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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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에서 확신으로 36 - 고난과 영광 (2) - 복음이 고난을 영광스럽게 한다

로마서 8:31-39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4-03-09

말씀내용
<복음이 고난을 영광스럽게 한다> 롬 8:31~39



조니 에릭슨 타다는 10대 소녀 시절에 다이빙을 하다가 사고로 사지가 마비된 채 45년 이상을 살아온 여인입니다. 남편과 함께 고난에 대한 많은 성경적인 책들을 저술했고, 유수한 복음주의 집회에서 인기 강연자로 활동하고 있는 그녀는 이런 말을 합니다. “말씀이 고난에 관해 어떻게 말하는지에 대한 확고한 시각을 갖고 있지 못하면 고통은 당신의 믿음을 무너뜨린다.” 바로 이런 이유로 저는 고난과 영광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여러분에게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고난은 우리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인데, 문제는 고난이 유익하다는 경험이 적게 일어나는 이유는 성경이 가르치는 고난에 대한 시각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 현실: 고난받는 사람이 정직해지기 어려울 때
그래서 교회 안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제가 오래 전에 읽었던 어느 책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노인들을 위한 모든 편의시설을 갖추어 놓은 아주 호화로운 양로원이 있는데 이 양로원에 살 수 있는 조건은 건강한 노인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노인 부부가 방에서 나와 산책을 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다가 방으로 돌아온 후에는 “아이고 허리야”, “아이고 다리야”하고 고통을 호소하면서 눕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교회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하고 저자는 꼬집어 지적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멀쩡하고 괜찮아 보입니다. 아무 문제도 없는 듯 보입니다. 그런데 실상 그들은 남모르는 고난과 고통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물론 우리 자신의 개인적이고 진정한 고통의 문제를 꺼내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도 있지만, 만일 우리가 어떤 문제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신앙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여지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신앙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가 있습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은 언제나 미소를 띠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심지어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습니까? 저는 언제나 미소를 띠는 사람을 보면 대단히 부담스러운데 말입니다. 특히 나 자신이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그런 사람을 보는 것은 나를 더 힘들게 하기도 합니다. 아니면, 고난은 신앙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보는 견해도 한 몫을 합니다. 이것은 욥의 친구들이 욥의 고난을 더욱 고통스럽게 했던 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런 가르침과 분위기 속에 많은 신자들이 있게 된다면 그런 교회에서 자신의 고난의 문제를 꺼내놓는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겪는 고난은 더욱 고통스러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조니 에릭슨 타다의 말대로, 성경적인 고난에 대한 관점을 가지지 못하면 그렇게 됩니다.

2.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다양한 고난들
사람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겪는 고난은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또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도 있습니다. 고난의 종류를 먼저 생각해보지요.

A. 일반적인 고난: 에덴 동산 밖의 삶
우리는 에덴 동산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실 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아담에게는 이마에 땀이 흘러야 할 것이라고 하셨고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하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와에게는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시고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삶이 고통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심지어 지상에서 가장 행복해야 할 부부관계 조차도 고통스러운 과정이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가 깨진 결과입니다. 그래서 산다는 것 자체는 고통스럽고 수고스러운 것이 되었습니다. 피할 수 없는 질병, 몸의 노쇠함 등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피해가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말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고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과 신앙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의 예는 조금 후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B. 내 잘못으로 초래된 고난(벧전 2:20a)
두 번째로 살펴볼 고난은 나의 잘못으로 초래된 고난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벧전 2:20a).” 이것은 나의 잘못으로 초래된 고난이기에 칭찬할 것은 없는 고난입니다. 여기서 신자들이 잘 구분해야 할 것은, 때로는 자기의 잘못으로 초래된 고난을 복음 때문에 받는 고난이라고 여기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받는 손가락질과 지탄은 상당 부분 목사들과 교회들의 잘못으로 초래된 것입니다. 이 고난은 칭찬받을 고난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알아야 할 것은 이 고난 조차도 하나님께서는 영광으로 바꾸신다는 엄청난 사실입니다.

