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오해에서 확신으로 34 - 하나님 중심적 예배 (14) - 인생은 예배자가 되는 과정입니다

창세기 22:1-19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4-02-02

말씀내용
<인생은 예배자가 되는 과정입니다> 창 22:1~19



1. 무서운 명령을 주신 의도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아마 성경에서 가장 무서운 본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기서 아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봅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2).”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명령을 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오해합니다. 그리고 이 본문을 통하여 헌신에 대한 많은 설교가 행해졌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가지고 헌신하라는 설교를 들을 때, 왠지 헌신이 쉽지 않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잔인한 요구를 하시는 무서운 하나님의 모습이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억지로 헌신을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하나님께서는 자원하는 것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이단 사이비 종교나, 타락한 기독교는 얼마든지 헌신으로 포장된 헌금을 강요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강탈이지 헌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라고 하셨습니까? 1절은 하나님의 의도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려고 부르실 때가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물론 이 시험은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유혹이 아닙니다. 우리를 세우려 하심이고,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심으로 강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또 우리로 우리의 믿음을 스스로 확인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약함을 알게 하시고, 때로는 우리의 믿음의 견고함을 보게 하사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기도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난 지도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그가 75세에 처음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고 볼 때, 100세에 이삭을 낳았고 이제 이삭의 나이도 10대 소년이었을테니 한 40여년 가까이 하나님을 섬겨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삭의 나이를 대략적으로 짐작하게 되는가 하면,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번제 나무를 지웠다고 하는데서 압니다(6). 물론 아브라함은 175세까지 살았으니 이후로도 60여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아브라함의 생애 특별히 그의 믿음의 절정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 부분은 우리가 상고하는 이 본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인생의 종착역: “나를 어디까지 데려가시려고?”
사람들은 인생의 종착역이라는 말을 종종 합니다. 때로는 저도 내 인생의 종착역은 어떤 곳일까 생각해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그런 생각을 다시 했습니다. 인생의 종착역이 이런 자리가 되기를 저는 바랍니다. 그 마지막 역에서 하나님께서는 시험하시려고 저를 부르실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의 종착역이 어떤 자리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신앙 생활을 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도대체 나를 어디까지 데려가시려는 것인가? 왜 나에게 여기까지 요구하시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어떤 영역, 애정의 대상을 우리 눈 앞에 가져다 놓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종착역에서만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평생에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사 우리 믿음을 견고하게 세워가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이만하면 되지 않았을까?” 이게 참 우리가 빠지기 쉬운 교만입니다. 물론 우리 자신은 의도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교만이라고 인식 조차 하지 못하지만 말입니다. 이만하면 됐을거라는 것은 우리의 판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또 시험하십니다. 그때 우리는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도대체 나를 어디까지 데려가시려는 것인가? 왜 나에게 이것까지 요구하시는가?” 볼멘 소리가 나오기도 합니다. 저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충분히 그럴 수 있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맥체인표에 따라서 욥기를 읽기 시작합니다. 저는 1장을 읽으면서도 오늘 본문과 이야기가 겹쳐지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자랑을 하시더니, 그 욥에게 닥치는 일들을 보면,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욥을 어디까지 데려가시기를 원하시는 것이지? 욥 정도면 이젠 다 된건데, 왜?”하는 질문입니다. 다윗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의 생애도 마지막까지도 바람 잘 날이 없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어디까지 데려가시려고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 종착역이 어딘가 말입니다.

3. 아들을 바치는 데까지!: 예배역(禮拜驛, Worship Station)
아브라함의 경우에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아들을 바치는 데까지’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이후의 아브라함의 삶에 대한 기록에서 그 이상의 이야기를 읽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바치는 데까지! 성경에 아브라함의 생애를 기록해놓은 것은 우리를 위함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이야기이자, 또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인생의 종착역을 ‘아들을 바치는 역’으로 인도하셨다면 이것은 믿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억지로 자식을 바치라고 헌신을 강요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랑하는 이삭도, 독자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생애를 아들을 바치는 데까지 데리고 가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핵심은 헌신이 아니라 예배입니다. 신자의 종착역은 헌신역이 아니라 예배역입니다.

