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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에서 확신으로 21 - 하나님 중심적 예배 (1) - 하늘 예배를 갈망하는 사람들

요한계시록 7:9-1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3-10-13

말씀내용
앞으로 몇 주 동안 예배라는 주제를 상고하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예배보다 중요한 주제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고, 구속하신 목적이며,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거나 공부하고 기도하는 모든 행위는 근본적으로 예배를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예배를 어떻게 가르치는가를 바르게 깨닫고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모두 사상누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1. 하나님 중심적 예배에서 인간 중심적 예배로의 변화: 감각적 만족과 흥미를 추구함
예배를 말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 시대의 예배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배가 무엇인지를 배우는 것은 성경이 예배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보다 우리 시대에 행해지는 예배를 보면서 더 많이 배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예배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 중심적 예배에서 인간 중심적 예배로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A. 감각적 만족과 흥미를 추구하는 예배
이것은 먼저 회중의 감각적 만족과 흥미를 추구하는 경향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인간의 만족도가 예배 평가의 기준이 된지 오래입니다. 사람들은 “오늘, 예배가 좋았어”라고 말할 때,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혹은 “오늘 예배는 별로 였어”라고 말할 때는요? 우리는 우리 자신의 느낌이나 만족도의 차원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예배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이 예배를 어떻게 받으셨을까 하는 관점에서 생각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예배 드리는 내 마음과 태도를 받으셨을까?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가 부르는 찬송을 기뻐 받으셨을까? 하나님께서 오늘 목사님께서 전하신 말씀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셨을까? 이런 생각, 이런 관점들이 우리에게서 너무나 멀어졌습니다. 인간의 만족도가 예배 평가의 기준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 교회의 지도자들도 회중들의 만족도를 끌어올릴 수 있는 예배를 생각하게 되었고, 예배의 형식과 내용은 전적으로 인간의 흥미를 유발시키고, 만족도를 올리는 방향으로 기획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너무나 중요하고, 예배의 본질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의식들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속에서 다 제거됩니다. 설교는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해서, 그리고 심리학이나 경영학의 지혜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찬송에 있어서의 변화는 어떻습니까? 마이클 호튼은 지난 150년 동안에 등장한 많은 찬송곡은 점점 인간적 가치와 행복을 다루는 내용으로, 즉 감상적 개인주의로 바뀌어왔다고 옳게 지적합니다. 시편은 하나님께서 행한 일, 하나님에 대해서 찬송하는 그야말로 찬송들입니다. 본래 찬송은 교리를 노래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점점 교리에 대해서 무관심해지자, 더 이상 교리를 노래하는 것은 감동을 줄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교리와 무관한 감상적인 가사와 곡조들이 만연하게 된 것입니다. 만일, 목사와 교회의 지도자들이 회중의 만족을 구하는 만큼 하나님의 만족을 염두에 두고 예배를 생각하고 준비하고 인도한다면, 예배는 이와 같이 타락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시카고 윌로우크릭 교회의 빌 하이벨스 목사의 말입니다: “셋째, 감동적이고 인상적인 예배를 하라. 예배는 감동을 주고 기억에 남아야 하며, 교회의 모임은 재미가 있어야 한다……사실 창의력과 감동이 있고 기억에 남는 예배를 만든다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다. 그러나 할만한 가치가 있다. 그런 예배라면 성도들이 자연스럽게 누군가를 데리고 오고 싶어 할 테니까 말이다. 영화관에 들어가 지루한 나머지 몸이 비틀리는 영화를 본다고 가정해 보자. 영화관을 뛰쳐나오지 못하는 게 단지 돈이 아까워서라면 누가 그 영화를 추천하겠는가? 교인들도 마찬가지다. 이를 생각하면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감동적인 예배를 준비하기에 충분하다... 많은 목회자들이 예배가 위대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아이디어를 내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이를 위해 춤도 좋고 영상도 좋으며 드라마도 좋으니 계속해 실험 정신을 갖고 예배에 임하기를 바란다. 물론 설교와 가르침에도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예배가 살아난다면 성도들은 자랑스러워할 것이고 반드시 소문으로 이어져 주위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목사님들의 설교는 더 많은 성도들에게 큰 은혜가 되어 가깝게 다가갈 것이다.” 이 말은 예배를 잘 드리자는 말이지만, 그 중심이 어디에 있다고 느껴지십니까? 바로 사람, 회중을 감동시켜야 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예배를 고려하는 사람들의 모든 관심의 초점입니다. 하지만 60년 전에 A.W.토저는 『예배인가, 쇼인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숙한 신앙에 이르지 못한 부끄러운 그리스도인들이 자꾸 기독교가 재미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희한한 단체들이 생겨나서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 애쓴다(p.145)……형제들이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너무나 영광스럽기에 우리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주는 것이지 단지 재미있는 것이 아니다.(p.186)”

