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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오해에서 확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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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에서 확신으로 29 - 하나님 중심적 예배 (9) - 감사와 헌상

역대상 29:9-17, 로마서 11:35-3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3-12-29

말씀내용
<감사와 헌상> 대상 29:9~17; 롬 11:35~36



1. 예배의 흐름 속에서 감사와 헌상의 배경
예배는 예배를 드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부르심으로써 죄인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예배하도록 부르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묵상할 때, 그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고 예배할 수 밖에 없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합당하지 않고 무가치한 우리들 자신을 보게 되고 이로 인하여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고 죄를 고백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다 제거하시고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선언하십니다. 죄 사함의 은총을 새롭게 경험한 하나님의 백성은 이제 무엇을 하게 될까요? 그는 감사의 제사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됩니다. 감사는 그저 말로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모든 것 가운데서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신자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표현하게 됩니다. 이것이 헌상입니다. 헌상이라는 말은 익숙한 말이 아닙니다. 헌금이라는 표현이 가지는 한계 때문에 헌상이 더 성경적이라고 몇 주 전에 설명 드렸지요? 돈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에 계신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주제를 다룰 때 일단은 헌금과 헌상이라는 단어를 혼용해서 사용할 것입니다.

2. 헌금에 관한 오해들
헌금이라는 주제는 민감한 사안입니다. 잘못된 목사님들이나 부흥사들이 가르친 잘못된 헌금 강요 때문에 이 주제는 더 예민한 주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헌금을 말씀으로 배우지 못한 채, 경험으로만 배우게 되는데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신앙 습관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한 번의 설교를 통해서 헌금을 온전히 배울 수는 없으나 그 원리를 기본적으로 교정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A. 헌금은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다(빌 4:18).
어떤 사람들에게 헌금이 어떤 사람에게 주는 것이라는 인식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라면 목사들이 대부분일 텐데, 이것은 목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이나 잘못된 관행으로 인하여 생긴 문제일 것입니다. 최근에도 잘 알려진 한 한국 교회에서 불거진 목회자 사례비 문제로 또 한 번 매스컴이 들썩거린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일을 볼 때 사람들은 헌금을 목사에게 바친다는 부정적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헌금은 사람에게, 사람을 위해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십일조와 헌물이라는 제도를 두시고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몫을 정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헌금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린 것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회가 ‘자기에게 보낸’ 헌금에 대해서 이렇게 빌립보 교회에게 썼습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빌 4:18).”

B. 헌금은 교회 운영을 위한 실용적 목적을 위해서 드리는 것이 아니다(대상 29:9,14).
같은 원리로, 헌금은 교회라는 조직 운영을 위한 회비가 아닙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런 방식으로 생각합니다. 교회가 운영되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예배당이나 시설에 소용되는 비용이나, 목회자의 생활비, 교육과 구제와 선교 그리고 기타 부대 비용들이 분명히 필요합니다. 그러나 헌금은 교회의 운영 자금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분명히 성전 건축을 위해서 자기 생애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하여 자기에게 있는 모든 물질을 다 드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백성들도 이런 왕의 마음과 태도에 감동하여 기쁨으로 물질을 드렸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물리적 건물을 위한 실용적 비용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보십시오. 9절에 “저희가 성심으로 여호와께 즐거이 드림이며”라고 했습니다. 또 14절에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라고 다윗은 고백합니다. 이것은 건축 자금이기 전에, 하나님께 드린 예물이었습니다. 이 차이는 실로 큽니다. 헌금은 단지 좋은 일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예배의 행위입니다. 물론 우리가 드리는 헌금은 교회의 운영을 위해서 사용되는 실용적 비용이 됩니다. 그러나 성도가 헌금을 드리는 것은 단지 그것을 위한 것이기 전에, 하나님께 드려지는 헌금인 것입니다.

C. 하나님께서 뭔가 부족하셔서 드리는 것이 아니다(대상 29:11~12; 롬 11:36; 말 3:8~9).
또 하나 헌금과 관련된 오해는 하나님께 드리기는 하는데, 하나님께서도 일을 하시려면 돈이 필요하시지 않은가 하는 생각입니다. 연로하신 부모님께 자식이 용돈을 드리는 것처럼 헌금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하나님을 모독하는 생각이 또 있을까요? 다윗의 고백을 다시 보십시오. 11~12절입니다.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나 자신을 비롯해서 만물이 그렇습니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았다’고 말합니다. 내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게 아닙니다. 본래 하나님의 것,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내 존재와 소유 가운데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헌금은 바로 이런 고백, 이런 인정 아래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라고 찬송합니다(롬 11:36). 말라기 선지자가 십일조를 하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지적한 것이 바로 이런 맥락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말 3:8~9).”