4. 예배가 목적인 인생
예배가 여러분의 인생의 목적이라고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예배는 창조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시기 위해서 세상을 창조하셨고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함으로써 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바치고 헌신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그 ‘바침’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당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당신을 즐거워할 때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것이 창조의 목적이었고 인간의 존재 목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담의 자손으로 에덴 밖에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죄인으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싫어하고 오해하고 하나님이 아닌 자아를 숭배하며 살아가는 본능을 지니고 삽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억지로 뭔가를 하면서 행복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좋아하는 것, 자신이 인정하는 가치를 위해서 모든 것을 아낌없이 쏟아 붓는 그러면서도 행복해하는, 아니, 그래서 행복해하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이렇게 만드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신감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그런 존재를 갈망합니다. 자기 인생 전부를, 자기에게 속한 모든 것을 다 바친다고 해도 아깝지도 않고 언제라도 후회하지 않을만한 가치를 찾습니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영속적인 만족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제가 지금 말한 것과 매우 유사한 개념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그 가치를 인정한 것을 예배합니다. 가치를 인정한 대상만을 진정으로 예배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저녁 수퍼볼 경기가 열린다고 난리입니다. 그 입장권의 액면가는 800~1500불이랍니다. 저는 이것도 지불할 용의가 없습니다만, 인터넷 거래 가격이 2,600불에서 비싸게는 25,000불까지 올랐답니다. 오늘 수퍼볼 전체 좌석 평균가는 4,600불입니다. 12~30명을 수용하는 VIP 룸 가격은 90만불까지 올랐답니다. 이것은 예배를 너무나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이 비용을 지불하고 경기장을 찾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최고의 풋볼 예배자들입니다. 그들 중에 경기를 보면서 지불한 돈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참된 예배자는 아닐 것입니다. 대다수는 그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서도 횡재를 했다고 느낄 것입니다. 그들은 가치를 알고 인정한 사람들입니다. 그들만이 그 대상을 예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의 하나님 예배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그 하나님은 복음 안에서 당신의 선하심과 사랑을 우리에게 확증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세상에 보내셨을 뿐 아니라, 그 아들로 죄인을 대신하여 율법의 저주가 되사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의 진노를 다 받게 하셨습니다. 복음만이 하나님의 가치를 알고 인정하게 하는 창입니다. 교회 역사 속에 수많은 순교자들은 이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그랬기에 그들의 생명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로 삶을 마감한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그는 이 본문에서 하나님께 최고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 전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드린 예배는 짐승 가운데 흠 없는 것을 잡아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서는 짐승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가장 소중한, 어쩌면 그 자신 보다 더 소중한 아들 이삭을 제물로 삼아 예배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우리는 성경 전체에서 그리고 인류의 역사에서 이보다 더 강렬한 예배를 보지 못합니다. 암몬 족속이 주로 섬겼던 몰렉 신에게 드리는 인신제사 관습은 경우가 다릅니다. 그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이방 제사나 종교에서는 참된 예배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혹은 신의 마음을 달램으로써 복을 구하려는 목적으로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예배는 진짜 예배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무엇을 얻어내기 위해서 아들을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힘에 굴복해서 할 수 없이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때 아브라함의 마음에 있던 것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7~19).” 아브라함이 드린 예배는 믿음으로 드린 예배였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하나님께서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예배는 진짜 예배였습니다. 제단 위에 결박 당하여 누워있는 이삭을 향하여 아브라함이 칼을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하여 막으셨지만, 그 예배는 이미 하나님께서 향기롭게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신 예배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탁월한 예배자라고 인정하셨습니다.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창 22:16~18).”

5. 선하신 하나님은,
A.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이렇게 말하고 싶은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대로가 좋습니다. 절 놔두십시오. 저는 아브라함도 아니고 욥도 아닙니다.” 이것이야말로,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아, 나는 그냥 버려진 인생을 살기 원합니다.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예배하는 것이라지만, 저는 그냥 살다가 지옥으로 가는 편이 낫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마다 징계하시고(히 12:5~11),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십니다(시 34:19). 예배자로 만드시는 과정은 모든 신자, 모든 하나님의 자녀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제 살펴야 할 것은 이 예배가 아브라함의 생애에 언제 일어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앞서 말한 대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난 지 약 40여년이 되어갈 때의 이야기입니다. 혹시 오늘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것을 요구하시는 것은 아닌가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수준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무려 25년이나 그것도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없을 지경이 되도록 기다리셔서 약속하신 아들을 주심으로써 그들을 시험하셨고 그렇게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믿음이 견고해지게 그들을 길러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루 아침에 일어난 변화가 아닙니다. 예배자가 되기 위한 긴 과정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 인생의 여정은 예배역이라고 하는 아브라함 인생의 종착역으로 그를 데려가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로운 여정이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늘 잘 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는 것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호하신다고 하신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두 번이나 잔꾀로 자기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을 뿐 아니라, 아내가 이방 왕의 첩이 되는 것을 보고만 있는 비겁한 남자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포기하여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또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하갈을 통하여 아들을 낳았을 뿐 아니라, 또 아내의 말을 따라 하갈과 자기 아들을 집에서 내쫓는 비겁한 인간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포기하여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성경이 아브라함의 이런 비겁한 행동들을 기록해 놓은 것을 인하여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서 저를 보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여 버리지 않으시는 자비하고 선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결국 아브라함처럼 비겁하고 치졸한 남자를 오늘 본문에서 보는 그 남자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불가능한 일을 이루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실패했을 때, 그가 비겁하게 행동했을 때,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포기하지 않으신 것이 감사합니다.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전능하신 능력을 사용하여 우리를 하나님을 예배하는 참된 예배자로 만드시는 일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선하신 하나님의 전능하심 앞에서 우리의 무능함은 장애물이 아닙니다.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어 십자가에 죽이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선하심 앞에서 우리의 악함과 죄성은 장애물이 아닙니다. 우리의 많은 실패 그리고 고통을 통해서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진짜 예배자로 만드십니다.

