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Home > 설교말씀 > 오해에서 확신으로 24 - 하나님 중심적 예배 (4) - 다른 불

주제설교 - 오해에서 확신으로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오해에서 확신으로 24 - 하나님 중심적 예배 (4) - 다른 불

레위기 10:1-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3-11-10

말씀내용
<다른 불> 레 10:1~3



1. 사소한 것이 사소한 것이 아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지만, 그 예배가 다 예배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때론 우리가 어린 시절에 이런 경험이 떠올릴 수 있습니다. 별 것 아닌 줄 알고 만지다가 깨뜨린 것이 부모님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물건이었던 경우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정도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별 것 아닌 줄 알고 했던 일이 첫 번째 제사장들의 죽음을 초래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본문을 대하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심하다고 느낍니다. "뭐 이런 일로 사람을 죽이시기까지 하시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합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이런 일을 적잖이 만나게 되고, 우리는 당황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갭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이런 일에 당황하거나 심지어 화가 나는 것일까요? 이것은 하나님께 너무나 중요한 것이 우리에게는 별 것 아닌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사소한 것인지를 배웁니다. 그 가치는 우리가 결정하지 않고 창조주 하나님께서 결정하십니다. 우리의 무지로 하나님의 지혜를 덮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끈질기게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성경에서 우리가 당황하게 되는 모든 대목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네가 볼 때 사소한 이 일이 내가 볼 때는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라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이 이야기의 전후 배경을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2. 이야기의 배경
이스라엘 백성이 400년을 애굽에서 노예노동을 하면서 고역을 치르는 것을 보시고 그들의 신음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종살이에서 건져주신 이야기가 출애굽기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목적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3:12)." 여기서 섬긴다는 말은 예배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애굽의 바로에게 또 바로가 모세에게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시 모세에게 이 주제를 계속해서 반복해서 언급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출 7:16; 8:25~28; 9:1; 10:24~26). 이것은 출애굽기에 이어지는 레위기의 주제를 예고하는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십계명과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지을 것을 명하십니다. 그리고 성막을 완성하게 됨으로써 출애굽기는 끝납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자, 이제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할 것인가, 예배의 방식을 하나님은 매우 자세하고 분명하게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레위기의 주제입니다. 레위기 1~7장까지는 예배/제사의 규례를 말씀하시고, 8장에서는 7일 동안 행해지는 제사장 위임식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제 이 예배를 주관한 대제사장 아론과 그 아들들이 제사장으로 거룩하게 세움을 입었습니다. 9장에서는 제 팔 일째에 아론이 자신과 백성들을 위한 첫 번째 역사적인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제사를 마치고 모세와 아론이 백성을 축복할 때에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지요.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더라(레 9:23~24)." 이 놀라운 광경을 우리는 상상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받으신 것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이 놀라운 일이 있고 나서, 이제 제사는 이스라엘의 일상적 삶 속에서 행해지게 됩니다. 여기서 바로 이어지는 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나답과 아비후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400년의 종살이를 하던 백성을 건져내신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목적을 위해서 율법을 주셨고 성막을 짓게 하셨으며 제사장을 세우셨고 예배의 규례들을 상세히 주셨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되었습니다.

3. 나답과 아비후 사건의 본질
이렇게 여덟째 날이 끝나자 마자 미혹하는 자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아론의 아들들에게 찾아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과 다른 것을 행하도록 부추겼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론의 장자와 차자인 나답과 아비후가 한 일은 성소 안에 있는 향단에 향을 사르기 위한 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어났습니다. 향을 사르기 위해 향단에 가지고 오는 불은 반드시 놋제단에서 가지고 와야 합니다(레 16:12). 이 불은 바로 얼마 전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초자연적 불이었습니다(9:24). 향을 사르는 불이 반드시 놋제단에서 와야 한다는 것은 기도가 속죄에 근거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소 안에 있는 향단에서 계속해서 올라가는 향은 성도들의 기도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성막 뜰에 있어서 항상 그 위에 제물들을 태우는 놋제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그대로 예표합니다. 이로써 성도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근거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 사건이어야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아무 생각 없이 절차를 복잡하게 만드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런 절차들, 의식들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예배와 그들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가늠하는 사활적으로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이스라엘 백성의 삶에서 제사보다 중요한 일은 존재하지 않았고 존재할 수도 없었습니다. 제사장은 무엇보다도 이것을 알아야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나답과 아비후가 한 일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분향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놋제단에서 나온 불이 아니었습니다. 어디서 이 불을 가지고 왔는지 성경은 밝히지 않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놋제단에서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불이 아닌 '다른 불'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한 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필요 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행한 건방지고 교만한 행위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인됨을 인정치 않는 행위를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우 신속하고 엄중하게 이 문제를 다루셨습니다.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살라 죽였습니다.

