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오해에서 확신으로 25 - 하나님 중심적 예배 (5) - 눈으로 보는 복음, 성찬

고린도전서 11:23-3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3-11-17

말씀내용
<눈으로 보는 복음, 성찬> 고전 11:23~30



종교개혁자 칼빈은 성찬을 눈으로 보는 설교(visible sermon)라고 했습니다. 보통 설교는 귀로 듣지만 보는 설교가 있습니다. 그것이 성찬입니다. 주님의 몸을 상징하는 떡, 주님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써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복음을 눈으로 볼 뿐 아니라, 오감으로 경험합니다. 오늘은 다음 주일에 있을 성찬을 합당하게 받기 위해서 성찬의 의미를 상고해보려고 합니다. 이것은 본래 <하나님 중심적 예배> 시리즈에서 마땅히 다룰 주제인데, 다음 주일 성례주일을 맞아 계획보다 조금 일찍 다루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전통에서 볼 때, 예배는 늘 귀로 듣는 설교에 이어 눈으로 보는 설교라고 불린 성찬이 행해졌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가 매주일 성찬을 거행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성찬을 정규적인 예배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보편적 현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찬은 복음을 눈으로 보도록 선포하는 또 다른 형태의 설교이고 예배의 정상적인 구성 요소였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성찬을 어떻게 합당하게 준비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주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1. 용어: 성찬(Holy Communion), 주님의 만찬(The Lord's supper)
성찬은 함께 먹는 교제를 생각하게 하는 거룩한 교제(Holy Communion)라고 불립니다. 혹은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 그 밤에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신 것에 기인하여 주님의 만찬(The Lord's supper)이라고도 불립니다. 이 마지막 만찬이 유월절을 기념하는 만찬으로 의도된 것과 주님께서 유월절을 대신하는 새로운 의식을 제정하신 것은 분명합니다. 주님 자신이 바로 죽임을 당하는 유월절 어린 양이 되셨고 주님께서는 떡과 포도주로 당신의 죽으심을 의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식탁에 참여하는 것이고, 종말론적으로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미리 참여하고 미리 맛을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며, 죽임을 당하신 유월절 어린양이 되신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것이고 구원의 은혜를 입은 형제 자매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교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 상세히 살피지는 못하겠지만, 성찬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상고하도록 하겠습니다.

2. 성찬은 주님이 제정하신 명령이다(23~25).
우리가 성찬을 생각할 때 제일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이 주님이 행하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이라는 점입니다. 바울 사도는 23절에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고안해낸 영성이나 제자훈련 프로그램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는 주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을 소개합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24,25)." 이것은 명령입니다. 성찬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찬은 목사나 교회 지도자들의 기호에 따라서 결정되거나 조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말씀과 성례가 바르게 행해지는 곳에 참 교회가 있다고 한 것입니다. 사도들이 전했던 그 복음의 진리가 바르게 선포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그리고 성례를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교회일 수 없습니다. 이것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다 교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찬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3. 성찬은 주님 자신을 기념하는 것이다(24~25).
주님께서 성찬을 행하라고 하신 가장 중요한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를 기념하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24,25). 주님은 두 차례나 이것을 강조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성찬은 주님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떡을 나누어주시면서 주님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라고 하셨고 포도주를 나누어주시면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떡과 포도주가 진짜 주님의 몸과 피라는 말씀은 분명히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도록 카톨릭교회는 이것이 실제적인 주님의 몸과 피라고 가르칩니다. 사제가 떡과 포도주를 놓고 축사하는 순간,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실제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해석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실제 살과 피를 반복적으로 먹는 것으로 성찬을 제정하신 것이 아니라, 주님을 기념하라고 성찬을 제정하신 것입니다. 만일 이런 카톨릭 교회의 해석에 서게 되면, 실제적인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게 되기 때문에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한다는 가르침으로 연결되어 성찬을 하나의 미신적 행위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4. 합당하게 성찬을 받는 전제는 믿음이다(27~29; 히 4:2)
우리는 27절에서 바울 사도가 합당치 않게 성찬을 받는 것에 대해서 주는 경고를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27).” 우리가 성찬을 합당하고 바르게 받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28절에서는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 성찬을 받으라고 했고 29절에서는 ‘주의 몸을 분별하고’ 성찬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믿음으로 성찬을 받으라는 말입니다.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사람이 자신을 정직하고 정확하게 살필 수 있습니까? 또 믿음이 없으면 어떻게 주의 몸을 분별할 수 있습니까? 주의 몸을 분별한다는 것은 성찬식에서 받는 떡과 잔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것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제대로 분별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요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마찬가지로(히 4:2), 보이는 말씀인 성찬도 믿음으로 받을 때에만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충만히 받는 것입니다.