C. 부당하게 당하는 고난(벧전 2:19)
세 번째로 부당하게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조금 전에 읽은 구절의 바로 앞 절입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벧전 2:19).” 이것은 아무런 이유 없이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세상으로 받게 되는 적대감으로 인한 고난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대로 세상은 주님을 미워하기 때문에 세상에 속하지 않고 주님에게 속한 제자들을 미워하는 것입니다(요 15:18~21). 이것은 어떤 일을 하건 하지 않건 그리스도인이라는 존재 자체로 인하여 미움을 받게 되는 고난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세상을 산다는 것 자체가 이미 고난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마음이 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부당하고 억울하다고 여기게 만드는 요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으면 이는 아름답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 고난을 잘 참는 것은 칭찬받을만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D. 복음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받는 고난(벧전 2:20b; 딤후 1:8)
그러나 여기서 더 나아가서 선을 행함으로 받는 고난이 있다고 사도 베드로는 말씀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20절 하반절입니다.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선을 행하였는데 도리어 고난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행할 수 있는 최고의 선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디모데후서에서 이렇게 표현됩니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심지어 교회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면 할수록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더 외로울 것이고, 더 고난을 겪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더 나아가서 이런 자들은 고난이 올 때 기뻐해야 할 이유가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벧전 3:14a).” 이것은 사실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 아닙니까?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0~12).” 하지만, 이 고난만큼은 어쩌면 여러분이 피할 수 있는 고난이라고 생각하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적당히 예수를 믿자는 생각 속에서 말이지요. 그러나 사실상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와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받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여기서 ‘이를 위하여’가 무엇을 가리킵니까? 바로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피할 수 있는 고난이 결코 아닙니다.

3. 그리스도인에게 모든 종류의 고난은 다 선이 되게 하신다(롬 8:28).
여기서 잠깐 한 가지 언급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고난이 우리 인생에 주어지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알아야만 하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 모든 고난, 그것이 비록 나의 잘못으로 인하여 초래된 고난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고난은 그리스도인에게 유익이 됩니다. 그것이 바울 사도가 로마서 8장 28절에서 말씀하는 논지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기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고 한 부분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구에게나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만 그렇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누구인지를 부연합니다. 그들은 ‘그(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은 자가 하나님께 나아올 수 없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모든 신자는 다 하나님이 그의 뜻대로 부르신 자입니다. 이들에게 고난은 어떤 종류의 고난이든지 다 유익이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4. 그리스도인의 고난에 대한 잘못된 관점들
우리는 이런 다양한 고난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살펴 보려고 하는 것은 고난에 대한 잘못된 접근들, 즉 고난과 관련된 신앙의 오해들입니다.

A. 율법주의적 접근: 죄에 대한 벌(욥의 친구들), 가계에 흐르는 저주
그 첫 번째는 율법주의적 접근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본성적 사고에 가장 부합하는 관점인데 고난을 죄에 대한 벌로 여기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등장하는 나면서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요 9:2).” 이것은 욥의 고난에 대한 세 친구들의 해석적 접근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인과율이라는 법칙 아래서 고난을 해석하려는 것입니다. 율법은 물론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고 말함으로써 인과율을 말합니다. 죄가 있으면 형벌이 따른다고 하는 것은 율법의 공의로운 원칙입니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습니다(히 9:22).”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모든 믿는 자들의 죄를 인한 죽으심이고 거기서 주님은 그 모든 죄의 형벌을 완전히 다 받으심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완전히 해결하셨다고 선언합니다(롬 3:25). 그리스도인이 받아야 할 형벌로서의 고난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얼마나 머리가 좋은지 고난에 대한 원인을 그 사람 자신에게서 찾지 못하게 될 때 설명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식을 고안해냈습니다. 그것이 한 때 베스트셀러가 되기까지 했던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산다』라는 책에서 주장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종종 언급한 적이 있듯이, 이것은 우리 주님의 구속사역의 완성을 불신하는 심각한 잘못이고, 또 수많은 성경구절들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결과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고 선언합니다. 남아있고 우리가 별도로 해결해야 할 저주 따위는 남아있지 않은 것입니다.

