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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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에서 확신으로 31 - 하나님 중심적 예배 (11) - 성례로 하나되는 교회

갈라디아서 3:26-2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4-01-12

말씀내용
<성례로 하나가 되는 교회> 갈 3:26~28



1. 어딘가에 소속하고 싶다!
인간이 범죄한 후에 잃어버린 것은 참 많습니다. 그 하나가 소속감입니다.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 인간은 하나님에게서 떨어져나갔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속해 있음으로써 가장 편안한 안정감을 가지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만 떨어져나간 것이 아닙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외가 시작되었습니다. 아담이 아내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렸을 때 이것은 최초의 부부 사이의 상처와 갈등을 낳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의 소속감, 부부가 서로에게 속해있다는 소속감이 다 깨어졌습니다.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다는 소속감에서 떨어져나간 인간은 끊임없이 어딘가에 속하기를 원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참된 안정감을 주는 소속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온갖 종류의 조직이나 단체들은 다 분열과 분쟁, 그리고 조직의 쓴 맛을 경험하게 합니다. 가족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 조차도 이런 저런 모습으로 깨어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한편 지난 10년 동안 온 세계를 뜨겁게 달군 Facebook과 같은 SNS 열풍은 현대인들, 특히 젊은이들의 잃어버린 소속감을 대체해주는 인기 있는 고안물이 되어왔습니다. 하지만 벌써 이것도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다는 최근의 분석들이 말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런 것이 인간이 찾는 소속감과 안정감을 채워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얻어야 할 소속감을 어떤 대체물로부터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범죄 후에 잃어버린 하나님께 속한다는 소속감을,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한 마디로 그것은 교회입니다. 교회에 속했다는 것이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이 질문은 사실 우리 신앙을 재는 시금석입니다.

2. 세례: 본래의 소속으로 돌아오는 의식
개신 교회가 성례(거룩한 예식)라고 부르는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세례와 성찬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 주님께서 분명히 교회에게 행하라고 명하신 의식입니다. 이 성례가 바로, 범죄하고 타락한 인간에게 그들이 잃어버린 소속감과 안정감을 다시 되찾아주고 믿음을 강화함으로써 그것을 경험하게 해주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라는 사실을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인식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먼저 세례를 살펴보지요. 세례는 본래의 소속으로 돌아오는 의식입니다.

A. “하나님께서 너를 용서하셨다.”
세례의 일차적 의미는 물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로 죄인의 죄를 담당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하셨다는 것을 공적으로 선언하는 의식입니다. 한 번은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께 요청했습니다.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막 10:37).”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막 10:38)?” 잔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은유로 구약 성경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심판의 잔을 마실 수 있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세례를 언급하실 때 의미하신 것 역시 잔과 같은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받으실 세례는 곧 자기 백성을 위하여 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왜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세례라고 표현하셨을까요? 십자가의 죽으심 이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받게 될 세례의 핵심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세례를 재연하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신자의 옛 사람은 죽었다는 선언이 이루어집니다. 옛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아담 아래 있던 나, 율법의 저주 아래 있던 나,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있던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심판하셨고, 그래서 그는 이제 용서받았다는 것입니다.

B. “너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
“하나님께서 너를 용서하셨다”는 선언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세례를 영원히 감당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하시는 근거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자기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모든 형벌과 저주를 받으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 밖에 없음을 알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믿는 자에게 세례를 베풀 것을 명하셨습니다. 세례는 우리의 죄가 사해졌다는 것뿐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로마서 6:3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합하여’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영어단어 into 에 해당하는 전치사인데, 즉 그리스도 예수 속으로 (들어오도록)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세례는 아담이 범죄한 후에 잃어버린 하나님께 속한 소속감이 회복되었다는 것을 선언합니다. 세례를 통해서 죄인은 다시 하나님께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는 본래의 소속으로 돌아오는 의식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갈라디아서 3:27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라는 표현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 속하는 세례를 받은 자’라는 말입니다.

C. “너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 다른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세례는 단지 나와 하나님 사이의 문제가 아닙니다. 세례는 그런 개인주의적 사고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가족이 됩니다. 가족이라는 것은 단지 아버지와 나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섬기는 다른 많은 형제들과 한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언약 백성’이 된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 언약으로써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의 피로 죄 씻음을 받은 모든 사람을 당신의 자녀로 영접해주십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본문 27~28절이 그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옷은 신분을 상징합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것은 옛 사람이 죽었고 이제는 새 사람이 되는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표현은 단지 이것만이 아니라, 세례를 받은 자들이 다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게 됨으로써 그들의 다양한 배경, 학식, 가문, 물질에 상관없이 그리스도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사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자신들의 현실로 선언하는 셈입니다. 유대인과 헬라인은 물과 기름 같이 섞일 수 없는 존재들이었지만, 그들은 그리스도로 옷 입고 한 가족, 다 하나라는 것입니다. 종과 주인이야말로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는 절대로 섞일 수 없는 신분계층이었지만, 그리스도로 옷 입은 이상, 그들은 사회적 신분과 계층에 영향을 받지 않고 도리어 한 형제와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두드러지게 구별되는 남자와 여자의 구분도 이제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한 가족이 됨으로써 허물어졌다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에서 쓴 것도 같은 뜻을 전합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마이클 호튼의 말입니다. “당신은 세례를 받았습니까? 라는 질문은 우리의 친교에 있어서 어떤 사람이 우리와 같은 인종, 같은 민족, 같은 사회 경제적 집단, 같은 정치적 집단, 심지어 같은 교단에 소속되는지의 여부보다 더욱 결정적인 것이어야 한다.”

