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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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에서 확신으로 27 - 하나님 중심적 예배 (7) - 무엇이 예배를 거룩하게 하는가

창세기 28:16-1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3-12-15

말씀내용
<무엇이 예배를 거룩하게 하는가> 창 28:16~18



1. 야곱 이야기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가로채고 도주하는 야곱의 머릿 속에는 자기에게 복수하려는 형 에서로부터 안전하게 도망해야 한다는 두려운 생각, 그리고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어떤 일을 겪게 될지, 곧 안전하게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장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자기가 직면한 문제들 외에 다른 아무 관심도 없었을 것입니다. 본문은 그런 야곱이 형 에서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는 그런 생각 속에서 길을 가다가 해가 져서 유숙하려고 돌을 베개 삼아 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꿈을 꾸었습니다. 그 내용이 창세기 28:12~15입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은 아버지 이삭과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이 외딴 곳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통해서 들어왔던 하나님을 처음으로 경험합니다. 이 꿈 때문에 잠이 깬 야곱은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그는 두려워서 말합니다.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그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베개삼았던 돌을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습니다. 이것은 예배의 행위입니다. 잘 알려진 이 이야기는 자신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던 한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자, 그 인생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2. 다른 이야기들
우리는 이와 비슷한 이야기들을 성경에서 적지 않게 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반응을 하는가를 보여주는 이야기들입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의 세월을 목자로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멀리서 불이 붙었는데 타지는 않는 떨기나무를 보고 그 광경을 보려고 가까이 갔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을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고 말씀하십니다. 순간 모세는 두려워서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의 불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직접 십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하나님의 그 큰 불이 자기들을 삼킬 것 같았고 다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면 죽고 말 것이라고 느꼈습니다(신 5:25). 이번에는 가나안 정복이 시작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성에 가까이 갔을 때,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들고 마주 선 것을 보았습니다(수 5:13~15). 그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라고 소개됩니다. 여호와의 군대 장관은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모세가 불붙는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뵌 장면과 비슷합니다. 많은 성경 학자들은 이 사건을 하나님과의 만남 혹은 성육신하기 전의 그리스도의 현현이라고 말합니다. 이때 여호수아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낙성식을 할 때,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번제물과 제물들을 사르고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게 임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대하 7:1~3). 이때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성전에 감히 들어갈 수 없다고 느꼈고 이 현상을 지켜본 이스라엘 모든 백성은 그 자리에 엎드려 경배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선하시도다.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라고 찬송을 했습니다. 신약성경은 어떻습니까? 베드로가 주님을 만났을 때, 그가 주님의 신성을 인식했을 때 그는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말했습니다(눅 5;8). 예수님의 제자들이 한 번은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다가 광풍을 만났을 때, 주님께서 말씀으로 바람을 잠잠케 하시는 것을 목도한 후의 반응을 보십시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눅 4:41). 하나만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사도 요한이 영광을 입으신 주 예수님을 뵈었을 때 그는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었습니다(계 1:17). 이것들은 죄인이 하나님을 뵈었을 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었을 때 자연히 느끼게 된 반응들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보았을 때 즉각적으로 경험한 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이것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고 즉각적이고 본능적으로 경험하는 반응이었습니다. 야곱의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던 이사야 선지자도 성전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을 때, 즉각적으로 자기의 죄악과 부패함을 보게 되고 거의 자신의 존재가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해체되는 것같은 두려운 경험을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성경의 이런 사건들을 통해서 말씀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두려운 경험이다 하는 것입니다.

3. 거룩하신 하나님
왜 그럴까요?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때 두려움의 감정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본질상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도덕적으로 흠이 없다는 면에서 거룩함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거룩함의 부차적인 의미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거룩함의 일차적 의미는 ‘구별되다, 분리되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떤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타자성(otherness)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어합니다. 하나님은 본질상 우리와 다른 분이시고, 우리를 완전히 초월해 계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본질이 완전히 우리와 다른 존재를 상상도 경험도 못합니다. 이 피조 세계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그 어떤 것들도 결코 우리와 완전히 다를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처음으로 가서 보게 된 그랜드 캐년이나 이과수 폭포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역사를 보면 인간은 자연을 두려워했다는 사실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연의 규칙성이 아니라, 자연의 불규칙성 혹은 변칙성을 두려워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가 통제할 수 없다고 느끼는 대상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종교를 만들어냈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설명입니다. 하지만 본질상 자연은 하나님의 창조물에 불과합니다. 실로 인간이 자신과 완전히 다른 타자성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을 경험할 때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거룩하시다고 하는 것에 대한 설명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상 우리와 다르신 분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과 완전히 다른 존재이신 하나님을 경험할 때, ‘두려움’이라는 단어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런 특별한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루돌프 오토(Rudolf Otto)는 거룩함이 우리 인간 안에 불러 일으키는 두려움을 ‘두려운 신비(awful mystery)라고 잘 표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야곱이 꿈에 하나님을 보고 경험했던 것이고, 제가 나열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느꼈던 반응이었습니다. 루돌프 오토는 더 나아가 이 두려움은 “몸과 마음이 압도된 상태에서 인간이 자신의 피조성을 의식하는 것 즉, 인간이 거룩함을 경험할 때 느끼는 가장 확실한 감정”이라고 했습니다. 지난 금요예배에서 함께 상고한 말씀인 시편 8편이 그것을 너무나 잘 보여줍니다. 다윗은 창조주 하나님을 묵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광대한 자연을 바라봅니다. 거기서 미물에 불과한 자신의 무가치함을 마주하게 됩니다. R.C.스프로울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서 이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절대자와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절대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무한하신 분과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유한하다는 것을 의식한다.” 이것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때, 그분을 마주할 때 인간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할 수 없습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하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왕상 8:27).”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결코 용납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없이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습니다. 만일 솔로몬이 자기가 지은 성전이 성전이 너무나 화려하고 웅대해서 자기가 섬기는 하나님이 들어와 거하시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면 엄격하게 말해서 그는 우상을 숭배한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화려하고 거대한 건축물 안에 거할 수 있는 분이라면 그분은 결코 자기와 다를 바 없는 ‘비슷한’ 존재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루돌프 오토가 말한 ‘두려움의 신비’ 즉 두려움의 요소가 발생할 수 없는 것입니다.

