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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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에서 확신으로 49 - 참 신앙과 거짓 신앙 (3) - 성령이 계십니까?

로마서 8:9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4-06-08

말씀내용
< 성령이 계십니까? > (롬 8:9)


1. 질문의 의미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하는 질문을 받을 때 우리는 이상히 여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계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어떨까요? 어쩌면 여러분은 약간 당혹스러워할지 모릅니다. 왜 그럴까요? “당신은 예수님을 믿습니까?”하는 질문과 “성령이 계십니까?”라는 질문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앞의 질문은 내 결정과 내 행위를 묻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뒤의 질문은 하나님께서 내게 그리고 내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행위를 묻는 것으로 들립니다. 만일 기독교가 인간의 종교적 선택의 문제라면 앞의 질문이면 충분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위라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물론 두 질문의 의미는 같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어쩌면 “당신은 진짜 그리스도인입니까?” 혹은 “당신은 진짜 예수님을 믿습니까?”라고 부연을 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성령님이 오셔서 내주하시며 영원히 떠나지 않으신다고 말씀합니다. 신자는 성령님이 계신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증거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러므로 “성령이 계십니까?”라는 질문은 내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행위를 했는가 보다는 그래서 ‘성령님께서 내 안에 오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고 이루시고 계신가’에 더 가까운 질문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내주하신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사람이며, 성령님은 반드시 그 사람 안에서 어떤 일?거룩한 어떤 일을 지속적으로 행하실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2. 성령님이 계신지 어떻게 아는가?
지난 주일에 “거룩한 감정이 있습니까?”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거룩한 감정이 있다는 것은 그 거룩한 감정을 내 안에 만들어내시는 분이 계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천성은 결코 자연적으로 거룩한 감정을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감정을 가지기 위해서 노력하고 애써야 하기 이전에 거룩한 감정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중생의 결과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지난 주에도 제가 강조하였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신 팔복은 우리가 노력해서 그런 사람이 되라는 새로운 율법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성령이 거하시는 중생한 사람의 특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 거룩한 감정이 있다는 것은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심을 아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상고하려고 합니다. 이 부분에서 오늘날의 교회는 상당히 심각한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불확실한 증거들을 가지고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신다고 가르치고 주장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가령, 사과는 둥글다고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둥근 모든 것은 사과다라고 말하는 식의 태도가 만연하다는 것입니다.

3. 성령님이 계시는 확실한 증거가 아닌 것들
여러분이 성령님을 떠올릴 때 자연스럽게 생각나는 개념들이 무엇입니까? 방언과 같은 어떤 은사들입니까? 이적과 같이 눈에 보이는 현상입니까? 기도 많이 해서 쉰 목소리입니까? 이런 것들이 떠오른다면 우리는 성령님을 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이 반드시 성령님으로 인한 역사라고 확정할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까? 이런 일들은 얼마든지 마귀가 모방하여 만들어낼 수 있는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모든 현상들 자체는 다 마귀가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도 이런 일들을 행하실 수 있으나 마귀도 할 수 있는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나 사이비 이단 집단들에서도 이런 일들이 발생한다는 것이 그것을 증거합니다.

