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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에서 확신으로 41 - 고난과 영광 (7) -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신 그리스도

히브리서 5: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4-04-13

말씀내용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신 그리스도> 히 5:8


1. 모든 아들은 고난으로 순종을 배운다(히 12:5~11; 잠 13:24; 22:15; 29:15).
범죄한 아담의 후손은 천성적으로 말만으로는 배우지 못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것을 12장에서 일반적인 원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5~11).”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을 징계합니다. 징계라는 말은 체벌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에게 잠언이 교훈하는 말씀도 일관성을 가집니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 13:24).”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잠 22:15).”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잠 29:15).” 성경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악은 결코 말로써 교정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모든 자녀들은 고난을 통해서야 비로소 순종을 배우는 법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12장에서 말했다시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인 5장 8절은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그가 아들이시면서도’라는 말은 정확히 표현하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라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2장에서 사용한 것과 같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예수님이 아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하시고 무한하시며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범죄한 아담의 모든 후손들의 죄성을 갖고 태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십니다(고후 5:21). 이런 점에서 예수님을 ‘그가 아들이시면서도’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예수님은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실 필요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순종을 배운다’는 표현도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은 순종을 배우셔야 할 필요가 있으신 분도 아니십니다. 주님은 하나님 자신이셨지만 스스로 종의 형체를 가지셨고, 성부 하나님께 완전한 순종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알지 못하던 어떤 것을 배우셔야 할 필요 아래 있으신 분이 아니십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런 주님께서 순종을 배우셨다고 말할 뿐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셨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살피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볼 수 있는 주님의 생애에 몇 가지 주목할 사건들이 있습니다.

2. 주님의 고난과 영광

A. 이 땅에 오셨을 때(눅 2:8~14)
첫째는 주님께서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셨을 때의 일입니다. 누가복음 2장 8절을 보지요. 베들레헴의 목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통하여 주님의 탄생 소식을 전해주셨습니다. 밤에 목자들이 양 떼를 돌보는데 주의 천사가 그들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자 그들은 크게 무서워했습니다. 그 때 천사가 말합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0~11).”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소식’이라고 주님의 탄생을 묘사하는 것을 주목해보십시오. 이어서 수 많은 천군천사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 찬송의 내용도 중요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주님의 탄생은 온 백성에게는 큰 기쁨과 평화의 소식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는 영광이라고 선언합니다. 하지만 목자들이 가서 보게 될 구주의 표식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입니다(눅 2:11). 왕궁이 아니라 구유, 말의 먹이통에 누워있는 아이가 바로 구주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이고 영광이라니요? 주님의 성육신이 주님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하늘 영광의 보좌에 영원에서 영원까지 무한한 영광을 누리시는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우리가 구주가 되시려고 이 땅에 피조물인 사람, 그것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고 오셨습니다(롬 8:3). ‘죄 있는 육신’이 아니라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기쁨이나 영광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나 먼, 무한히 비천해 지심이고 무한한 수욕이고 굴욕의 사건입니다. 여기에 적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어떤 인간의 언어도 존재하지 않는 그런 낮아지심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완전히 다른 언어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기쁨, 영광이라고 말입니다.

