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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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에서 확신으로 38 - 고난과 영광 (4) - 고난 속에서 견고해지는 믿음

창세기 22:1-1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4-03-23

말씀내용
<고난 속에서 견고해지는 믿음> 창 22:1~12



1. 믿음은 시험을 필요로 한다(1).
본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유명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을 해석하는 기본 열쇠는 1절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라는 구절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는 의도였다는 사실에서 해석해야만 이야기 전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로 아들을 죽이게 하시는 이야기가 아니라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일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이런 부분을 놓치면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많습니다. 물론 우리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실 때 우리는 때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 처해지기도 합니다. 저는 그것을 지난 주일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적하시는” 상황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바로 그런 상황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를 본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왜 당신의 자녀들을 시험하시는 것일까요? 마이클 호튼은 “시험이 없는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으며 발버둥치게 만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옳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시험하시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우리에게는 고난과 고통으로 주어지게 되는데, 이런 고통의 시간에 우리의 믿음은 시험대에 오르게 됩니다. 우리가 그 동안 말해왔고 고백해왔던 모든 신앙의 내용들과 신학적 지식들이 시험대에 올라갑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에 바르게 반응하고 참된 신앙의 확신에 이르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은 이런 시험을 통과함으로써 그 참됨이 우리 자신에게 입증되는 것입니다.

2. 시험의 본질: 믿음을 죽이는 시험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제일 먼저 상고하려고 하는 주제는 시험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셨다는 말입니다. 이 시험의 핵심은 아들을 바치라는 것의 문제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시험, 이 연단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완전히 멸절시켜 버리시는 것 그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제거시키려는 것처럼 보인다는데 있습니다. 지금 시험대에 오른 아브라함의 믿음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은 이삭이 하나님의 약속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창 21:12).” 이삭을 통해서 세상의 구주인 그리스도가 오시게 될 것에 대한 믿음이 아브라함에게는 있었고 이 점에서 이삭에게 온 인류의 구원이 달려 있다는 것을 그는 알았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삭이 죽는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이삭을 번제로 바쳐 죽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와 그 약속에 근거했을 때 단지 이삭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이라는 근거에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직면하고 있는 이런 극한 상황은 아브라함 자신이 75세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가나안 땅에 왔고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약속들을 붙잡고 살아온 지난 40여 년의 삶 전부를 시험대에 올리는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 그 신뢰 전체가 지금 시험을 받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지금까지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험은 그 모든 은혜로운 경험을 다 없애버릴 것만 같이 아브라함에게 다가온 시험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정말 진실한 것인가?” 이 시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죽이라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께 대한 그의 믿음을 죽이는 시험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중적인 태도를 보게 된다고 칼빈은 말합니다. 분명히 이삭을 약속의 아들로 주셨다고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창 21:12). 그런데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령을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창 22:2). 하나님께서는 지금 하나님 자신의 약속과 충돌되는 명령을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이중적 태도를 본다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단지 하나님의 약속의 진실성만을 의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정말 어떤 분이신가?”하는 하나님 자신의 진실성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명령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서는 아들인 이삭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있다는 하나님의 약속과 아들 이삭을 죽여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3. 믿음의 본질: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음
여기서 우리는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지난 주일에 이미 저는 믿음이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약속과 관계가 있다고 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반응입니다. 이것이 막연한 기대와 참된 믿음을 구분하여 주는 중요한 기준입니다. 자, 이 상황, 아브라함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명령이 싸우는 이 상황에서 아브라함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이미 아브라함은 자기의 한계상황을 경험했었습니다. 도무지 자식을 낳을 수 있는 생물학적 조건이 아내에게서나 자신에게서 사라져버린 상황을 넘어서 있을 때,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믿음으로 아들 이삭을 얻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것은 지금 아브라함이 처한 상황에 비한다면 가벼운 시험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때에 아브라함은 자신의 현실적 상황과 하나님의 약속이 충돌하는 상황을 겪고 있었던 것이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명령이 하나님의 약속과 충돌되는 상황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붙잡을 수 있는 약속은 아들 이삭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약속의 아들이고, 이삭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세상의 구주를 주실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모든 믿음은 바로 이 약속에 근거해야만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다른 어떤 막연한 기대 정도를 가지고 거기에 자기의 아들의 죽음을 걸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무나 확실하게 주신 약속을 붙잡음으로써만 아브라함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믿음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지, 이 확실한 약속을 접어버리고서는 자신의 믿음의 근거를 완전히 상실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 행동으로도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약속이 믿음의 근거라는 말은 약속이 무너지면 모든 믿음은 무너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즉, 이 첫 번째 약속을 확고하게 붙잡는 믿음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그 다음 믿음의 행동으로 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서 기자가 말씀한대로, 하나님께서 자기의 아들을 사망에서 다시 살리시는 권세가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9).” 이와 같이 어떤 고난의 상황,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시험하시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해야 하는 것은 믿음의 순종인데, 그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확고하게 붙잡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4. 약속의 본질: 하나님의 사랑