A. 방언
방언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교회에서는 정기적으로 가지는 집회에서 방언이 터지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사람이 복음을 분명하게 들었고 그 복음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을 했는가 하는 모든 것들을 제쳐둔 채, 그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고 선언합니다. 또 어떤 특별한 현상을 체험했다고 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속고 있는 것이고 그 당사자를 속이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순복음교회는 방언이 참된 믿음의 증거이고 성령 받은 증거이므로 방언 하지 못하는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는 심각하게 위험한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러다 보니 방언을 연습과 훈련까지 시켜서 하게 하는 기현상까지 낳게 된 것입니다. 방언뿐 아니라 몸에 어떤 이상한 현상, 진동이나 쓰러짐과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성령이 계신 증거로 보는 것도 위험한 일입니다. 실제로 이슬람권에서도 이런 현상들은 많이 일어납니다. 이것들은 현저하게 마귀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설령 이런 현상이 성령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할지라도, 참된 신앙의 증거라고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계시는가, 성령님이 내주하시는가 하는 것은 구원의 문제를 다루는 것인데, 성령님께서는 구원의 은혜와 무관하게 소위 ‘일반적’ 은혜를 통하여 어떤 사람에게 어떤 현상을 주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울 왕의 경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는 다윗을 잡으러 사무엘이 있는 라마 나욧으로 갔다가 옷을 벗고 예언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삼상 19). 이 현상으로 사울이 성령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B. 성경구절들이 떠오르는 경우
그렇다면 좀 더 성경과 연관이 있는 현상을 생각해보지요. 꿈에서 혹은 갑자기 어떤 성경구절이 떠올랐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떠오른 것이 불경의 구절이나 세속적인 개념이 아니라 성경구절이기 때문에 이것은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주시는 은혜로운 증거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얼마든지 마귀도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내가 그 말씀을 찾아서 읽고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을 깨닫고 그로 인하여 크게 위로와 은혜를 받는가, 아니면 그것이 떠오른 말씀이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그 말씀에 위로를 얻는가 하는 것입니다. 즉 내가 기뻐하고 흥분하는 것이 말씀이 떠올랐다는 사실 때문인지, 아니면 그 말씀에 담겨 있는 내용을 깨달았기 때문인지를 우리는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믿음이 없는 사람일 때 이런 속임의 현상은 더욱 심각하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 어떤 성경구절이 떠오르게 하셔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런 현상에 의지하여 자기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거짓 확신에 이르도록 인도하시지 않으십니다. 발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까지도 했던 사람입니다(민 24:17). 하지만 그것은 성령님의 일반적인 역사였을 뿐, 그 사람 안에 성령님은 거하지 않으셨습니다.

C. 환상과 같은 자극
때로는 환상 가운데 그리스도를 보았다거나 혹은 천국의 환상을 보았다고 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성령님이 계신 증거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가장 즐겨 사용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광야에서 주님을 시험하려고 했을 때에도 주님께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의 환상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마 4:8). 만일 우리가 이런 환상을 본다면 은혜롭게 여겨 간증을 하는 일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경험은 우리를 자칫 참된 신앙 감정보다도 더 흥분하게 하고 고양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천로역정의 등장 인물 중에 ‘온순(Pliable)’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영적 실재와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강력하게 표현하고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절망의 늪에 빠지기 전까지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는 절망의 늪에 빠지게 되자 천국의 소망과 영적 실재에 대한 기쁨을 순식간에 잃어버리고 옛 삶의 자리로 돌아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상상력을 이용해서 사람들이 은혜를 받는 것처럼 유도하는 목회의 기술들도 오늘날 많이 사용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과연 바른 성경적 가르침을 이해하고 분별할 수 있는 성도들은 얼마나 될까요? 이것은 정말 악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D. 능력 있는 사역
우리가 성령님이 계신 확실한 증거가 아닌 것으로서 한 가지 더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능력 있는 사역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그것이 반드시 성령님의 역사의 증거라고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봅니다. 성경은 겉으로 드러나는 역사가 반드시 성령님의 역사의 증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가룟 유다만 하더라도 그는 다른 사도들과 같이 주님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는 등의 사역을 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마 10:1). 하지만 그는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마귀였습니다(요 6:70). 외양적으로 능력 있는 사역을 한다는 것이 곧 성령이 계신 증거요, 그 사람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일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4. 성령님이 계신 확실한 증거
그렇다면 성령님이 계심을 확인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을 다시 보십시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여기서 성령님을 가리켜 처음에는 ‘하나님의 영’이라고 말씀했고 두 번째는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바로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인의 삶이 얼마나 거룩한 삶이 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누구냐, 그리스도인은 어떤 위치에 서 있는 자냐 하는 그리스도인의 신분, 위치를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사람입니다. 성령님이 그 안에 계시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이 계신 증거가 무엇입니까?

