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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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에서 확신으로 48 - 참 신앙과 거짓 신앙 (2)- 거룩한 감정이 있습니까?

베드로전서 1: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4-06-01

말씀내용
<거룩한 감정(holy affections)이 있습니까?> 벧전 1:8


1. 거룩한 감정을 잃어버린 교회
우리 시대 기독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외부의 적이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는 오늘날 기독교회가 현저히 약화된 근저에는 확신이 없는 교인들이 교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안다고 말하지만 그리스도를 아는 자가 적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진실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이 적은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 조차도 무색해졌습니다. 물론 그 주요 책임은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에게 있고 그들이 오래도록 강단에서 물 탄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교회의 현실에서 그리스도께 위로를 받거나 그리스도를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찾아보기가 어려워진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구절을 경험적으로 공감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적어진 것이지요. 말하자면 거룩한 감정을 잃어버린 교회와 교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하였던 것이 하나님인가, 아니면 나의 이기적인 추구인가를 돌아볼 때,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당신의 말씀인 성경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성경을 면밀히 살펴 말하기를, 참된 신앙은 그 무엇보다도 바로 이 ‘거룩한 감정(holy affections)’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만일 그의 말이 성경적으로 옳다면 거룩한 감정은 매우 중요한, 우리 신앙의 진위를 가늠하는 개념일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거룩한 감정’이라는 개념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2. 감정(emotion)과 이성(reason)의 대립을 넘어서
신앙 감정이라고 할 때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감정(emotion)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이 설교에서 신앙 감정 혹은 거룩한 감정이라고 말할 때에는 그냥 감정(emotion)과는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는 것을 먼저 말씀 드립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감정적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그가 이성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생각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감정과 이성, 가슴과 머리를 대립되는 기능으로 이해하는데 기인합니다. 이성적인 사람은 감정적이지 않고, 감정적인 사람은 이성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우리의 언어 습관과 개념 속에 어느 정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합니다. 감정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성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구분은 신앙의 영역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는데, 어떤 사람들이나 그룹들은 매우 감정적인 신앙을 보여주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이나 그룹들은 너무나 이성에 치우친 신앙 생활을 합니다. 전자는 지나친 열광주의나 광신주의로 흐르기 쉽고, 후자는 냉담한 지성주의로 가기 쉬운 것입니다. 하지만 참 신앙의 본질은 그 어느 한 면에서 상당한 열정이나 지식을 나타낸다고 하는 데서 찾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참 신앙의 본질을 보게 됩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그 모진 핍박(사도는 이것을 ‘불시험’이라고 표현함으로써 그 혹독함을 보여줍니다, 벧전 4:12) 속에서도 지켜 낼 수 있었던 힘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거룩한 감정이었습니다. 그것은 한 때 펄펄 끓다가 한 순간에 식어버리는 감정(emotion)이 아니었습니다. 또 그것은 성경공부를 많이 해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가르칠 수 있는 실력만도 아니었습니다. 이 불시험을 통해서 그들은 그들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는 것을 입증했는데 그 참된 믿음은 바로 그들의 거룩한 감정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라는 표현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 대한 사랑 그리고 그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형언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인 것입니다. 즉 참된 신앙은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그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기쁜 감정에 있는 것입니다.

