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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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에서 확신으로 23 - 하나님 중심적 예배(3) - 참 예배와 거짓 예배를 구별하는 기준

출애굽기 20:3-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3-11-03

말씀내용
<참 예배와 거짓 예배를 구별하는 기준> 출 20:3~6



우리는 [오해에서 확신으로]라는 큰 주제 아래서, <하나님 중심적 예배>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어떤 것이 하나님 중심적 예배인지를 다루기 앞서 어떤 것이 참 예배이고 어떤 것이 거짓 예배인가, 무엇이 그것을 가르는 기준이 되는 원리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탁월한 신학자이자 목회자였던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는 목회사역 마지막 몇 년 동안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이 참된 예배의 의미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탄식하였습니다. 그는 이 불행한 현상이 세 가지 정도에 기인한다고 보았는데 첫째는 우리 시대가 경박한 시대라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는 경향, 둘째는 이 시대가 반역적일 정도로 자아에 심취된 자아중심적 시대이기에 하나님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을 상실했다는 점, 셋째는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는 시대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우리도 자유할 수 없습니다. 이 시대에 참된 예배를 회복하는 것, 우리 자신의 기분을 즐겁게 해주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를 회복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목적도 모두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을 만드시고자 하시는 것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성경적 선언 때문입니다.

1. 무엇이 예배와 예배가 아닌 것들을 구별하는 기준인가?
무엇이 예배와 예배가 아닌 것을 구별하는 기준입니까? 그것은 어떤 영향력 있는 교단이나 교회 혹은 어떤 신학자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 예배와 거짓 예배를 가르는 기준은 오직 성경에서 나온 원리여야 합니다. 오늘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예배 방식은 우리가 얼마든지 자유롭게 구상할 수 있고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이스 박사가 지적한 우리 시대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오직 성경’의 원리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만이 교회의 유일하고 최종적 권위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예배를 어떻게 드리라고 원리를 가르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오늘 우리는 십계명의 제일계명과 제이계명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2. 첫 계명과 둘째 계명: 예배의 대상과 예배의 방식
일계명과 이계명은 각각 예배의 대상과 예배의 방식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A. 예배의 대상: 오직 하나님만 예배하라(3).
일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는 말씀은 일차적으로 예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뿐이시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다른 신들의 존재를 인정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이 세상의 사람들이 섬기는 다른 모든 헛된 우상들의 존재들을 너희 안에서 다 제거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는 오직 하나님만이 계실 수 있으며 어떤 우상도 그 자리에 설 수 없게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구약 시대의 우상들의 이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이 말씀은 우리에게 우상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요구합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첫 계명을 잘 지키고 살아가십니까?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오직 하나님만 계십니까? 과연 여러분은 여러분을 구원하여 주신 여호와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십니까? 여러분의 삶의 모든 조건이 다 채워지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족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여러분은 우상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고 우상을 섬기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제일계명을 잘 지키고 있습니까?