A. 성령님은 하나님의 도덕적 본성을 성도의 심령에 주신다.
성령님께서 성도 안에 거하시고 그를 성령의 전으로 삼으시게 될 때 성령님은 그 사람의 심령에 하나님의 도덕적 본성을 계속해서 전달해주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거룩하신 속성이 성도의 심령 안에 계속적인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방언이나 어떤 현상이나 능력이 일어나는 것과 같은 외적인 차원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도의 심령 안에 성령님께서 일으키시는 역사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성령님께서는 성도를 성화의 은혜로 이끌어가십니다. 이전에 즐기던 것들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사모하게 하시고 영원한 것을 바라보게 하시며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해지고 싶은 소원을 갖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거하시는 사람은 그 자신이 압니다. “아, 이것은 예전에 내가 자연적으로 가질 수 있었던 그런 착한 마음이 아니다. 이것은 분명히 성령님께서 내 안에 오셔서 역사하신 결과다. 이것은 나의 의지나 마음 먹기 정도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님께서는 성도 안에 내주하시면서 그에게 거룩한 감정, 신앙 감정을 불러일으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더욱 주님을 갈망하게 되고 은혜가 없이는 스스로 살 수 없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의 의존하여 살게 됩니다. 이전에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던 것들이 이제는 죄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 일들이 싫어집니다. 비로소 죄와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됩니다. 비록 세상의 유혹이 그치지 않고 성도를 넘어뜨리려고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자신에게 가장 큰 기쁨이 된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낮추고 어떻게 해서든지 주님을 높이고 싶어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전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의 이름을 나타내고 그 일로 인하여 희열을 느꼈는데, 이제는 자기를 부인하는 마음이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이름이 영예롭게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간절해집니다.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을 성령님께서 또 일으켜주십니다.

B. 성령님께서 주시는 확신(롬 8:16)
성령님이 신자 안에서 하시는 일은 이와 같이 그 안에 거룩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일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한 가지 더 중요하게 언급해야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의 심령에 확신을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6절을 보겠습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성도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께서 성도의 영과 더불어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증언하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증언한다’는 말은 법정에서 증인으로서 증거를 한다고 할 때 사용되는 법적 효력을 함축하는 단어입니다. 거짓말하지 못하시는 하나님이신 성령님께서 성도의 영과 함께 증언을 하신다고 말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것이 성도의 영혼이 체험할 수 있는 성령의 증거 가운데 최고의 수준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확신입니다. 어떻게 성령님께서 이 일을 하시는 것일까요? 일각에서는 이것을 직접 계시의 차원으로 이해를 하고 가르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직통 계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성경 외에 다른 계시는 없습니다. 이렇게 가르치는 사람들은 이단이거나 이단적이라는 판단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십니다(요 14:17). 성령님은 그리스도를 증거하십니다(요 15:26; 16:13~14). 그리고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께서는 우리 구주께서 가르치신 모든 것들을 생각나게 하시고 그 의미를 깨닫게 하심으로써 가르쳐주십니다(요 14:26). 즉 성령님께서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을 증언하신다고 하는 것은 갑자기 어떤 구절이 떠오르게 하거나 환상을 보게 하거나 혹 방언이 터지게 하거나 몸이 떨리는 이상 현상을 경험하게 하거나 혹 직통 계시를 주시는 방식이 아니라, 이미 주신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그 말씀을 사용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말씀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을 그리고 복음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방법이 되는지를, 십자가가 얼마나 놀랍고 복된 구원의 복음인지를 보도록 우리의 눈을 열어 깨닫게 하심으로써 그렇게 하십니다.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고린도후서 4장 6절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어떻게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보게 됩니까? 성령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열어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고 그 선하심을 알고 그 영광에 감격하는 일이 일어나게 될 때, 성령님께서는 이미 우리 영과 더불어 “얘야, 내 사랑하는 아들/딸아!”라고 확증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앞에 나아가고 또 나아가야 할 이유를 너무나 분명하게 주지 않습니까? 참으로 성령의 사람이라면, 참으로 성령이 거하시는 사람이라면 그는 은사를 추구하고 은사 집회를 쫓아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이 길을 따라 성령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성화의 길로 이끌어가시는 것입니다.

5. 성령이 계십니까?
성령이 계십니까? 이 질문은 중요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계시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지금 교회에 와 앉아계신다고 해도, 여러분이 오래도록 교회 생활을 했고 많은 봉사를 했다고 해도, 여러분이 어떤 교회의 직분을 가지셨다고 해도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껍데기를 가진 종교인이 아니라, 진짜 그리스도의 사람이어야 하고 참으로 성령이 거하시는 성령의 거룩한 성전이어야 합니다. 성령이 계시는 사람은 그로 말미암아 주께서 오라고 부르시는 좁은 길을 걸으면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말씀 속에서 복음의 영광을 발견하고 그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말씀하시는지 성령의 증거를 듣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그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도 없는 역사입니다. 오, 하나님께서 이런 은혜를 사랑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허락하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