B. 목적에서 수단이 되어버린 예배
그 결과 예배는 더 이상 교회의 존재 목적이 아니라, 교회가 성장하기 위한 하나의 주요한 수단이 되어버렸습니다. 일단은 모든 교인이 다 모이는 자리이기 때문에, 교회의 프로그램을 가장 효과적으로 소개하거나, 교회의 중요한 비전을 제시하는 자리가 되기 일수입니다. 효과적인 모금을 위한 예배가 되기도 합니다. 사실 예배는 어떤 말씀을 가르치기 위한 수단이 될 수도 없습니다. 예배는 결코 어떤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예배의 하나님 중심성이 인간 중심성으로 옮겨지게 된 후에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예배의 타락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의 역사에서 북왕국 이스라엘이나 남왕국 유다의 멸망은 바로 예배의 타락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2. 참 성도가 갈망하는 예배
성경이 가르치는 예배는 어떤 것입니까?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완벽하고 이상적인 예배의 장면이 오늘 읽은 본문에 나타납니다. 이것은 마지막 때에 하늘에서 이루어지게 될 예배를 보여줍니다. 본문은 세상에서의 모든 영적 전투를 다 마치고 승리한 천상의 교회가 드리는 예배를 보여줍니다. 이 자리에는 셀 수 없는 무리가 모여있습니다. 그들은 각 나라, 족속에서 나온 사람들이고 각 언어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다 흰 옷을 입었는데 이것은 그들 모두가 그리스도의 피로 죄씻음을 받은 거룩한 성도들임을 상징하면서 동시에 그들이 모든 전쟁을 마치고 깨끗한 옷으로 단장한 승리한 사람들임을 보여줍니다. 전쟁에서 개선한 로마의 장군이 흰 토가를 입고 마차에 올라 개선행진을 하는 모습과 같이 말입니다. 이것은 14절에서 한 장로가 사도 요한에게 이들이 누구인지 설명하는데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승리하고서)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또 그들이 손에 들고 있는 종려가지는 교회가 이 세상에서의 모든 전쟁을 견디고 승리한 것을 상징합니다. 그들이 서 있는 자리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어린 양 앞 입니다. 그들은 큰 소리로 노래합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10).” 큰 소리로 노래했다는 것은 그들이 열광적으로, 온 마음으로 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셀 수 없는 무리 중에 구경군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주위에는 모든 천사가 서 있는데, 일제히 보좌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경배합니다.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12).” 15~17절은 한 장로가 하나님과 어린 양을 예배하는 이 무리들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길 뿐 아니라 보좌에 앉으신 분이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신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보좌에 계신(영광을 받으신) 어린 양께서 친히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내용이 여러분에게 어떤 느낌을 줍니까? 지금 이 예배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된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그들은 지치지 않고 큰 소리로 열광하면서 그 하나님과 어린 양께 찬송을 드립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부 하나님의 구속 계획과 택하심, 성자 하나님의 구속 행위가 자신들의 구원을 이루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 구원의 영광을 한껏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떤 것을 얻거나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예배를 통해서 어떤 만족을 누리려는 자기 만족에 관한 생각이 없습니다. 이 예배에는 재미나 흥미 따위를 논할 여지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배는 그 이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배가 좋았어”라고 말할 여유가 없습니다. 그들은 그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몰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예배는 전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자들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인 예배입니다. 그들이 찬양하는 내용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라고 합니다. 12절에 있는 천사들의 찬송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예배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중심적이고, 그 자체가 수단일 수 없는 예배입니다. 참된 성도가 갈망하는 예배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런 예배는 세상에서 운동경기장에서 열광하는 관중들과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에는 영광의 요소, 신적인 요소, 하나님을 만나는 인격적인 요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 중심적 예배로 돌아가야 한다.
어떻게 우리는 이런 하나님 중심적 예배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가 매 주일 함께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모여서 드리는 예배는 그저 의무적으로 반복해야 하는 의식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실, 마지막 때에 그리고 영원히 성도들이 드릴 그 영광스러운 예배의 리허설입니다. 우리가 매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면서 모이는 것은 참 성도들이 누리게 될 영원한 안식의 리허설입니다. 우리는 이 날 모여 함께 예배하면서, 우리가 누릴 영광을 먼저 맛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이런 것에 관하여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이런 장래의 영광을 바라보는 만큼 이 땅에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더 영광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 소망을 가진 자들, 이 소망이 자신의 현실의 삶 속에 능력으로 경험되는 사람들은 이 예배의 영광을 알게 되고,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자기 입맛에 맞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 하나님 중심적인 예배에 목마를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자기의 감정을 부추겨주는 찬양이나 설교를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재미나 흥미 따위로 예배를 판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실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함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시 2:11). 이제 저는 예배의 정의를 여러분에게 이야기하겠습니다. 많은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예배를 정의한 것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마크 드리스콜 목사가 정의한 것을 소개합니다. “성령 하나님의 내주하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자 하나님의 중보자 되심을 통해 성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바로 앞에서 우리가 본 하늘 예배의 장면은 바로 이 정의와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예배를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보셨습니까? 아니면 그냥 주일 아침에 교회에 나와서 하는 어떤 행위라고만 생각하셨습니까?

