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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에서 확신으로 40 - 고난과 영광 (6) -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빌립보서 1:27-3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4-04-06

말씀내용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빌 1:27~30



1. 고난의 소극적 차원과 적극적 차원
저는 지금까지 고난의 소극적인 차원을 주로 다루었습니다. 소극적 차원이라는 말은 우리가 원해서 받는 고난이라기 보다는 그저 받아야 하니까 받는 고난이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도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구분이 없이 인간 전체에 대해서 사용할 때에는 사는 게 고난이다 하는 뜻으로 우리가 겪고 살아가는 질병, 가난, 상한 관계, 실업, 노동과 같은 많은 문제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리스도인들만이 겪게 되는 소극적 차원의 고난도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주로 생각해왔던 것인데, 욥이나 아브라함의 경우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의 믿음을 시험하시고 연단하시기 위하여 주시는 고난입니다. 여기에는 징계도 포함됩니다. 이 소극적 차원의 고난은 피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상고하려는 본문 말씀은 또 다른 차원의 고난이 있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것은 적극적 차원의 고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 혹은 복음을 위하여 받는 고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소극적 차원의 고난을 넘어 적극적 차원의 고난을 경험하고 살아가는지 말입니다.

2. 다양한 고난들의 관계
소위 먹고 사는 것이 힘들다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나 그리스도인이 아니거나 누구나 겪는 고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것이 내 삶의 고난의 전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그런 일상적 고난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믿음의 시련이 되도록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그 고난이 그냥 무의미한 고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 속에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말씀하시고 뭔가를 가르쳐주심으로써 그 고난이 유익이 되게 하십니다. 이것은 욥의 경우에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비록 욥이 고난을 받은 이유는 욥 자신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으리만치 영광스러운 것이었지만, 욥이 당한 고난의 내용만큼은 자녀들의 죽음, 경제적인 실패, 건강의 상실과 같이 사람이 일상적으로 겪을 수 있는 고난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라고 하시는 특별한 명령을 주신 경우는 조금은 예외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들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명령이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난의 성격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연단하시는 시련이었다는 점에서 다른 하나님의 자녀들의 고난과 다르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3.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은 피할 수 없는 특권이다.
오늘 본문은 고난의 적극적 차원을 말씀합니다. 29절을 보지요.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두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이고 둘째는 고난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선물이자 특권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믿음이 특권으로 주어졌다는 말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난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진 선물이고 특권이라는 생각은 낯설지 않습니까? 이 구절의 뉘앙스를 좀 더 살려서 이해할 수 있도록 제가 다른 성경번역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공동번역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을 특권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해서 고난까지 당하는 특권,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표준새번역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해서 고난도 받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여러분이 받는 특권입니다.”

A. 믿음과 고난은 패키지다(딤후 1:8; 3:12).
고난이 믿음과 함께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특권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이 믿음을 취하고 고난은 버릴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믿음은 필수고 고난은 선택이다라는 생각을 성경은 긍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고난은 제가 앞에서 말한 소극적 고난을 말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믿음과 고난이라는 특권이 주어진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서’입니다. 믿음의 대상은 그리스도시고, 고난을 받는 목적과 이유도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고난은 ‘그를 위한’ 고난입니다. 어쩔 수 없이 당하는 고난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실, 여러분이 피하려고 한다면 어느 정도 피해갈 수도 있는 고난입니다. 이 점에서 이 고난을 적극적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적극적으로 이 고난을 받으라고 신자들에게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을 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같은 서신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이 구절은 이 고난을 피하지 않으려면 경건하게 살라고 말합니다. 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취한다는 말은 무엇인가 하면, 믿음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믿음을 포기하면 고난도 받지 않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믿음을 붙잡으면 고난도 피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고난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패키지 선물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은 취하고 고난은 버릴 수 없습니다.