D. 헌금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사는 것이 아니다(말 3:10; 롬 11:35; 대상 29:13).
우리가 마지막으로 다룰 헌금에 대한 오해는 헌금을 뇌물로 여기는 태도입니다. 헌금을 드려서 하나님이 감동을 하심으로 나에게 더 많이 갚아주시게 하려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다분히 잘못된 부흥사들과 같은 이들의 가르침을 통해서 주어진 것 같습니다. 바로 앞에서 인용한 말라기 선지자의 말씀에 이어지는 3:10 말씀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 때문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이 말씀은 헌금을 많이 내면 하나님께서 더블로 갚아주시니까 손해가 아니다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탐욕을 부추겨서 헌금을 내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확실성을 하나님께서 스스로 보장하시는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는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롬 11:35)”라고 했습니다 .아무도 하나님께 빚을 지게 만들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36절에서 설명하듯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빚진 자요, 하나님께서 제공해주신 모든 것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헌금을 하면서, “이만하면 하나님이 감동하실거야”라고 생각하면서 뭔가를 기대하는 것이 합당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헌금을 드리는 것은 잡신을 섬기는 것이고, 종교에 불과한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본질적으로 헌금을 감사의 표현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13절에서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합당한 헌금의 자세입니다.

3. 헌금/헌상의 원리
그러면 이제 헌금/헌상의 긍정적 원리를 생각해보겠습니다.

A. 대표성(대상 29:14~16; 고후 8:5)
헌금에는 대표성이 있습니다. 비록 헌금, 즉 금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만, 그 금전은 단순히 금전이 아니라, 금전을 드리는 사람 자신, 그리고 그 사람에게 속한 모든 것을 대표하는 것일 뿐입니다. 자신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사는 것임을 알기에, 그리고 자신이 누리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알기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나에게 있는 모든 것, 재물, 건강, 능력, 재능 모든 것을 다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유일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으로 드리는 것이다. “다 주님의 것입니다. 쓰시옵소서.” 헌금이라는 말보다는 헌상이라는 말이 보다 적합하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헌상이 의미하는 대표성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일 예배에서 헌상을 합니다. 그러나 이 헌상은 시간에 있어서도 대표성을 지닙니다. 비록 주일 예배의 한 순간에 우리는 헌상을 하지만, 이 헌상은 우리의 매일, 매 순간을 대표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모든 시간이 다 저의 헌상입니다”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윗은 오늘 본문에서 잘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가 주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려고 미리 저축한 이 모든 물건이 다 주의 손에서 왔사오니 다 주의 것이니이다(14~16).” 이것이 헌상입니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 사도는 마게도냐 교회의 모범을 소개합니다.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고후 8:5).” 그들은 물질만이 아니라, 자신을 드리는 헌상을 한 것입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헌금을 한 것인가, 헌상을 한 것인가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더 생각할 점은 헌상이 개별적이고 개인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에서 헌상을 할 때, 각 개인이 드리는 헌상만이 아니라, 공동체가 하나로 헌금을 모아서 하나님께 헌상을 합니다. 이것은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께 자신을 헌상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것을 ‘나와 나의 백성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14).

