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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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에서 확신으로 1 - 선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 (1) - 흔들리는 신앙. 그 원인과 치료 - 지식 없는 신앙은 서지 못한다.

디모데후서 3:14a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3-05-05

말씀내용
1. 시리즈를 시작하게 된 배경: 교회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잃어버린 이유
오늘부터 새로운 설교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제목은 <오해에서 확신으로>입니다. 부제가 있는데 그것은 [흔들리는 신앙, 그 원인과 치료]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흔들리는 신앙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온갖 이단들이 교회에 침투해 들어와 교회를 허물고 수많은 교인들을 유혹하는데 성공하고 있는 현실이 그 하나의 증거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 믿는 도리를 분명하게 배워서 알고 신앙 생활을 하는 신자들을 만나는 것이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리는 것은 교회의 도덕적 타락이기 전에 교회의 무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다가 교회가 이런 모습을 보이게 되었을까요?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 교회 안에서 제가 보고 경험한 것들만 가지고 보더라도 그 이유를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가르침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설교는 교회의 삶에서 점점 비중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주일 예배에서 설교 시간이 짧아진 것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시간들은 감각적이고 화려한 프로그램들로 대치되었습니다. 더구나 포스트모더니티의 정신은 사람들로 하여금 배우고 깨닫고 이해하기 보다는 느끼라고 도전합니다. 그래서 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교리의 내용을 가르치는 대신, 소위 ‘먹히는’ 프로그램들으로 검증된 것들을 가져다 쓰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읽는 그리스도인의 습관은 점차 짧은 본문을 묵상하는 큐티로 바뀌었고 몇 년이 지나도 성경 한 번 제대로 읽지 않은 신자들로 교회는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무지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기 보다는 자기가 나름대로 느끼고 원하고 바라는 하나님의 상을 만들어놓고 그 하나님을 섬기는 현상이 교회 안에 가득합니다. 그래서 그들 안에는 유일하고 참되신 한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의 일치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각자 자기가 원하는 마음 속의 우상을 하나님이라고 이름하고 섬기는 격이 된 것입니다. 물론 저는 노골적으로 성경을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기적 욕망과 죄성이 만들어낸 하나님 상에 맞추어 그런 하나님을 말함으로써 그들의 비유를 맞추어 진리를 파는 목사들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말할 가치 조차 없습니다. 저는 중학교 때 목사님으로부터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배웠습니다. 이후 삼사십 년이 지나는 동안 저는 그런 교리 교육을 시키는 교회에 대해서 거의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슬픈 현실입니다. 교회에 구름 떼와 같이 모여든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하나님, 예수님, 십자가와 같은 단어들이기는 하지만, 정작 그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십자가와 복음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거나, 그 지식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피상적 지식에 불과합니다. 지난 2006년 10월 <타임>지는 지난 20~30년 동안의 미국 복음주의 교회들의 청소년 사역에 대해서 분석한 글을 실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해왔던 사탕발림의 프로그램들로 청소년들을 교회로 끌어당기려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그 기사는 말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의 입맛에 맞추어 청소년 사역이 많은 변화를 거듭했지만, 결국 그 아이들은 교회를 떠나고 마는 더 참담한 결과를 만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반면 소수이기는 하지만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면서 성경에 기초한 가르침과 예배라는 신앙의 기초로 돌아가는 교회들의 청소년 사역은 도리어 성장하고 있다는 내용도 싣고 있습니다. 성경과 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농구대와 당구대와 온갖 게임기기들로 아이들을 끌어당기는 것은 결코 그리스도께로 아이들을 인도하는데 효과적인 수단도 아닐 뿐 더러 교회가 가야 할 부르심이 아니라는 것을 이 기사는 보여줍니다. 이것은 비단 청소년 사역에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닙니다. 교회가 가르침을 그 사역의 중심에 두려고 한다면 사람들은 교회를 떠날 것이라는 두려움이 많은 교회 지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점점 교회는 소비자 친화적 교회가 되어 온 것이지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어느 목사님을 통해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지를 않으니 말씀을 잘 가르치시는 잘 알려진 목사님의 설교 강의 테잎을 구해서 청년들이 함께 모여 들으면서 공부를 하는 일도 일어난다고 하니, 얼마나 참담한 현실입니까? 신앙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참된 신앙의 확신에 서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을 가지고 그 하나님을 섬기는 신자들이 드문 현실이 되었습니다.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해보려고 하는 사람들도 바른 말씀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므로 수많은 오해들 위에 그들의 신앙을 쌓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은 결코 견고한 신앙으로 세움을 입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견고한 신앙은 진리에 대한 확신 위에서만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신앙 생활을 평가해보십시오. 배우려고 하지 않는 학생을 가르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려고 하고, 신앙의 도리를 배우기 위해서 다른 중요한 일들을 내려놓는 교인들은 심히 적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참된 지식이 없이도 신앙이 가능하다는 뿌리 깊은 오해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고,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근거 없는 오해 위에서 신앙을 세워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참된 신앙은 세워지지 않습니다. 만일 지금까지 여러분이 이런 나태함 속에 자신의 영혼을 방치해 오셨다면, 여러분은 단지 자신의 영혼만을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도 허물고 있었다는 사실도 아셔야 합니다. 가르치지 않는 교회의 배후에는 배우려고 하지 않는 교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신앙에 관련된 이런 많은 오해들을 다루려고 합니다. 이런 오해들이 진리의 말씀에 의해서 교정되고 바른 이해에 이르게 될 때, 그리고 여러분이 참된 진리의 지식을 추구하게 될 때, 여러분은 자신의 신앙이 비로소 견고해지고 성장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오래 믿어왔을지라도 여전히 흔들리는 신앙을 확고하게 세울 수 있는 치료책입니다.