4. 문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존중하지 않은 것이다.
에덴에서의 죽음이 불순종에 대한 죽음이었듯이, 여기서도 불순종은 죽음으로 응답되었습니다. 이 즉각적인 죽음의 심판은 나답과 아비후가 범한 죄가 무거운 것임을 시사합니다. 즉, 나답과 아비후가 생각할 때, 별 것이 아닌 사소한 일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그들의 생명을 죽이고 살릴만큼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별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그냥 하나님을 섬기면 된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방식이 왜 중요한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제사장직을 수행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이 사건을 정리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나답과 아비후의 제사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아니었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존중하지 않음으로써 그것을 깨뜨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죽이신 것은 그들을 대신할 대속제물을 부정하고 그들이 나갔기 때문에 그들이 받을 형벌을 받은 일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공의로운 일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을 예배할 때, 여러분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대속제물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근거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지난 한 주간의 여러분의 의로운 행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나답과 아비후의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죽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의 궁극적 삶의 결과는 그런 방식으로 정확하게 나타나게 될 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것 외에 인간 편에서 하나님께 더 내어놓을 것은 없습니다. 선한 의도를 가지고 이렇게 했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의 외에는 인간 편에서 내어놓을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 교회에게 '다른 복음'은 없다고 말했을 때, 정확하게 이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갈 1:8~9). 다른 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불필요하게 만드는 복음이었습니다. 거짓 교사들이 말로는 그렇게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수단으로 할례를 받아야 하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그들의 가르침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실 이유를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명하지 않은 다른 불을 드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인간의 의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려는 것과 인간의 부패한 의지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끼어들어서 움직일 때만큼 몸서리치고 가증한 때는 없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주일 아침에 예배를 드리러 교회로 가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얼마나 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을 힘입어,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여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를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일까요? 그리고 주일에 지구 상에 수많은 곳에서 드려지는 예배에서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는 얼마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필요를 말하는 것일까요? 좀 더 열심히 살면 소망이 있으니까, 좀 더 잘 합시다 하는 식의 설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하는 이유를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인간 편에서 하나님께 가지고 나갈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여호와께서 명하신 놋제단의 불, 제물을 태움으로써 하나님께서 그 제물을 받으셨다는 근거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태도입니까 아니면, 자기 방식대로 나가는 것입니까? 이런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예배이고, 이런 예배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존중하지 않고 도리어 깨뜨림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예배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렇게 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5. 성경의 역사 속에서 반복된 '다른 불'의 예배들
A. 가인의 제사(창 4:3~5)
슬프게도 이런 일은 나답과 아비후 사건 전후에 성경 역사에서 계속 반복되는 일었습니다. 성경에 등장한 첫번째 다른 불의 예배는 가인의 예배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였을 때 친히 창조하신 동물을 죽이심으로써 그 생명인 피를 흘리셨고 벌거벗은 죄인들의 몸을 가려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 이 한 구절 안에 엄청난 복음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죽어야 할 자들은 아담과 하와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대속제물을 통해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그들에게 보이심으로써 진노 중에도 자비를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배운 것은 에덴에서 살 때와는 달리, 죄인인 자신들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속제물이 있어야 한다는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장자와 차자인 가인과 아벨에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도리를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창 4:3~5).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고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 제물을 열납하셨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인 곡식으로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는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이 무시한 것은 정확하게 나답과 아비후가 무시한 것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아벨의 제사는 믿음으로 드린 것이었지만, 가인의 제사는 그렇지 않았다고 정리합니다(히 11:4). 믿음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인 것입니다. 이 사건에서 주목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단순히 제물만 열납하지 않았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제물과 예배자를 동일시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용납된다면 그것은 우리의 대속 제물인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서 만족스럽게 받으시는 제물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께 용납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가지고 온 제물이 그리스도가 아닌, 바로 여러분 자신이거나 여러분의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예배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가 아닌가는 아벨과 가인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비록 아벨은 이 일로 인해 형 가인에게 목숨을 잃게 되지만, 첫 번째 순교자로 기록될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영광을 누리게 되지만, 가인은 살인자로서 죄 가운데서 죽게 되고 영원한 형벌에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을 갖게 됩니다. 무엇이 이렇게 했습니까? '다른 불'을 드린 일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B. 사울 왕의 제사(삼상 13:1~14)
두 번째로 제가 제시하고 싶은 '다른 불'에 대한 성경의 사건은 사울 왕이 직접 하나님께 번제를 드린 사건입니다(삼상 13:1~14). 사울 왕은 많은 수의 블레셋 군대와 대치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사무엘이 오겠다고 약속한 날짜에 나타나지 않고, 백성들은 블레셋 군대가 무서워서 굴과 수풀과 바위틈에 숨고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울은 다급한 나머지 자신이 제사를 드릴 아무 권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을 기다리지 않고 번제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 때 사무엘이 나타났고 사무엘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았다고 책망하면서 하나님께서 다른 왕,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왕을 세우실 것이라는 청천벽력같은 말씀을 전합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너무 하신 것 아닌가라고 말입니다. "뭐 이런 사소한 것을 가지고 이렇게 하시는가?"하는 것이지요. 여기서도 이 일은 사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예배의 방식이 있다는 모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상황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할 상황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울이 드러낸 것은 자신의 믿음 없음, 불신앙이었습니다. 그의 제사는 가인의 제사나 나답과 아비후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자기 방식대로, 자기 생각대로 제사를 드리기만 하면 된다는 불신앙적인 생각이 그를 지배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거짓 예배입니다.