D. “나는 세례를 받았다!”
우리의 믿음은 종종 연약함 아래 놓일 때가 많고, 마귀가 던져 놓는 의심과 절망의 도전 앞에 설 때가 많습니다. 잘 알려진 마틴 루터의 일화입니다. 그는 사탄이 자기를 유혹해서 죄로 나아가게 하거나 정죄의 두려움으로 자기를 몰아가려고 할 때마다 “사탄아, 물러가라! 나는 세례를 받았다!”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세례는 우리의 믿음을 인치는 외적 의식입니다. 자기 얼굴 사진 위에 정부의 인장이 찍힌 여권을 통해서 자신이 어느 나라의 시민이라는 것을 인증 받는 것처럼, 신자에게 세례가 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례를 받는 사람 또 받은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는 내 것이다. 나는 너로 인해 즐겁다. 이것이 너의 신분을 증명하는 내 인침이다.”

3. 성찬: 신자 자신이 그리스도와 교회에 속했음을 확인하는 의식
A. 그리스도로 옷 입은 성도의 교제(고전 11:27~29)
성찬은 주님의 식탁에 참여하는 교제를 상징하는 의식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허용된 것은 아닙니다. 바로 그리스도로 옷 입은 형제와 자매들,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이 식탁에 앉는 것이 허용됩니다. 바울 사도는 분명하게 이 식탁에 제한조항을 두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고전 11:27~30).”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신다는 것은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것’인데 즉 주님의 죽으심의 의미와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은혜인지를 알지 못하면 이 식탁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실 때에는 사람들을 구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만찬을 하실 때, 주님은 제자들과만 그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을 위한 규례였습니다. 이 식탁은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들의 교제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 교제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만이 누리는 교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별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취지에서 누구든지 다 함께 참여하자고 해서, 앞의 말씀을 무시하고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신 사람들 중에 병든 자와 잠자는 자도 적지 않다고 한 것은 그들이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병에 들고 죽은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B. 죄인들을 위한 만찬
일반적으로 이런 설명을 들으면 마음이 불편해질 수 있습니다. 보통 조직이나 단체 같으면 이것은 소수의 특별히 기여한 사람들만을 위한 만찬이라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성찬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이 자기의 영적인 능력이나 의로움을 가지고 참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합당치 않음을 가지고 이 식탁에 앉습니다. 그들이 합당치 않은 존재이기에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고 그 죽으심을 기념하라고 이 자리에 모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찢기신 몸과 흘리신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주십니다. 이 떡과 잔을 받는 사람들은 이렇게 고백하는 셈입니다. “저는 주님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제게 주어진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가 아니면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고 지옥에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소망 없는 죄인입니다. 저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오늘도 이 떡과 잔을 받음으로써 저는 하나님께서 제게 부여해주신 생명으로 사는 것을 고백합니다.” 성찬은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는 소수의 특권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아니면 영벌을 면할 수 없는 자라고 스스로 여기는 죄인들을 위한 만찬입니다.

C. 그리스도께서 하셨듯이 형제를 위하여 내어주는 삶
이런 은혜를 알고 구하는 사람들은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자신을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성찬 제정에 대한 말씀을 나눌 때, 고린도 교회 가운데 있는 분쟁과 파당을 지적했습니다(고전 11:17~22). 그들은 지도자에 대한 문제로 분열되어 있었고, 그들 안에 벌어진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대한 이견으로 또 분리되었으며, 경제적, 사회적 신분에 의해서도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그들이 성찬에 참여한 것이야말로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일이었습니다(고전 11:29). 주의 몸은 나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로 원수된 장벽을 허시고 하나로 불러 교회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세례를 받았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으며 서로에게 형제가 된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과 피를 자신들을 위해서 주셨다는 것을 알고 그들은 성찬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를 그들은 판단했고 멸시했으며 주님의 몸을 찢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세례를 받은 자들에게 합당한 것이 아니라고 바울 사도는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참여하지 말자’가 아니라, ‘오 주님, 제가 범죄하였습니다. 제가 주님의 피로 하나가 되게 하신 교회를 찢고 헐었습니다.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제가 찢어진 것을 다시 세우기를 원합니다. 제게 은혜를 주시옵소서’하고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에 기대어 용서를 구하고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찬은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안전장치인 셈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무뎌지고 강퍅해진 채로 오래 방치되지 않도록 주께서 주신 은혜의 수단인 것입니다.