B. 예배의 방식: 형상을 만들지 말라(4~5a).
이계명은 예배의 방식에 대한 명령입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 20:4~5a).” 종교개혁자들은 이 계명을 따라서 예배당 안에 회중들의 시선을 끌어 하나님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형상들을 두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그래서 개신교회의 예배당 실내는 매우 심플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 계명을 범한 대표적인 사례는 금송아지 숭배였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형상화하고 시각화하여 섬기기를 원했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고 나서 그들이 한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출 32:4).” 그리고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고 하면서 예배/제사를 드렸습니다(출 32:5~6). 그들은 이계명을 범한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진멸될 위기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일은 북왕국 이스라엘이 분리 건국된 후에 여로보암 왕에 의해서 다시 재개되었습니다. 여로보암은 절기가 되어 백성들이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을 내려갔다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염려해서 단과 벧엘에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고 말했습니다(왕상 12:28).”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규정해 주신 원리가 이와 같이 인간의 편의주의에 의해서 User-friendly worship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보는 산당 제사도 그런 경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소가 있는 곳에서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계시해주셨지만, 세월이 흘러가면서 자기들이 살고 있는 주변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으면 좋지 않겠는가 하는 편의주의 때문에 산당들이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산당 제사는 결국 이방인들의 제사제도와 혼합되면서 매우 혼탁한 혼합주의 제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또 이계명은 우리의 상상과 머리 속에서 조차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을 금하는 명령입니다. 가령, 예배 인도자가 “눈을 감고 지금 당신을 안아주시는 주님을 상상해 보십시오”라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원튼 원치 않든 user-friendly god을 만들어냅니다. 내가 원하는 모습의 하나님을 상상 속에서 그리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하는 하나님은 밀려나게 됩니다. “나는 하나님을 심판자와 같이 무서운 모습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아버지로 생각하기를 좋아해요”하는 식으로 말하는데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만들어진 형상뿐 아니라, 상상 속에서도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무한 광대하신 하나님을 제한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에 익숙해지게 되면 그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언제나 상상의 세계 속에 자신을 던질 뿐(소위 관상기도의 위험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으로 나아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은 우리의 감각에는 와 닿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C. 두 계명은 분리될 수 없다.
예배의 대상을 규정하는 일계명과 예배의 방식을 규정하는 이계명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둘째 계명을 어기면서 첫째 계명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참되신 하나님을 우리가 원하고 선택한 방식대로 예배할 수 없습니다.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하려면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원리를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3. 예배의 규정적 원리(Regulative principle)와 규범적 원리(Normative principle)
이와 관련하여 오래된 신학적 논쟁이 있습니다. 예배와 관련하여 규정적 원리와 규범적 원리라 불리는 용어들이 있습니다. 먼저 규정적 원리는 성경이 예배에 대해서 하라고 명한 것들만을 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규범적 원리는 성경이 금하고 있지 않은 것을 예배에 포함시킬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이 더 성경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전자는 칼빈이, 후자는 루터가 강조한 입장입니다. 규범적 원리는 문화적 상황화를 포함하여 많은 자유를 허용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마는, 때로는 너무 많은 자유를 허용함으로써 이교적인 혼합주의로 흘러갈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또 이 원리는 하나님 보다 우리의 즐거움과 만족을 예배의 척도를 삼을 수 있는 위험, 그리고 성경에 언급된 예배의 요소들 보다 언급되지 않은 요소들을 더 많이 사용할 위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유가 많기 때문이지요. 반면, 규정적 원리는 예배의 방식을 하나님께서 친히 정하실 뿐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성경을 기준으로 삼음으로써 이교적 요소들이 예배에 들어오는 것을 예방합니다. 구약의 역사에서 보듯이 우리는 그럴 가능성을 너무나 많이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것은 중요합니다. 일례로, 소위 이머징 교회들에서 시작되어 적잖은 복음주의 교회들까지도 행하고 있는 미로걷기(labyrinth walk, 혹은 기도의 미로/오솔길)와 같은 것이 예배 가운데 들어오는 것을 규정적 원리는 막아줄 수 있습니다. 미로걷기는 고대의 이교적 예배의식에서 온 것입니다. 미로는 여러 갈래 길이 있는 실제 미로가 아니라 중앙에 이르는 한 길이고 밖으로 돌아 나오게 되어 있는 길입니다. 미로를 걷는 사람들은 길을 걷는 동안 고른 한 단어나 한 문구를 반복하면서 자기가 자신 안에 있는 신성에 도달하거나 신성에 이르게 된다는 기원을 가지고 걷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예배 가운데 들어와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지금 부산에서 열리고 있는 세계교회협의회(WCC) 7차 총회가 호주 캔버라(Canberra)에서 열렸을 때에는 당시 이화여대 신학과 교수였던 정현경 교수가 초혼제를 행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 행위가 참석자들에게 충격을 주기도 하고 즉각 퇴장을 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결국 세계교회협의회가 추구하는 다원주의 안에서는 규범적 원리 조차도 논의되지 않는 세계 교회의 우상숭배적 타락상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 시대의 예배의 타락은 성수(聖水)라는 것을 떠다가 바치고, 향을 피우고, 촛불을 켜놓고, 심지어는 그림을 그리고 싶은 사람은 그림으로, 노래를 부를 사람은 노래로, 춤을 출 사람은 춤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들도 행해지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이런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이유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예배가 어느 정도까지 타락한 시대인가를 아실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예배의 방식을 사람이 정할 수 있다는 생각 혹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금하지 않으신 것은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이런 결과들을 가져오게 되었고 이것을 금할 길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규정적 원리는 중요합니다. 규정적 원리에 대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참 하나님을 예배하는 적절한 방법은 그분 자신으로 말미암아 제정되고 그분 자신의 계시하신 뜻에 따라 제한된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람의 상상이나 고안, 또는 사단의 암시를 따라 예배 받으시지 않으시고, 어떤 보이는 표현물이나 성경에서 규정하지 않은 어떤 다른 방식을 따라 예배 받지 않으신다.” 우리가 규정적 원리를 극단적으로 적용하게 될 때, 율법주의적 혹은 위선적 양상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조심해야 하지만, 이 원리는 예배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성경적 원리입니다. 모든 타락의 이면에는 먼저 예배의 타락이 일어났다는 점을 생각할 때, 예배를 성경적으로 지켜주는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규정적 원리는 이처럼 중요합니다. 누가 예배의 방식과 요소들을 결정하고 명령할 수 있습니까? 목사입니까? 당회입니까? 교인들의 다수의 의견입니까? 아니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결정합니다. 목사나 어떤 교회 지도자도 예배자들에게 무엇을 하고 할 수 없는지를 규정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칼빈이 말한 대로 인간의 마음은 우상 공장이기 때문에 규정적 원리는 더욱 중요합니다. 예배는 인간이 고안해낸 가장 좋은 방식으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배를 결정합니다.