3. 신앙 감정(religious affection)
우리는 지정의(知情意)로 사람을 구분하는데 매우 익숙합니다. 하지만 조나단 에드워즈가 ‘신앙 감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때 그가 생각한 것은 이런 구분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구분으로는 참된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드러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의 본질은 어떻게 드러날 수 있는가를 생각해볼 때, 그것은 지성을 동반한 감정이라는 개념에서 드러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는 인간에게 두 가지 기능이 있다고 이해했습니다. 하나는 단순히 사물을 이해하고 지각하고 사유할 수 있는 기능이고 다른 하나는 사물을 지각하고 분별할 뿐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지 지각하고 분별하는 사물들에 대해 끌리고 기울어지게 되는 기능입니다. 끌리고 기울어지는 것을 호감이라고 할 수 있고, 반대의 경우는 비호감, 반감 또는 불쾌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전적으로 지각하고 분별하는 것을 통해서 온다는 것입니다. 무분별하게 그냥 확 끌린다 하는 것은 여기서 에드워즈가 말하는 신앙 감정(religious affection)이 아니라 그냥 격정 혹은 열정(passion)일 뿐입니다. 보통 격정이나 열정 앞에서는 지성과 분별은 힘을 잃게 되고 통제력도 상실되고 맙니다. 참된 신앙의 본질은 이런 격정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 신앙 감정이 하나님께 대하여 좋아함과 끌림의 정도가 강한 것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사랑한다는 말로 표현된 것입니다. 이런 신앙 감정에 속하는 표현들은 사랑 외에도, 갈망, 소망, 기쁨, 감사, 만족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 반대편에는 미움, 두려움, 분노, 슬픔 같은 반감, 비호감 내지는 불쾌함이 있습니다.
이런 신앙 감정은 다른 말로는 성향(inclination)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성향은 지성과 관계없는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자아가 판단하고자 하는 대상이나 교리나 사상에 대한 이해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성향은 반드시 의지를 움직이고 행동을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신앙의 본질이 거룩한 감정 즉 이런 성향에 있다고 볼 때, 사람의 삶의 다양한 모든 영역들 중에서 신앙은 미지근함이 불가능한 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둘 사이에 머뭇머뭇 거리는 신앙, 말로는 믿는다 혹은 믿고 싶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참된 신앙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우리가 대충 건성으로 하나님을 믿고 섬길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보는 기독교회의 모습은 대충 건성으로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로 넘쳐나지 않습니까?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말씀에 비추어 볼 때 판단은 명확합니다. 조금도 모호하지 않습니다. 참된 신앙이 아닌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만일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위한 열심,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우리의 의지를 움직이고 행위를 유발함이 없다면 거기에 참된 신앙이 있는지를 의심해야 마땅합니다. 참된 신앙이 거룩한 감정에 있다고 말할 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일하고자 하는 성향과 의지가 왕성하게 발동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4. 빛과 열
저는 지난 수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이런 류의 질문을 간접적으로 적잖이 들어보았습니다. “왜 말씀을 듣는데 내가 변하지 않는가?”하는 질문입니다. 한 마디로 답하면 말씀을 들을 때 내 신앙 감정이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에 대한 지식이 많고 바르게 복음을 이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성경을 가르칠 수 있을만한 실력을 갖춘 사람들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런 지식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 신앙 감정이 그 지식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그 지식은 결코 참된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신앙 감정이 말씀에 의해서 영향을 받기까지 그 사람은 절대로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설교를 들으면서 늘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는데도 전혀 변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이 설교를 통해서 영향을 받은 것은 거룩한 감정이 아니라 그냥 ‘감정(emotion)’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감동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탁월하심이거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 자체가 아닌 것입니다. 얼마든지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나중에 더 깊이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지만, 그가 영향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내용을 통해서 깨달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진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선하심,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와 능력,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사랑하심,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그분의 아름다우심을 듣고 교리적으로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그저 일반적인 이해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 지식은 사람을 영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신앙은 빛과 열을 둘 다 가지는 것입니다. 빛은 진리의 빛을 말하고 열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감정을 말합니다. 이 둘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사랑할 수 없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진리의 빛을 받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거룩하심과 아름다우심을 더 깊이 깨달아 알게 되고 그 지식이 그 사람 안에 있는 거룩한 감정에 영향을 미치게 되며 이것이 한 인격을 움직여 자기가 사랑하는 하나님을 위하여 살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질적 성향에 따라서 신앙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신앙은 우리를 온전하고 새롭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빚어가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복음에 대해서 충분하게 배우고 계십니까? 그리고 여러분이 배우는 그 지식 때문에 여러분의 신앙 감정은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고 있습니까?

