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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오해에서 확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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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에서 확신으로 35 - 고난과 영광 (1) - 고난과 영광

욥기 2:3-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4-03-02

말씀내용
1. 고난이 만들어내는 질문들
고난은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난제입니다. 그것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인생입니다. 즉 고난은 죄로 말미암아 범죄한 아담의 후손들에게 피할 수 없는 난제가 된 것입니다. 고난은 질문을 만들어냅니다. 그 질문은 신학적인 질문입니다. 아무리 낙천적이고 무신론적인 사람이라도 고난 속에서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 질문의 핵심은 ‘왜?’입니다. 고난의 이유, 고난의 의미를 알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런 질문들은 이런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하시다면, 왜 이런 고난이 내게 일어나는가? 신자들만이 아니라 심지어 불신자들도 고난 속에서 이런 질문을 합다. 또 다른 사람의 고난을 보면서도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은 하나님을 잘 믿는데도 불구하고 왜 저런 고난에서 헤어나지를 못하는가? 저 사람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질문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때때로 우리는 이런 말도 합니다. “하나님, 저는 욥이 아닙니다.” 욥처럼 심한 고생을 할 것에 대한 두려움은 이런 말을 하게 합니다. 물론 하나님도 여러분이 욥이 아니라는 것을 아십니다. 그러니 사실상 이런 말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편에서 고난을 당하는 시인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 중에서 흔히 보게 되는 것은 이런 질문입니다. “하나님, 언제까지니이까?” 시편 13편에서 집중적으로 이런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고난이 힘든 것은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 속에서 “억울하다”고 외치기도 합니다. 이런 것이 해결되지 않은 채 심해지게 되면 사람은 이런 낙심 어린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인가?”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은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가?”라고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저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인생은 정말 이런 것입니까?” 앞에서 던진 질문들에 대해서 대답을 줄 수 없는, 그저 인생이란 이렇게 고난으로 점철된 것일 뿐입니까?

2. 하나님의 사람들과 고난
저는 조금 더 나아가서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떻게 고난과 깊이 연관된 삶을 살았는지를 주마간산격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A. 욥: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
욥이 그 첫 번째 사람입니다. 욥이 고난을 당한 것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증거하듯이, 하나님이 사탄에게 욥의 믿음을 자랑하신 결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사탄에게 말을 거셨고 욥에 대한 말을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욥 1:8).” 이것이 욥의 고난의 발단이었습니다. 사탄은 욥이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할 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 하에 욥에게 주어진 모든 축복을 거두어갔습니다. 세상 역사에 이 사람처럼 하루 아침에 완전하게 망한 사람이 있는가 싶을 정도로 사탄은 욥을 무참하게 짓밟았습니다. 열 자식이 함께 앉아 먹는 자리에서 지붕이 무너져 한 순간에 모두 죽었고 그날에 이방 민족들의 습격과 천재지변으로 욥의 모든 재산들이 한꺼번에 다 날아가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 극심한 고난 속에서 욥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사탄에게 욥의 믿음을 칭찬하심으로써 사탄의 마음을 격동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욥 2:3).” 다시 욥에 대한 하나님의 자랑이 욥의 고난의 발단이 됩니다. 이제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 하에 욥 자신을 칩니다. 생명만을 취하지 못할 뿐, 욥의 뼈와 살을 칩니다. 욥기는 이때부터 질문의 책이 됩니다. 욥은 내내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의 세 친구들은 이 질문에 대해서 어리석은 대답들을 내놓습니다. 욥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는 성경의 설명(1:1)이 욥기의 독자들을 어렵게 합니다. 그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왜 이토록 극심한 고난을 당하는가? 욥기의 대답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고난과 영광이라는 주제로 얼마간 전하게 될 설교의 전체 주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신자의 고난은 욥의 고난과 같이 영광스럽다는 것입니다.

