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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에서 확신으로 44 - 고난과 영광 (10) - 고난과 위로 그리고 하나됨

고린도후서 1:3-1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4-05-04

말씀내용
<고난과 위로 그리고 하나됨> 고후 1:3~11



우리는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우리 자신 그리고 우리가 당하는 고난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가 당하는 고난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조금 전 영상에서 강연자는 자기에게 갑자기 찾아온 뇌종양이라는 심각하고 무서운 질병이 자기에게 선물이었다고 말입니다. 물론 고난이 지난 후의 말입니다. 저는 그녀가 그리스도인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뇌종양이라는 심각한 질병 속에서 소위 넓게 적용된 ‘일반은혜’를 발견한 것입니다. 물론 그녀가 발견한 것은 구원의 은혜는 아닙니다. 하지만 고난을 통해서 그녀는 고난 이면에 있는 축복을 본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에게야 어떻겠습니까? 저는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들이 가진 엄청난 위치를 알지 못하는 것이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1. ‘그리스도의 고난’(5)
고린도후서 1장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자신이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 쓰고 있습니다. 그 중 우리가 주목할 것은 5절에 ‘그리스도의 고난’이라고 쓴 부분입니다. 사도는 자기가 겪는 고난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표현한 것일까요? 사도는 자기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라는 의미에서 이렇게 썼을 것입니다. 그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고 고백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당하는 고난은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며,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로서 당하는 고난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사도가 그리스도의 자리에 섰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입니다. 즉 그리스도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곧 자신에 대한 태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고난을 그저 겪었다고 말하는 대신 ‘넘쳤다’고 표현합니다(5). 그는 실로 고난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많이 받을 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행 9:15~16).” 바울은 사도로서 특별한 고난 즉 교회를 세우기 위한 고난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점에서 그의 고난은 사도적 고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특별히 주목하려고 하는 것은 사도가 이 고난을 자기 한 사람만의 독특한 경험으로 소개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2.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6)
물론 5절에서 사도가 ‘나’라는 인칭대명사 대신에 ‘우리’라는 대명사를 사용함으로써 고린도교회의 성도들과 자신을 함께 묶어서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지만, 6절에서는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라고 말함으로써 사도가 받는 고난과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받는 고난이 같은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도는 나는 사도이기 때문에 너희 보다 특별한 고난을 당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라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와 자신을 연결시켰던 사도는 이제 자신이 받는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자신과 하나로 묶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 역시 핍박을 피할 수 없었는데 그것도 그리스도의 이름과 복음을 위한 고난임에 분명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본 영상에서 강연자는 자기에게 찾아온 뇌종양이 그녀의 가족 모두가 함께 하도록 해주었고 자신이 몇 년 동안 소식을 듣지 못했던 친구들과 지인들과 다시 연결해 주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됨을 가져다 주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고난이 언제나 모두에게 이런 결과를 가져다 주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고난 때문에 이혼을 하기도 하고 다툼이 깊어지기도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가슴 아픈 일이지요. 그러나 오늘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고난이 교회를 하나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8절에서 자기가 아시아에서 당했던 심한 고난을 고린도교회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이어서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극한 고난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고난이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느낄만한 심한 고난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아마 사도가 이 심한 고난을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말하는 이유는 지금 아무리 심한 고난 가운데 처한 성도라 할지라도 이런 고난을 겪은 자신을 생각하고 힘을 얻으라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형선고와 같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9). 하나님은 이런 큰 사망의 고통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는 분이며 장래에도 건지실 분이라고 그는 말합니다(10).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자기들과 같은 고난을 겪은 바울 사도와 심정적으로 동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사도는 자신이 받는 그리스도의 고난은 자기만의 독특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며 고난을 감당해야 했던 모든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겪는 것과 동일한 고난이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을 그들과 결속시키는 것입니다.
3. 고난 보다 더 큰 하나님의 위로가 고난을 견디게 한다.
본문에는 ‘위로’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여기 사용된 위로(헬. 파라클레시스)라는 단어는 보혜사(파라클레토스)라는 단어와 같은 어원을 가집니다. 그 뜻은 ‘사람이 혹독한 시련을 겪을 때 그의 곁에 서서 그를 격려한다’는 것입니다. 즉, 성도는 고난 중에 있을 때 결코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혜사(여기서는 ‘위로자’라는 의미로) 성령님께서 그 옆에서 그를 위로하십니다. 3절에서 바울 사도는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보혜사 하나님이라는 의미를 전달해줍니다. 성자와 성령님뿐 아니라 성부 하나님도 근본적으로 자녀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언제 그렇게 하는가 하면, ‘모든 환난 중에서’ 그렇게 하십니다(4). 4절을 다시 보십시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모든 환난’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사도는 하나님께서 위로하시지 않는 고난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난의 삶을 살았던 사도의 산 경험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아시아에서 당한 그 극한 고난 속에서도 사도는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했습니다. 사도는 또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라고 표현합니다(5). ‘하나님께 받는 위로’는 고난보다 더 큽니다. 고난이 넘친다면 하나님의 위로는 더욱 넘칩니다. 그래서 사도는 자신이 겪었던 그 극한의 고난이었던 아시아에서 당한 고난도 감당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위로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런 위로를 경험해보셨습니까? 이 놀라운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그가 고난 속에서 구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위로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를 조금 밖에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고난이 너무나 작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저는 여러분의 삶에서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서 받는 소위 적극적 고난이 더욱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더 큰 위로를 경험하시라는 것입니다.