4. 하나님 중심적 예배가 왜 모든 것의 기초인가?
여러분, 신앙 생활의 기초이자 중심은 예배입니다. 봉사나 섬김, 성도의 교제나 전도, 선교와 같은 중요한 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배는 이 모든 것들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이 모든 것들의 기초가 되고, 또 이 모든 것들의 목적이 됩니다. 예배는 교회의 본질이고, 교회의 존재 목적이기도 합니다. 예배가 없다면 그 교회는 더 이상 교회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교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모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는 제가 지금 표현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제가 앞에서 예배는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예배는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 모든 목적을 이루어주는 근원이 될 수 있다고 말씀드립니다. 이것은 예배가 수단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배 자체를 우리가 온전히 드릴 수 있다면, 우리가 예배 외에 바라는 모든 합당한 것들을 이룰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가령, 여러분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경험하신다면, 여러분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여러분은 복음 위에 서서 살아가는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주일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시게 된다면, 여러분의 섬김과 봉사는 힘을 받게 될 것이고,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여러분 안에서 흘러넘치게 될 것이며, 땅끝에 있는 백성이라고 할지라도 복음을 가지고 가려는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저는 참된 예배를 통해서 성도들이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게 된다면, 그 교회가 물질에 있어서도 부족함을 겪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존 파이퍼는 예배가 선교의 목적일 뿐 아니라 연료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말합니다.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행위의 연료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의 행위는 예배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로 귀결이 됩니다. 여기서 저는 예배를 통해서 일어나는 일 한 가지를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가운데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 혹은 교회에 처음으로 나온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이 참된 성도들이 하나님 중심적인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아니, 이 사람들이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면 분명히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심할 수는 없다. 나도 그분을 알고 싶다. 저들과 같이 그 하나님을 섬기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고, 성령으로 말미암는 회심의 역사도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때때로 교회 안에 불신자들을 의식해서 예배에서 찬양이나 설교를 쉽고 재미있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오늘날 팽배합니다. 그러나 저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짜 예배를 드려야 할 이유가 너무나 분명합니다. 아무도 연기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목사이지, 예배를 연기하는 자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예배의 구경군이 아니라, 예배자로 부름을 받는 것입니다. 찬송을 부를 때, 참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구원을 노래하는 그 내용에, 그리고 그 하나님께 몰입하여 온 마음으로, 큰 소리로 찬송을 부르십시오. 그리고 기도를 드릴 때, 대표로 기도를 드리는 분과 함께, 혹 합심으로 기도한다면 온 마음을 실어서 그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십시오. 설교 말씀을 들을 때, 이 하나님의 말씀이 내 영혼을 소성케 하고 살리는 능력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알고 간절한 마음으로 그 말씀 앞에 조아리십시오. 여러분, 어떤 사람이 교회를 방문해서 우리가 드리는 진정한 예배를 보고 회심하는 역사를 상상해보십시오. 오, 하나님께서 그런 은혜를 우리에게 보게 하시고 알게 하시기를 구합니다.

