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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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에서 확신으로 30 - 하나님 중심적 예배(10) - 말씀을 경험하는 예배

느헤미야 8:1-1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4-01-05

말씀내용
<말씀을 경험하는 예배> 느 8:1~12



성도의 삶의 연료가 하나님의 말씀이듯이, 예배의 연료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배할 수 있도록 우리 영혼을 고양시키는 것은 어떤 다른 요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예배를 위하여 다른 요소들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 안에서 행하시는 역사와 조작을 구분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요소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서 예배를 성공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조작입니다. 두 주일 전에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회개의 역사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일어난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것은 탁월한 영적인 지도자가 만들어낸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성령님께서 이루신 역사입니다. 회심이 인간적 조작을 통하여 일어나는 심리적 현상이 아니듯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예배의 감격과 은혜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성령님께서 우리 영혼 안에 이루시는 역사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중심적이며 결정적인 요소인지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이 예배의 열쇠이자 연료다.
본문에서 70년의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귀환한 하나님의 백성은 7월 초하루인 나팔절, 즉 그들의 신년축제일에 예루살렘 수문 앞에 일제히 모였습니다. 그들은 제사장이자 학사 에스라의 인도 하에 예배를 드리는데 그날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9절을 보면,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회개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두 주일 전에 우리가 상고한대로, 이 회개는 놀라운 기쁨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보통 이 사건을 수문 앞 광장의 부흥이라고 부릅니다. 본문을 조금이라도 주의 깊게 읽어본다면 우리가 피할 수 없는 결론은 하나님의 말씀, 즉 율법 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깨닫게 한 것이 이날의 예배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이고, 이 예배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심령에 회개의 역사를 일으킨 연료라는 사실입니다.

2. 죄인의 심령은 하나님의 말씀 외에 어떤 것으로도 참된 회개에 이를 수 없다.
죄인의 심령은 하나님의 말씀 외에 어떤 것으로도 참된 회개에 이르지 않습니다. 무섭게 꾸짖는 것이나,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 자체로는 사람의 심령은 잠시 동요할 수 있지만, 참된 회개 혹은 참된 심령의 변화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은 영혼은 결코 어떤 것으로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그 영혼은 살아있다고 하지만, 죽어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 영혼을 향해서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는 식의 율법 혹은 도덕적 교훈을 아무리 설득력 있게 말한다고 할지라도 그 영혼에 참된 영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환상 가운데 마른 뼈들이 가득한 골짜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그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고, 에스겔은 하나님만 아신다고 대답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대답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 마른 뼈들은 다시 살아날 길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겔 37:4).” 마른 뼈들을 향하여 권고하거나 격려하거나 설득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너희의 무력한 상태에서 벗어나라고 말하거나, 동정심으로 나도 너희와 같은 사람이라고 동일시하라고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직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대언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때, 뼈들이 서로 연결되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였습니다. 그리고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고 대언할 때, 그들이 살아나서 극히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이 본문은 죄인의 심령이 살아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죽은 영혼을 살립니다. 그리고 그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권세는 칼의 권세가 아니라, 말씀의 권세이고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기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신다면 예배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예배하고 찬송하고 뭔가 좀 더 배우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것이 그 예배를 예배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3. 성도의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만을 먹고 자란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살아난 영혼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양식으로 섭취하고 자라납니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모세의 율법에서도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습니다. 특별히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학사 에스라와 함께 한 레위 사람들이 낭독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도록 해석하여 주었다는 것을 주목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이는 예배에서 하나님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낭독함으로써 그리고 그 말씀을 설명하여 깨닫게 함으로써 자기 백성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경험한 자들, 이 말씀을 먹어본 사람들은 더욱 이 말씀에 대한 식욕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뭇 백성의 지도자들인 족장들, 제사장들, 레위인들은 이튿날 다시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학사 에스라에게 모여들었습니다(느 8:13).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고 먹음으로써 그 믿음이 성장합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가장 결정적으로 예배를 통하여 선포됩니다.