그런데 우리의 질문은 이런 극한 상황 속에서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을 수 있었는가, 이 약속을 붙잡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을까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약속이라는 것이 두 종류로 나누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이런 약속이 있습니다.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의 약속입니다. 언제까지 빌린 돈을 어떤 방식으로 갚겠다고 하는 약속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는 정치인의 약속도 있습니다. 물론 정치인의 약속이라는 것은 다 믿어주기에는 어려움이 있지만, 정치인들도 약속을 합니다. 또는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주는 약속도 있습니다. 회사의 최고경영자나 이사회가 주는 약속일 수 있습니다. 이런 약속들이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알았던 하나님의 약속은 이런 약속들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것이 사람이 하는 약속이냐,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냐 하는 차이만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또 한 종류의 약속을 생각해보지요. 아버지가 아들과 딸에게 주는 약속이 있습니다. “얘야 오늘 저녁에는 너희가 좋아하는 닭 튀김을 함께 먹을까? 아빠가 저녁에 사 올께.” 또는 “얘야, 여기 그릇 몇 개 설거지 좀 해주련? 엄마가 네게 주고 싶은 것이 있어서 말이지.” 이런 아주 사소한 약속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혹은 “얘들아, 너희가 여기에 있는 책들을 다 읽게 되면 아빠가 너희가 기대할 만한 선물을 주려고 한단다.” 이 약속들은 부모가 자녀들에게 주는 약속입니다. 기본적으로 이 약속들은 자녀들이 하는 어떤 행위에 대한 보상처럼 보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합당한 보상은 아닙니다. 자녀가 하는 일에 비하면 그보다 훨씬 큰 것을 부모가 약속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단지 부모는 자녀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뭔가를 주고 싶은데 그것을 주기 전에 어떤 작은 순종을 통해서 ‘사랑을’ 테스트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녀들은 “아, 나의 부모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뭔가를 주기를 기뻐하시는구나”하고 부모님의 사랑이 그 약속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어떻게 여겼는가를 보여주는 아주 적절한 예라고 할 수는 없지만, 기본적인 개념은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전자의 경우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그를 사랑하시는 부모님의 약속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자기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느낀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있어서 부모님의 약속이란 그 약속의 내용뿐 아니라 약속 안에 담겨 있는 사랑을 전달해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랑을 그 약속 안에서 발견하고 느끼게 되는 것은 자녀들로 하여금 그 약속을 따라서 순종할 수 있는 힘을 더해 줄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이 사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아온 아브라함의 지난 삶 속에서 아브라함이 경험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욱 순종할 힘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 극한 상황 속에서 붙잡을 수 있었던 것은 자기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를 그 약속 안에서 알았고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주시는 모든 약속의 본질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하나님의 약속 속에 감추어져 있고 배어져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을 붙잡았다는 말은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붙잡았다는 말입니다. 그 사랑은 말하자면, 로마서 8장 31~39절에서 바울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사랑입니다. 내가 지금 처해 있는 상황뿐 아니라 그 어떤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를 끊어낼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머리로 동의된 명제가 아닙니다. 그는 약속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믿음의 본질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것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형식적으로 “하나님, 이렇게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믿음은 그 약속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하나님의 사랑 그 자체를 증거하는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내가 너를 사랑한단다”하는 말을 하실 수 있고 또 하시지만, 많은 경우에 당신의 약속을 통해서 그 사랑을 표현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에 가득한 하나님의 약속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 힘을 얻고 믿음이 더욱 강화되는 것입니다. 단지 그 약속 자체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 사랑 때문에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모든 성품을 드러내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고 증명합니다.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이것을 보지 못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을 힘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채권자가 채무에게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약속을 주장하며 나아간다는 말은 곧 하나님의 사랑에 자기 자신을 붙들어 매는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 중요한 통찰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런 시련 속에서, 즉 하나님의 명령이 하나님의 약속을 죽이는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기로 작정했다는 것은,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자기 자신을 붙들어 매는 일을 한 것인데, 이것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설명을 요구하고 따지는 방향으로 가기로 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을 자기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함에 근거해서 순종하기로 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좀 더 상세하게 다음 주에 계속해서 상고할 것입니다. 약속을 믿는 믿음은 언제나 ‘무조건적인 순종’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약속을 어떻게 이루시는가 하는 것은 이해를 요구하는 쪽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에 맡기기로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가는 일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설명하시지는 않으십니다. 다만,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통해서 우리가 그 사랑을 알기를 원하시고 그 사랑에 자신을 붙들어매는 믿음의 행위를 통해서 순종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치 않았으며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자기 자신의 생각으로 판단하거나 측량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이 극한 상황 속에서 취한 믿음의 태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 배어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때,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느낀 것, 이것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순종할 수 있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5. 싸움의 본질
A.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하나님과 싸우신다.