B. 아담: 낙원을 잃어버린 고통을 930세를 사는 동안 경험해야 했던 사람
보통 사람들은 아담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었을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에덴 동산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을 알았고 경험했던 사람은 역사상 단 두 사람입니다. 그들은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잃어버리게 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그리고 경험적으로 아는 유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담은 오래 살았습니다. 930세를 살았다고 성경이 기록합니다. 그는 아들들의 살인사건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는 가인의 후손들이 하나님을 떠나 범죄하는 삶을 보아야 했습니다. 자신의 범죄로 말미암아 자기의 자손들 안에 빚어지는 범죄의 참상을 보아야 했습니다. 그가 몇 살에 에덴에서 쫓겨났는지는 모르지만 거의 900년 이상을 말입니다.

C. 아브라함: 하나님이 불러내신 삶이 왜 이런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갈대아 우르에서 나와 가나안에 정착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자손과 땅을 약속하셨고 모든 축복을 보장해주셨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사는 동안에 기근을 겪어야 했고, 주변의 왕들의 온갖 위협을 느끼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땅 한 평도 소유하지 못한 채,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그녀의 매장지를 얻기 위해서 땅을 매입해야만 했습니다. 또 나이가 100살이 되도록 아들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뿐입니까?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이 어느 정도 자랐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명령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믿어주셨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고 하신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믿음이 어느 정도의 믿음인지를 가르쳐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어주셨기에 이런 무리한 명령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불러내신 아브라함의 삶은 고난이 많았습니다.

D. 야곱: ‘험악한 세월(창 47:10)’
야곱의 삶은 어떻습니까? 그는 밧단아람에서 외삼촌 라반을 통해서 20여년의 고난의 세월을 겪어야 했고, 이후에도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죽음, 그리고 비록 거짓말이기는 했지만 사랑하는 아들 요셉의 죽음의 소식을 겪고 살아야 했습니다. 야곱의 삶은 그가 애굽의 바로에게 말한대로, ‘험악한 세월’이었습니다(창 47:10).

E. 요셉: 노예 생활과 감옥 생활
요셉은 어떻습니까? 비록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된 사람이었지만, 17살에 인신매매단도 아닌 형들에게 팔려서 말도 통하지 않는 애굽이라는 나라에 가서 노예가 된 사람입니다. 그의 노예 생활은 주인의 아내를 강간하려고 한 강간미수범으로 몰려 감옥에 들어가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 요셉이 그의 10대와 20대에 겪은 삶은 비참하고 억울한 것이었습니다.