B. 실용성(대하 31:4~5; 고전 9:9)
두 번째는 헌금의 실용성입니다. 반복하지만 헌금/헌상은 교회의 운영자금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일차적으로 헌상은 하나님께 드리는 나의 헌신의 표현입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께 드려진 물질을 사용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린 헌금을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분명한 원리에 맞게 사용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 자신이 일차적으로 하나님께 가지는 책임이고, 헌금을 하나님께 드린 교인들에 대한 책임은 이차적입니다. 제가 이차적이라고 표현할 때, 그 책임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 중심적 사고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차이입니다. 이 차이를 놓치면, 자칫 교인들은 내가 목사님의 생활비를 댄다든지, 내가 교회를 운영한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의 신앙은 무너지게 되는 법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헌상한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게 됩니다. 이것이 제대로 되려면, 정말 믿음이 성숙한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로 세워져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가 성경에서 가르치는 지도자의 요건들을 무시하기 시작하면서 많은 문제들을 초래하게 된 것은 자업자득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의 비용에는 기본적으로 교회가 존재하기 위한 필수 비용이 있습니다. 건물이나 시설, 그리고 목회자의 생활비 등일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은 교육과 구제 그리고 선교를 포함합니다. 이것은 사실상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에서 공히 강조된 원리입니다. 구약의 역사를 보면 슬프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일조와 헌물을 하나님께 제대로 바쳤던 경우가 매우 드물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먹고 살 길을 찾기 위해서 방황하게 되었고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충실하지 못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삶이 한층 더 피폐해지는 악순환을 낳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신앙을 개혁할 때 백성들에게 십일조를 드리라고 명했던 것입니다. “또 예루살렘에 거한 백성을 명하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응식을 주어 저희로 여호와의 율법을 힘쓰게 하라 한지라. 왕의 명령이 내리자 곧 이스라엘 자손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꿀과 밭의 모든 소산의 처음 것을 풍성히 드렸고 또 모든 것의 십일조를 많이 가져왔으며(대하 31:4~5).”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이 율법에 힘써야만 하나님의 백성의 영적 삶이 회복될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신약의 원리도 동일합니다. 바울 사도는 신명기 25:4을 인용하여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고전 9:9)”고 함으로써 교회에서 전임으로 말씀 사역을 하는 사람들의 생활을 위한 용도를 분명하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제가 하나 더 언급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있습니다. 말씀 사역자가 헌상을 통해서 공급을 받을 때 가지게 되는 마땅한 태도입니다. 그는 일차적으로 하나님께 감사 드려야 합니다. 공급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헌상을 통해서 공급받는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그들에게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이고 합당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빌립보서 4:18을 통해서 보여주는 태도입니다.

C. 헌상은 믿음으로만 드려질 수 있다.
헌상의 세번째 원리는 헌상은 믿음으로만 드려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드리는 헌금이나 헌상이 우리 자신의 의로움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통해서만 의롭고 흠 없는 제물이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예배자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이미 우리는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결코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와서 예배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면 하나님의 진노 밖에는 받을 것이 없는 존재임을 압니다. 그리고 죄 용서와 하나님께 받아들여짐에 대한 감사를 담아서 우리는 헌상을 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의 헌상이 믿음으로 하는 헌상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는 헌상은 자기의를 낳지 않습니다. “내가 헌금을 이만큼 했다”고 하는 생각이 남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헌상을 하지 않을 때, 남는 것은 자기의 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지도자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심정이 생기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그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물을 드린 것이 아니라, 교회의 운영비를 낸 이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의 대우를 요구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결국 그의 믿음을 허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헌금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지 않을 때를 제외한다면, 헌금을 드리고 나서 시험에 드는 대다수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D. 헌상하는 믿음은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이다(갈 5:6; 고후 8:2, 20; 9:5,11,13).
마지막으로 언급하려는 헌상의 원리는 헌상하는 믿음은 또한 사랑으로 역사하는(표현되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믿음은 사랑과 결코 분리되는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사랑으로 표현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 고린도후서에서 헌금에 해당되어 사용되는 용어가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가 언급하는 연보라는 말인데, 예루살렘의 극심한 기근으로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한 구제 헌금을 의미합니다. ‘연보’로 번역된 이 용어는 사실 고린도후서 8~9장에서만 헬라어로 세 가지 용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풍성함을 뜻하는 ‘hadrotes’(고후 8:20), 관대하게 나누는 마음이나 태도를 가리키는‘haplotes’(고후 8:2; 9:11,13),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하나님의 축복을 의미하지만, 풍성함이라는 뜻도 포함하는 ‘eulogia’(고후 9:5)라는 단어들이 사용되었고, 이것들을 모두 한글개역성경은 연보라고 번역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축복과 은혜를 ‘부족한’ 사람들과 나눈다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런 사랑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헌상하는 믿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것을 우리 교회는 ‘나눔 헌금’ 또는 ‘코이노니아 헌금’이라는 이름으로 행합니다. 단순히 내가 어떤 부족한 형제에게 주어 돕는 것이 아닙니다. 일차적으로 나는 하나님께 헌상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용도로 형제 사랑을 표현하고 싶다고 지정할 때, 그 헌금은 그 형제에게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은혜로 전달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헌상의 바른 정신입니다.

4. 적용
우리는 이제 실제적인 적용의 문제를 다루어 보겠습니다.