B. 영광의 신학(혹은 번영 신학)적 접근
두 번째로 언급하려는 그리스도인의 고난에 대한 잘못된 접근은 영광의 신학이라고 일컬어지는 관점입니다. 영광의 신학이라는 용어는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십자가의 신학이라는 용어와 함께 사용한 것인데, 이 관점에서 고난은 단지 더 나은 길로 가는 필요악에 지나지 않습니다. 영광의 신학은 각 개인이 열심히 노력해서 점점 더 하나님에게로 상승해가는 움직임을 신앙의 길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래서 고난, 십자가, 약함, 어리석음은 좋은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없고 영광, 강함, 승리를 선호하고 추구합니다. 이런 관점에서는 고난이나 약함의 현실을 결코 인정할 수 없고 또 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고난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부정하게 되거나, 혹은 이걸 통해서 뭔가를 배웠다는 식으로 고난을 축소시키게 됩니다. 이것은 일종의 나쁜 신학인데, 이런 나쁜 신학은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을 더욱 고통스럽게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번영 신학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들은 병에서 치유를 받음으로써, 가난에서 부함으로 옮겨감으로써, 아래서 위로 상승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굳게 믿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모든 질병과 고난까지도 다 감당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신자가 받을 질병이나 고난은 없다고 가르칩니다. 정말 그렇다면 그들은 죽음도 피해야 한다고 가르쳐야 할텐데 그렇게 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이런 나쁜 신학은 성경적 고난의 관점에서 우리를 점점 더 멀리 도망가게 할 뿐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합니다.

5. 고난에 대한 비성경적인 태도들
고난에 대한 이런 비성경적인 접근법들을 가지게 되면 고난 가운데 있는 형제들에게 이런 식으로 말을 하게 됩니다. 물론 비성경적인 조언들이고 태도들입니다.

A. 회개해라. 그러면 고난을 거둬가실 것이다.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고난을 거둬가실 것이라는 이것이야말로 욥의 세 친구들이 욥을 향해서 일관했던 태도였습니다. 고난을 죄의 결과로 이해하는 데서 나오는 전형적인 태도입니다. 성경은 죄에 대한 징계를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하지만, 이 태도는 종종 고난을 죄에 대한 일대일 대응의 형벌로 이해하게 하고, 그 외의 경우에 대해서는 신자를 매우 깊은 영적 고통으로 몰아넣게 될 위험이 너무나 큰 태도입니다.

B. 견뎌라. 고난을 극복하면 많은 유익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고난을 잘 견뎌내라는 것입니다. 고난을 견뎌내고 나면 많은 유익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틀린 말입니까? 아닙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더 힘든 것입니다. 고난을 견뎌내면 물론 다른 것을 통해서는 배울 수 없는 것들을 배웁니다. 문제는 그 고난을 견뎌내기까지는 결국 내가 감당해내야 하는 나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더 강해져야 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질문을 하겠습니다. 만일 내가 이 고난을 이겨내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러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난은 극복되기는커녕, 더 심각해진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때에도 우리는 ‘견뎌내라’는 충고를 듣고 또 극복하려는 싸움을 다시 시작해야 합니까? 아니면 고난을 견뎌내지 못한 네 탓이다라고 말하겠습니까? 이게 전부입니까? 그렇다면 기독교 복음과 세상의 지혜로운 조언과 차이는 무엇입니까? 만일 이것이 기독교 복음이 할 수 있는 말의 전부라면 그 차이는 없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기독교 복음이 하는 말이라기 보다, 율법이 하는 말이 아닙니까? “네가 이렇게 하면”이라는 조건 속에 다시 우리를 집어넣는 것입니다.

