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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에서 확신으로 33 - 하나님 중심적 예배 (13) - 예배는 삶입니다

로마서 12:1-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4-01-26

말씀내용
<예배는 삶입니다> 롬 12:1~2



1. 예배는 삶으로 입증된다.
지난 주에 우리는 예배가 축도로써 마쳐지는 것만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을 가지고삶의 예배 속으로 들어가는 시작이라는 것을 살펴 보았습니다. 사실, 의식으로서의 예배와 삶의 예배가 연결되는 것은 형태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둘은 하나님은 왕이고 높임을 받으실 만한 분이라는 원리에 의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단지 의식으로서의 예배만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 즉 삶으로서의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영적’ 예배라고 읽을 때, ‘영적’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주님께서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하셨습니다(요 4:24). 주님의 이 말씀에서 ‘영으로’ 드리는 예배가 바로 오늘 본문이 의미하는 ‘영적’이라는 말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헬라어 성경은 완전히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본문이 ‘영적’ 예배라고 할 때 이것은 ‘영으로’ 드리는 예배라는 말이 아닙니다. 본래 여기서 ‘영적’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라는 말인데, 이 말은 로고스와 같은 어근을 가지는 것으로 ‘논리적인’, ‘합리적인’ 또는 ‘말이 되는’이라는 의미입니다. 논리적인 예배, 합리적인 예배, 합당한 예배, 말이 되는 예배를 드리라는 말입니다. 가령, 표준새번역은 ‘합당한’ 예배, 공동번역은 ‘진정한’ 예배, 그리고 영어 KJV는 ‘reasonable’ service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왜 삶으로서의 예배를 이렇게 설명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뒤에서도 강조하고 있듯이,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여기서 ‘마음’은 종종 감정을 포함하지만, 생각을 지배하는 지성의 영역을 더 가리킵니다. 사도는 분별하는 것과 함께 우리의 정신과 이성과 지성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주일예배에서 “하나님은 나의 왕이십니다”라고 고백했다면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이 나의 왕이 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말이 되는 것이고, 합당한 것이고 논리적인 일입니다. 만일, 우리가 매 주일 예배를 드리지만, 삶에서 우리 자신이 주인인 삶을 살고 있다면 그것은 말이 안 되고 모순투성이의 예배를 드리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는 삶으로 입증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예배는 신학을 반영한다.
뿐만 아니라 예배는 신학을 반영합니다. 신학은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으로 알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신학은 우리가 삶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관점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예배에 반영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학, 우리의 예배, 우리의 삶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예배를 어떻게 드리느냐는 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우리의 지식과 삶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가치 등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서로가 연결되어있을 뿐 아니라, 서로가 영향을 주고 받습니다. 의식으로서의 예배가 성경적으로 드려져야 하는 이유는 이것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예배의 문제를 다루셨습니다. 구체적으로 일계명과 이계명은 예배의 문제, 예배의 형식의 문제를 다룬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한 하나님을 섬깁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어떤 모양으로든지 만들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의 많은 부분이 예배와 관련된 규례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규례를 매우 중요하게 다루셨습니다. 오늘 이것을 종말론과 관련해서 설명하려고 합니다.

3. 세 가지 종말론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
크게 우리의 종말론을 세 가지로 분류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종말론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그것이 우리의 예배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보려고 합니다.

A. 이미(already): 십자가 없는 부활?승리주의(triumphalism), 완전주의(perfectionism)
첫째는 ‘이미’로 표현되는 종말론인데, 이것을 ‘과도하게 구현된 종말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성취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종말론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정복자로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관점입니다. 이 입장에서 신자는 이미 영광의 상태에 있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이것을 보통 승리주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양적인 성장과 외적 성공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 또는 ‘그리스도인의 풍성한 삶’을 많이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성공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교회적으로 이것은 양으로 측정되는 교회 성장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이것이 다른 한편으로는 완전주의적 가르침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은 죄를 초월해서 살 수 있다, 죄를 짓지 않는 완전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가르침입니다. 이런 견해에 서게 되면, 눈에 보이는 행위에 의존하기 쉽게 되고, 영적 훈련이나 성화의 방법들을 강조하면서 점점 더 영적이 되고 위로 올라가는 것을 삶의 중요한 목표로 설정하게 됩니다. 자, 우리는 이런 가르침이 과연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그러면 이런 종말론의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삶에서 겪게 되는 고난을 설명하는데 어려움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욥의 고난에 대해서 그의 세 친구들이 말하는 수준 이상을 벗어나기가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즉, 신앙의 영역에서 우리가 도무지 딱 떨어지게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께 속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놓치기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런 신학의 내용 안에서 고통스러워 하게 됩니다.