A. 얼마를 드릴 것인가?(고후 9:7,13; 마 6:21)
먼저 다룰 문제는 얼마를 드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기본 원리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9:7입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마음에 정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색함이나 억지가 개입되면 그것은 이미 헌금이 아닙니다. 연보는 그 뜻이 풍성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는 표현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얻어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은 자로서 마땅한 행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헌상은 믿음이 아니고서는 바르게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헌상에 있어서 인색하거나 게으르다면, 그는 실상 믿음을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고후 9:13)”라고 쓴 것은 이 헌상으로서 자신들의 믿음을 증명하라는 말입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는 주님의 말씀은 합당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정하십시오. 내가 새해에는 어떻게 헌금을 드려야겠다고 정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액수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감사와 사랑이 여기에 필연적으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B. 어떻게 드릴 것인가?
얼마를 드릴 것인가의 문제와 함께 어떻게 드릴 것인가의 문제도 있습니다. 십일조와 각종 헌금의 종류가 있습니다. 크게는 십일조와 헌금으로 나눌 수 있는데 모두를 우리는 헌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가져오라고 정해주신 몫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마치 세금과 같은 개념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의무입니다. 이외에는 헌금(offering)이 있습니다. 헌금이 조금 전에 언급한 것처럼 마음에 정해서 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이미 정해주신 기준이므로 우리가 타협할 성질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에 십일조는 구약 율법인가, 신약시대에도 유효한가의 문제는 여전히 많은 논난이 있습니다. 그 논의를 차치하고,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1/10의 기준선은 매우 합리적으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우리의 믿음의 표현의 최저선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가 최저선이라고 하는 것은, 십일조 즉 1/10을 헌상했을 때, 나는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십일조 외에 그들은 각종 헌물을 하나님께 가지고 왔습니다. 매일 아침과 저녁에 드려지는 번제가 있었고 여기에 소용될 번제물이 필요했습니다. 각종 낙헌제(감사제)로 드려지는 제물이 있었고, 소제로 그들이 추수한 곡식 즉 수고의 소산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런 구약의 원리들을 율법적으로 지킬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원리를 따라서 생각할 때, 십일조를 드리고 때때로 감사헌금을 드리는 것, 그리고 절기에 빈 손으로 하나님께 나아오지 않았듯이 연중에 신년, 부활절, 감사절, 성탄절에 특별한 헌상을 드리는 것은 합당합니다. 그리고 매주일에 드리는 주정헌금도 중요합니다. 때로 우리는 십일조만 드린다고 생각할 때, 봉급을 받았을 때만 드리기 쉽지만, 여러분이 매 주일 예배를 드릴 때 헌상을 하는 것이 더 합당하고 성경적이라고 권면을 드립니다. 그러므로 주정헌금도 여러분이 마음에 정하여 매 주일 하시는 것이 좋다고 저는 개인적으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이것은 새로운 율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제가 이 ‘어떻게’의 문제와 관련해서 한 가지 여러분께 말씀드릴 것은, 우리 교회가 헌상을 하는 방식을 조금 변경하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예배 중에 헌금 바구니를 돌리는 것을 더 이상 하지 않고, 여러분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예배당에 들어오실 때, 미리 준비하신 헌금을 준비된 헌금함에 넣고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배 중에 우리는 공동체 전체의 헌상을 하나님께 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헌상의 시간에 급하게 헌금을 준비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고, 미리 준비하여 하나님께 드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5. 결론: 감사를 넘어 장래의 은혜에 대한 믿음으로!(고후 9:8)
근본적으로 헌상은 우리의 감사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과 사랑으로 또한 표현됩니다. 그 믿음은 장래의 은혜에 대한 믿음을 포함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헌금을 드리기 부족함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사정을 모르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지만 내 필요한 것, 원하는 것은 아무리 없어도 하는데, 헌금에 있어서는 항상 우선순위가 밀리는 것이 아닌가 돌아보십시오. 그것은 합당한 신앙의 자세가 아닙니다. 헌상의 믿음은 지금 현재 가지고 있는 돈으로 먹고 사는 것이 아니며, 내 삶에 언제나 최상의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지속적인 신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언제나?과거와 현재와 미래에도?채우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감사를 넘어 장래의 은혜에 대한 믿음으로 헌상을 하시라는 것은, 있거나 없거나, 부족하거나 넘치거나 항상 하나님께 최우선순위를 드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돈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삶,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시는 자녀들의 삶에 원하시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9:8 입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이런 방식의 삶 속에서 헌상은 예배의 한 순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이 되고,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려지는 것입니다. 새해 2014년에 그리고 우리의 남은 평생에 하나님께서 이런 복된 은혜를 우리 모두에게 허락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