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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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에서 확신으로 42 - 고난과 영광 (8) -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요.

요한복음 11:1-4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4-04-20

말씀내용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요 11:1~44
지난 한 주는 조국과 전세계의 모든 동포들 대다수가 함께 비통함과 슬픔 그리고 가슴 먹먹함을 겪었던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고난주간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세월호의 침몰과 함께 유명을 달리하게 된 사람들, 무엇보다 그들 대다수가 피어보지도 못한 어린 학생들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더욱 슬프고 아프게 했습니다. 슬픔을 당한 가정들 중에도 주의 백성들이 있을 것이고, 그들은 참담하고 견딜 수 없는 심정으로 부활 주일을 맞이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고통과 슬픔의 딜레마를 벗어날 수 없는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어떤 의미를 주는 것입니까? 이런 고통과 슬픔이 단지 남의 일이기만 할까요? 그런 고통은 하나님을 믿는 나를 피해갈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지난 주 세월호의 침몰로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죽음을 당했거나 혹은 고통과 슬픔으로 가슴이 무너져 내린 그 많은 분들은 수요일 아침까지만 해도 이런 일이 자신의 삶 속에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안 된 일이지만 우리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죽음을 피할 수 없듯이 이런 일은 때때로 우리의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현실이고 딜레마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해마다 맞이하는 부활절은 이런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1. 인간의 언어: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21,32)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보통 사람들이 기대하는 만큼을 살다가 죽은 것이 아닙니다. 젊은 나이에 갑작스런 병으로 허무하게 죽은 죽음이었습니다. 그의 두 누이는 복음서가 매우 친숙하게 소개하는 마르다와 마리아입니다. 특히 마리아는 초대교회가 잊어버릴 수 없을 만큼 주님께서 칭찬하셨던 인물입니다. 그녀는 주님께 향유를 부음으로써 주님의 죽음을 믿음으로 준비한 여인입니다(2). 하지만 자기들이 사랑하는 형제 나사로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망연자실할 수 밖에 없었고 이 믿음의 여인들의 믿음은 흔들렸던 것입니다. 큰 슬픔과 고통스러운 현실 앞에서 종종 우리의 믿음도 흔들립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도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이라고 말입니다(21,32). 이것은 마르다와 마리아가 자기들이 생각하기에 타이밍을 놓쳐버리신 주님을 만났을 때 한결같이 주님께 꺼낸 말이었습니다. 이것은 거의 책망과 비난에 가까운 말이었습니다.
A. 부활에 대한 믿음(22)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그 다음 말이 무엇인지 우리는 직감적으로 압니다.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들은 주님에 대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마르다는 “그러나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유감스러움을 감추지는 않고 있는 뭔가가 걸려 있는 신앙이지만 말입니다.
B.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27)
게다가 마르다는 주께서 당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을 때 즉각적으로 반응했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을 내가 믿나이다(27).” 이것은 사도 베드로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그리스도에 대하여 고백한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정확한 고백이 아닙니까? 마르다와 마리아는 주님의 제자들에 결코 뒤지지 않는 그리스도에 대한 놀라운 신앙 고백을 가지고 있던 몇 안 되는 믿음의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오라비 나사로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들의 믿음을 흔들어놓을 만큼 슬프고 비통한 일이었습니다. 신자들에게 이런 일은 일어납니다.
C. 불신자들의 불평(37~38)은 신자의 불평과는 다르다.
하지만 본문에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이라고 하는 말과는 다른 차원의 불평이 나옵니다. 그것은 불신자의 불평입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37)?” 주님께서는 흔들리는 신앙 가운데서 말했던 마르다와 마리아에게와는 전혀 다르게 이들에게 반응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들의 불신으로 인하여 비통해하셨습니다(38). 감당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 속에서 비슷해 보이긴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이렇게 둘로 갈립니다.
2.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일어나는 고통의 문제(4~5)
A.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에(5)
때때로 경솔한 목사들이 하는 말을 듣습니다. 동남아시아와 일본의 쓰나미 때, 그리고 아이티의 대지진 때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들을 치셨다고 말한 목사들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경솔하고 주님의 말씀에 무지한 자들의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 당시에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사람들 18명이 압사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4~5).” 주님은 그들처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나사로의 사건을 소개하는 본문의 강조를 주목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주님께 전할 때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다고 전했습니다. 게다가 마리아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리고 5절은 결정적으로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니라”라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나사로와 자매들을 사랑하지 않으셨기 때문이거나 그들의 죄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께서 그들을 특별히 사랑하셨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B.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죽음(4)
게다가 오늘 나사로의 갑작스런 죽음의 사건을 보는 주님의 관점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나사로가 병들었으니 와서 고쳐달라는 두 자매의 요청을 받으셨을 때,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4). 나사로의 병과 죽음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사건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몇 주 동안 <고난과 영광>이라는 주제로 설교를 하는 가운데 신자들에게 일어나는 고난의 영광스러운 차원을 보라고 반복적으로 강조해왔습니다. 신자들은 자신들이 겪고 살아가는 고통의 현실 속에서 고난의 이 차원을 알아야 하고 보아야 합니다. 신자에게 고난이 피할 수 없듯이 영광도 피할 수 없습니다.