B. 아직(not yet): 부활 없는 십자가?패배주의, 반율법주의(anti-nomianism)
두 번째로 제가 소개하고 싶은 것은 ‘아직’의 종말론입니다. 이것은 ‘이미’의 종말론의 반대편에 있는 입장으로 ‘미흡하게 구현된 종말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오직 않았고 멀었다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니 이 입장에 서게 되면, 신자는 이 세상에서 고통과 박해를 받는 낮아짐의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보게 됩니다. 그래서 신자는 이런 적대적인 세상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하며 살아갑니다. 여기에는 패배주의적 경향이 있어서, 교회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맡겨주신 보화를 그저 잘 지키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것 보다는 세상으로부터 자기를 지키는 것, 생존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승리 혹은 죄의 지배를 종식시키는 힘이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합니다. 이 견해에 서게 되면 교회의 성장이나 그리스도인의 훈련 등에 대한 적극적 태도들에 대해서 냉소적인 태도를 가지기 쉽습니다. 또 이런 가르침은 반율법주의적(율법폐기론적) 경향으로 흐르기가 쉽습니다. 앞에 ‘이미’의 종말론이 십자가 없는 부활에 강조를 두고 있다면 ‘아직’의 종말론은 부활 없는 십자가를 강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종말론의 입장은 다 한편으로 치우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C. 이미 그러나 아직(already but not yet): 십자가와 부활의 긴장 사이에서
그렇다면 성경적인 종말론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왔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왔고, 오고 있으며, 올 것이다라고 봅니다. 여기서 신자는 은혜의 상태에서 영광을 상태를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신자는 주님의 말씀대로 십자가를 지고 약속과 영광의 땅으로 나아가는 사람이고,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은 순례자입니다. 마틴 루터의 말을 빌리면, 신자는 의롭다 하심을 받은 죄인입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왕으로 지금 은혜 가운데 통치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잣대로 측정할 수 있는 성공도 아니고, 혹은 고난과 가난, 어려움이 곧 신앙의 증거도 아니며,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충성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평가하실 때, 세상적 성공이나 실패의 잣대, 외적인 열매의 다과가 아니라, 그의 순종, 신실함, 충성으로 평가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삶 속에서 신자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께서 자기 안에서 역사하시는 결과, 거룩해져 가는 변화와 죄를 이기는 승리를 경험합니다. 자신이 비록 죄와 싸우고 살아야 하고 때로는 죄에게 져서 괴로움을 겪게 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거나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예수님께 속한 자이기 때문에 이 죄의 실재와 늘 싸움을 피할 수 없으며 종종 낙심과 실패를 겪게 된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므로 이 종말론에서 신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고난과 영광 사이의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성령의 영감으로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라고 표현했습니다(고후 6:10). 이 종말론 아래서 신자는 외적인 성공에 처하기도 하고 실패에 처하기도 하지만 늘 충성스럽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어떤 종말론에 관한 신학을 가졌는가에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신학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삶을 바라보게 하는데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이 점에서 교회 안의 모든 사람은 다 나름의 신학을 가진 셈입니다. 그래서 나쁜 신학은 신자의 삶의 건강에 치명적인 독소가 되어 건강을 심지어 생명을 해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신학은 어떻게 예배에서 반영되는 것일까요?