2. 오해: 지식과 신앙은 무관하다.
이 시대의 교회에 만연한 오해 하나를 다룸으로써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지식과 신앙은 무관하다’는 오해입니다. 이 오해는 신앙에 막대한 해악을 미쳐왔고 지금도 미치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 몇 주 동안 서론으로 다루려고 하는 주제는 참된 지식의 중요성과 필요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처럼, 지식 없는 신앙은 서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에 사도 바울이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주는 말은 아주 단순하고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조금도 없는 말씀입니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디모데는 배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신앙의 도리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을 만나서 구약 성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배웠습니다. 이런 배움은 그를 한 사람의 성숙한 신자로 만들어주었고 그는 비록 나이는 젊었지만, 사도 바울의 부탁을 받아 지금 에베소 교회를 목양하는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디모데에게 사도 바울은 너는 계속해서 그 배운 것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가 다 배웠으니까 더 이상 배울게 없다는 말이 아니라, 계속해서 배움의 자리에 서 있으라는 권면이고, 이렇게 하는 일이 결국 디모데의 신앙을 확신한 일에 서게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확신한 일! 이것이야말로 오늘 이 시대에 정말 필요한 것이 아닙니까? 확신한 일에 서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배우는 일이 없다면 확신한 일에 거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배우고 또 배우십시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는 말이고, 바로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배우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 그리고 그 믿음의 내용을 배워야만 하는 것입니다. 배운다는 것은 기독교에 있어서 절대적인 중요성을 가집니다. 주님은 여러 차례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마 9:13).”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 6:45).” 사도들도 배움을 강조했습니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엡 4:21).”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히 5:12).” 이 말씀은 사실상 책망입니다. 믿은 지 오래나 배우지 않아서 아는 것이 없고, 여전히 도의 초보만을 배우고 있는 형편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벧전 1:10~11)”고 했습니다. 구약 선지자들도 그냥 말만 받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연구하고 배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특별히 구약 성경에서 배우고 가르치는 행위의 중요성은 가정에서 강조되었습니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 6:7).” 이 말씀들은 기독교는 배우는 종교이며 신앙과 지식은 불가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배우지 않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A. “머리만 커진다.”
이런 내용을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들은 머리만 커진다고 비판하고 싶어합니다. 이런 비판은 결코 신앙이 지식을 필요로 하고, 지식 위에 세워진다는 명제를 반박하는 논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을 추구한 적도 없고, 경험한 적도 없는 사람들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가령, 하나님의 속성에 대하여 배운 적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신앙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이 맺는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이 세상에 어떤 관계도 신앙의 관계만큼 은혜로운 관계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먼지 같은 존재인 인간과 관계를 맺어주시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무한 광대하심에 대한 지식을 성경으로부터 체계적으로 배워본 적이 없는 사람은 이 신앙이 무한히 은혜로운 관계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 그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한 인격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그 인격을 신뢰할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모르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한 인격에 대하여 알아가고 배워가는 것은 결코 머리를 키워가는 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어떤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는 이런 유사한 현상을 보게 됩니다. 그는 성경을 잘 알고 신학적 지식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거나 사랑하는 모습이 삶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가 많이 배워서 생긴 문제가 아니라, 머리의 지식이 마음 속으로 깨달아지지 않아서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배움을 중단해야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계속해서 배우되 성령님께서 자신 안에 자신이 배워서 지성적으로 알게 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은혜로우심과 아름다우심을 감각적으로 경험하게 해 주시기를 구해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B. “나는 느끼고 싶어.”
지식을 배격하는 신앙, 지식과 무관한 신앙관을 가진 사람들이 빠지게 되는 또 하나의 위험은 느낌에 의존하고 느낌을 추구하는 경향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포스트모던적 흐름과 함께 교회의 대세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배당 안은 어둡고 감각적인 조명들, 심장의 박동을 부추기는 음악 비트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비집고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설교 자체도 가르침의 내용 보다, 어떻게든 감동과 느낌을 주는 이야기 이상이 되지 못하는 저급한 우화 수준으로 떨어져버린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오늘날 이런 현상을 보는 것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느낌으로 통하고 느낌을 주는 것이 성공의 척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느낌을 위해서라면 굳이 복음이 아니어도 되고, 교회가 아니어도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종종 언급했습니다마는, 인도네시아 오지에서 지내다가 비자를 받으러 싱가폴에 갔을 때 어느 집에서 ‘열린 음악회’ 비디오를 보다가 감동을 받아 거의 울 뻔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신앙이란 그 믿는 바 분명한 내용을 가지는 것이고 그 이해 위에서 믿음은 힘이 생기는 법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당에 와서 감동을 받고 나가지만 아무런 변화도 그들의 삶 속에서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옛날 많이 불렀던 찬송가의 가사가 이것을 말해줍니다. 343장입니다.