4. 성례는 짐이 아니라 기쁨의 표지다.
성례가 이와 같은 은혜와 기쁨의 표지가 되지 않고 도리어 짐이 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합니다. 성례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표지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어떤 헌신의 표시가 될 때 그렇게 됩니다. 세례는 세례를 받는 사람이 하나님께 “제가 이제 하나님을 믿기로 결정했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께 저를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고백이기 전에,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세례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나와 하나가 되도록 내가 결정했다는 것을 너에게 보여주는 나의 표지가 여기 있다. 내가 네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었다는 표지가 여기 있다. 네가 죄를 짓고 넘어질 때에도 나는 여전히 내 언약에 충실하여 너를 포기하거나 너를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는 나의 표지가 여기 있다.” 매리언 클락의 말입니다. “세례를 받는 사람이 일차적으로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영원한 헌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연약하고 죄인된 나를 구속하시고 깨끗케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궁극적으로 영화롭게 하시는, 그분의 다함이 없는 무한한 헌신을 고백하는 것이다...... 세례의 초점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행하시는 것에 두어져야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나 우리의 존재나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행할 것에 초점을 두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성례는 단지 짐이 될 뿐이며 궁극적으로 우리를 정죄하게 될 것이다.” 성찬도 마찬가지입니다. 초점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이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에 합당하게 잘 살았고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었으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았는가가 아닙니다. 이것은 나쁜 동기는 아닐지라도, 무지함으로 말미암아 성찬을 그리스도의 성찬이 아니라, 나의 성찬으로 바꾸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내가 한 일을 가지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근거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시고 용납하신 그 무한하신 은혜를 다시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때 성례는 짐이 아니라, 기쁨이 되고, 은혜의 회복을 경험하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로 결속되고, 교회 안에서 용서와 용납 그리고 사랑을 행할 수 있는 근거로서의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성례, 주님께서 행하라고 명하시고 제정하신 세례와 성찬을 통하여 교회는 더욱 하나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5. ‘말씀의 예전’과 ‘다락방 예전’
제가 오늘 성례를 예배의 한 주제로 다룬 이유가 있습니다. 작금의 많은 교인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본래 성경에 근거를 두고 행해진 역사적인 예배 의식들은 거의 예외 없이 말씀의 예배(예전)과 성찬을 행하는 다락방 예배(예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는 다락방 예전을 너무나 드물게 행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말씀의 예전이 예배의 전체인 것처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대부분 학자들은 초대 교회가 성찬을 매주 시행했다는데 동의하지만, 성경이 성례를 얼마나 자주 행하라는 명확한 명령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성찬을 얼마나 자주 행해야한다는 법을 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적 판단이 요구되는데, 현재 우리 교회는 주님께서 제정하신 은혜의 수단을 너무나 적게 행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물론 세례는 세례를 받을 합당한 사람이 있어야 하지만 성찬은 보다 자주 행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자주 성찬을 행하게 되면 형식적이 될 것이고, 성찬의 의미가 퇴색할 것이라고 우려합니다. 얼마든지 이해가 됩니다. 만일 성찬을 자주 행하게 되면 성찬이 형식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그날의 설교 말씀을 적용하는 차원에서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말씀을 전한 후에, 성찬이 이어진다면, 설교는 복음의 핵심으로부터 쉽게 멀어지지 못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말씀의 예전에서 개인주의화 되어가는 교회의 현상을 성례는 복음의 본질인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를 하나가 되도록 묶어주는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으로 역할을 할 것입니다. 칼빈은 성찬의 시행 빈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례는 모든 기독교인이 자주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기억으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런 기념을 통해서 그들의 믿음을 부양하며 강하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 가운데서 자주 시행되도록 제정되었다.” 우리 교회에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당회는 이런 성경적 원리와 여러 요소를 목회적으로 고려하여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6. 성례로 하나가 되는 교회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가족의 새 식구가 됩니다. 성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됨을 늘 새롭게 경험합니다. 교회는 그저 말씀 잘 배우고 깨달아서 득도를 하는 기관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상징하는 세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한 가족이 된 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성찬을 통해서 한 가족임을 거듭 확인하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은 성례를 통하여 하나님께 돌아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속함으로써 비로소 참된 소속감과 온전한 안정감을 누리게 됩니다. 신자들은 다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고 경험한 자들입니다. 이로써 그들은 서로를 용서할 줄 알고, 용납하는 것을 배우며 비로소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 행하라고 명령하신 이 성례를 행함으로써, 우리는 주님께서 성례를 통해서 교회에게 주시는 그 무한하신 은혜를 늘 새롭게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은혜를 깊이 누리게 되고,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예배 가운데 행해지는 성례를 통하여 우리가 참된 교회임을, 그리고 하나님의 가족됨을, 그리고 용서와 용납과 사랑 그리고 하나됨을 깊이 경험하는 은혜를 충만히 누리게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