A.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를 묵상하라.
믿음으로 성찬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를 알고 그리스도를 기념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믿음으로 성찬을 받기 위해서 성도가 묵상해야 할 주제들을 몇 가지 여러분에게 제시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존 오웬이 말한 것입니다. 첫째, 죄에 따르는 책임과 하나님의 진노를 묵상하십시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형벌과 저주, 수치와 고통 속에서 여러분이 묵상하셔야 하는 것은 죄에 따르는 책임과 하나님의 진노의 무서움입니다. "오, 주님, 이것이 죄의 결과입니까? 죄 안에 이런 모든 저주와 형벌이 들어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죄를 다시 바라보십시오. 둘째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엄위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결코 그냥 넘기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본성은 얼마나 거룩하신가! 하나님은 진노를 발하실 때 얼마나 엄하신가! 자신의 아들이 다른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리셨음에도 이토록 무섭게 벌하시고 이토록 엄하게 진노하시다니!" 이것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무한한 사랑을 묵상하십시오. 이런 엄위하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나같은 죄인을 구원하실 방법을 찾아내셨다는 사실,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이 나의 구원을 이루셨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그렇다면 내가 아무리 가련하고 비참한 영혼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이런 사랑에서 무엇을 기대하지 못하겠습니까? 네번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묵상하십시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주님(갈 2:20), 나를 사랑하사 모든 것을 참으시고 견디시고 이기신 주님을 생각하십시오(히 12:2). 마지막으로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이루어진 영원한 화평을 묵상하십시오. 날마다 죄를 짓는 우리가 하나님과 영원한 화평을 이루었다는 것을 믿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성찬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없음을 새롭고 강력한 믿음으로 바꾸어주십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묵상할 때,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복음인 성찬을 통하여 우리의 영혼을 배불리시고 만족케하시며 소성케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번 한 주간, 성찬을 준비하면서 하셔야 하는 것은 바로 이것들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자기를 보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자기를 살피고 주의 몸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B. 중생하고 세례받은 그리스도인만이 성찬에 참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어떤 사람이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리적 귀결에 이르게 됩니다. 성찬을 받기 위해서 믿음이 요구된다는 것은 중생하고 세례받은 그리스도인만이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결론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성령님의 중생케 하시는 신비한 은혜의 역사로 사람은 믿음을 가지게 되고, 믿음을 고백한 사람은 성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됩니다. 이제 그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시는 성찬의 은혜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벌코프는 성찬이 믿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믿는 사람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그들의 죄를 정직하게 회개하고 그 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하는 피로 덮힌 것을 믿으며 그들의 믿음을 키우는 것과 삶의 참된 거룩 속에서 자라는 것을 원하는 사람들이다.”

C. 눈으로 보는 복음(a visible sermon)은 사람들을 분열시킨다(고전 1:18; 고후 2:16).
하지만 슬프게도 오늘날 이것은 매우 위험한 주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성찬이 교인들을 분열시킨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의 비난은 부분적으로는 옳습니다. 성찬은 분열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교인들을 분열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분열시킵니다. 신자와 불신자, 중생한 자와 중생하지 않은 자의 분열이 일어납니다. 이런 성찬만 없으면 교회는 무난히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다”하는 구호와 함께 편안하게 갈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찬은 성찬을 받는 자와 받지 못하는 자로 나눔으로써 교회를 둘로 나눕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다 함께 하든지, 일부 중생하고 세례 받은 사람들만 참여하려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 성장에 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비난이야말로 복음을 부인하는 비난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복음은 사람을 둘로 나눕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언제나 사람을 멸망하는 자와 구원을 얻는 자로 분열시켰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사망에 이르는 자와 생명에 이르는 자로 나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했고,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 2:16)”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성찬이 눈에 보이는 복음이라고 한 말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귀로 듣는 설교는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으라고 선포합니다. 모두가 듣습니다. 듣는 자들이 어떻게 반응을 하는가에 따라서 그들의 영원한 운명이 갈립니다. 사람들이 나뉩니다. 하지만, 눈으로 보는 복음인 성찬이 시행될 때만큼 분명하게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성찬은 주의 살과 피를 받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눈에 보이게 분리합니다. 이것은 복음이 정상적으로 하는 일입니다.

D. 영원한 분열이 일어나기 전에.. (마 25:31~46).
주님께서 영광 중에 재림하실 때 일어날 일을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마 25:31~46). 그 때 주님은 영광의 보좌에 앉아 심판을 행하실 것입니다. 목자가 염소와 양을 나누듯이 주님께서는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실 것입니다(마 25:32). 한 편에 선 자들은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로 창세로부터 저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나라를 상속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편에 선 자들은 저주를 받아 주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한편은 영벌에, 한편은 영생에 들어가게 되는 영원한 분열이 일어날 것입니다. 영생에 들어가는 자들은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될 신부입니다. 성찬은 바로 그날 그 잔치의 리허설입니다. 영원히 주님과 함께 누리게 될 교제와 그 식탁에서 영원히 부족함이 없이 누리게 될 만족과 배부름을 우리는 성찬에서 맛보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아직 중생하지 않았고 따라서 세례를 받지 않은 분들이 계십니다. 그분들은 성찬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합당합니다. 이것은 다소 불편한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도리어 여러분으로 하여금 더욱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고 그 구원하시는 은혜와 자비를 구하게 하는 생생한 복음이 되기를 저는 간절히 바랍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성찬을 받지 못하는 시간들이 있었을지 몰라도, 우리가 마지막 날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나뉘어질 때에는 결코 한 사람도 저주와 영원한 불에 들어감으로써 어린 양의 혼인 잔치, 우리 주님이 마련하신 그 식탁에 참여하지 못하는 분들이 한 분도 없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성찬의 규례는 이렇게 가르칠 수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 강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덧붙이고 싶습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의 양심에 맡겨진 일입니다. 나는 참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있으니 이 성찬을 받아야만 하겠다고 스스로 생각하신다면 주님의 식탁으로부터 여러분을 막을 수 있는 힘은 아무에게도 없습니다. 다만 성경의 경고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27).”