F. 모세: ‘수고와 슬픔(시 90:10)’
나이 사십이 될 때까지는 애굽의 궁전에 왕자로 길러짐으로써 그 누구보다 행운이 따른 사내였지만, 이후 40년은 광야에서 깨어진 삶을 경험했고, 마지막 40년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이끄는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내야 했던 것이 모세의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편 90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G. 다윗: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시 23:4)’
다윗은 10대에 이스라엘의 왕으로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후 그는 십 수년 동안을 사울 왕으로부터 쫓김을 받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30세에 가까스로 유다의 왕이 되었지만,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기까지는 7년을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다윗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중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했고 많은 시를 쓴 사람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누구보다도 많은 고난을 겪은 사람입니다. 왕이 된 후에도 자식들의 근친상간과 살인 그리고 반란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 또한 기막힌 범죄로 무너지는 경험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편 23편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H. 바울: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사람(고후 6:10)’
바울 사도는 자신의 사도성을 의심하는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이런 말을 썼습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고후 6:10). 이것은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쓴 말입니다. 사람들은 바울 사도를 볼 때, 근심하는 자같이 보았던 모양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 말할 수 없는 심한 고생을 겪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고린도후서 6장에서 사도는 그것을 죽 나열하고 있습니다(고후 6:4~5, 8~10). 하지만, 이런 고난과 고생 속에서도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기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게 된 기쁨은 결코 소진해 버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을 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항상 기뻐해야 할 이유를 알았고 그렇게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I. 예수님: ‘슬픔의 사람(사 53:4)’
예수님은 성 삼위 하나님의 제2위로서 삼위 하나님의 완전한 기쁨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아셨던 분입니다. 하지만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그는 실로 슬픔의 사람이셨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으로서 인간의 죄의 모든 결과를 감당하셔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3. 당신은 이런 하나님을 믿겠는가?
우리는 정직한 질문을 여기서 스스로에게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들이 고난을 겪었다면, 나는 이런 하나님을 믿을 것인가? 그리스도께서 모든 고난을 다 짊어지고 해결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고난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치는 설교자들이 있습니다. 물론 듣기에는 좋지만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바가 아닙니다. 바울 사도 뿐 아니라 사도들의 삶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며,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겪었던 삶의 고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기독교가 말하는 기쁨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죠이선교교회라는 이름이 담고 있는 죠이(Joy)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분명히 인생에서 고난을 피해가는 기쁨은 아닙니다. 아지스 페르난도는 <고난과 기쁨>이라는 책에서 특별히 신약성경이 말하는 기쁨이 대부분 고난이 주는 축복으로 언급된다는 사실을 잘 지적하였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역설입니다. 바울 사도가 말한 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라는 말에 담긴 의미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고난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고난과 관련해서 생각해 보아야만 하는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4. 무의미한 고난은 없다.
그리스도인에게 무의미한 고난은 없습니다. 이 말은 몇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A.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뜻 밖의 일을 행하신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을 행하십니다. 요셉의 고난은 요셉 자신이 고난이 지난 후에 형들에게 말하듯이,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을 준비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창 45:7~8).” 이런 깨달음은 대개 그 모든 고난이 지난 후에 우리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을 행하신다는 것은 바울 사도의 경험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를 시작하는 1장에서 유난히 고난이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난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후 1:4~6).” 고난은 바울 사도 자신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넘치게 경험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와 마찬가지로 고난을 당하는 많은 성도들을 위로하는 수단이 되었다고 그는 말합니다. 다윗도 자신이 아무런 불편도 고통도 느끼지 않는 편안한 환경 속에 있을 때,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시 34:8). 그 자신이 사울에게 쫓기는 환경 속에 있을 때, 그는 이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그와 마찬가지로 곤고한 삶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말이 되었습니다(시 34:2). 또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를 낮추사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을 마칠 즈음, 그들에게 지난 40년의 삶을 기억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신 8:2).” 고난은 사람을 낮추는 일을 합니다. 고난은 사람을 겸손하게 합니다. 그리고 고난은 하나님을 더욱 의뢰하게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뜻 밖의 일들을 행하십니다.

B. 하나님의 백성의 고난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믿음을 믿어주시는 영광이고 특권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백성의 고난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믿음을 믿어주시는 영광이고 특권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믿음이 일방적인 것이 아닌 쌍방적인 관계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어주시는 것입니다(요 2:23~24). 이것이 구원얻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믿음을 믿어주셨습니다. 욥이 자신이 누리는 선물들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믿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욥의 고난이 초래되었습니다. 그리고 욥은 끝까지 하나님께 대한 자기의 믿음을 지켰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지켰는가 하면,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니(욥 13:15)”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라고 명령하신 것은 아브라함을 믿어주셨기 때문에 주어진 명령이었습니다. 고난은 하나님께서 나를 믿어주신다는 것이기에 신자에게는 영광스러운 특권인 것입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공회에 잡혀 매를 맞은 후에 취했던 태도가 이것을 잘 보여줍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 5:41).”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고난과 기쁨이 놀랍게 연결되는 것을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C. 고난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는 수단이다.
세번째로 고난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는 수단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죄에 대한 형벌로서의 고난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받을 죄의 형벌을 다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여전히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이 주어지는 것입니까? 위에서 언급한 적극적인 이유들 외에도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고난의 학교를 통해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선하심은 책상 머리에서 배워지지 않습니다. 특별히 개혁주의 복음의 교리는 너무나 정교해서 자칫 지적 유희의 대상으로 전락하기가 매우 쉽습니다. 죄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에게 최상의 것을 주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믿음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전적인 신뢰입니다.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게 됩니다. 그 선하심을 최초로 맛보아 알게 되는 것이 바로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 복음의 창으로 우리는 비로소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해석하고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건들이 다 하나님의 선하심의 증거였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는 사람들은 인내를 배웁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 5:10~11).” 인내로 고난을 견디고 난 후에 비로소 우리는 고난의 의미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5. 고난은 선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영광스러운 선물이다.
우리는 고난과 영광이라는 주제에서 이런 결론을 얻게 될 것입니다. 고난은 선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영광스러운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제가 언급한 고난의 이유와 목적들 때문에 그렇습니다.