B. 세례를 받으실 때(마 3:13~17)
두 번째로 주목할 사건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의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이미 자신이 증거해야 할 빛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았고 예수님을 향해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공중에게 증거했던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서 오시자 당황하여 말합니다.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마 3:14)?” 예수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마태복음 3장 15절입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결국 요한은 주님께 세례를 베풀었는데 주님께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주님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시는” 것을 보셨습니다(마 3:16). 그리고 하늘에서 성부 하나님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성경 전체를 통해서 매우 드문 특별한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성부 하나님의 음성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것이었습니다(마 3:17).” 다시 한 번 우리는 주님의 세례 받으신 사건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례는 죄인들이 받는 것이었습니다. 세례는 죄 씻음의 표시였습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마 3:6).” 하지만 예수님은 자복할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세례를 받으실 이유도 없으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것을 알았기에 예수님에게 세례 베푸는 것을 주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세례를 베풂으로써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의를 이루신다는 것입니까? 율법의 의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아담이 실패했던 율법의 의, 아담의 모든 후손이 실패할 수 밖에 없고 그래서 죽어야만 하는 율법의 의를 이루시는 것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죄인의 구주가 되시기 위해서 반드시 하셔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분은 세례를 받으심으로 죄인들 중의 하나로 헤아림을 입으신 것입니다(사 53:12). 주님은 사람이 되셨을 뿐 아니라, 죄인으로 여김을 받으셨고 죄인의 운명에 용감히 서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례의 사건은 성육신의 사건 만큼이나 거룩하신 하나님 자신이신 주님께서 말할 수 없는 수욕과 수치를 짊어지신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일을 ‘내가 받는 세례’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막 10:39). 주님에게 세례는 수욕과 수치일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성령 하나님께서 비둘기와 같이 하늘에서 내려 예수님에게 임하셨을 뿐 아니라 성부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음성을 들려주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죄인으로 여겨짐으로 굴욕을 받으실 때 성부 하나님께서는 그를 향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처참한 굴욕의 순간에, 성부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하신 아드님에게 확신에 확신을, 당신의 사랑과 기쁨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C. 변화산에 오르셨을 때(마 17:1~8)
세 번째로 주목할 사건은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오르셨을 때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 세 명만 데리고 변화산에 오르셨습니다. 거기서 주님은 변형이 되셨는데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마 17:2).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더불어 말하는 것을 세 제자는 보았습니다. 그때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제자들을 덮으며 다시 성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것이었습니다(마 17:5). 다시 한 번 엄청난 일,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음성으로 말씀을 들려주시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사건이 기록되기 바로 전에, 주님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멋진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이 고백을 하자 주님은 처음으로 당신의 고난 받으실 것과 죽으실 것 그리고 부활하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마 16:21). 이 말씀에 놀란 베드로는 그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면 안 된다고 하면서 주님을 말리다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혹독한 책망을 듣게 됩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님의 정체성에 대한 고백과 함께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과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신 일은 복음서의 분수령입니다. 이제 17장부터 이야기는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향해서 질주하게 됩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무력하고 무능하게 사람들에게 잡히시고 조롱과 고난을 받으시며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님이 누구신지를 분명하게 드러내주시는 사건이 바로 이 변화산 사건입니다. 그 주님은 무력한 인간이 아니라, 영광 중에 계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고난 받으시는 주님에게서 그들은 그 영광의 주님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때 성부 하나님께서 다시 하늘에서 음성을 들려주신 일은 의미심장합니다. 고난 받으시는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영광의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D. 헬라인들이 찾아왔을 때(요 12:27~28)
네 번째로 주목할 사건입니다.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그 주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온 ‘하나님을 경외하는’ 헬라인 몇이 주님을 뵙고자 청원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말씀하시고(요 12:23) 그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이때 다시 하늘에서 성부 하나님의 소리가 납니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요 12:28).” 사람들은 그저 천둥이 울렸거나 천사가 예수님에게 말을 했다는 정도로만 알았고 그 내용은 들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부 하나님께서는 고난과 죽으심을 목전에 둔 예수님에게 다시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 고난의 의미를 밝힐 뿐 아니라 그 고난을 받고 죽으셔야 하는 주님을 향한 성부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사랑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이 고난과 이 죽음을 통하여 내가 너를 영광스럽게 했고 할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E. 십자가상에서(마 27:46)
여기까지 우리는 주님의 생애에서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던 사건들을 살펴봤습니다. 이런 현상들은 정말 성경 전체를 통틀어 드물게 일어나는 현상들입니다. 하나는 천사들의 말이었고 세 개는 성부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하나 같이 주님의 비하?낮아지심?와 수욕, 고난과 죽으심에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아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아셨기에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1,5).”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은 예수님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 결정적인 사건일 뿐 아니라, 성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임을 주님은 아셨고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하지만, 공관복음은 요한복음과는 또 다른 견지에서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주님은 비록 당신 자신께서 이 고난을 결코 원하지는 않으시지만,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복종하여 자신을 드리신다고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께 복종할 것인지에 대한 갈등이 아니라, 이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아셨던 주님께서 그 고난을 두려워하셨던 것을 정직하게 보여주는 기도입니다. 그 고난과 죽으심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지는 고통이고, 창세로부터 모든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의 자리에서 홀로 서서 그들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그 어마어마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쌓여진 진노를 한 몸에 다 받으시는 고난과 죽으심이라는 것을 주님은 아셨습니다. 루터가 말한 대로, 주님처럼 죽음을 두려워했던 인간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야말로 죽음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아셨던 유일한 인간이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만 성 삼위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아셨기에, 주님은 당신 자신을 죽기까지 복종하는 자리로 가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들이 하는 모든 조롱과 고난을 받으시면서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혹은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처럼 그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사 53:7). 그리고 십자가 상에서 이렇게 성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런데 정작 이때 하나님 아버지는 침묵하셨습니다. 세례를 받으실 때, 변화산에서, 그리고 헬라인들이 왔던 며칠 전에 하늘에서 말씀하셨던 성부 하나님은 정작 이 때는 침묵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성부 하나님께서 그 아드님이신 성자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택하신 모든 백성의 죄를 전가하시고 그를 향하여 진노하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택한 백성의 죄에 대하여 행하실 그 무서운 심판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게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정작 그 순간에 성부 하나님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그 아들을 대적하셨고, 그 아들을 향하여 진노하셨고, 그 아들에게 심판을 퍼부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세례를 받으실 때, 그리고 며칠 전 헬라인들이 주님을 찾아왔을 때 하늘이 열리고 음성으로 친히 말씀해주셨던 사랑하는 아버지의 음성을 들으셨기에 주님은 확신 가운데 그 진노와 심판의 자리에서도 이렇게 성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입니다. 심판하시고 대적하시는 하나님은 바로 ‘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주님은 아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그동안 우리가 상고했던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는 바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이야기임이 드러나게 됩니다.

