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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오해에서 확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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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에서 확신으로 28 - 하나님 중심적 예배 (8) - 고백과 회개

느헤미야 8:1-1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3-12-22

말씀내용
<고백과 회개> 느 8:1~12



1. 예배는 기독교 복음과 신자의 삶의 압축판이다.
<하나님 중심적 예배>라는 주제를 생각할 때, 여러분이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내용은 예배는 기독교 복음과 신자의 삶의 압축판이라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신자는 복음을 다시 보고 듣고 고백하고 느낍니다. 그리고 이 예배가 신자의 삶의 중심이자 동력이 될 때, 그의 삶은 복음을 나타내고 드러내고 살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은 한 마디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이고 이로써 복음을 경험하는 삶입니다. 신자가 자신의 삶에서 영적 무력함을 경험한다면 그가 회복해야 하는 것은 예배입니다. 예배의 회복이 없이 신자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정상적으로 회복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반면, 예배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여러분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서 더 이상 복음을 새롭게 경험하지 못한다면 여러분의 삶이 무너지는 신호라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배는 기독교 복음과 신자의 삶의 압축판입니다.

2. 신앙고백
A. 진리 안에서 하나가 되는 교회
오늘 우리가 다룰 주제는 예배에 있어서 고백과 회개의 요소입니다. 고백과 회개는 별도의 주제지만, 함께 다루려고 합니다. 먼저 고백이라는 요소를 생각해보지요. ‘고백’이라고 할 때, 여러분은 무엇을 연상하십니까? 아마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것을 생각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 중에는 ‘사도신경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겠습니다’라는 예배 멘트에 익숙한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왜 우리 교회는 사도신경을 하지 않느냐고 물어보는 분들도 계십니다. 처음 몇 년 동안 했었지요. 그러나 어떻게 하면 이것이 우리의 습관적이고 형식적인 ‘읽기’나 ‘암송’이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저의 고민이었습니다.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신앙 고백이 예배 가운데 반드시 필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왜 많은 교회가 예배 시간에 사도신경을 함께 고백합니까? 신앙고백을 사도신경을 통해서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고백은 교회가 믿는 신앙의 기본이 되는 내용을 입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이 진리 안에서 하나임을 선포하고, 또 역사 속에 진리를 믿고 고백한 모든 교회와 하나가 되며, 같은 시대에 전세계에 퍼져 있는, 진리를 고백하는 모든 교회와의 연대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최초의 예루살렘 교회 그리고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해서 세워진 이방인의 많은 교회들과 시대를 뛰어넘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그 장엄한 예배에서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어서 경험하게 될 예배를 맛보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아프리카에서 참된 복음의 진리, 사도가 전했던 그 진리를 고백하는 교회들과 하나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역사적으로 가장 오랜 신앙고백 문서에 속하고 보편적으로 하나님의 모든 교회가 자신들의 신앙의 내용이라고 믿었던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방식이 된 것입니다.

B. 참 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분하는 기준
또한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참된 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별하는 가장 두드러진 기준입니다. 만일 사도신경과 같은 교리적 진술을 신앙고백으로 할 때 이것을 신앙의 내용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참된 기독교회일 수 없는 것이고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스스로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슬프게도 오늘날 명목상으로는 사도신경을 자신들의 고백으로 가지고 있고 예배 시간에 여전히 읽고 있지만, 그 내용을 부인하는 교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셨고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셨다는 사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대속 형벌로서의 죽음을 믿는 교회들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2000년의 교회 역사는 신앙고백의 역사였습니다. 역사적으로 이단들이 발흥할 때마다 교회는 자신이 믿는 분명한 신앙의 내용을 기록된 문서의 형태로 만들어 고백함으로써 진리를 밝혔습니다. 그러므로 신앙 고백은 단순한 진술이 아니라, 시대 시대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목숨을 걸고 고백해야 했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안한 때의 고백은 쉽지만, 핍박과 박해의 때에도 이 신앙의 내용을 생명을 걸고 고백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된 하나님의 교회는 언제나 이것을 고백했습니다.

