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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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에서 확신으로 37 - 고난과 영광 (3) - 하나님이 나를 대적하실 때

욥기 13:1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4-03-16

말씀내용
<하나님께서 나를 대적하실 때> 욥 13:15



1. 하나님께서 나를 대적하신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대적하신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욥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죽이실지라도”라는 표현을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이런 말을 할 때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왜 이렇게 하시는 것일까?” 바로 이 질문의 근원에는 욥과 같은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대적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처럼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길을 막으신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냥 포기해야 합니까? 그냥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아야 하는 것입니까? 욥이 여기서 이런 표현을 하고 있기도 하지만, 사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겪은 고난 특별히 저는 연단 혹은 시련이라는 표현으로 그것을 좁혀서 사용하기를 원하는데, 이런 시련이나 연단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시련이나 연단을 마귀가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파놓은 함정인 유혹과는 구분을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마귀의 유혹에 우리가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런 마귀의 시험은 상존하는 위험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어 기도할 것을 명하셨습니다(마 26:41). 그러나 오늘 우리가 상고하려고 하는 말씀은 마귀가 주는 유혹이라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시험, 즉 시련 혹은 연단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가르치시고, 연단하십니다. 그래서 일평생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온전해지고, 깊어지고, 전적인 신뢰가 되게 만들어가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길러가시는 중요한 목표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하나님의 훈육 목표를 분명하게 알고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고난이나 어려움들은 사실 모두가 이 목표를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손길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겪게 되는 고난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수 있겠습니까? 욥은 자신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생각은 “내가 무엇을 잘못 했기 때문에 이런 고난이 나에게 왔는가?”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욥은 도무지 이 고난을 초래한 원인을 자기 안에서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욥의 입술에서는 우리가 읽은 것과 같은 이런 고백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죽이실지라도”라고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대적하신다고 느낀 것입니다. 이외에는 어떤 것으로도 자기의 고난을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생각지도 못했던 깊은 고난을 우리의 인생에서 만나게 될 때 이렇게 생각하거나 말하는 경향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이렇게 하시는가 하고 말입니다. 이때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가장 힘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시고 선하신 나의 아버지가 되시는데, 왜 내가 이런 막다른 길에 봉착하도록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겪지 않는 고난을 겪는가 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믿음은 크게 위협을 받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나를 대적하신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께 대한 나의 믿음을 흔드시고 마치 죽이시려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를 대적하는 것이 마귀라면 우리는 싸울 힘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적하신다면, 우리의 믿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이런 상황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단지 욥이 그렇게 느꼈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2. 야곱의 씨름(창 32:24~32; 호 12:3)
야곱은 20여 년의 밧단아람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해서 피할 수 없는 만남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쌍둥이 형제이지만, 자기를 죽이려고까지 했던 형 에서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땅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분명한 인도를 받고 순종하여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형이 자기를 죽일 것인지 용서해줄 것인지 모릅니다. 형 에서가 400명의 부하들을 데리고 야곱을 보려고 강 건너에 와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를 기다리는 상황은 마치 하나님께서 자기를 대적하시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순종하여 왔지만, 자기가 생각했던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다. 모든 가족들과 소유로 먼저 얍복 나루를 건너게 한 후, 야곱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혼자 남습니다. 이때 우리가 잘 아는 야곱의 씨름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더니(창 32:24).” 그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야곱을 강하게 붙잡고 넘어뜨리려고 했을 때 야곱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분명히 야곱은 에서가 보낸 암살자라고 생각했을 듯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 야곱은 이 싸움을 걸어오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고 야곱은 날이 밝은 후에 말합니다(창 32:30). 또 야곱은 이 씨름에서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는 말을 듣습니다(창 32:28). 이 씨름을 본질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야곱이 하나님께 싸움을 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오셔서 싸움을 거신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야곱은...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호 12:3)”라고 말씀했습니다. 즉 이 씨름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대적하여 겨루신 씨름이었습니다. 게다가 이 씨름은 그저 3분씩 3회전을 하고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씨름이 끝났을 때는 ‘해가 돋았다’고 했습니다(창 32:31). 야곱은 밤새도록 하나님과 씨름을 한 것입니다.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과 겨룰 수 있으며 심지어,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판정을 얻어낼 수 있습니까? 이 자체가 아이러니 아닙니까?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우리를 대적하시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다 사용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환도뼈를 쳤습니다. 환도뼈가 위골된 후에 어떻게 씨름을 정상적으로 할 수 있겠습니까? 야곱은 절망적으로 그를 붙잡았습니다. 야곱은 자기 힘에 거는 모든 기대를 다 포기하게 되는 순간에까지 왔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와 싸우시는 하나님을 붙잡는 것 뿐이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진상이 무엇입니까? 야곱이 자기를 의지하여 살아오는 모든 힘을 꺾어버리신 것입니다. 야곱은 이제 절름발이가 되었습니다. 자기의 걸음 조차도 스스로 제대로 걷기 어려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자기를 의지할 수 있는, 그리고 환경 속에서 붙잡을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깨어지기까지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붙잡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이것을 하신 것입니다.