4. 믿음은 ‘봄(seeing)’에서 나지 않고 ‘들음(hearing)’에서 난다(롬 10:17~18; 8:24).
A. 믿음이 ‘봄’에서 날 때: 우상숭배적 경향, 은사주의
성경은 분명하게 믿음이 죄인 안에 생성되는 것은 보는 것에서 나지 않고 들음에서 난다고 말씀합니다(롬 10:17). 우리는 본성적으로 듣는 것보다는 보는 것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제2계명에서,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어떤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도 만들어 섬길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자기 백성에게 주셨고 그 말씀을 들음으로써 믿음이 그들 안에 자라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방식을 거부하고 보는 것에 집중하게 될 때, 마치 믿음이 ‘봄’에서 난다고 생각할 때 우리의 예배는 어떻게 타락할 수 있을까요? 사실, ‘이미’의 종말론은 본질상 눈으로 보는 시각적인 부분으로 경사될 수 밖에 없는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승리주의는 양적인 성장과 외적 성공의 표시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들음에서가 아니라 봄에서 난다고 여길 때, 예배는 우상 숭배로 흐를 위험을 필연적으로 안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표적을 구했던 유대인들의 악하고 음란한 마음은 바로 이런 본성에 부합하는 신학에서 나온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섬긴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눈 앞에서 자기들을 인도하는 신을 필요로 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그들에게는 불안한 요소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눈에 보이고, 감각적인 어떤 볼거리들을 예배의 현장에 제시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무대 장식과 현란한 조명이 필요합니까?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백성들의 마음에는 성취되지 않은 약속을 마치 자기들의 눈 앞에서 이미 성취된 것처럼 느끼고 싶어하는 죄성이 있었습니다. 이런 예배는 언제나 승리, 정복, 행복, 즐거움을 강조하게 되는데, 진정한 의미에서 성령님께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기 백성들 안에 만들어내시는 은혜의 역사가 아니라, 인간이 조작해내는 수준의 감정들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참되신 하나님의 속성들은 간과되게 되는 것입니다. 은사주의 교회들만 그런 것은 결코 아니고 이것이 보편적 교회들의 현상이 되었지만, 특별히 은사주의 교회의 예배일수록 이 볼거리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 같습니다.

B. 믿음은 ‘봄’에서도 ‘들음’에서도 나지 않을 때,
반면, ‘아직’의 종말론에서는 믿음은 사실, ‘봄’에서도, ‘들음’에서도 난다고 믿지 못하는 확신의 결여가 두드러집니다. 우리는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퍼져있던 냉소적 경향을 여기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그 많은 하나님의 권능과 이적을 보았고 또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이었음에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식탁을 베푸실 수 있으랴(시 78:19).” 얼마나 악한 말입니까? 말하자면, 그들은 무덤덤하고 냉냉했던 것입니다. 예배와 관련해서는 이런 태도입니다. “아니, 예배드린다고 뭐가 변하겠어? 하나님의 말씀에 모든게 달려 있다고 말은 하지만, 그 말씀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겠냐고?”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의 종말론에서 예배가 많은 볼거리들이 준비되고 감각적 추구를 열광적으로 한다면, ‘아직’의 종말론에서는 무미건조한 전통적 양식의 예배에서 조금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믿음은 ‘봄’에서도 ‘들음’에서도 난다고 여기지 않으므로 그들에게 예배는 아무 기대도 없는 형식이고 행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출구는 오직 내세입니다. 내세 지향적 성향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C. 믿음이 ‘들음’에서 날 때
그렇다면 성경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믿는 ‘이미 그러나 아직’의 종말론에서 예배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모든 것을 걸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능한 한, 성경을 읽고, 성경을 설교하고, 성경을 기도하고, 성경을 노래하려고 합니다. 예배의 중심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예배에서 하나님의 복음과 약속을 신뢰하는 것을 표현할 것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만일 볼거리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주님께서 교회에게 행하라고 명령하신 성례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들려지는 복음과, 눈에 보이는 말씀인 성례가 그들의 예배의 중심이자, 전부가 될 것입니다. 이런 예배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고, 복음의 진리를 성령님께서 조명하심으로써 깨닫게 되고 그 말씀으로 변화를 받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늘 하나님의 약속에 기대어 기대감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5. 매 주일 예배에서 경험하는 복음이 믿음으로 살게 하는 동력이다.
예배에서 보고 느낀 짜릿한 체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깨달아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인생을 살게 하는 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여전히 살아서 매일의 삶 속에서 자기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도록 역사하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이 세대를 판단하고 본받지 않으며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눈으로 본 어떤 전율이 아니라, 우리가 들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의 삶 전부를 하나님이 받으시는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을 합당한 예배, 합리적인, 논리적인 예배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순례자입니다. 그는 이 땅에서 십자가를 지고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순례자입니다. 하지만 그는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믿습니다. 그는 자신이 경험하는 승리나 패배의 사건들에 연연해하지 않고, 의연하게 자기의 왕이신 하나님께 충성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매일의 삶 속에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내재하는 죄와 싸우는 삶을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바라보며 주님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일에 자신의 삶을 드립니다. 그의 인생의 초점은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는 매 주일마다 예배를 통해서, 그 예배 가운데 풍성하게 노래되고, 기도되며,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 복음의 진리를 통해서 이것을 다시 확인하고 자신의 삶을 산 제물로 드리는 영적 예배를 다시 시작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영적 예배, 삶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는 매 주일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여서 드리는 예배로부터 언제나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