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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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에서 확신으로 22 - 하나님 중심적 예배 (2) - 여호와 경외함을 회복하십시오

이사야 29:13, 예레미야 2:19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3-10-20

말씀내용
<여호와 경외함을 회복하십시오> 사 29:13; 렘 2:19


1. 레이몬드 에드먼 박사(1900~1967)의 마지막 설교: “In the Presence of the King”
25년간 휘튼 대학의 총장을 역임했던 레이몬드 에드먼 박사는 은퇴 후,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였지만 특별히 대학 예배의 강단에 섰습니다. <왕의 임재 앞에서>라는 설교를 통해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의 경외감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기를 원했습니다. 도날드 맥컬로우의 『하찮아진 하나님』에서의 인용입니다: “예배는 진지한 행위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하일레 셀라시에 이디오피아 황제를 방문했을 때를 상기했다. 황제 앞에 나가기 전에 주어지는 지시 사항들, 그가 따라 해야 했던 외교 의례, 황제 앞에서 존경을 표하기 위하여 어떻게 절을 했나를 설명하면서 우리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바로 이 말을 마친 순간에 에드먼드 박사는 설교단에서 쿵 하고 넘어져 마루에 쓰러졌으며, 왕 중의 왕이신 하나님 앞으로 갔다. 비록 그는 죽었지만 적어도 잠시나마 우리는 생명을 맛보았다. 하늘과 땅 사이를 구분하는 선이 갑자기 없어졌고, 다음 시간에 치를 시험과 주말에 가질 데이트를 걱정하는 대학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 앞에 천사들과 천사장과 함께 있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기 위해 함께 모일 때,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마주 하게 된다. 아마도 오늘날 예배 중에 가장 소홀하게 되는 때는 예배가 시작될 때일 것이다...우리는 전능하신 분이 매우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예배를 시작할 때 조용하게 묵상하는 방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레이몬드 에드먼 박사가 그의 마지막 설교에서 가르치려고 했던 하나님 경외함은 여전히 오늘 우리 교회가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 경외함이 회복되면 예배가 회복된다(사 29:13; 렘 2:19).
먼저 오늘 우리가 읽은 두 구절의 말씀이 무엇을 지적하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먼저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를 드리기는 했지만, 그것은 형식주의, 외형주의에 빠진 예배였고,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었고,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오직 형식일 뿐 참된 경외함이 아니라고 선지자는 지적했습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예배를 드리기 보다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형식들로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예배가 마음 없는 형식에 불과했고, 그것도 멋지게 드려야 한다는 기준에서 인간들이 만들어 붙인 형식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예배의 원칙들은 다 무시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700여 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사야 선지자 보다 약 100년 뒤의 사람입니다. 그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 이후 100년이 지났지만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더 통렬하게 그들의 죄와 악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 경외함이 없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왜 그 백성이 마음이 없는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가? 그것은 하나님 경외함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경외함이 없는 것이 바로 악이고,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주시는 이 말씀은 한 마디로, 너희 마음에 하나님 경외함이 회복되면 예배는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배를 회복하기 위해서 예배의 형식을 바꾸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것이야말로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치는 행위일 뿐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 경외함이 없다면, 예배당의 실내 장식을 좀 더 엄숙하게 바꾸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 경외함이 없다면 아무리 예배를 준비하고 치장한들, 예배가 살아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감동도 줄 수 있고, 사람들의 환호도 이끌어낼 수 있겠지요. 인간이 고안해내고, 인간이 만들어낸 예배의 형식은 잠깐의 감동도 줄 수 있고, 의지도 움직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경외하십니까? 오늘 이것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을까요? 우리의 악과 고통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씀대로 하나님 경외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 선지자들이 말씀을 전했던 때는 지금으로부터 이천 육칠백년 전이었고, 유대 땅이었습니다. 무수한 세월이 지난 오늘 우리는 미국 땅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두 선지자의 말씀에서 자유롭습니까? 우리의 예배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벗어날 수 있습니까?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이 두 선지자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의 삶과 예배에 대하여 여전히 유효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어떻게 들어야 하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이것이 제가 이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는 것이고, 오늘 여러분 모두와 함께 이 말씀을 가지고 씨름하자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 경외함이 없는 것이 왜 악이고 고통인가?(시 25:14; 145:19; 34:9; 사 66:2)