5. 특별한 은혜: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한다(26).
우리가 합당하게 성찬식에 참여하게 될 때, 실로 성찬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특별한 것입니다. 26절은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주의 죽으심, 십자가의 복음이 성찬을 행할 때마다 전파된다, 선언된다는 말씀입니다. 귀로만 듣도록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도록, 그리고 입으로 느끼도록 그 이상의 오감으로 복음을 경험할 수 있도록 선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특별한 은혜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두 대상을 향해서 선포됩니다. 첫째는 우리 자신, 교회 공동체에 선포되고, 둘째로는 세상을 향해서 선포됩니다.

A. 우리 자신에게
주의 죽으심이 우리 자신에게 선포된다는 것은 바로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교회는 성찬식을 통해서 복음을 새로운 방식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생생하게 그리스도의 죽으심 곧 복음을 눈으로 봅니다. 존 오웬은 성찬식을 합당하게 준비하고 믿음으로 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메마른 마음을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로운 기습 작전’으로 찾아오실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향한 거룩하고 은혜로운 기질을 불어넣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구합니다.

B. 세상을 향하여
둘째로 성찬은 주님의 죽으심의 복음을 세상을 향해서도 선포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멸시하는 세상 앞에서 교회는 성찬을 행함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도리어 자랑하며 이것이 우리의 생명이 되었다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 때문에 살았고,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것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C. ‘그가 오실 때까지’
성찬식은 장례식이나 추도예배가 아닙니다. 성찬식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살아난 기쁨을 경축하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사모하고 고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을 드러냅니다. “주의 죽으심을 그의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가 오실 때까지!’ 그가 오시면 더 이상 이 의식은 필요없습니다. 그때에는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영광을 입게 될 것이고 주와 같이 될 것이며, 영원토록 주께서 우리를 만족케 하실 것입니다. 성찬을 행할 때 우리는 우리를 기다리는 잔치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그날이 오기를 소망합니다.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6. 성찬을 ‘믿음으로’ 준비하십시오.
저는 오늘 성찬에 대해서 너무나 적게 말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번 주간에 성찬을 준비하시면서 들으실 설교를 하나 추천합니다. 2007년 10월 21일 주일에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누리는 영광>이라는 제목으로 전한 말씀입니다. 성찬의 포괄적인 의미를 다룬 말씀입니다. 이제 한 주간 믿음으로 성찬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성찬을 받는 분이나 받지 않으시는 분이나 동일합니다. 받는 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제가 앞서 소개한 주제들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또 성찬을 받을 준비가 되지 않으신 분들도 믿음으로 준비할 것이 있습니다. “오, 자비로우신 주님, 제게 믿음을 주시고 구원의 은혜를 허락하사 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은혜를 알게 하시고 성찬뿐 아니라 마지막 날에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하시옵소서”라고 간절히 은혜를 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28절에 ‘자기를 살피는’ 일입니다. 저는 29절에 말씀한 ‘주의 몸을 분별함’에 대해서 한 가지 권면을 합니다. 고린도교회는 서로 사랑함이 없이, 가진 자는 많이 먹고 가난한 자는 먹지도 못하는 방식으로 합당치 않게 성찬이 시행되었습니다. 그들은 주의 몸을 분별치 못하고 성찬을 먹고 마심으로써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신 형국이 된 것입니다. 이 일로 하나님께서는 몇 사람을 죽게 하셨고 혹은 병들게 하심으로써 징계하셨습니다. 30절은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성찬은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나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찬을 받는 모든 성도들은 형제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순종과 고백 속에서 성찬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의 몸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성찬을 믿음으로 준비하는 것은 여러분이 용서하지 못한 사람을 용서하고 불화한 형제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찬은 다시 한 번 모든 성도들에게 힘있는 복음 선포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가 자주 기념되어야 합니다. 아무도 자기의 완벽함이나 의로움으로 성찬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으로 우리를 받으실 수 있도록, 우리의 무가치함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합당하게 주의 만찬에 나아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보내사,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습니다(고전 1:30).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주의 식탁에 나갈 준비를 하고 그 예비하신 은혜 앞에 나아가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