C. 하나님께서 이 고난에서 곧 건져주실 거다.
또 하나 고난에 대한 잘못된 접근법이 고난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곧 건져주실 거야”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당장 듣기에는 좋고 위로가 되는 말일 수 있지만, 하나님 외에 그 어느 누구도 이 말을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의 삶이 고난 속에서 마감되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이 사람의 삶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요? 앞에서 인용한 조니 에릭슨 타다는 한 때 자신의 전신마비가 치유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기도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일주일은 한 달이 되고, 한 달은 다시 두 달이 되었는데 치유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점진적으로 나아지겠지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자기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가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회개를 하고 또 회개를 했습니다. 그 다음에 든 생각은 자신의 믿음이 하나님이 들어주실 만큼 부족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나쁜 신학의 굴레 속에 들어간 것입니다. 결국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조니에게 가르쳐주신 것이 이것이었습니다. 그대로 인용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기적적인 방법으로 질병을 고치실 수 있고 실제로 고치신다. 그러나 믿음을 갖고 하나님께 나아오는 모든 자들을 고쳐준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지 않는다. 고치시고 안 고치시고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관이다.” 어쩌면 이것은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는 분들에게는 너무나 힘들게 들릴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 누구보다도 고통스러운 전신마비를 겪는 한 자매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사실, 바울 사도가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육체의 가시를 없애주시기를 하나님께 세 번 간구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우리로 하여금 이런 고백을 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6. 복음이 고난을 영광스럽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을 때,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려주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가장 영광스러운 사건이었습니다. 기독교 복음은 단순히 무슨 어려움이 있든지, ‘고난이 어떠하든지 버텨’라고 말하거나 ‘그래도 웃으면서 견뎌’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복음의 메시지는 고난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고난을 버티는 것은 결국 너에게 달린 문제야’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저는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툴리안 차비진은 말합니다. “복음의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잡고 계시므로 결국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모든 고통과 어려움에서 이겨내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다른 이야기입니다. 복음은 고난을 견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고난 속에서 선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잡아주고 계시며 견디게 해주신다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명령이 아니라 약속인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성령의 영감으로 이렇게 놀랍게 썼습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1~39).”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입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을 그 모든 고난 속에서도 잡아주고 계신다는 약속이 아닙니까? 툴리안 차비진은 말합니다. “복음은 고통의 현실에 대해 정직하게 말해 주고 우리에겐 고난을 막거나 극복할 능력이 없음을 확신시켜 줌으로써 우리를 자유케 한다.” 욥의 세 친구들이 욥에게 했던 말의 논지는 “결국은 너 하기에 달렸어”라는 말이라는 사실을 아시겠습니까? 그런 말은 결국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욥의 마음을 더욱 고통스럽게 했을 뿐입니다.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비록 네가 고난 가운데서 엎어진다고 할지라도, 네가 이 고난을 스스로 극복하지 못한다고 해도 염려하지 마라. 내가 너의 편에 있다. 나는 너를 여전히 사랑한단다. 그리고 언젠가 고난의 수수께끼가 풀리게 될 때 너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할 수 있을 거야. 내 아들아, 내가 너를 지금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이것은 너무나 큰 자유입니다. 복음만이 줄 수 있는 자유입니다. 우리는 고난 중에 있을 때,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평가할지 두려워합니다. 실패자로 보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실패자가 아니야. 내가 너를 붙잡고 있고, 내가 너를 통해서 어떤 굉장한 일을 하고 있는 중이거든.” 이렇게 복음은 고난 중에서 고통하는 사람을 위로합니다. 여전히 고난 가운데서 신음하는 그를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로 초청합니다. 이 복음의 메시지는, 아니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신 십자가의 복음 그 자체는 우리의 고난을 이전에는 감히 상상 조차 할 수도 없는 은혜의 영광으로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계속해서 조니 에릭슨 타다가 표현한, 결국 하늘에서 완전히 풀려지게 될 그 고난이라는 수수께끼를 이 땅에서 풀 수 있는 한계 안에서 말씀을 통하여 알려주신 것들을 가지고 풀어갈 것입니다.

http://www.jmcusa.org/Sermon_Audio/SAKor2014/SAK140309_KimHI.mp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