먼저 우리가 생각해보려고 하는 것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씀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것이 바로 악이고 고통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 하나님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한 일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문제는 이것이 왜 고통이냐는 것입니다. 성경 몇 곳을 보지요. 시편 25:14에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또 시편 145:19에는 “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저희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시편 34:9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66:2을 보십시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을 만날 길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길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길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말씀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신앙의 기본이고 이것이 없다면 그는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자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잃어버린 것이 바로 이 경외함, 여호와를 경외함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외에 오늘날의 교회는 과거의 교회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가졌습니다. 거대한 예배당과 멋진 무대와 온갖 첨단 장비들, 마치 운동경기장에서나 볼 수 있을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경외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의 삶이 무력해지고, 하나님의 친밀한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돌보심과 도우심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경외함이 없는 것이 바로 고통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엄위하심(Majesty of God)을 알지 못하는 교회(시 95:3,6)
왜 하나님의 교회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왜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엄위하심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말하는 것이고 이 단어가 올 때에는 언제나 그 하나님 앞에 엎드려 예배를 드리라는 명령이 내포됩니다. 가령, 시편 95:3,6을 보지요. “대저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 위에 크신 왕이시로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하나님의 크심, 위대하심, 엄위하심이 나오면 그 뒤에는 굽혀 경배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으라는 명령이 나오는 것입니다. 제임스 패커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엄위하심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대체로 결여된 지식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믿음이 그처럼 힘이 없고 우리 예배가 그처럼 활기없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저는 여러분이 오늘 예배를 드리러 나오실 때, 혹 예배를 시작할 때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묻고 싶습니다. 우리가 엄위하신 하나님께 지금 나아가고 있으며, 그 분을 예배하고 그 분 앞에 엎드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셨습니까? 옛날 사극을 보면 우리는 과거에 사람들이 어떻게 왕 앞에 나아가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멀리서부터 몇 차례를 절을 하면서 왕에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도 그들은 엎드려 있습니다. 감히 왕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왕 앞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도 만일 영국 여왕을 만나게 된다면, 가슴이 두근거릴 것이고, 그 앞에서 엎드려 절하지는 않겠지만, 최대한 조심하며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여왕을 만난다는 것, 그리고 왕의 위엄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영어로는 Her Majesty(여왕 폐하)라고 말하겠지요. 저는 오늘날 교인들이 하나님께 예배할 때에 이런 정도의 인식이라도 가지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엄위하신 하나님을 아십니까? 만일, 그 엄위하신 하나님을 모른다면 우리가 알고 예배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사랑이 많으시고 자비하셔서 우리가 무슨 짓을 하든지 아무 상관도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입니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오해 위에서 이런 하나님을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저 우리의 삶 속에 어려운 일들이 있을 때마다 도와주시고 우리 편이 되어주시는 하나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그런 하나님은 아닙니까? 그러다가 편안해지면 다시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살다가 또 위기의 순간이 닥치면 나아가고 하는 그런 편리한 하나님입니까? 우리는 알라딘의 램프를 비비면 나오는 지니와 같은 존재를 결코 경외할 수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아는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 이상이 되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결코 그 하나님을 경외할 수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은 경외할만한 가치가 없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요. 또 때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외할 대상은 아닌 것입니다. 그 분 앞에 나아갈 때 엎드려 경배해야 할 분은 아닌 것입니다. 그분이 무슨 말씀을 하실 때 그것이 내 마음에 드는지, 내 기호에 맞는지 살펴보고 나서 따를 것을 결정하면 되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이 내 생명처럼 여겨져야 할 이유도, 그분을 따르되 어떤 손해와 불이익이 온다고 할지라도 심지어 내 목숨을 내어주어야 할지라도 나는 그분을 따르겠다고 할 만한 분일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의 수많은 교회에서 예배하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려 경배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은 엄위하신 하나님을 아십니까? 그리고 지금 여러분은 그 엄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5. 사람은 자기의 필요와 상상이 만들어낸 신을 경외할 수 없다(출 20:3; 전 12:13).