3. 그리스도의 고난과 순종
다시 말하지만, 주님은 순종을 배워서 아셔야 할 분이 아니십니다. 그는 하나님이십니다. 더구나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워야 하는 죄인의 아들이 아니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셔야 했던 것은 모든 면에서 죄인을 위한 대제사장으로서의 완벽한 조건과 자격을 성취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이 9절에 ‘온전하게 되셨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주님은 덜 온전하셨다고 더 온전해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여기서 죄인을 구속할 완전한 대제사장의 조건을 갖추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순종을 배우심으로써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사’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신’ 것입니다(히 5:9~10). 주님의 삶은 성육신부터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순종에서 순종으로 이어진 삶이었습니다. 이것은 자발적인 순종이셨습니다. 첫 사람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은 순종에서 실패했지만,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주님은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빌 2:7)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의를 흠 없이 이루셨고 이로써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아십시오. 아버지께 대한 주님의 순종은 주님을 고난과 수욕으로 이끌었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순종의 필연적인 대가였습니다. 세례로 시작된 주님의 공적인 순종의 생애는 두 번째 세례, 곧 첫 세례에서 예상된 수욕과 고난을 끝까지 견디고 죽으심으로써 “모든 의”를 이루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게 된 것입니다.

4. 그리스도인의 고난과 순종
히브리서라는 서신의 직접적인 수신자들이었던 초대 교회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의 신앙과 충절을 지키려면 어차피 시련과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고난은 그들의 삶의 특징이었습니다. 그 고난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 그들이 당하는 일상적인 삶의 고난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그들이 짊어지게 된 피할 수 없는 고난이었습니다. 또 그들은 신앙을 포기하거나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에 외부 사람들의 관심이 적게 쏠리도록 하기만 해도 시련과 고난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직면한 문제는 뒤로 물러서서 모든 것을 잃을 것이냐 아니면 완전을 향해 계속 전진할 것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사람들에게 히브리서는 쓰여졌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에게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계속 전진하라고 하면서 고난 앞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으셨고 “고난으로 온전하게 되신” 예수님의 모범을 그들에게 제시하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이 당하신 고난이 구원을 이루는 고난이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주님의 고난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즉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울 필요가 전혀 없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이라는 고난을 피하지 않고 받으심으로써 순종을 온전하게 배우신 주님을 제시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땅히 고난을 통해서 밖에는 순종을 배울 수 없는 우리들에게는 얼마나 더 고난이 순종을 배우게 하는 적극적 수단인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모범은 당연히 고난의 현장에 살던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인내하라는 격려가 되었을 것은 자명합니다.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사 그들의 대제사장으로 온전하게 되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고난을 겪으셨다는 것은 그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순종은 자기 부인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자기 부인이 없는 순종은 순종이 아닙니다. 순종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순종은 내 뜻과 아버지의 뜻이 맞아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은 내 뜻과 아버지의 뜻이 다를지라도 자기를 부인하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친히 고난을 통해서 배우셨고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순종입니다. 칼빈이 말한 대로, 우리는 다 주님께서 당신의 멍에를 메고 가게 하실 때까지는 절대로 복종하지도 따르지도 않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런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 순종은 필연적으로 주님을 위한 고난을 초래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압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에게 순종은 믿음과 조금도 차이가 없는 동의어입니다. 순종은 믿음이 옵션이 아니듯이, 옵션이 아닙니다. 주님의 멍에를 멜 때까지 우리는 주님에게서 배우지 못합니다. 주님의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말씀하십니다(마 11:30). 왜냐하면 주님과 함께 메는 멍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약속이 있습니다.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주님께서 성육신과 세례 그리고 변화산 등의 사건에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향하여 말씀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의 멍에를 메고 따라가는 길에서 우리의 낮아짐, 수욕과 고난의 순간마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향하여 주시는 놀라운 메시지를 우리도 경험할 것입니다. 사실상,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말씀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언제 우리가 그 말씀을 듣습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걸어갈 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갈 때,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을 때 우리는 그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이 감당할 수 없는 말씀 앞에서 우리가 감당치 못할 고난도 없을 것입니다. 지속적인 순종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어디에서도 즉각적이고 단회적인 순종으로 뭔가를 이룰 수 있다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믿음의 길은 지속적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입양된 아들들은 징계와 고통을 통해서만 길들여지고 순종을 배울 수 있는 자녀들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순종을 배우고 계십니까? 그럴 의향이 있으십니까? 그렇게 지금까지 주님의 멍에를 메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오셨습니까? 이 고난 주간에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신 주님을 묵상하시고, 어떤 대가를 치른다고 하더라도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고백하며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복된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넘치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