C. 자녀 세대와 세상을 향한 선언
신앙고백이 지니는 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분명하게 고백함으로써 우리는 자녀들의 세대에게 우리의 믿음을 추상적 형태로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매우 분명하게 진술되고 기록된 형태로 전하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함께 예배를 드릴 때, 신앙고백은 “자녀들아, 우리는 바로 이런 하나님을 믿는다고 분명하게 고백한단다. 이것이 너희가 믿고 고백해야 할 신앙의 내용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뿐이 아닙니다. 우리는 신앙고백을 통해서 이 세상을 향해서 교회가 믿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분명한 형태로 선포합니다. 단지 우리는 세상을 향해서 그냥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는다”라고 분명하게 우리의 믿음과 그 믿음의 내용을 선언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D. 어떻게 신앙고백을 할 것인가?
그러면 예배에서 어떻게 신앙고백을 하는 것이 좋을까요? 물론 사도신경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형태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종종 형식적이 되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성경에 나오는 고백적 선포들을 그대로 교독을 하거나 합독을 함으로써 할 수도 있습니다. 가령, 유대인들의 가장 중요한 고백은 신명기 6:4~5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우리는 시편이나 신약 성경의 서신서의 어느 구절들을 읽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역사적 신조와 고백들의 부분들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형식은 찬송을 통한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은 아마 우리가 예배의 흐름을 중요하게 생각할 때, 가장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가령, “이 몸의 소망 무언가”와 같은 찬송도 좋은 신앙고백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몸의 소망 무언가 / 우리 주 예수 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 믿을 이 아주 없도다
주 나의 반석이시니 / 그 위에 내가 서리라 /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우리는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묵상하며 찬송하게 될 뿐 아니라, 신앙의 내용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찬양을 통해서 신앙을 고백하는데에는 물론 장점과 약점이 있습니다. 단점은 찬양의 가사 가운데 우리가 믿는 믿음의 도리를 충분하고도 분명하게 기술한 것을 찾기 어렵기 때문에, 부분적인 내용을 고백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고, 장점은 곡조를 가진 찬송으로 부름으로써 더욱 마음의 감동으로 고백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단점은 다른 말씀의 가르침으로 보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배를 드릴 때, 단순히 찬송을 따라 부른다는 태도에서 더 나아가 ‘아, 지금 우리가 우리의 신앙의 내용을 이 찬송을 통해서 고백하고 있구나’하는 것을 아시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3. 회개?죄의 고백
이제 우리가 또 하나 생각할 또 하나의 고백은 죄의 고백 즉 회개입니다. 예배에서 여러분은 회개를 경험하십니까? 예배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계시되고 알려질 때, 우리는 죄를 인식하게 됩니다. 예배에서 죄의 고백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예배의 대상이신 거룩하신 하나님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고 그렇게 될 때 그 예배는 예배의 참 의미를 잃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이 없이는 회개도 없습니다. 적지 않은 교회들이 예배 순서에 죄의 고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죄의 고백 시간에 참된 회개가 일어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교회당 정문에 붙였던 95개 신조의 첫번째 항목인 “신자의 전 생애는 회개다”라는 말을 썼을 때, 이미 당시의 교회는 고해성사를 일상적으로 행하고 있었습니다. 고해성사가 회개라고 믿었고, 뿐만 아니라, 죄를 용서받는 수단으로 면죄부가 있었습니다. 이런 형식적 관행들 속에서 참된 회개가 일어나지 않는 것을 마틴 루터는 보았습니다. 게다가 면죄부는 로마 교황이 돈을 벌기 위해서 종교를 이용하는 타락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오늘날 면죄부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배 안에서 행해지는 죄의 고백이라는 순서가 또 하나의 면죄부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운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이 점에서 저는 다시 한 번 여러분에게 예배를 드릴 때,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찬양하고 묵상하는 첫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예배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기 위해서 우리가 준비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예배를 준비하는 것 이상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여러분이 자라가셔야 합니다. 이보다 더 예배의 삶으로 우리를 준비시키는 것은 없습니다.