4. 낭독과 설교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낭독되었다는 것과 그 말씀이 설명되었다는 것을 봅니다. 이 두 가지는 예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A. 낭독(3,8,18; 신 31:9~12; 골 4:16; 딤전 4:13)
교회 전통 속에서 공개적인 성경 낭독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왔습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에서만이 아니라 신 31:9~12에 있는 하나님의 명령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또 모세가 이 율법을 써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자손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에게 주고 모세가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매 칠 년 끝 해 곧 면제년의 초막절에 온 이스라엘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그가 택하신 곳에 모일 때에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에게 듣게 할지니 곧 백성의 남녀와 어린이와 네 성읍 안에 거류하는 타국인을 모으고 그들에게 듣고 배우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고 또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 거주할 동안에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자녀에게 듣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할지니라.” 이런 말씀을 따라서, 유대인들은 회당 예배에서 언제나 율법서와 선지서를 낭독하는 순서를 가졌습니다. 도리어 설교는 선택적으로 주어질 만큼 성경 낭독은 중요한, 빠뜨릴 수 없는 회당 예배의 중심이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골로새서를 쓸 때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골 4:16).” 이 말씀은 교회가 모일 때, 하나님의 말씀인 사도들의 서신을 공적으로 읽어줄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또한 디모데에게 이렇게 명령합니다.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딤전 4:13).” 분명히 이 말씀은 (공적으로) 읽는 것과 권하는 것, 가르치는 것을 구분하여 말합니다. 이런 구약 성경에 나오는 관습과 명령뿐 아니라 신약 성경의 명령에 기인하여 교회는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여기서 성경을 낭독하는 것은 설교와는 구분되는 순서로 여겨졌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은 설교하는 한 부분의 말씀만이 아니라, 균형있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예배 가운데 낭독하는 것은 여러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구약에서 한 부분, 신약에서 한 부분을 읽을 수 있고, 혹은 구약 성경을 설교하는 경우, 신약 성경의 한 장을 낭독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읽은 말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면 그것을 간단하게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이렇게 읽어주는 말씀 자체를 통해서 죄인들은 회심을 하기도 했고, 성도들은 은혜를 깊이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것도 그것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학사 에스라는 율법 책을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무릇 알아들을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어주었습니다. 이것은 거의 5~6시간 동안에 행해진 일입니다. 이 일은 그 달에 열린 초막절에서 매일 계속되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에스라는 첫날부터 끝날까지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무리가 이레 동안 절기를 지키고 여덟째 날에 규례를 따라 성회를 열었느니라.” 청교도들은 유대인들의 회당 예배처럼 성경 말씀을 낭독만 하는 것은 반대했지만 낭독 없이 설교만 하는 것도 옹호하지 않았을 만큼 이 성경 낭독은 중요한 예배의 요소였습니다.