이것을 한 번 생각해보지요.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실 때, 제일계명으로 주신 것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왜 이 계명을 제일 먼저 주셨을까요? 존 칼빈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묵상하고 두려워하며 예배하라는 명령이다. 하나님의 축복들 안에 참여하고 모든 상황 속에서 오직 하나님만의 도우심을 구하라는 명령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위대함을 인정하고 기념하고 찬양하는 것을 인생의 모든 활동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하나님만을 예배하라는 명령이고, 예배를 인생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으라는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매주일 아침에 드리는 이 예배가 여러분에게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만일 우리가 다른 더 중요한 일 때문에 주일에 드리는 이 예배를 제쳐놓는 일들이 일어난다면, 만일 예배가 굳이 제 시간에 가야 할 만큼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 삶은 실패한 인생이고 망한 인생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는 성경적 근거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다른 모든 삶에서 성실하고, 두각을 나타내고 있으며, 지금까지 어느 정도의 성취를 이루고 살아왔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것들은 사상누각이 되고 말 것입니다. 솔로몬의 삶이 그것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그는 지혜와 부와 권력과 장수를 누린 사람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 인생을 망하게 했습니까? 한 가지에서 실패했습니다. 그는 아버지 다윗이 하나님을 경외한 것처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말년에 쓴 것으로 보이는 전도서의 결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하나님 경외함이 무너지면,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도리를 다하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 경외함을 잃어버린 결과, 교회는 만신전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머릿속에 있는 신은 성경이 계시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닙니다. 자기들의 필요가 만들어낸 신이지요. 그들은 황금 송아지를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 춤추고 노래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건대, 사람은 자기의 필요와 상상이 만들어낸 신을 향하여 결코 경외감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금송아지일뿐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도 좋아했던 바알이고 아세라인 것입니다. 여러분, 참된 예배와 거짓된 예배의 본질적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 경외함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지적한 형식주의에 빠져버린 예배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결여된 거짓 예배인 것입니다. 오늘날 이런 예배가 팽배해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매 주일 드리는 예배가 그런 예배는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다면 우리는 교회에 와서 바알을 섬기고 아세라를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는 나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고 하신 일계명을 매주일마다 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드림으로써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6. 경외함이 없는 예배
그래서 형식적인 예배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 경외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더 흥분하게 하고, 더 감동하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이것이 합당한 시도입니까?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엄위를 알아야 합니다. 저는 지난 7년 동안 하나님, 성경이 계시하는 참되신 하나님을 말하려고 애써왔습니다. 참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이 우리는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사랑인지, 얼마나 철저한 하나님의 공의에 서 있는 사랑인지를 말해왔습니다. 기쁜 소식인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저는 많은 분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만큼 나쁜 소식을 먼저 말해왔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예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중생을 통해서 죄인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그래서 중생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절대 조건이고 전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아, 나는 중생하지 않았으니 더 이상 예배도 드릴 수 없군.” 아닙니다. 아직 중생하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더욱 그 엄위하시고 자비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구원을 달라고 구하고 또 구하셔야 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구하십시오. 왜냐하면 이것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당하는 악과 고통은 하나님 경외함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경외함이 없이 살아갈 생각을 더 이상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을 경외하기까지 여러분은 결코 지금 겪는 고통에서 자유할 수 없습니다. 주일 아침에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특별하게 정해진 시간, 정해진 장소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만일 이 예배가 여러분에게 별 의미가 없는 것이라면, 여러분의 삶 전체가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예배는 여러분의 삶 중심으로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하나님 경외함을 위해서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7.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말 1:10; 렘 32:39~40)
우리가 회복할 것은 예배 이전에 하나님 경외함입니다. 음악이 없어도, 악기들이 없어도, 아주 극단적으로 말해서 설교가 없어도 만일 여러분이 엄위하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엎드린다면, 여러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르짖는 뜨거운 기도가 없고, 어쩌면 침묵만이 흐르는 조용한 예배가 될지라도 그 조용함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그 예배는 어떤 부르짖고 흥분하는 예배와 비교 조차 할 수 없는 참된 예배입니다. 아브라함의 꿇어엎드림, 두려워 숨는 모세,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외치는 이사야의 외침, 완전히 쓰러져버린 사울, 그리고 3년 동안 함께 했던 주 예수님의 영광받으신 모습 앞에서 죽은 자와 같이 엎드러졌던 사도 요한의 모습이 참된 예배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런 예배를 회복해야 합니다. 저는 단지 우리가 예배 시간에 회복해야 할 하나님 경외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숨 쉬는 모든 순간에 하나님을 경외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사야 선지자와 예레미야 선지자가 경고하는 이 말씀들을 들었을 때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냥 흘려버렸습니다. 마음이 강퍅한 자들은 “저 친구들, 입 좀 닥치게 해”라고 말했고 심지어 선지자들을 때렸고, 가두었고, 학대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경외함을 회복하기를 거절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 저는 그 말씀을 똑같이 전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아무 문제없이 잘 돌아가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들이 그랬듯이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경외하는지를 묻습니다. 여러분이 매 주일 드리는 예배가 형식주의에 빠진, 마음 없는 예배가 아닌지 묻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 경외함을 여러분의 마음에서 회복해야 합니다. 이것이 없다면 여러분의 삶도 망합니다 .이것이 없다면 여러분은 매 주일 이 예배당에 나와서 하나님을 향하여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선지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 1:10).” 오늘날의 교회가 피폐함을 면할 수 없음은 하나님 경외하기를 그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두려워함을 배우십시오. 하나님 경외함을 회복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경외함을 가르쳐 주시기를 구합니다. 하나님 경외함을 우리 마음에 다시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렘 32:3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