4. 본문: 수문 앞 광장의 부흥
오늘 읽은 본문은 주전 444년의 나팔절에 일어난 일입니다. 나팔절은 일곱째 달(7월) 초하루인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원래 사용하던 민간 달력으로 이 날은 신년을 시작하는 신년제에 해당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본래 사용하던 민간력이 있었고, 출애굽을 하게 된 유월절을 기준으로 하는 종교력(혹은 성서력)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상 생활에서는 민간력을 사용했는데 본문에 일곱째 달이라고 하는 것은 종교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일곱째 달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매우 특별한 달이었습니다 1일이 나팔절, 신년제였고, 10일에 속죄일(욤 키퍼)이 있었고, 이어서 초막절이 15~21일에 그리고 초막절의 팔일째인 7월 22일은 큰 날, 거룩한 성회로 모이는 날이었습니다. 2절에 보면 남자, 여자, 알아들을만한 모든 사람이 모여서 에스라가 율법책을 낭독해주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마 이때는 7년에 한 번 오는 안식년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모세의 율법에 7년째 되는 해의 초막절에는 이스라엘 모든 남녀와 어린 아이들과 성 안의 타국인까지 다 모여서 율법을 읽어주는 것을 듣고 배워 지키게 하라는 규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신 31:10~13). 물론 이 때가 초막절이 아니지만, 이들이 먼저 이렇게 모여서 은혜를 구했는지 모르겠습니다. 3절에 새벽부터 정오까지 그들이 율법책을 낭독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 것으로 볼 때, 거의 4~5시간 정도 지속되었던 것 같습니다. 에스라가 율법을 낭독하기 위해서 먼저 하나님을 송축할 때, 백성들은 손을 들고 ‘아멘 아멘’으로 응답하면서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습니다(6).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 때, 예배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낭독되는 율법책의 뜻을 레위인들이 해석해주자 백성들이 깨닫게 되는데, 깨닫자 그들은 울기 했습니다(9). 이것은 분명히 그들의 회개를 보여줍니다. 총독 느헤미야와 에스라는 이 날이 기쁜 신년제이므로, 슬퍼하고 울지 말라고 하고 느헤미야는 고기와 음식을 먹으라고 하고 준비하지 못한 가난한 자들에게는 나누어주면서 말했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10).” 그리고 백성들은 지도자들의 말대로 먹고 마시고 나누면서 크게 즐거워했는데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힙니다. “그들이 그 읽어 들린 말을 밝히 앎이니라(12).”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이 들려졌고 그들이 그 말씀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이어지는 말씀들을 읽게 되면 우리는 이 일이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튿날 백성의 지도자들은 율법의 말씀의 의미를 더 밝히 깨닫고 싶어서 학사 에스라에게 다시 나아왔습니다(13). 그리고 이어지는 초막절에 에스라는 첫날부터 끝날까지 7일 동안 꼬박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해주었습니다(18). 초막절이 끝나고 7월 25일 백성들은 다시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를 입고 티끌을 무릅쓰고 자기들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 회개했습니다(9:1~2). 역시 이날에도 율법책은 약 3시간 동안(낮 사분지 일) 낭독되었고, 또 3시간 동안은 죄를 자복하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9:3). 약 2450년 전에 하나님의 백성이 드렸던 예배의 모습입니다.

A. 회개는 감정적으로 조작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회개가 감정적으로 조작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봅니다. 조작은 커녕 지도자들은 그들의 슬퍼 우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곳에서 회개를 감정적으로 조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음악이 있어야 하고,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조명과 음향을 최대한도로 사용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런 시도를 완전히 배격합니다. 인간적으로 회개를 만들어내려는 시도는 조금도 없었습니다. 이들의 회개는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그들에게 읽어줄 때, 오직 그 말씀을 사용하여 성령님께서 일하신 결과였습니다. 다른 설명은 불가능합니다. 아메리칸 인디언의 선교사였던 데이빗 브레이너드의 일기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내가 공개적으로, 그러나 심하지는 않은 말로 울지 말라고 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무서운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충만하고 부족함이 없는 공로를 그들에게 제시하고 그분이 자신에게 오는 모든 자를 기꺼이 구원하신다고 말했으며, 그럼으로써 그들에게 기쁨으로 나오라고 했을 뿐인데도 어떤 사람들은 강하게 선포된 몇 마디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그로 인해 사람들이 영혼의 아픔을 느끼며 울기 시작했다.” 회개는 감정적으로 조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회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면하게 될 때, 성령님께서 우리의 심령 안에 행하시는 신적인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역사를 집단적으로 허락하셨던 것이 바로 부흥의 역사였습니다.