4. 거룩한 예배
예배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이 말은 예배가 엄숙하게 진행되는 의식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종교적으로 잘 지어진 공간에서 행해지는 의식이라는 말도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고결한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배가 거룩하다고 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하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일단 오늘 말씀의 주제이자 질문에 답을 해야겠습니다. “무엇이 예배를 거룩하게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입니다. 무엇이 야곱으로 돌베개를 세워 기름을 붓고 그곳을 거룩한 성소를 삼게 했습니까? 그 돌이 특별한 돌이기 때문입니까?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대답은 오직 하나, 야곱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는 두려워하며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경험이 야곱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게 했고, 그의 예배를 거룩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것이 베개를 삼았던 평범한 돌을 거룩한 돌로 만든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고 경험하는 것만이 예배를 거룩하게 합니다. 그것은 거룩한 예배를 파생시킵니다.

5. 예배의 시작: 하나님의 속성을 선포하고 묵상하고 찬양함
예배가 예배의 대상이신 거룩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선포하고 묵상하고 찬양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합당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제일 먼저 교회는 예배를 시작할 때, 예배의 대상이 되시는 성 삼위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올려드리는 소위 ‘송영(doxology)’을 부릅니다. 그리고 나서 바로 그 하나님의 속성을 선포하고 묵상하고 찬양하게 됩니다. 가령, 우리는 ‘거룩, 거룩, 거룩’이라는 찬송을 부름으로써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찬송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거룩한 임재 가운데로 불러주십니다. 이때 예배자들은 자신들이 다른 분 앞에 와 있음을 느끼고 두려운 신비에 사로잡힙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심을 선포합니다. 찬송을 부를 때 우리는 그 하나님의 속성을 묵상합니다. 그리고 자연히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부정한 자임을 인식하게 되고 여기서 회개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리고 당연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또는 예배를 시작할 때 우리는 ‘오 신실하신 주, 내 아버지여’를 부를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너무나 신실하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무한한 감사와 함께 그 신실하신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도 신실하지 못한 우리 자신을 보고 인정하게 됩니다. 이것이 회개로 이어지는 당연한 과정이 됩니다.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한 채 일어나는 회개는 참된 회개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 찬송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찰스 웨슬리의 찬송시인 ‘내 주는 살아계시고’를 생각해보십시오.

내 주는 살아계시고 / 날 위해 비심을 / 그 주신 사랑 인하여 / 나 알게 되었네.
날 거룩하게 하시려고 / 주 작정하신 일 / 그 누가 반대하리요 / 곧 이뤄주시리.
주 다시 돌아오실 때 / 날 안다 하시고 / 또 나를 받아주실 줄 / 나 확신합니다.
내 안에 주님 계시고 / 주 안에 나 있어 / 그 한량없는 기쁨과 / 참 안식얻도다.

