록 고난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도덕적 탁월하심에 대한 욥의 믿음이 흔들렸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그의 신뢰는 결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비록 하나님이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신뢰할 것”이라고 그는 말했습니다(욥 13:15 현대인의 성경). 욥은 이유를 알지 못하는 고난 속에서 모든 것이 다 흔들리는 가운데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는 잃어버린 자식들 보다, 잃어버린 모든 재물 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신앙의 증거입니다. 베드로전서에서 우리가 보았던 초대교회 성도들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인하여 불시험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보지도 못한 그리스도를 사랑했고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즐거워했습니다. 사탄은 욥에게 했듯이 이들에게도 동일한 일을 행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그렇게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느 기초 위에 서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만일, 우리의 신앙이 단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뭔가를 얻어내려는 이기적 생각에 기초한 본능적 사랑에 불과하다면 하나님께 대한 그 사랑과 신앙은 무너질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아름답고 탁월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 거룩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사람은 이제 자신 안에 그런 거룩함을 배워가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 안에서 발견하는 거룩함, 즉 경건함을 가장 고상한 가치로 여기게 되고 그런 사람에게 끌리게 되고 그런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중생한 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주신 감각이고 인식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은 참된 신앙의 부인할 수 없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은혜를 우리 모두로 하여금 알고 경험하게 하시고 그 거룩함을 우리의 삶에서 반영하는 복을 더하시기를 구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