5. 거룩한 감정의 다양한 표현들
성경이 신앙을 설명할 때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그러나 신앙 감정과 연결된 용어들을 통해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맥체인표에 따라 읽은 이사야 말씀입니다. “네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사 33:6).” 성경을 통틀어 참된 신앙을 표현하기 위해서 가장 많이 사용된 말이 ‘하나님 경외함’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바로 거룩한 감정입니다. 이것은 그저 한 순간 뜨거워졌다 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위에서 거룩한 감정이 영향을 받고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지만 사랑한다는 것도 거룩한 감정으로 신앙의 본질을 서술하는 한 방식입니다. 이 거룩한 감정은 매우 강렬해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고 표현되는 것입니다. 또 시편 말씀 중에서 우리가 기억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시 42:1~2).” 여기에는 갈망이라는 거룩한 감정이 있습니다. 또 주님께서 참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특징으로 팔복을 묘사하신 것을 주목해 보는 것은 아주 유익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3~10).” 여기에 표현된 것들은 모두가 거룩한 감정들이거나 거룩한 감정이 만들어내는 결과들입니다. 심령의 가난함, 애통함, 온유함,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함, 긍휼히 여김, 마음의 청결함 등은 다 거룩한 감정입니다. 그리고 화평하게 함과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은 거룩한 감정에 있는 참된 신앙이 밖으로 입증되는 경우를 보여줍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불시험을 통과하면서 그 참됨이 입증되었고 그 참된 신앙은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이 만들어낸 기쁨이라는 거룩한 감정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참된 신앙의 본질을 결정하는 거룩한 감정은 다양하게 표현된다는 것을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살아있고 정열적인 사랑은 필연적으로 다양한 신앙 감정들을 드러내는데 그 중에는 죄에 대한 강렬한 미움과 혐오, 죄에 대한 두려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감사, 은혜롭게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느낄 때 얻게 되는 만족과 기쁨,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을 때 느끼는 슬픔, 장차 하나님을 누릴 것을 기대할 때 생기는 즐거운 소망,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강한 열정 등이 있다(조나단 에드워즈 전집 제1권, 신앙감정론, p.165).”

6. 하나님께서 거룩한 감정에 영향을 주시기 위해서 성경을 사용하신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목적을 이렇게 명시했습니다.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딤전 1:5).” 설교를 통해서 참된 교리를 가르치는 목적은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거룩한 감정은 말씀을 깨달을 때 감동을 받고 불러일으켜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바로 그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구약의 말씀들을 풀어주신 것을 압니다.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이것은 놀라운 성경공부였습니다. 그 성경공부를 통해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두 제자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 24:32).” 이것은 그냥 감정이 아니라, 거룩한 감정이 움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앎으로써 그들의 감정이 뜨거워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서 그들이 단순히 말씀을 들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말씀이 가르치는 바를 제대로 깨달아 알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 둘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여기에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사랑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되 참된 믿음을 가지고 믿으려 한다면 여러분은 말씀을 사랑하셔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읽고 공부하고 심지어 암송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가르쳐지는 교회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성경은 바른 교훈이 아닌 다른 교훈, 바른 복음이 아니라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은 참된 신앙을 만들어내는 대신 도리어 교만한 변론만을 만들어낼 뿐이라는 경고로 가득합니다. 여러분으로 하여금 교회를 결정하게 하는 것은 사랑스러운 분위기도, 인격이 훌륭한 사람들도, 멋진 연주를 하는 밴드도, 병을 치유하고 초자연적인 은사들의 나타남도, 그리고 안락하고 편리한 시설이어서는 안됩니다. 이런 요소들은 마귀도 얼마든지 모방하여 만들어낼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오직 당신의 바른 복음과 말씀을 통해서만 사람의 거룩한 감정을 움직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른 복음을 전하는 교회에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아무 것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그 말씀을 열심을 품고 청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7. 거룩한 감정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찬송가 60장 2절 가사입니다. “이 눈에 단잠 오기 전 고요히 주를 그리며 구주의 품에 안기니 한없이 평안합니다.” 또 484장 1절 가사입니다. “내 맘의 주여 소망되소서. 주 없이 모든 일 헛되어라. 밤에나 낮에나 주님 생각, 잘 때나 깰 때 함께 하소서.” 또 85장은 중세의 성 버나드가 지은 찬송시입니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주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거룩한 감정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참된 신앙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아는 지식이 있으며,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무한하고 위대하신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더 알기 원하고 더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바로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말했습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이 거룩한 감정 안에 참된 신앙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거룩한 감정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것으로 인해서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더 많이, 더 거룩하게, 더 강력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는 자리로 나아가십시오. 만일 이런 거룩한 감정이 여러분 안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면 낙심에 이르기 전에 여러분은 합당한 은혜, 참된 은혜를 자비하신 하나님께 구하셔야만 합니다.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할 뿐 아니라, 매일 말씀을 읽고 말씀을 가르치는 모든 자리에 나아와 그 말씀을 청종하십시오. 이런 일이 없이 교회에서 세월을 보내는 것은 여러분의 영혼에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여러분 안에 은혜를 증진할 수 있는 모든 합당한 수단들을 사용하셔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있는 모든 죄악들을 물리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여러분의 거룩한 감정을 움직여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