울어도 못하네. 눈물 많이 흘려도.
겁을 없게 못하고 죄를 씻지 못하니
울어도 못하네
믿으면 하겠네. 주 예수만 믿어서.
그 은혜를 힘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네

열쇠는 감동이 아니라 믿음이고, 그 믿음은 언제나 믿음의 내용을 가지고 있으며, 믿음의 내용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에 의존하는 것이고, 이 내용은 우리가 배워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느낌에 의존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여부를 측정하신다면 그것은 건강하지 않은 매우 위험한 태도입니다. 하지만, 감정이 중요하지 않거나 무시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 우리는 이성적으로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과 더불어 의지적으로도 반응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전인이 변화되는 역사를 하나님께서 주실 때 먼저 우리로 알고 깨닫게 하시고 그것이 가슴으로 와서 감동으로 전해지게 하시며 다시 그 감동이 우리의 의지를 복종시켜 하나님을 섬기게 합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손과 발로 가는 것입니다. 이 순서를 무시한 채, 내용이 없는 느낌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영혼에 무익한 것이며 심지어 자기 신앙을 스스로 속이는 해로운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C. “이제는 그만 배우고 사역을 하라.”
신앙에서 지식을 무시하는 경향은 “이제는 그만 배우고 사역을 하라”는 말에서도 나타납니다. 사역을 하는 것, 섬기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만 배우고 사역을 하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성경적으로 옳은 말일 수 없습니다. 섬김을 나 몰라라 하고 말씀만 배우는 태도를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배우는 것은 일평생 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마치는 날에야 비로소 우리는 이 학교를 졸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섬김과 봉사는 이런 배움을 제쳐놓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배움과 함께 가는 것이지요. 사람이 더 이상의 배움이 없는 봉사와 섬김에 자신을 드리게 될 때 그 사람은 머잖아 지치고 말 것이고, 근본적으로 자신의 신앙 마저 흔들리는 경우를 경험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인은 평생 아니 영원토록 하나님과 복음의 진리를 배워야 하는 사람입니다.

3. 하나님은 우리가 배우기를 바라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고, 참된 복음의 진리와 성경을 통해서 계시된 모든 지식을 얻기 위해서 힘써야 할 자명하고도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배우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를 바라십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복음 그리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을 배워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다.

A.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다.
먼저,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습니다. 구약 시대에 모세로부터 시작해서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계시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고 신약 시대에는 사도들을 통해서 다시 그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해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성경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위하여 어떤 체험이나 신비로운 기적을 주시는 대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주셔서 그 능력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로 믿게 하고 믿을 뿐 아니라 믿음 안에서 성장하도록 의도하고 계획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을 배워서 알라는 것입니다.