이런 시련과 연단은 사실 아브라함만의 것은 아닙니다. 성경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기록해놓은 것은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신자의 일평생은 계속해서 이런 싸움 속에 던져지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의 믿음은 시험을 통과함으로써 견고해지기 때문입니다.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시험들을 피해 빙빙 돌아서 가지 않습니다. 시험들을 통과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우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바로 나태함에 빠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대적하시기로 하시고,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심으로써 우리를 나태함으로부터 깨우시고 건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요? 이 모든 시험을 통해 우리는 우리를 대적하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한편으로는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고 훈련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대적하시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련에서 우리를 적대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약한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야곱의 씨름에서 우리가 본 것처럼 말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승리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적하시는 하나님과 싸워 이기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겪는 모든 고난 속에는 하나님의 시험이라는 전제가 놓여져 있습니다. 욥에게도 그랬고, 야곱이나 요셉, 아브라함에게도 그랬고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그렇습니다. 이 사실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얼마나 큰 힘을 주는지 모릅니다. 이 고난은 하나님이 나를 대적하시는 것이고, 나를 대적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결국 내 안에서 나를 위해서 싸우시는 하나님에게 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들을 상대로 싸우시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발견할 때 그 고난은 힘을 잃게 됩니다. 이것은 실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승리를 거두었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승리했고 이 은혜 때문에 우리가 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B. 하나님께서 주신 힘과 무기로만 싸운다.
하지만 여전히 이 싸움은 우리 자신의 싸움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만히 앉아서 구경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내적으로 심각한 싸움 속에 던져졌던 것입니다. 그가 아들을 데리고 삼 일 동안을 걸어서 번제를 드릴 곳에 도착했습니다. 그 삼 일 동안 아브라함이 마음 속에서 감당했어야 했던 그 싸움을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의 싸움이자 또한 우리의 싸움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위해서 싸워주시는 싸움임에도 불구하고 이 싸움의 고통은 조금도 경감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싸움을 무엇으로 싸울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힘, 하나님께서 주신 무기로 싸우는 싸움입니다. 존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정복당할 때는 우리 손에 말씀의 검이 떨어질 때입니다.” <천로역정>에서 담대가 그렇게 오래도록 싸우고도 피곤해 하지 않는가 묻자 진리의 용사는 대답합니다. “나는 칼이 내 손에 붙을 정도로 싸웠지요(삼하 23:10) 칼은 내 팔에서 돋아난 몸의 일부처럼 느껴지고 피가 손가락을 통해 거기까지 흐르는 것 같아 피곤함을 모르고 용기있게 싸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손에 붙어 몸의 일부처럼 느껴지도록 붙드십시오. 그리고 내 안에서 나를 위해서 싸우시는 그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말씀을 통해서 승리를 주시는지를 경험하십시오. 그 모든 약속의 말씀 속에서 나를 사랑한다고 세미한 소리로 말씀하시는 그 사랑을 확인하십시오. 그리고 그 약속을 붙잡으십시오. 내 몸의 일부가 되도록 말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로 이기게 하시고 우리의 믿음을 인정해주시는 복된 은혜와 영광을 이 고난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험과 연단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은 견고해집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십시다. 그 시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해주시기를 구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