5. 하나님 중심적 예배로 돌아가는 길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이런 하나님 중심적 예배를 회복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는 인간 중심적 예배에서 하나님 중심적 예배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A. 중생과 회심이 예배의 열쇠다.
하나님 중심적 예배의 열쇠는 중생과 회심입니다. 여러분, 근본적으로 자기 중심성이라는 것은 죄인의 본성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중심적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까? 그런 일은 그 사람이 중생하고 회심을 경험하기 전에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우리는 참된 성도가 드리는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됩니다. 앞서 소개한 예배의 정의대로 우리는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됩니다.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죄인은 자기 중심성에서 하나님 중심성으로 변화됩니다. 오늘날 교회의 예배가 타락한 근본적인 원인도 여기에 있습니다. 중생과 회심이 없는 교인들을 잔뜩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님 중심적 예배를 갈망하지도, 드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 속에서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신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감정이나 건드리고 싸구려 위안을 주는 천박한 가사들을 가진 노래들을 찬송이라고 부르고, 인간의 마음에 자신감을 주고 근거 없는 희망을 제공하는 거짓 목사들의 설교를 들으면서 신음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살펴본 하늘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거기 모인 흰 옷을 입은 무리들은 셀 수없이 많은 숫자의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고 그 구원을 누리게 된 자들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서로를 가리켜 “너는 여호와를 알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작은 자부터 큰 자까지 모두가 다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렘 31:34). 그들은 다 자기의 죄악을 사함 받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기억도 하지 않으시는 것을 아는 자들입니다.

B. 예배에 생명을 걸라.
둘째로 중생하고 회심한 성도들에게 말씀 드립니다. 여러분은 오늘부터 예배를 새롭게 배우실 것입니다. 배우고 알게 되었다면, 온 마음으로 그리고 간절한 심령으로 그런 예배를 갈망하기 시작하십시오. 그렇게 예배하기를 원하십시오. 그런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여러분 자신을 준비하십시오. 예배가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는 사실을 아십시오. 여러분의 삶에 예배가 회복되기 전에는 아무 것도 회복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십시오. 예배에 목숨을 거십시오.

C.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 중심적 예배를 배우라.
세번째로, 저는 찬양을 인도하시는 Jay전도사님과 함께 그리고 장로님, 다른 교역자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우리는 어떻게 하면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을지를 함께 공부하고 고민하고 논의할 것입니다. 예배의 초점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가고,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참된 예배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참된 지혜로 인도하셔서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읽은 승리한 천상의 교회가 하나님께 드리는 그 예배에 가장 근접한 예배, 하나님 중심적 예배를 회복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6. 하늘 예배를 갈망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왜 사도 요한에게 오늘 본문에서 읽은 것과 같은 하늘 예배의 영광스러운 장면을 보여주셨고 기록하게 하셨을까요? 왜 일까요? 교회는 예배자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그런 하늘의 예배와 똑 같은 영광을 누리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입은 성도는 그런 예배, 그 하늘의 예배에 목말라하고, 그런 예배를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하나님 중심적 예배가 아니면 만족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은 갈망이 그 속에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예배를 드릴 때 언제나 하늘의 예배를 사모하게 하시려고 이 장면을 사도 요한에게 보이시고 기록하신 것 같습니다. 하늘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저 약간의 느낌이나 만족 정도를 얻으려고 예배하는 우리의 모든 천박함을 회개하게 하는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배는 나 중심일 수 없습니다. 나 중심의 예배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닌 자기 숭배의 한 수단일 뿐입니다. 오, 하나님을 예배하는 교회로 주께서 우리를 세워주시기를 구합니다. 구약시대나 신약 성경이 쓰여지던 시대와 같은 기적들이 지금은 많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표적과 기사를 통해서 일하시는 동일한 하나님이십니다. 그 표적과 기사는 일상적인 예배 속에서 일어납니다. 평범한 물 그리고 평범한 포도주와 떡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아서 구원의 현존을 보이는 표징이 되고, 평범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은 죄인을 회심케 하시는 기적을 베푸십니다. 이런 일들이 언제 일어납니까? 하나님이 친히 정하신 예배라는 형식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교회에서 그리고 우리의 평생에 이런 은혜의 기적들을 보게 하시기를 구합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하늘 예배를 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