B. 하나님께서 교회에 목사와 교사를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교회에 교사와 목사를 주셨습니다. 에베소서 4:11을 보십시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지도자의 직분을 말해줍니다. 여기서 사도와 선지자의 고유한 직분은 교회가 세워지고 성경이 완성된 후에는 더 이상 교회에 주어지지 않지만, 복음 전도자나 목사와 교사는 지속적으로 주어지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특별히 목사와 교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 말씀으로 목양을 하는 직분이 아닙니까? 여기에도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가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점 하나만 보더라도 목사와 장로는 자신의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교인들을 목양해야 하며, 교인들은 열심히 배우는 것보다 이 목양을 잘 따르는 길이 없는 것입니다. 존 에인절 제임스는 <목사에 대한 교인들의 의무>라는 책에서 8가지 의무를 말하고 있는데, 그 중 세번째 의무를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목사가 말씀을 가르치는 자리에 참석하는 것은 교인이 그들의 목사에 대하여 해야 하는 의무다.” 가끔이 아니라 항상 참석하라고 말합니다. 목사의 임무는 무엇보다 주님의 양들에게 말씀을 먹이는 일입니다. 주님의 양이 마땅히 해야 할 의무는 그 말씀을 먹는 일입니다.

C.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하여 성령님을 보내주셨다.
이것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마 약속하셨습니다. 주님깨서는 보혜사 성령님에 대하여 설명을 하실 때, “저는 진리의 영이라”고 하셨습니다(요 14:17).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그 하시는 일을 설명해주셨습니다(요 14:26). 그 진리의 성령님은 그리스도를 증거하실 것입니다(요 15:26). 이상이 주님께서 성령님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주신 교훈의 전부입니다. 성령님은 신자들에게 오셔서 진리를 가르치십니다. 우리로 말씀을 배워 깨닫고 경험으로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성경을 주셨고, 목사와 교사들을 주셨으며 무엇보다 성령 하나님을 주신 것을 생각한다면, 신자들이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배워 아는 것은 그 어느 것보다도 중요한 신자의 의무인 것입니다. 목사에 대한 의무가 아니라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의무인 것입니다.

4. 더 풍성한 지식을 추구하십시오.
하나님을 배우고 알아가는 일에서 우리가 핑계 댈 것이 없으며,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더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성경을 아는 지식이 풍성해지도록 추구하고 구하시라는 것입니다. 적당한 지식의 수준에서 만족하지 마십시오.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와 신자들에게서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의 확신이 희박하게 나타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고린도전서 1:5~6을 봅시다.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모든 지식에 풍족함’이 그리스도의 증거를 견고하게 한다고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성경을 가지고 얼마나 잘 설명할 수 있으십니까? 이것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 곧 전도입니다. 성경 전체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그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말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얼마나 성경에 기초해 있는가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위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빌 1:9~11).” 사도 바울은 그저 사랑이 많아지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지식 없이 자라지 않고 풍성해지지도 않습니다. 이 지식이 없을 때, 신앙과 관련된 모든 것은 정체됩니다. 이 지식이 풍성해질 때, 설교를 들어도 하나를 배워 열을 깨닫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식 없는 신앙은 서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 지식에 대해서 열심을 품으시고 지식이 풍성하고 차고 넘치기까지 추구하십시오.

5.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십시오.
여러분 우리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오늘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지난 며칠 동안 하나님에 대해서 배운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해서 어떤 것을 배우셨습니까? 여러분은 과연 배우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지난 수년 동안 성경을 정기적으로 매일 읽어 오셨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에 관한 애매모호한 지식에 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방법에 관한 교리를 바르고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배우셨습니까? 여러분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을 분명히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아무리 오래도록 신앙 생활을 해 왔다고 할지라도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해서 예라고 대답하실 수 없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책망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우리는 금년에 <전교인함께성경읽기>를 하고 있습니다. 매일 주의 깊게, 의미를 깨달으려고 노력하면서 성경을 읽으십시오. 교회에서 소개하는 책들도 열심으로 사서 읽으십시오. 그리고 교회에서 주일과 금요일에 드리는 예배와 성경공부에 참여하여 열심히 배우십시오. 그리고 깨달음을 주시도록 성령님께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배운 대로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초석입니다. 이렇게 가는 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것이 없이 행해지는 모든 형태의 종교적 노력과 봉사는 여러분의 신앙을 결코 세워주지 못합니다. 그저 주일에 교회나 오는 것이 여러분의 신앙 생활의 전부라면 여러분은 결코 안전한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십시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렇게 갈 때, 교회는 어린 아이처럼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는 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될 것입니다(엡 4:13~14). 그리고 그리스도의 증거가 견고해지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마침내 비추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