C. 웃사 사건(삼하 6:1~8)
제가 한 사건을 더 언급하고 싶은데 그것은 직접적으로 예배의 행위는 아니었지만 예배에 관한 중요한 교훈을 주는 웃사의 사건입니다(삼하 6:1~8). 다윗은 오래도록 방치되어 있던 하나님의 언약궤를 다윗 성으로 옮겨오려고 대규모 행사를 거행했습니다. 그의 동기와 행사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이 때 언약궤를 싣기 위해서 수레를 새로 만들어 소가 끌게 하고 아비나답의 두 아들 아효와 웃사가 수레를 지키게 했습니다. 수레가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소가 갑자기 뛰므로 언약궤가 수레에서 떨어질 것 같아서 동작이 빠른 웃사는 얼른 손으로 궤를 붙잡았습니다. 그때 일어난 일은 하나님의 진노로 웃사가 즉사한 일입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 못마땅합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다윗은 분했습니다. 이 즐겁고 복된 행사에 왜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못마땅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가지고 오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그는 깨닫습니다(대상 15:13). 하나님께서 명하신 방법을 자신이 지키지 않고 자기 정성과 뜻대로 하나님의 언약궤를 다루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언약궤를 다루는 규례를 말씀하셨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 자체를 상징하는 것이었고 제사장 외에는 아무도 볼 수 없었고 제사장이 덮개를 덮으면 레위 지파 고핫 자손이 직접 보거나 만지지 않고 언약궤를 들도록 끼워진 긴 채로 직접 메어야 했습니다(민 4:15). 다윗은 정성과 진심이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정성과 진심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도달할 수 없기에 하나님은 이런 규례들을 주신 것입니다. 죄인이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을 지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과 영광을 위해서 어떤 존재의 도움도 필요로 하시지 않으십니다. 웃사도 이것을 몰랐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해드릴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성경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뭐 그리 중요합니까? 우리 죄인의 생각하는 방식 안에는 언제나 내가 하나님께 뭔가 해드릴 수 있다는 일종의 자신감, 자부심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대단히 소중히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자존하셔서 아무 것도, 어떤 존재도 또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으시는 분임을 증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나 섬김을 필요로 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시기에 너무나 합당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다윗과 웃사는 '다른 불'을 드린 것입니다. 이것은 나답과 아비후의 사건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일입니다. 자기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규정하시고 가르쳐주신 방식대로만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6. 현대의 '다른 불'들
A. 진리가 아닌 것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려는 모든 시도들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유혹은 실로 적지 않습니다. 예배에 오는 사람들이 예배를 통해서 감동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지나치게 되면 진리와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친히 역사하심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케 하시는 것이 아닌 다른 모든 수단들을 동원하게 되는데 이런 현대의 '다른 불'들을 보게 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모든 시도들은 사람들을 속이게 되는데, 성령께서 진리의 말씀을 사용하여 신자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시는 신비하고 신적인 역사가 아닌 단순한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감정의 동요를 은혜요, 신앙의 증거로 착각하게 만드는 속임의 요소를 낳게 됩니다. 이런 속임이 일어나게 될 때, 거짓의 영인 사단이 역사하도록 대문을 열어주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성령님께서 진리의 영으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고,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원칙은 분명하게 지켜져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없고,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한 신뢰가 없을 때, 우리는 적당히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수단들을 사용하게 되고 그것들은 결국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드려 하나님을 예배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과 노력으로 사람들을 감동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왜 필요합니까? 이런 현상은 단순히 은사주의 운동에 속한 교회들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기도와 설교와 찬양의 모든 곳에서 이런 요소가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비단 예배 인도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예배자로서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를 소성케 하는 진리의 능력과 성령님께서 예배를 통해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역사를 믿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목사나 예배 인도자만을 바라보게 될 것이고 그들에게 감동을 받는 일이 계속 일어나게 될 것이고 이것은 하나님께만 돌려드려야 하는 영광을 하나님 아닌 우상에게 돌리는 행위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B.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 중심이 되는 예배