만일 이 찬송으로 우리가 예배를 시작했다면,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하셨겠습니까? “내가 지금 예배하는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시다. 나는 이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예배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시기에 너무나 합당하신 분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나서 우리는 그분의 사랑과 은혜에 마땅한 반응을 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믿음 없음을 보게 되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 그것이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모든 성품은 인간이 경험하거나 가질 수 있는 모든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즉 거룩하신 성품에 속한 것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그 어떤 찬송을 부르더라도 그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온전히 경험하게 될 때, 야곱과 다른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경험했던 바로 그 두려움, 경외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예배 전체를 거룩하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6. 예배를 ‘속되게’ 만드는 것
그렇다면 우리의 예배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속되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별 생각이나 준비 없이 그리고 우리가 지금 만왕의 왕이시며 창조주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식 조차 하지 않고 예배에 나아오는 경우는 언급 조차 할 필요가 없습니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사모함이 있고 기대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예배를 속되게 만드는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필요, 우리의 문제에서 예배를 시작하는 태도입니다. “내가 오늘 예배를 통해서 이 문제를 해결받아야겠다” 혹은 “기도 응답을 오늘 예배에서는 꼭 받아내야겠다”는 식의 태도들은 결코 거룩한 예배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거기에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다는 의식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뵌 사람들이 가졌던 두려움의 요소가 없습니다. 모든 관심이 자기 문제, 자기 필요에 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받으려는 절실한 필요를 가지고 친구나 어떤 사람에게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를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하나님을 부르게 한 후, 곧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구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이 우리의 기도를 거룩하게 합니까? 그가 지금 그저 자기의 소원 목록을 되뇌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구하는 가운데, 기도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지금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음을 인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이 사람의 기도는 거룩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에 있어서도 우리의 문제와 필요를 가지고 시작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예배와 마찬가지로 기도에 있어서도 거룩하신 하나님을 인식함으로써 시작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를 거룩한 예배가 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7. 예배의 ‘첫 일 분’!
그래서 예배의 ‘첫 일 분’이 중요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면해야 합니다. 예배의 첫 찬송에서 선포하고 묵상하고 찬양하는 그 거룩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인하여 우리는 두려운 신비를 경험하고 감격할 수 있고 그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지 못한 우리 자신을 보게 되고 죄를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설령, 내가 나의 절실한 필요에 눌려서 하나님께 나아왔을지라도, 예배의 첫 시간에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 우리가 찬송하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 고백을 통해서 우리는 각성될 수 있습니다. “아, 내가 지금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앞에 나왔구나!”하는 두려운 신비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예배 인도자가 우리를 그렇게 몰고 가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면한 이사야가 했던 것처럼 우리의 부패함과 죄성을 보게 되고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우리의 모든 예배에서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예배를 시작하고 나서 10분이나 20분의 예열을 해야 예배에 몰입된다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그것은 모든 인간적이고 우리와 비슷한 대상들을 경험할 때에나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났을 때, 두려운 신비를 느끼고 그 하나님께 제대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시간이 필요했던 사람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고 찬송을 부를 때, 여러분은 바로 그 순간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 일생을, 아니 내 영원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심을 인하여 떨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라고 찬송을 부름으로써 시작하는 그 첫 일 분에 이미 세상에서는 경험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예수님의 그 거룩한 사랑을 인하여 그리고 나와 같이 연약함으로 온통 쌓여 있는 인생을 전능하신 힘으로 붙잡아 주시는 은혜 앞에 이미 감격하고 그분을 예배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치지 않고 ‘날 사랑하심 / 날 사랑하심 / 날 사랑하심 / 성경에 써있네’라고 부르고 또 부르는 예배, 이렇게 시작되는 예배를 저는 보고 싶습니다. 로버트 머리 맥체인(1813~1843)은 29세라는 젊은 나이에 주님 품으로 돌아간 스코틀랜드의 목사입니다. 그가 강단에 서서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오’ 하는 외침으로 기도를 하려고 할 때, 회중들이 벌써 감동을 받아서 울기 시작했다는 말은 젊은 목회자인 맥체인의 깊은 경건을 드러내주는 잘 알려진 일화입니다. 그러나 저는 단지 맥체인의 경건만이 아니라, 그 회중들의 경건을 드러내는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이미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선 회중들은 그 젊은 목회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이미 그것을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8. 예배 회복이 신앙 회복의 열쇠다.
우리의 예배가 예배의 대상인 거룩하신 하나님과 분리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은 신앙의 대상인 거룩하신 하나님께 대한 신앙입니다. 우리는 분주한 일상 속에서 한 거룩한 시간, 그리고 거룩한 장소를 만납니다. 그것이 우리의 예배입니다. 그것이 거룩한 시간이 되고 거룩한 장소가 되는 까닭은 본래적으로 주일 오전의 그 시간이 거룩해서도 아니고, 우리가 앉아있는 이 장소가 본래 우리의 집이나 일터보다 더 거룩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이 시간 여기에 모였기 때문에, 이 시간이 거룩하고 이 장소가 거룩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거룩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이 회복됩니다. 우리 신앙의 열쇠는 언제나 여기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스프로울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처럼 신자들은 거룩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거룩한 것의 발현을 경험한다. 초월적인 것을 가로막는 빗장이 깨지고, 거룩한 것의 개입으로 현재의 순간이 거룩해진다. 그런 개입을 막으려고 노력하고, 그런 순간이 우리의 영혼을 가득 채우는 것을 피하려고 애쓴다면, 그것은 곧 거룩한 것을 속된 것으로 바꾸고, 하나님에게서 그분의 영광을 빼앗고, 우리에게서 그분의 은혜를 빼앗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를 준비하십시오. 여러분이 생애에 준비해야 할 많은 중요한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여러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예배를 준비해야 하는 일 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준비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드리는, 아니 우리가 함께 드리는 모든 예배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경험하고 아무 것도 아닌 돌베개를 세우고 기름을 부어 거룩한 성소가 되게 만든 것 같은 야곱의 경험이 우리 모두에게 매 주일 마다 경험될 수 있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