B. 성경의 증거들(롬 8:17)
믿음과 고난이 패키지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진 선물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성경에 나오는 사도들의 권면들과 그들의 삶, 그리고 초대 교회 성도들의 삶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사도 야고보의 순교로 시작해서 사도 요한의 유배에 이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를 만나 그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후에 고난도 함께 받은 삶이었습니다. 여기에는 한 사람의 예외도 없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도 그랬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박해가 일어나자 믿음을 지키기를 원했던 사람들은 자기들의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밖에 로마제국 하의 그리스도인들은 적어도 처음 300년 동안에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잃거나, 재산을 빼앗기거나, 노예로 팔려가야 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믿음을 지킨 사람들일 뿐 아니라, 고난도 함께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 사도 자신이 그것을 자신의 삶을 통해서 웅변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30절입니다.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빌립보 성도들은 사도 바울의 삶에서 고난이 무엇인지를 이미 잘 보았고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대로 그들이 사도에게서 보고 들었던 그 싸움은 또한 빌립보 교인들 자신의 싸움이기도 했습니다. 고난은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결코 낯선 것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적어도 신약 성경이 쓰여지던 시대의 상황이었습니다. 믿음과 고난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불가분의 특권이라는 것은 사도들에게나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는 하나의 중요한 전제였고 원리였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그때는 지금과 상황이 달랐기 때문에 성경을 읽을 때 그런 문화적, 시대적 거리를 해석해서 읽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의 본성은 결코 변하지 않으며, 사람의 영적 상태도 마찬가지이고,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복음을 필요로 하는 것도 결코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C. 세상은 그리스도를 미워한다(요 15:18~19; 엡 2:2~3; 약 4:4).
왜 믿음과 고난이라는 패키지가 박해를 받던 초대 교회나 역사 속에서 핍박을 받던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의 상황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지를 설명드리겠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보십시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8~19).” 세상은 주님을 싫어하고 하나님을 싫어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모든 자들을 또한 싫어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에베소서 2장 2~3절이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의 모습이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은 세상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본성적으로 복음의 진리를 대적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미워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역사를 보면 때로는 그런 반기독교적인 태도가 정권적 차원에서 노골적으로 표현된 시대가 있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북한과 같은 나라는 그런 상황 가운데 처해 있는 가장 대표적인 나라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은 사회 문화적 차원에서 노골적으로 기독교를 핍박하는 상황 가운데 있다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속지 마십시오. 세상이 기독교에 대해서 친절해졌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역사상 세상은 한 번도 그리스도를 사랑하거나 좋아했던 적이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야고보서는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 4:4).” 그리스도인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과 복음에 대하여 적대적인 세상을 사는 것이 사실은 고난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취하고 고난을 버릴 수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고난을 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지 않습니까?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함께 피하거나 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4.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의 실재(빌 1:27~28)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30절에서 싸움이라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이것은 이 고난의 성격이 훨씬 더 적극적임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내가 나가서 싸우는 것입니다. 사실 그 싸움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를 27~28절이 보여줍니다. 먼저 27절 상반절을 보지요.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사도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받은 고난, 그 싸움은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싸움이었습니다. 개역개정성경의 ‘생활하라’는 단어의 난외주에 보면 ‘시민 노릇’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단어가 본래 ‘시민이 되다, 시민으로 행동하다, 시민 노릇을 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여기서 의도하는 것은 너희는 하늘 나라,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니까 그 시민답게 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하나님에게 적대적인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면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은 고난을 자초하는 일이 될 것이고,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즉 영예로운 고난이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믿음과 함께 주신 특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울 사도가 함축하고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내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행함이 있고, 둘째는 외부 즉 세상을 향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것입니다.

A.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라(빌 1:27b; 딤후 2:2~3).
내적인 싸움이 있습니다. “너희가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이란 말이 그것입니다. ‘서서’라는 말을 ‘인내하고 견디는 것’, 어떤 압력이나 저항이나 반대나 방해에도 불구하고 좌우되지 않고 선다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 자체가 이미 어떤 반대의 힘을 상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혼자서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이 한 마음으로 서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협력하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함께 싸우다’ 혹은 ‘함께 투쟁하다’라는 뜻입니다. 단순한 협력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상황을 상정하는 말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싸우는데, 나는 한가하게 놀고 있을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함께 한 뜻으로 싸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어떤 사역이나 어떤 프로그램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함께 싸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복음을 위해서 싸워야 하는 내적인 싸움입니다. 로이드존스는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기독교 신앙은 학습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공부하면 신앙이 만들어진다는 말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중생하게 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열심을 가지고 믿어야 할 실체인 교리를 배워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내용인 교리를 두루뭉실하게 아는 것으로 결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 참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실상 그리스도를 믿는 것 조차도 확실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싸워야 하는데 이 싸운다는 개념은 뭔가를 희생한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디모데후서에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을 군인에 비유해서 설명했습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2~3).” 우리가 오늘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대로,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명령을 어떻게 순종할 수 있습니까? 먼저 우리의 우선순위를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병사로서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서 싸우기 위해서 내가 내려놓거나 포기해야 하는 것, 희생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일에, 신앙을 배우는 일에 더욱 여러분 자신을 드리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행하는 첫 번째 내용입니다.