두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 중심이 되는 예배입니다. 무엇을 말하는지 아실 것입니다. 한국에서 한 동안 목사님의 박사학위 취득 감사예배라는 것이 드려지는 유행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든지 하나님 중심적인 예배이기 어렵습니다. 인간 안에 있는 죄의 탐심과 인간을 높이는 교만, 학위 숭배적 태도 들이 이 안에 가득히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열심히 수고하여 학위를 받았다면 하나님께 감사할 일입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될 일입니다. 이런 예배에서 하나님이 예배의 중심이 되실 수 없습니다. 최근에는 한국에서 박정희 대통령 추모예배가 강남의 어느 교회에서 있었는데, 저도 편집된 비디오를 보았지만 이것은 예배의 타락, 목사들의 타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매우 전형적인 증거입니다. 그것은 박정희 대통령 숭배이지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예배가 아닌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전에 우상숭배의 단을 세우고 온갖 우상숭배 행위를 했던 것이 바로 한국 교회에서 이런 방식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 드리는 주일 예배만을 예배라 부르고 여타 장례식이나 결혼식이나 다른 모든 것을 예배라고 부를 수 없다고 하는 주장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중심이 되기가 쉽기 때문이지요. 장례식은 그렇다치고, 결혼식을 하는 신랑 신부들 가운데 과연 몇 사람이 정말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맺고 결혼한 부부가 되는 것을 인식하고 준비하며 행할까요? 성경이 규정하는 예배는 하나님 아닌 사람이 중심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장례식과 결혼식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일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장례식은 한 인생을 주님께서 불러가실 때까지 구원하시고 거룩케 하시고 견인하신 모든 은혜를 인하여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장례식이 예배일 수 있으려면 돌아가신 분의 이런 신앙의 여정이 분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 고인은 그렇지 않았지만, 유족들이 은혜 안에 있을 때에도 장례 예배를 드릴 수 있으나 그 예배와 메시지의 내용은 사뭇 다를 것입니다. 결혼예배에도 우리는 동일한 것을 적용해야만 합니다. 그 예배의 주인은 하나님이시지, 신랑과 신부가 아닙니다. 이것을 좀 더 널리 적용해본다면, 개업예배, 이사예배도 마찬가지로 적용해야 합니다. 모든 동기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을 경배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에배를 드림으로서 사업이 잘 되고 이사한 집에서 잘 되는 것을 바람인가를 정직하게 보아야 합니다. 만일 후자의 마음이라면 그것은 무당 불러 굿할 것을 목사 불러 축복 비는 것으로 바꾼 것이고, 어떤 목적을 위해서 예배를 이용하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드리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C. 국가적 신 숭배 행위
얼마 전 메이저리그 베이스볼 월드시리즈 경기를 잠깐 보았는데 거기서 대단히 흥미로운 의식을 보게 되었습니다. 여러 군인들이 초청되었고 한 여군이 나와서 God bless America라는 노래를 부르고 관중석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정말 경건한 태도로 그 노래에 참여하는 의식이었습니다. 저는 순간 초대교회 때 황제를 숭배하던 로마제국에 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의 God은 미지의 신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미국이라는 국가를 수호해주는 수호신인 것은 분명합니다. 거기에는 종교성이 있었습니다. 관중들은 예배자가 되었습니다. 국가는 교회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국가를 위해서, 평안한 신앙 생활을 위해서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분별을 하지 못한 채 이런 이교적 예배에 동참하게 된다면 그것은 '다른 불'을 드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7. '하나님의 명하신 대로' 예배하라.
저는 장자와 차자인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으로 인해 아버지인 아론의 마음이 얼마나 상했을지 도무지 그 마음을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작은 아버지인 모세는 어떠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3절에 모세의 말입니다.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10장 전체를 보면 우리는 모세가 얼마나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행하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지 보게 됩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성막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하신 대로 제사장들을 세웠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무엇이 중요한 것이고 무엇이 사소한 것인지를 분별합니다.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중요하다고 하시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나에게 사소하게 여겨지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신앙과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지침과 목적에 따라 행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여러분은 매주일 예배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명하시고 계시는지를 알기 위해서 주의를 기울여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내 기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자신의 방법, 자신의 불, 자신의 생각이 하나님의 옛 방식이나 인기 없는 방법 보다 낫다고 여기는 경향은 위험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 없이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는 생각은 위험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예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은 것을 분별하셔야 합니다. 그 기준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분을 자기 방식대로 예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할 때, 교회는 만신전이 되고 맙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떠나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 성전 안에서 마땅히 드려져야 할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타락하였고, 거기서 에스겔이 본 것은 각종 우상숭배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여기서 크게 가증한 일을 행하여 나로 내 성소를 멀리 떠나게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겔 8:6). 저는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에 이와 동일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두렵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참된 하나님 중심적 예배, 하나님의 명하신 대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 회복되게 해 주시기를 구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