4. 고난은 위로의 사람을 만든다(4).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를 넘치도록 경험하게 되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는 4절 하반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사도는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위로를 통해서 자신과 같이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즉, 자신이 당한 고난은 자신을 하나님의 위로자가 되게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도덕적으로 매우 음란하고 개방적인 이교 도시 고린도에 와서 18개월 동안 복음을 전했고 거기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게 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겪어야 하는 핍박과 고난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당한 고난을 말함으로써, 그리고 그때마다 넘치도록 주셨던 하나님의 위로를 말함으로써 자신을 고난 가운데 있는 그들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사도는 자신이 겪은 고난이 고린도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6).”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아프리카 콩고의 선교사였던 헬렌 로즈비어(Helen Roseveare)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녀는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한 후 1953년 아프리카 콩고로 들어간 의료선교사입니다. 병원을 세우고 간호원들을 양성하는 등 성공적인 사역을 감당하던 중, 1964년 내전이 터졌고 그녀는 반군에게 붙잡혀 강간을 당함으로써 그녀의 인생에 말할 수 없는 큰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녀는 그런 중에도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고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 사도에게 그랬듯이 하나님의 위로는 그녀가 경험한 고통 보다 더 넘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2년 후인 1966년 다시 자신을 짓밟았던 콩고로 들어가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무엇보다 그 잔혹한 내전 속에서 자기와 같이 고통을 겪은 많은 여성들을 힘있게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에도 그녀는 저술과 강연으로 세계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물론 우리는 누구도 이런 식의 고난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들은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일어납니다. 비록 그 어떤 일이 우리 인생에서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알 것은 거기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사도는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의 고난은 위로의 사람을 만듭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 사람들이 단지 같은 고난을 겪었다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를 전할 수 있는 위로의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고난은 성도들로 하여금 더욱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깊이 경험하게 해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더욱 하나로 묶어주는 띠가 되는 것입니다.
5. 고난과 위로를 통한 교회의 하나됨: “나 한 사람만의 고난은 없다.”
오늘 본문 전체는 ‘고난과 위로’라는 주제 아래서 바울 사도와 고린도교회가 하나가 되는 경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고난은 한 사람 개인의 고난인 경우는 없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리스도의 몸은 나뉘어질 수 없습니다. 한 지체의 고통은 몸 전체가 느끼는 고통입니다. 고난 중에서 성도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위로도 자기 한 사람만을 위한 위로가 아닙니다. 나를 통하여 교회를 위로하시는 위로인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여러분은 절대로 혼자인 개별자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사도는 이런 전제 위에서 고린도후서를 쓰고 있습니다. 사도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고린도교회가 알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제 아들이 큰 환난을 겪었는데 그것을 아버지인 제가 알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정상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는 과연 성경이 가르치는 이런 신앙적 전제가 있습니까? 그런 전제에서 살아가십니까? 사도 바울은 여전히 고난 가운데 있는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11).” 그가 너무나 약해져서 자기 연민에서 이런 부탁을 하는 것입니까? 그들이 바울 사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이기 때문에 부탁한 것입니다. 결국 고난을 통한 위로가 모두의 위로가 되고, 감사가 모두의 감사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자신의 고난이 고린도교회와 자신을 하나로,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결속하게 해주는 도구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일은 일어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6. ‘그리스도로 말미암아’(5)
제가 고린도후서 1장에 근거하여 전한 이 모든 말씀이 여러분 자신에게 의미를 가지려면 하나의 조건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5절에 언급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말입니다. 사도가 없어도 되는 말을 넣은 것일까요? 그 말이 없이 읽어보십시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넘치는도다.”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도리어 더 간결한 느낌이 들기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아니 성령님께서 이 세 단어(헬라어로)를 쓰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가 없이는 오늘 모든 이야기는 허구가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받는 위로는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위로입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누리는 위로라는 말입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모든 위로는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들에게 주어집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우리로 하여금 모든 환난 중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게 하는 통로라는 말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죄가 없으시고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이 그리스도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한다면, 사도가 말씀한 바 넘치는 위로는 경험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만연한 오해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없는 위로를 구하고 또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수 없듯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의 위로를 얻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리스도 복음의 은혜를 아는 일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고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께서 자비와 위로의 아버지로서 자녀들에게 주시는 위로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두 단어는 사실 고린도후서 1장의 열쇠입니다. 아니, 그리스도인의 삶의 열쇠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모든 고난 그리고 그 모든 고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위로의 열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고난 속에서 넘치는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십니까? 그 위로는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위로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넘치는 위로를 공급받게 하는 통로인 것입니다. 이것을 깊이 알았던 사도가 3절에서 하나님께 찬송을 돌린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3).” 찬송을 받으실 하나님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도는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함께 그 하나님께 찬송을 돌리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7. 시각의 변화: 하나님 그리고 교회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고난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고 계십니까? 과거에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여러분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여러분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사람은 고난을 당할 때 자기 밖에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받는 고난은 너만의 것이 아니다. 네가 받는 위로는 너만의 것이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넘치는 위로를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또 교회를 보라고 하십니다. 교회를 위한 고난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고난의 영광이 있습니다. 내가 받는 고난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위로가 넘치게 할 뿐 아니라, 이로 인하여 교회를 하나되게 하고, 하나님의 교회 모든 지체들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전하며, 그 위로로 그들 모두가 고난을 능히 견디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서로 위하여 기도하게 하며, 결국 바울 사도의 솔로가 아니라 교회의 코러스로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노래하게 하는 것입니다. 시각을 교정해야 합니다. 여러분 개인의 삶에 일어나는 고난은 여러분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보셔야 하고, 그리고 교회를 보셔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난을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우리의 약함은 강함의 원천이고 우리의 고난은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의 도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