3. 하나님의 잔인한 자비(severe mercy, 6)
때로 이런 말은 고통과 절망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무의미하게 혹은 잔인하게 들립니다. 그들은 그래서 ‘내 사랑하는 아들과 딸을 살려낼 수 있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때 입을 다무는게 낫다는 것을 압니다. 무슨 말이 저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만은 여전히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고통과 절망 속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 밖에 위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좀 더 말해야겠습니다.
A. 하나님께서 이 모든 상황을 아신다(11~14).
주님께서는 모든 상황을 훤히 꿰뚫어 보고 알고 계셨습니다. 전지하신 주님은 나사로가 죽었다는 사실을 아셨고 보고 계셨습니다. 여러분, 저는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크나큰 위로가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모든 고통과 슬픔의 상황을 내가 아뢸 때까지는 모르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눈동자와 같이 보호하신다고 하셨는데 참으로 그러실 수 있으신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상황을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혀의 말을 모르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십니다(시 139:4). 시편 139편은 구구절절이 이것을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내 사정을 알지 못하신다고 느껴질 때 우리 믿음은 흔들립니다. 이 때 시편 139편을 묵상하는 것은 얼마나 큰 위로인지요? 하지만 질문은 남습니다. 왜 나사로가 죽기 전에, 이런 슬픔과 고통이 자매들에게 일어나기 전에 주님은 움직이지 않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B. 너희의 믿음을 위하여(15,42)
그 이유를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15).” 먼저 주님은 나사로의 사건을 통하여 제자들의 믿음을 세워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이 사건을 바라보는 무리들의 믿음을 세워주는 사건이 되기를 주님은 원하셨습니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42).”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앞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라는 말씀의 의미를 봅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위해 나사로의 죽음을 허용하셨습니다. 이를 위하여 주님께서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것을 아시고도 의도적으로 이틀을 더 지체하심으로써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6). 물론 마르다와 마리아가 말했듯이 주님께서 거기 계셨더라면 나사로는 죽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나사로가 죽기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주님이 거기 계시지 않았던 것이 도리어 축복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잔인한 자비라고 말합니다.
4. 주님께서 죽음의 현실을 넘어 죄의 결과와 사탄의 악을 보시다(33,35,38).
드디어 주님은 죽은 지 이미 나흘이 된 나사로의 무덤 앞에 오셨습니다. 거기서 주님은 마리아와, 생전에 나사로를 알았고 그의 죽음을 인하여 우는 유대인들을 보셨습니다. 죽음 앞에서 무력한 인간의 실존, 그 앞에서 아무런 희망도 없다고 절망에 승복해버린 사람들을 주님은 보고 계십니다. 울고 있는 마리아와 유대인들은 죽음 앞에서 무력한 모든 인간을 대표합니다. 사실 주님은 거기서 죄의 결과인 죽음, 인간을 묶고 있는 죽음의 권세를 마주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께서 파괴하러 오신 마귀의 권세와 마주한 것인데, 이 권세는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생명의 창시자가 죽음의 세력을 스스로 짊어질 때에 쫓겨나게 될 권세입니다. 주님은 죽음에 복종하심으로써 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죽음은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입니다(고전 15:26). 여기서 주님은 죽음이라는 슬프고 고통스러운 현실 자체만이 아니라 죽음을 초래한 인간의 죄와 그 죄로 인간을 데리고 간 사단의 악을 보고 비통해하시는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주님께서는 죽음의 현실 앞에서 절망하면서도 주님을 불신하는 사람들을 보시면서 또한 비통해 하셨습니다(38). 이 불신이 바로 죽음을 초래한 죄이기 때문입니다.
5. 그리스도가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의미(25~26).