3. 막연한 기대와 믿음의 차이
종종 우리는 막연한 기대와 믿음을 혼동하고 살아갑니다. 특별히 고난이 닥칠 때 이런 현상은 매우 자연스럽게 그리고 두드러지게 드러납니다. 고난의 끝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이 때 우리는 막연한 기대를 겁니다. “하나님께서 내년에는 뭔가 좀 새로운 일을 해주시겠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만큼 나를 단련하셨으니 이제는 좀 풀리겠지?”라고 생각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나 제가 던지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믿음인가? 이것이 과연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입니까? 이런 막연한 기대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품을 수 있는 기대가 아닙니까? 그리고 또 하나, 더욱 치명적인 것은 이런 기대가 깨어지는 경험을 우리는 솔직하게 하지 않습니까? 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대적하신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이렇게 다루시는가?”라고 말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잡을 수 있는 지푸라기라도 있으면 그것을 잡는 법입니다. 이것이 막연한 기대로 이어집니다. 그야말로 막연한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년에는 이 상황을 네가 원하는 대로 풀어준다고 약속하신 적이 없는데 우리는 그런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저는 아브라함이 하갈을 취해서 아들을 낳고자 했을 때 가졌던 생각이 정확히 이 막연한 기대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기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할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방법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를 않기 때문에,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한 고집이 우리의 믿음과 대척점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붙잡는 모든 지푸라기이며, 막연한 기대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아닐 뿐 아니라, 믿음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막연한 기대가 깨어지는 경험을 하게 될 때에 그 막연한 기대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 남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쓴 뿌리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아니라 쓴 뿌리가 남게 됩니다. 이런 경험을 몇 번씩 해보시지 않았습니까? 저는 해봤습니다. 목회를 하는 동안에도 여러 번 해봤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자기의 방법대로 처리하려는 시도를 한 후에 무려 13년이나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결국 이런 막연한 기대가 선하신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이런 쓴 뿌리를 제거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없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십니다. 제가 야곱의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넘어가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야곱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환도뼈를 치신 것은 야곱이 의지하는 모든 것을 꺾어버리시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는 달리기는커녕, 이제 지팡이가 없으면 혼자서 걸을 수도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의지하는, 그가 잡을 수 있는 지푸라기를 이제 마지막으로 뽑아내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잔인한 자비라고 일컬어집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로 가지 못하는 것이 우리인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외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를 대적하시러 오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우리가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적하려고 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정말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연단 혹은 시련이라고 불리는 고난인 것입니다.