B. 세상을 두려워 말라(빌 1:28; 막 8:38; ).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은 내적인 것이 아니라 외적인 것입니다. 세상 곧 대적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28a).” 초대 교회 당시, 복음을 전하고 믿음을 지키고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수많은 물리적 반대와 적대적 행위를 감수해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실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위협은 물론이고, 사랑하는 가족들이 노예로 팔려가는 일까지도 감수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대적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그렇게 반대하고 적대하는 그들의 행위 자체가 곧 그들이 멸망하게 될 증거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런 고난을 감수하면서 믿음으로 지키는 너희에게는 이 고난이 곧 너희의 구원의 증거, 너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초대 교회 성도들은 고난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의 증거로,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는 증거로 여겼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약 성경의 말씀들이 적지 않습니다. 저는 오늘날의 상황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사회 문화적 압력이 적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더 교묘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것 같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너는 그리스도인이냐”고 대답을 강요하며 묻지 않습니다. 도리어 “너의 신앙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고 하기 때문에 교묘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침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하지 말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이 세상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한 이 적극적 고난을 피하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받고 이 싸움을 싸우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을 아는 사람들이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압니까? 단순히 교회를 다니는 사람인가 보다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진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드러내십니까? 여러분이 한국 사람인 것만큼이나,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압니까?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질문입니다. 이것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모든 방식으로 알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알려져야 할 중요한 이유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중요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 8:38).” 우리는 진리 자체를 싫어하고 공격하는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도 그리스도인으로 드러나야만 합니다. 그들은 진리를 공격해도 진리가 필요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위해서 굳게 서서 싸워야 할 이유가 너무나 분명하지 않습니까? 동성애 이슈만 생각해봐도 그렇습니다. 실제로 동성애자가 아닐지라도, 지금 미국의 점점 더 많은 대중들이 동성애 문제를 정상적인 것으로 보는 데로 기울어지고 있습니다. 동성애를 정상적인 것으로 보는 사람들은 매우 용감합니다. 그들은 자유롭게 말합니다. 그러나 동성애가 성경이 말하는 죄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말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두렵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일터에서 논쟁을 벌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가 필요하고 그들을 근본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동성애가 하나님 앞에서 죄라고 나는 분명하게 믿는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교회 밖에서도 비진리로 진리를 억누르려는 사람들은 참 용감합니다. 하지만, 복음의 진리 편에 선 자들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고 진리를 위한 싸움을 싸워야 할 자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주께서는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5.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을 때(마 5:11~12)
여러분이 대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말하기 시작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다 알 수는 없지만, 우리가 그 결과를 경험하게 될 것은 분명합니다. 고난이 올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 안에서 본 싸움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거기서 진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될 뿐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복된 위로가 넘치는 것을 또한 경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그것이 고린도후서 1장의 주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이런 자리에까지 가는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주시고 인정해주시는 것을 경험하고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실로 나를 홀로 두지 않으시고 함께 하신다는 확신,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귀히 여겨주신다는 기쁨을 가슴 깊이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죽었는지 잠자는지 모르던 신앙이 번쩍 잠을 깨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더욱 복음의 진리를 확실하게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싸우지 않는 사람은 훈련과 연습의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정말 위험한 삶은 안팎으로 아무 도전도 없이 그냥 먹고 살기 위해서 사는 것처럼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주님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을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여러분을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한다면,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하늘에서 여러분의 상이 크다는 사실을 아십시오(마 5:11~12).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사십시오. 한 마음으로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굳게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해 함께 싸우십시오. 대적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십시오. 이것이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