B. 회개는 죄의 지적만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회개에 대한 한 부정적 견해를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회개를 말하면 부정적이고 정죄하는 분위기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닙니다. 제리 브리지스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확신이 없이는 회개할 수 없다”고 바르게 지적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죄악을 용서하시는 자비롭고 선하신 분임을 확신하기까지 죄인은 결코 참된 회개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존 파이퍼는 회개를 이렇게 잘 설명했습니다.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죄에 대한 뉘우침으로 시작되는 철저한 순종의 강력하고 고통스러운 행동은 하나님 안에 있는 즐거움을 깨닫고 맛보는 데서 유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울음과 통회가 참되고 복음적이려면 단지 고통의 위협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데 대한 아픈 가슴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자신이 거룩하지 못한 것 때문에 울기 위해서는 거룩을 하나님에 대한 소중한 경험과 묵상으로 갈망해야 합니다...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것을 진정으로 슬퍼하게 하려면 하나님의 영광 안에 있는 기쁨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적 회개는 하나님의 거룩의 매혹적인 모습에 기초합니다. 형제들이여, 양떼가 즐거움을 통해 회개에 이르게 하라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죄인이 참으로 회개하려면 죄의 지적, 정죄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깊이 알게 될 때, 그 영광의 빛 아래서 그는 자신의 더러움을 보고 깊이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탕자는 아버지 집의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아버지의 용서와 자비를 확신했기에 아버지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회개는 부정적이고 정죄하는 분위기만이 아니라, 참된 용서의 기쁨과 소망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이것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C. 회개의 결과는 달콤하다.
그래서 참된 회개의 결과는 언제나 달콤하고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을 가져다 줍니다. 본문에서 지도자들은 근심하고 슬피 우는 백성들에게 기뻐하라고 말했습니다. 백성들의 슬픔과 울음은 큰 기쁨과 즐거움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회개가 거짓이었거나 순간적인 감정이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가 아닙니다. 도리어 그들의 회개가 진짜 회개였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회개는 언제나 달콤한 결과, 곧 즐거움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만일 회개가 처음부터 끝까지 고통스럽고 쓰기만 한 것이라면 그것은 참된 복음적 회개가 아닌 율법적/종교적 회개입니다. 종교적 회개는 아무리 회개를 해도 아무런 죄용서의 확신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용납되었다고 선언합니다. 복음은 우리가 아무리 깊은 죄를 자백해도 하나님께서 쫓아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복음은 우리 소망이 우리 자신의 의가 아닌 그리스도의 의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회개를 통해서 용서받을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의 통회가 충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버림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이 죄인으로 하여금 자기의 죄를 고백하게 만들고, 회개하는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즐거움과 달콤함을 주는 것입니다. 회개 자체는 죄에 대한 슬픔을 포함하기에 씁쓸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씁쓸함 뒤에는 달콤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도자들의 말을 듣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할 수 있었다는 것은 도리어 그들의 회개의 진정성을 설명해주는 증거인 것입니다.

5. 고백 없는 예배에서 고백이 풍성한 예배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할 때 예배자들이 하는 두 가지 고백을 다루었습니다. 첫째는 신앙고백이고 둘째는 죄의 고백 곧 회개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지금까지 여러분이 드리신 예배는 얼마나 여러분 자신의 고백이 있는 예배였습니다. 찬송을 부르실 때 여러분은 얼마나 여러분 자신의 가슴에서 나온는 신앙의 고백으로 그 찬송을 부르셨습니까? 기도할 때, 여러분은 얼마나 여러분 자신의 참된 신앙고백으로, 그리고 죄의 고백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셨습니까? 여러분의 예배에는 고백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질 때, 여러분은 얼마나 ‘아, 이것은 저의 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그런 분이십니다’하는 가슴의 고백으로 그 진리의 말씀에 반응하셨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 많은 예배가 고백을 잃어버린 채 드려지고 있습니다. 고백이 없다면 거기에는 형식만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예배를 싫어하십니다. 그것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고 하셨습니다(사 1:12). 가져온 제물은 있었습니다. 안식일과 절기마다 그들은 성전에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런 예배를 하나님은 견디지 못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주일마다 모든 교회당에서 예배가 드려집니다. 헌금도 드려집니다. 그러나 고백이 없습니다. 여러분, 예배를 준비하실 때 입술의 열매를 준비하십시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사랑하는 여러분, 고백이 없던 예배가 고백으로 풍성한 예배가 되는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이 그런 부드러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올 때,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통해서 당신의 선하심을 더욱 놀랍게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진리의 말씀을 밝히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또 얼마나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겠습니까? 오, 하나님께서 그런 복된 은혜를 우리와 우리의 예배 가운데 부어주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