4. 믿음의 본질은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과연 믿음, 선하신 하나님께 대한 참된 신뢰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막연한 기대가 믿음이 아니라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무엇인가를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A.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이다.
첫 번째로 우리가 믿음의 본질에 대해서 가장 기본적으로 생각해야만 하는 것은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확실한 근거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약속은 깊이 연결된 개념입니다. 우리가 선하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힘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위로와 힘과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막연한 기대가 믿음일 수 없는 것은 그것은 내가 바라고 소망하는 어떤 것일지는 모르지만, 결코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과는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점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믿음은 결코 실패하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의 종교적으로 채색된 막연한 기대는 무너질지라도 말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 즉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은 결코 하나님의 자녀들을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실망스러운 대답으로 들리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참으로 믿음의 사람인가를 돌아보아야만 한다고 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때로는 우리가 바라는 것처럼 구체적이고 시기적으로도 명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바라는 것처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특별히 연단과 시련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위로요, 힘이 되는 것입니다. 약속은 믿음의 최종 근거일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믿음을 일으켜주시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주어지는 모든 약속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이런 하나님의 약속을 경험하고 살아가시는지 묻고 싶습니다. 이 궁극적인 승리와 영광에 대한 소망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모든 환난과 고통을 능히 견디게 하는 믿음이 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수 있게 하는 힘이 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과 별개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약속과 별개로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들을 얻어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자리에 서서 신앙 생활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의 신앙 생활의 이력에 남게 되는 것은 신앙의 경험이 아니라, 쓴 뿌리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B. 불가능한 현실을 정확히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는 것이다.
두 번째로 믿음의 본질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참된 믿음은 현실을 정확하게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모든 막연한 기대가 무너졌을 때, 그가 더 이상 잡을 수 있는 지푸라기가 하나도 남지 않았을 때, 결국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리로 가게 됩니다. 이것은 얼마나 놀랍고 자비로운 하나님의 역사인지 모릅니다. 로마서 4장에서 바울 사도는 구원얻는 믿음의 본질을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로마서 4장 18~22절을 봅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가 99세가 되었을 때, 그러니까 그가 하갈을 취하여 아들 이스마엘을 낳은지 13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아들을 약속해주셨습니다. 이미 아브라함은 지칠 대로 지쳤고, 모든 희망이 다 사라진 뒤였습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주셨던 때는 24년 전이었습니다. 그나마 희망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이제 아브라함의 나이는 99세이고 사라의 나이는 89세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태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고, 또 자신이 다른 첩을 취하여 아들을 낳을 수 있는 능력도 이미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19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기에는 불가능한 현실을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지푸라기의 수가 아직도 얼마나 많이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하신 하나님께 대한 신뢰, 그분의 약속에 대한 참된 믿음은 전보다 더 악화된 상황 속에서, 전에는 붙잡을 지푸라기라도 몇 개가 있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다 사라진 현실에서 그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사실상 그 전에도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5:6). 하지만, 여전히 내 막연한 기대를 품을 수 있는 평범한 상황 속에서는 이 참된 믿음과 막연한 기대가 뒤섞여있기가 쉬워서 참된 믿음이 참되고 순전한 믿음으로 드러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하지만, 고통과 고난이라는 환경 속에서, 내가 붙잡을 수 있는 모든 희망이 다 사라져버린 상황에서, 그리고 그 상황을 현실적으로 분명히 인지하고 있을 때, 믿음은 그 존재를 온전하게 드러냅니다. 이것이 19절이 보여주는 믿음의 본질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는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라고 말합니다(롬 4:20~21).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반응입니다. ‘약속하신 그것을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모든 상황을 거슬리는 것입니다. 초현실주의이거나 비현실주의 혹은 현실도피주의라서가 아닙니다. 철저한 현실을 알고, 알면서도, 현실에 나와있는 지푸라기들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C. 우리에게 맡겨진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싸우시는 믿음이다.
마지막으로 믿음의 본질에 대해서 하나 더 언급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대적하신다는 상황에서 시작을 했습니다. 정말 그런 상황이 우리 삶에는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욥만의 이야기는 결코 아닙니다. 야곱도 자기를 대적하시는 하나님을 만나 싸워야 했고, 아브라함도 자기를 대적하시는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이것은 다음 주일에 좀 더 깊이 상고하겠지만, 아브라함 자신에게 약속하신 것을 주시지 않고 25년을 기다리게 하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대적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단지 우리에게 “자, 이제 네 믿음으로 견뎌 내어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한편으로는 우리를 대적하시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를 위해서 싸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대적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싸우도록 힘을 주시고, 붙잡아 주시고, 결국에는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위로요, 힘입니다. 여기에 성도의 믿음을 유발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도를 믿어주시는 믿음이 왜 믿음의 본질과 관계가 있는가를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이 믿음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우리의 믿음은 우리 편에서 노력하고 믿는 믿음으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 믿음은 본래 하나님께서 중생하게 하실 때 주신 믿음이며, 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역시 하나님의 성령께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들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역사해주시는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본질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내 믿음이 네 믿음보다 낫다고 교만해질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오직 은혜로 밖에는 설명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우리가 모든 불가능한 현실을 정확하게 알고서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때,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승리했고 이 은혜 때문에 우리가 포기하지 않았고, 패배하지 않고 견딜 수 있었고 승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들의 모든 고통과 고난 속에서 결국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욥과 같이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니”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그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혜를 찬송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