B. 설교(7~8,12)
그러나 오늘 본문이 보여주듯이, 레위 사람들이 말씀의 뜻을 해석해줌으로써 낭독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7~8). 여기서 우리는 설교의 중요한 원리를 발견합니다. 설교는 읽혀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도록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설교입니다. 설교는 설교자의 지식을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설교자의 설득력에 달린 것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 점에서 오늘날 교회의 보편적인 형편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마이클 그린이 30년 전에 영국과 유럽 그리고 미국의 교회들을 향해서 쓴 말을 인용하려고 합니다. “오늘날 설교의 수준은 통탄할 정도다. 위대한 설교자들이 거의 없다. 많은 목사들은 설교를 복음을 전하고 삶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방법으로 더 이상 믿지 않는 것 같다. 이 세대는 가짜 설교의 세대이고 가짜 설교는 가짜 기독교인을 만든다.” 저는 이 말이 오늘날에도 보편적으로 옳으며, 특별히 한국교회와 이민교회를 향하여 그렇다고 동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의 말들이 오늘날의 강단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게 되어야 합니다. 예배의 중심에 있는 설교를 통해서 사람들은 설교자의 말 재주와 농담에 울고 웃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5:39).” 그렇다면 설교는 성경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고, 복음의 은혜를 나타내는 일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해주셨습니다(눅 24:27). 그들은 이 일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 24:32)” 바로 이것이 설교입니다. 주님은 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서 ‘자기에 관한 것’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불을 붙이는 힘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보게 될 때, 복음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때 사람의 심령은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불타게 됩니다. 브라이언 채플은 설교의 기능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듣는 사람의 마음에 예수님을 향한 애정으로 가득 채우는 설교는 그와 동시에 우리 마음을 장악하고 있는 거짓된 우상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죄가 발산하는 매력을 저지하며 거룩함을 향한 소망을 키우며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려는 열망을 불러일으킨다.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현저하게 나타날 때 예수님의 뜻을 행하는 일은 우리에게 가장 큰 욕망인 동시에 기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은 우리의 힘이며, 이런 기쁨이 생겨나도록 돕는 일은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에 부여된 커다란 특권이다... 복음이 주는 확증을 지속적으로 설교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절망과 교만을 몰아낸다. 그렇게 되면 영적인 피로, 경쟁심, 쇠퇴가 성도들에게서 사라지고 대신에 예수님 안에서 느끼는 새로운 기쁨, 예수님을 모든 삶의 주인으로 섬기려는 소망, 연약한 자들에 대한 이해, 곤궁한 자들에 대한 배려, 죄를 범하는 자들에 대한 용서, 그리고 심지어 잃어버린 자들에 대한 사랑이 흘러나오게 된다.” 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설교를 매 주일마다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함으로써 그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었고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힘과 동기를 제공해주는 것이 되었습니다(10~12).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니 이는 그들이 그 읽어 들려 준 말을 밝히 앎이라(12).” 이것이 바로 죠이선교교회가 추구하는 기쁨입니다. 오, 자비하신 주께서 이런 은혜를 저희에게 풍성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5.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는 예배를 주시옵소서.
오늘날의 교회에서 예배가 힘을 잃게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유흥적인 요소들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드라마와 기타 사람들의 관심을 유발시키는 다양한 방식을 사용할수록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배의 열쇠이고, 연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백성들이 가졌던 태도입니다. 이 예배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보십시오. 백성들이 수문 앞 광장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에스라에게 요청했습니다(1). 모세의 율법 책을 가져와 달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에스라가 주도적으로 행한 일이 아니라, 백성들이 요구함으로써 시작된 일입니다. 가족을 대표하는 남자들만이 아니라, 여자들 그리고 알아들을만한 모든 어린 자녀들까지 다 모였습니다. 그들은 새벽부터 정오까지 무려 5~6시간을 꼬박 읽어주는 율법 책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3). 5절에서는 에스라가 율법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섰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가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유대인 랍비들은 이 말씀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낭독되는 동안에는 서있어야 한다는 규칙을 만들어냈습니다. 지금도 이런 전통을 가지고 있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마음이고 태도입니다. 마치 굶주린 사람들처럼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원했고, 그 말씀 앞에서 경의를 표했고, 오랜 시간 그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본문은 오늘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가지는 이런 마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원하는 마음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원하는 마음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주일마다 예배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굶주린 사람처럼 그 말씀을 원하는 마음을 달라고 구하십시오. 정녕 우리는 그 말씀에 얼마나 배부름을 경험하고 살아갑니까? 아니, 정말 여러분이 그 말씀에 배불러 보셨다면, 여러분은 더욱 간절함으로 그 말씀을 찾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본 사람만이, 그 말씀으로 배부름을 경험해본 사람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할 때, 우리는 에스라 시대에 그 말씀을 인하여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불타오르며, 온갖 우상과 유혹거리를 짓밟아버리는 힘을 얻고, 거룩함을 이루고 싶은 소원을 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들으십시오. 성경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그 말씀 앞에 청종하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어디에서 생깁니까?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믿음이 어떻게 자랍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은 자랍니다. 주님께서는 귀있는 자들은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모두가 다 듣는다고 듣는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목말라 하십시오. 그 말씀을 원하십시오. 제게 그 말씀을 전해달라고 하십시오.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하면 어떻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말씀합니다. 그 말씀을 듣지 않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들으십시오. 이것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은혜입니다. 그리고 저를 위해서 쉬지 말고 기도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주님에 대한 애정으로 우리의 마음을 가득 차게 하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복음만이 주는 위로, 하늘의 기쁨으로 성도들의 가슴을 충만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말입니다. 오, 주님께서 이런 말씀으로 우리의 예배 가운데 말씀하시고, 우리는 그 말씀을 경험하는 예배를 이 한 해 동안만이 아니라 남은 평생에 허락하여 주시기를 구하십시다. 이 말씀만이 죽은 영혼을 살리는 능력입니다. 이 말씀만이 우리로 예배하게 합니다. 이 말씀만이 성도를 믿음에서 자라게 하는 유일한 양식입니다. 이 말씀만이 우리를 하늘의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는 축복의 원천입니다. 이 말씀을 사랑하십시오. 매일 읽으십시오. 외우십시오. 그리고 귀를 기울여 들으십시오. 이 말씀을 경험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