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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에서 확신으로 45 - 고난과 영광 (11) - 고난과 그리스도와의 연합

골로새서 1:2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4-05-11

말씀내용
<고난과 그리스도와의 연합> 골 1:24


1. 고난을 피하는 기독교는 복음의 은혜의 진수를 경험하지 못한다.
하나님을 편리한 거리에 두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 여부와는 별개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과 실제로 거리를 두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편리한 거리’라는 말은 참 편한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과도 이런 식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좋으면 만나고 안 좋으면 안 만나고 하는 자기 편한 대로 맺는 지극히 이기적인 관계 맺음입니다. 때때로 부모와 이런 식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그것은 지극한 미숙함의 표출일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가 하나님을 편리한 거리에 두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만일 그것이 참된 신앙이라면 그것은 심각하게 병들어있는 신앙임에 분명합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는 ‘값싼 은혜’가 만연하는 교회의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그는 값싼 은혜를 ‘회개를 요구하지 않는 죄사함, 제자도가 결여된 은혜, 그리스도를 따름이 없는 은혜, 십자가 즉 고난이 없는 은혜’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런 값싼 은혜는 교회를 어떤 고난도 감당할 수 없는 무기력한 교회가 되게 합니다. 값싼 은혜는 내세보장 영생보험의 혜택만 바라보고 살아가면서 적당히 ‘착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며 사는 사람들을 양산합니다.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그것은 오합지졸과 사상누각에 불과합니다. 고난이 오면 다 무너지고 맙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부인은 십자가를 지는 삶의 전제입니다. 고난을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물며 십자가 처형을 당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십자가를 져야 한다면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자기 본성을 거슬리는 일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주님께서 하신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너무나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믿음으로 인한 고난은 그들에게 당연한 일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의 거의 모든 서신서가 고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고난을 회피하는 값싼 은혜의 기독교가 가지는 정말 심각한 문제는 복음의 은혜의 진수를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은혜의 진수는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고 살아가는 경험은 귀한 일이지만, 그것이 복음의 은혜의 진수는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 안에서 듣는 간증들은 사실상 복음의 은혜의 진수와는 거리가 있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복음의 은혜의 진수를 경험하지 못하는 기독교는 수많은 거짓 신앙을 양산해내는 모판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2. 복음의 은혜의 진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경험하는 것(빌 3:7~12)
복음의 은혜의 진수는 무엇입니까? 바울 사도가 자신의 가치와 소원을 언급한 본문을 보지요.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7~12).” 사도는 여기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에게 일어난 전적인 변화를 보여줍니다. 복음은 그의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 전체를 완전히 바꾼 사건입니다. 이것은 단지 사도에게 국한된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근본적으로 비그리스도인과 모든 영역에서 전적으로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된 사람입니다. 이전에 자기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들을 이제는 다 해로 여긴다고 사도는 말합니다. 이제 바울 사도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되었습니다. 이 지식을 위해서 그는 자기에게 소중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그것들을 다 배설물로 여길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그에게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바꿀 수 없는 가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가치를 그가 그렇게 높이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에게 거저 주어진 의의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사도가 여기서 갈망한다고 말하는 것은 주님 자신에 대한 보다 친밀한 인격적 지식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더 잘 알기를 원하는 사람은 분명히 그분과 같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사도는 그리스도를 알고 경험하고 닮는데 있어 세 가지 조건을 말합니다.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알고, 둘째 그의 고난에 참여하고 셋째로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빌 3:10). 사도는 단지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만을 배우겠다고 말하지 않고 그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으면 닮을수록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리스도를 욕하는 사람들에 의해 핍박을 받을 가능성은 더 커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에게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했기에 이 모든 것?고난과 죽음?이 도리어 영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의 이 본문은 골로새서 1장 24절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3. 골로새서 1장 24절에 대한 두 가지 해석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말은 종종 잘못 이해되어온 구절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뭔가 부족한가 보다 하는 생각에서 우리가 이제 2~3%미만으로 남은 고난을 채움으로써 그리스도의 고난을 완성하자는 것은 터무니없는 비복음적 생각입니다. 이것은 복음과 그리스도의 사역의 충분성을 완전히 오해하는 태도입니다. 이런 생각을 거부하면서 우리는 이 구절에 대하여 두 가지 정도의 타당한 해석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A. 그리스도의 복음이 각 사람에게 적용되기 위한 고난
첫째는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택하신 백성의 구속을 완성하셨지만, 그 구속 사역이 백성들 각자에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담당해야 할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복음으로 영혼들을 낳기 위해서는 감당할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 자신은 이것을 해산하는 수고에 비하기도 하였습니다(갈 4:19).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가 사람들에게 적용되기 위해 필요한 고난입니다. 그리스도의 역사는 성취되었지만 그 복음의 메시지가 아직 완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필요한 고난입니다. 이것은 올바른 해석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야 합니다.

B. 그리스도의 고난을 스스로 체험하는 것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서 그분의 능력을 체험하고 공유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살펴본 빌립보서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표현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빌 3:10). 고난을 통해서만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연합)의 경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가 주님께로부터 들은 대답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사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물으시자 사울은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물었고 주님은 다시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대답하셨습니다(행 9:4~5). 여기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주의 깊게 보면, 주님은 교회와 당신을 동일시하고 계신 것을 보게 됩니다. 바울이 되기 전 사울은 교회와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지만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박해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네가 나를 박해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교회와 주님은 연합된 몸임을 보여줄 뿐 아니라, 특별히 교회가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주님께서는 교회와 함께 고난을 받으시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사울이 교회를 공격할 때 그리스도와 교회는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라고 말할 때, 교회를 위한 고난이라면 그것은 곧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고 그리스도의 고난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또 고난에 대한 말씀을 로마서에서도 이렇게 소개합니다. 로마서 8장 17절을 보십시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사도 바울에게 이런 의식은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그에게 고난은 그리스도와의 친밀감과 유대를 더 깊게 만들어주는 수단이었습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모든 유익하던 것들을 다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길지라도 얻기를 원했던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었습니다. 그는 머리를 만족시키는 지식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난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실재를 더 깊이 경험적으로 알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라는 말의 의미였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감으로써 그는 부활의 권능과 기쁨을 또한 체험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 고난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실재를 깊이 누리게 하는 영광스러운 경험이 되었던 것입니다.