주님은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는 마르다를 만나셨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 이 말씀이 나사로 사건의 핵심 교훈이 아닙니까? 나사로가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이 사건은 이제 곧 일어나게 될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며, 많은 사람을 구원할 사건인지를 보여주는 십자가와 부활의 리허설입니다. 주님은 부활과 생명이라고 친히 말씀하심으로써 당신께서 생명의 창시자이심을, 생명의 원천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스도 없이 생명이 없고, 그리스도 없이 부활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부활과 생명이라고 선언하심으로써, 우리가 사는 모든 생명이 그리스도께 달려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다 죽을 인생입니다. 이것뿐 아니라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을 어떤 다양한 모습으로든지간에 먼저 죽음으로 보내야 하는 슬픈 운명 아래 살아가는 무력한 존재입니다. 세월호 참사와 같은 사건은 우리에게 이 현실을 깨우쳐줍니다.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나에게 여전히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나에게 아직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울고 있던 마리아와 유대인들과 우리 자신의 실존을 비교해 보십시오. 무엇이 다릅니까? 세월호 참사로 사랑하는 자녀들과 가족들을 잃은 이들의 현실과 우리의 실존은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실낱 같은 희망은 점점 사라져가고 절망의 그림자가 우리를 둘러 덮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이 있습니까?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혹은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셨습니까?”와 같은 말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일까요?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는 주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큰 소리로 부르시자 그 말씀 한 마디로 살아났습니다. 물론 세월이 흘러 그가 다시 죽었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하지만 나사로가 살아난 사건은 주님의 부활의 리허설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주님은 로마 병사들을 앞세운 유대 당국자들에게 잡히셨고 심문과 고난을 받으셨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 새벽에 주님은 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은 나사로의 부활과는 전혀 다른 사건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생명의 주를 무덤에 가두어놓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아들의 제사를 받으셨고, 그 아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그 제사를 확증해주셨습니다. 생명이신 주님은 친히 죽으심으로써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인 죽음을 그 발 아래 복종시키셨습니다. 주님은 친히 죽으심으로써 죄의 결과인 죽음을 죽이셨습니다. 주님은 부활로써 그것을 확증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영원히 살아계셔서 여전히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것은 주님의 부활로써 확증된 말씀입니다. 여전히 죽음의 현실 아래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이 말씀보다 더 실제적이고 위로가 되는 말씀은 없습니다. 주님을 믿는 자에게는 죽음이 절망일 수 없습니다. 주님은 부활이고 생명이십니다. 주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이미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써 죽음의 권세와 마귀의 권세를 치명적으로 파괴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나 자신의 죽음이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든 더 이상 나를 멸하는 사탄의 권세가 될 수 없습니다.
6.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40)
하지만 이 좋은 사실이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를 믿는 자는”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25). 또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셨습니다(40). 나사로의 무덤 앞에 있던 자들은 예외 없이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나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나사로의 부활을 본 것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은 아닙니다. 기적을 본 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도 아닙니다. 믿는 자만 그 믿음의 렌즈로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이 엄청난 사건을 보고 모두가 다 믿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45) 전부는 아닙니다. 그 중에 어떤 이들은 이 사실을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고했고 이 소식을 들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공회를 소집하여 예수님을 죽이기로 모의했습니다(46~53). 보고도 믿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기적이라는 현상은 보았으나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한 자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직 믿음으로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7. 그리스도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며 사는 것
우리는 모두 이 땅에서 죽음을 경험합니다. 우리 자신의 죽음 이전에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먼저 경험합니다. 때로는 예상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예상치 못한 비통한 죽음들을 경험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무슨 효용성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 삶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죽은 지 사흘째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죽음의 현실 앞에서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것입니까?
A.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야 한다(롬 12:15).
믿는 자들은 죽음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다고 성경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죽음은 결코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죽음은 고통스러운 원수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권면합니다(롬 12:15). 주님은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죽음 너머에 있는 죄의 문제와 사탄과 악의 문제를 보셨지만 여전히 죽음 자체를 슬퍼하셨습니다. 주님은 또 죽음의 비참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을 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것은 우는 자들을 동정하시고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함께 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인간의 연약함과 비참함을 그대로 보시고 동정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죽음을 포함하여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체휼하신 분이십니다(히 4:15).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 역시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사람들입니다.
B. 생명의 주께서 그때 거기에 계셨다!
주님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말처럼, 그때 거기에 계시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의 현장에 있던 마르다나 마리아보다 더 정확하게 모든 것을 아셨습니다. 비록 사람의 몸을 입으신 주님은 언제나 모든 곳에 계셨던 것은 아니지만, 주님은 여전히 하나님으로서 모든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죽음과 같은 거역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우리의 무력감을 한하며 슬퍼하고 고통스러워 합니다. 그 때 우리는 마르다나 마리아처럼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이라고 말하고 싶은 유혹을 느낍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셨고, 모든 것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셨다는 사실을 아십시오. 우리는 물론 그 모든 의미를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아십니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루십니다. 우리의 고통과 슬픔, 그리고 절망의 시간을 통해서 주님은 부활의 소망을 보여주십니다. 도무지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내 삶을 소성케 하십니다. 절망의 포로로 잡혀 있는 우리를 풀어내십니다. 부활하신 주를 바라보십시오. 생명의 창시자이신 주님,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죽음이 우리의 끝이 아니며, 죽음이 우리를 영원히 갈라놓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확증된 소망입니다. 누구에게 말입니까? 믿는 자에게 말입니다. 믿는 자는 절망 속에서, 그리고 절망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입니다. 오, 자비하신 주님께서 지금 특별히 감당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을 당한 이들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이런 은혜를 베풀어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