B. 믿어주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과정에서 단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를 믿어주십니다. 여러분, 누가 우리를 믿어준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존경하는 분이 여러분을 믿어준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격려가 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어주신다는 것은 격려 이상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왜 제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어주신다고 말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인생 여정을 여기까지 데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시험하여 아들을 번제로 바치는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단지 이 순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순간을 포함하여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아브라함의 인생 여정을 인도하신 하나님은 그 모든 과정에서 아브라함을 믿어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실패 속에서 그의 비겁함을 보시지 않으시고, 도리어 이 모든 실패 속에서도 결국에는 그가 이르게 될 이 영광스러운 예배자가 될 것을 보셨고 그를 믿어주셨습니다. 믿음은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선하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뢰이자, 하나님께서 또한 그 오래 참으시는 선하심으로 우리를 믿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믿어주셨기 때문에 욥에게 그런 고난을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만일 “나는 이만하면 된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나를 어디까지 데려가시려고 이런 고난을 주시는가”라고 생각하신다면, 이것을 아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믿어 주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혹은 여러분 자신 조차도 받아들이기 힘든 고난을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이 믿어주심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너무나 감당할 수 없는 영광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믿음의 자리까지, 예배자의 자리까지 갈 수 있도록, 우리를 그 예배역으로 데려가시려는 지치지 않으시고 포기하지 않으시는 선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보십시오. 우리가 “나를 그렇게 여겨주시는 하나님”을 그 고통 속에서, 고난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는 능히 그 고통과 고난을 지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통과 고난이 무감각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능히 그 선하신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고난을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 같은 예배자로 서게 되는 소망을 가지고서 말입니다. 진짜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알고 인정하고 그분께 인생 전부와 우리가 가졌다고 생각하는 모든 소중한 것들을 다 드린다고 할지라도 아깝지 않고, 후회하지 않는 예배를 드리는 자리에 설 소망을 가지고 말입니다.

6. 신자의 삶: 은혜와 영광 “은혜는 시작된 영광이고, 영광은 완성된 은혜다(Grace is but glory begun, and glory is but grace perfected.).” Jonathan Edwards
그래서 신자의 삶을 저는 은혜와 영광이라는 두 단어로 설명하는 것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은혜는 시작된 영광이고, 영광은 완성된 은혜다(Grace is but glory begun, and glory is but grace perfected.).” 신자의 삶은 이미 영광이 시작된 삶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생 중에는 은혜로만 나타날 것입니다. 종착역의 영광은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놀랍게 예배하게 될 때 드러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토록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즐거이 예배함으로써 영원한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천상의 예배에서 천천 만만의 천사들과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께 올린 찬송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계 5:11~13).” 우리는 압니다. 아들을 바친 것은 사실 아브라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정 사정 없이 우리의 헌신을 요구하시는 아버지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영광의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영원토록 우리와 온 천하의 모든 피조물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기에 너무나 합당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영광이 이미 모든 신자들의 삶의 여정에 시작되었습니다. 예배자로 만들어지는 과정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언젠가 죽음의 침상에서 우리는 평생 우리 자신이 놓지 못하던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아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그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절정의 믿음으로 그렇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때 우리는 그 침상에서 인생 최고의 예배를 하나님께 돌려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의 임종의 침상이 예배역이기를 바랍니다. 7년 전에 돌아가신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사모님 룻 그래함 여사가 임종 전에 자신의 묘비명을 이렇게 제안했었답니다. “공사 끝! 하나님, 오래 참아주셔서 감사합니다(End of construction! Thank you for your patience.).” 물론 룻 여사는 하나님께 참아주셔서 감사하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에 우리가 서로를 참아준 것에 대한 감사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님과 함께 우리는 공사 중인 인생을 마치고 은혜가 완성의 영광에 들어가게 되는 날, 하나님 앞에서 서로를 보며 함께 ‘공사 끝!’을 선언하고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참된 예배자로 하나님 앞에 영광스럽게 설 것입니다. 인생은 예배자가 되는 과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