4.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은 그리스도를 닮게 한다.
앞에서 저는 주님을 더 잘 알기를 원하는 사람은 분명히 그분과 같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더 잘 알려는 마음이 여러분의 심정에 없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닮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닮기를 원하는 것은 우리 앞에서 믿음의 길을 지켰던 모든 선배들의 간절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더 알기를 원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닮아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했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기쁨과 영광으로 알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은 그들을 그리스도를 닮는 자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초대 교회의 일곱 집사 중의 하나인 스데반을 보십시오. 그는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밝히 아는 자였고 지혜와 성령으로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사람들이 능히 대적할 수 없던 사람이었습니다(행 6:10). 사도행전 7장에 기록되어 있는 설교는 그가 공회에 붙잡혀서 행했던 설교입니다. 그가 설교를 마치자 공회원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았고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갈았습니다(행 7:54). 그리고 그를 성 밖으로 끌고 가서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그 때 스데반이 드린 기도가 있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59~60).” 역사상 많은 순교자들도 이런 모습으로 그들이 사랑하는 구주의 남은 고난에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은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이 아닙니까? 바로 고난이 그들을 그리스도와 가장 닮은 모습으로 빚어가는 하나님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2차 대전 중 네덜란드에서 유대인들을 숨겨주다가 독일군에게 붙잡혀 온 가족이 수용소에 끌려간 코리 텐 붐 여사의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여사의 가정은 정말 훌륭한 믿음의 가정이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를 비롯하여 거의 모든 식구가 다 수용소에서 죽었습니다. 극한 상황 속에서 수용소에 함께 있던 코리 여사와 언니 베티의 모습은 고난이 어떻게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깊이 경험하게 하고 그리스도를 닮게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언니 베티는 자기를 채찍질하는 간수에게 삽을 들고 달려들려는 코리에게 말합니다. “보지 마, 코리. 예수님만 바라봐.”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는 구주의 모습이 무자비한 행위가 주는 고통을 가져간다는 사실을 그들은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를 짓누르는 모든 불행에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힘을 줄 뿐 아니라, 비통한 마음을 떨쳐내는 그분의 사랑을 체험하게 해줍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죽은 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 경험되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고, 우리의 고난 속에서 더욱 그리스도를 닮게 하는 힘입니다.

5. 고난과 기쁨: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이 고난 즉 괴로움을 기뻐하는 이유는 단순하게는 두 가지인데, 이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교회를 위한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해한대로라면, 이것은 둘 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경험하게 하는 고난입니다. 실제로 성경에는 오늘 본문의 구절과 마찬가지로 고난과 기쁨을 짝으로 설명하는 부분이 참 많습니다. 아지스 페르난도는 신약 성경에만 고난과 기쁨이 함께 언급되는 곳이 18곳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이 기쁨은 십자가를 가치 있게 만드는 기쁨이다. 왜냐하면 그 기쁨은 우리에게 고난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이다.” 찬송가의 이 가사를 묵상해보십시오.
너희 마음에 슬픔이 가득할 때 주가 위로해 주시리라
아침 해같이 빛나는 마음으로 너 십자가 지고 가라
참 기쁨 마음으로 십자가 지고 가라
네가 기쁘게 십자가 지고 가면 슬픈 마음이 위로 받네
이 기쁨의 본질은 그리스도와 내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깊이 하나가 되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넘치는 위로가 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감옥에 구금되어 있는 상태에서 사랑하는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했습니다(빌 4:4). 주님은 잡혀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시기 직전 제자들과 함께 있던 자리에서 적어도 6번 이상 기쁨을 언급하셨습니다(요 15:11; 16:20,21,22,24; 17:13).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주님의 기쁨은 아버지의 계명을 지킴으로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시는 기쁨이었습니다(요 15:9). 이 기쁨이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신 주님에게 충만했습니다. 죽으시기까지 순종하는 기쁨은 창세전부터 본래 누리셨던 아버지와 하나 되는 기쁨을 ‘더욱’ 충만하게 누리는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이 말을 조심스럽게 하고 들어야 하는데, 영원 전부터 이미 완전하고 충만한 기쁨을 누리신 하나님께 ‘더욱’ 충만하게 누리셨다는 말은 모순이 되는 말이지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표현한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육체에 채울 때,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로 인하여 그리고 교회를 위하여 고난을 받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놀랍게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우리는 그리스도의 위로를 넘치게 경험할 것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우리는 감사할 것이고 감격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오늘 본문을 통해서 고백한 말씀이며, 빌립보서에서 모든 유익하던 것을 다 버리고 배설물로 여길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갈망한다고 말한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인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런 기쁨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와 주로 섬기는 성도들에게 이런 기쁨이 필요합니다. 오늘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에게 이런 기쁨이 필요합니다. 이런 기쁨은 우리의 심령을 소성시킬 것이고, 하나님의 교회를 새롭게 할 것입니다. 오, 주님께서 우리 인생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깊이 하나가 되는 기쁨을 충만히 주시기를 구합니다. 평생을 복음의 얕은 물가를 벗어나지 못하고 노는 어린 아이가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일지라도 복음의 은혜의 진수를 경험하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