A. 고난을 기쁘게 여겨라(약 1:2; 롬 5:3~4).
그러므로 고난을 기쁘게 여기라고 야고보서는 말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 1:2).”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롬 5:3)”라고 한 것도 같은 말씀입니다.

B. 고난의 의미를 자기 논리와 지식에 담아낼 수 없다.
하지만 고난의 의미를 자기 논리와 지식에 담아낼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하려고 시도한 사람들이 바로 욥의 세 친구들이었습니다. 인간이 전혀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일어난 욥의 고난은 인간의 지식으로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의 고난 역시 하나님께서 펼쳐 보여주시기 전까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인과율이라는 인간의 논리로 하나님의 백성이 당하는 고난은 해석될 수 없습니다.

C. 지혜를 구하라(약 1:5).
그러기에 야고보서는 고난을 기쁘게 여기라는 말에 덧붙여 지혜를 구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지혜만이 고난의 의미를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D.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라(롬 5:2~4).
또 성경은 고난을 당할 때 도리어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2~4).” 이것이 고난을 당할 때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가져야 하는 자세입니다.

E. 고난은 자녀를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수단이다(요 17:1; 욥 42:5).
고난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서 자녀들을 믿음의 절정에 가게 하십니다(요 17:1).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은 한 없이 영광스러운 믿음의 고백을 하게 하십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나를 믿어주신다는 확신 속에서 견딜 수 있었습니다. 고난은 고통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알아주시는 영광임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 속에서 내 믿음의 형편 없음을 보게 되면서도 또한 그 과정을 통해서 결국 고난을 통과한 믿음의 고백을 하게 하십니다. 욥의 고백을 보십시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F. 고난을 낭비하지 말라. 고난을 견뎌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에 일어나는 온갖 고난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자녀에게 일어나는 모든 고난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더욱 깊이 경험하여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난을 견딤으로써만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난을 견뎌냈을 때,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영광을 경험합니다. 고난을 견뎌냈을 때, 하나님께서 채우시는 하늘의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니 이것은 비단 고난을 다 견뎌냈을 때만이 아니라, 믿음으로 고난을 견디고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 경험하고 누리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고난 속에서 불평하고 원망하고 억울해하는 자기 한탄과 연민 속에 빠지는 것보다 더 고난을 낭비하는 일은 없습니다. 고난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고난을 견디십시오.

6. 고난은 유익이다(시 119:67~68,71).
하나님께서 욥의 믿음을 믿어주셨기 때문에 욥이 고난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당하는 고난의 차원은 바로 이런 차원이라는 사실을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고난의 결말을 몰라도 고난이 하나님께서 나를 믿어주시는 증거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영광스러운 일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믿어주신 사람들 중에서 그 어느 누구도 고난을 인하여 믿음을 배신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도리어 고난은 그들의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67~68,71).” 여기서 고난이 하나님께서 선을 행하신 일이라고 시편 기자가 고백하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고난은 하나님의 선하신 일이기에 우리에게 유익입니다. 그리고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믿음으로 견디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