4. 성경?예배의 책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많이 말씀합니다. 아벨과 가인의 제사부터 시작해서 요한계시록은 천상에 모인 모든 구속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 어린양의 신부들이 하나님과 어린양께 드리는 경배로 마칩니다. 성경은 예배의 책입니다. 모세의 율법의 많은 부분이 예배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레위기는 특별히 예배를 가장 큰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구약의 역사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는 일에서 벗어났으며 그 일로 인하여 멸망을 자초하게 되었는가를 보여줍니다. 주님께서도 어떻게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이 참된 예배를 벗어났는지를 지적하셨고, 서신서에서 사도들 역시 성령의 영감으로 참된 예배를 가르쳤습니다. 성경은 예배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며,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목적이라는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여러분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중요하게 여겨지는 어떤 것, 여러분의 인생 전체는 아닐지라도 여러분의 삶의 꽤 많은 부분을 좌우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식을 따라서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살아가는가 하는 것이 여러분의 인생과 영원을 결정하는 문제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5. 참 예배와 거짓 예배가 초래하는 다른 결과
이것은 제가 그냥 지어낸 강조어법이 아닙니다. 예배의 결과는 실로 무섭습니다. 5절입니다.

A. 경고: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5b).”
이계명에는 상당히 무서운 경고가 첨부되어있습니다. 이 계명을 범하여 우상을 섬기고 잘못된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면 그 사람의 삼 사대 후손에게까지 죄책을 넘겨주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아버지의 잘못된 습관이 자식에게 전수된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죄책이 자녀손에게 전수된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이해하기 쉬운 말씀이 아닙니다. 구약 성경에는 언약적 연대(covenant solidarity)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가정이라는 단위는 하나님께서 책임을 맡기시고 물으시는 기본 단위입니다. 그래서 만일 언약 가정의 가장이 하나님께 범죄하면 그 가족이 모두 정죄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그 자녀들이 아무 죄가 없이 무죄한데 아버지 때문에 죄값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죄에 그들이 참여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죄값을 받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우상을 섬기면 자식들도 그 우상숭배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잘못된 예배의 관행이 얼마나 참된 신앙을 훼손하는가를 이 경고를 통해서 보이십니다. 그런데 잘 보십시오.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미워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선호하는 예배가 이런거야”, 혹은 “나는 이게 편해”하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것을 무시하고 행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아닌 인간 중심적 예배입니다. 그 결과는 실로 무서운 것입니다.

B. 약속: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6).”
하지만 여기에는 약속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바르고 합당한 예배, 하나님 중심적 예배를 드리는 자들에게 주시는 약속입니다. 이들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6).” 이 약속은 경고의 말씀에 비할 수 없이 강력합니다. 죄책이 삼 사대에 이르는 반면, 은혜는 천대까지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선하신 성품의 크기를 보여줍니다. 아무리 아버지가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그 가정을 뚫고 들어오는지를 보십시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섬기고 우상을 제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집안에 은혜로 뚫고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아브라함은 우상숭배의 죄의 흐름을 끊어버렸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어떤 가정이었느냐, 과거 여러분의 부모님께서 우상을 섬기던 분들이셨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늘 여러분이 하나님을 아는 이 자리에 와 계신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 모든 죄책의 고리를 끊어버리시고 은혜의 자리에 우리를 부르셨고 부르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6.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으로 부름 받았다는 것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모두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 예배가 무너진 것을 회복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고 구속을 이루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우리 안에 회복해 주신 것은 예배입니다. 신자들은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존재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으로 불러냄을 받았습니다. 예배는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우리에게 회복된 영광이고 특권입니다. 복음을 아는 자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최고로 중요한 일은 예배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우리는 예배의 대상이신 참되신 하나님을 성경이 계시하여주는 대로 알아야만 합니다. 부지런히 알아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방식, 우리의 취향, 우리의 기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여 주신 방식대로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원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으로 부름 받은 것을 인하여 감사함으로 개인적으로 날마다, 그리고 공동체로서 주일과 금요일에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마음으로 나아온 하나님의 자녀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이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를 받는 것은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까요? 저는 그것을 기대합니다. 예배하는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바라보십시오. 또한 자기 방식대로 경박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도 마음에 새기십시오.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다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게 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방식으로 내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지 늘 말씀을 살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참되고 바른 예배로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게 하시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예배 가운데 우리가 살아계신 참되신 하나님을 만나 뵐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실 그 은혜를 저는 기대합니다. 우리들, 죠이선교교회는 그 어느 것도 아닌, 바로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