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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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에서 확신으로 6 - 선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 (6) - 복음의 핵심

이사야 53:10-1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3-06-09

말씀내용
<복음의 핵심> 사 53:10~12



십자가는 기독교의 가장 대표적인 상징입니다. 그러나 가장 오랜 상징은 아닙니다. 십자가 조형물이 기독교의 상징이 되어 역사 속에 나타난 것은 5세기 초반이나 되어서였습니다. 그 전에 살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는 결코 흔한 상징물이 될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는 그들에게 너무나 생생하고 무시무시했을 뿐 아니라, 개인적인 사연들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라고 마이클 카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의 말입니다. “1세기 크리스천들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것은 역사에 기록된 사건이 아니라 실재하는 공포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실제로 자신들의 친구나 가족 중에 십자가에 달려 희생된 아픔을 갖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오랜 역사 동안 십자가는 기독교 복음의 상징이 되어온 것이 사실입니다. 문제는 이 십자가가 복음에 대한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된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런 오해를 교정해줍니다.

1. 왜곡/제한된 시각
먼저 십자가에 대한 오해 혹은 제한된 시각을 살펴보겠습니다.

A.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과 희생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이 찬송을 아실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어떤 이들의 마음 속에는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 떠오릅니다. 십자가는 부담스러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이것이 다일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기독교 복음을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B.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다.
십자가와 관련된 두 번째 오해 내지는 제한된 이해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보는 시각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예수님께서 당신을 못박는 로마 군인들을 용서하는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사람들은 기독교는 사랑과 용서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틀리지 않은 말이지만 이것이 다는 아닙니다. 이것은 기독교 복음의 절반에 불과한 이야기입니다. 복음은 그 이상입니다.

C.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십자가에 관한 세 번째 제한된 시각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모든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물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을 주목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에 사람들은 모든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이야기는 이보다 훨씬 더 깊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분의 배후에서 일어난 일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2. 시각 교정
먼저 십자가에 대한 이런 오해 내지는 제한된 시각들을 교정한 후에 오늘 본문을 통해서 십자가의 진실에 대한 하나님의 설명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A. 복음의 핵심은 우리의 헌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헌신의 이야기다.
십자가는 우리의 헌신을 요구하는 이야기이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헌신과 하나님의 희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기독교 복음의 거의 전부를 놓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가 단지 우리에게 희생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라면 거기에는 복음은 없고 율법 만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우리의 헌신을 요구한다면, 복음은 하나님의 헌신을 선언합니다. 십자가에는 율법만이 아니라, 복음의 핵심이 풍성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먼저 우리의 헌신이나 희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헌신과 희생의 이야기입니다.

B.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지만,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시다(롬 1:18; 히 9:22).
두번째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 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서우리만치 확실하고 양보 없는 의로움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런 모습을 좋아하지 않고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죄와 죄인에 대한 진노를 유발하고, 하나님의 공의는 죄와 죄인에 대한 심판을 가져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이 속성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롬 1:18).”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C.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초점을 맞춘다(요 3:16; 롬 3:25; 5:8).
세번째로 십자가에 대해서 우리가 풀어야 할 오해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배후에 그를 십자가로 보내어 비참한 죽음을 죽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가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는 단지 그 위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 또한 말씀합니다. 십자가에서 우리가 성부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기독교의 한 면을 보고 다른 한 면은 전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3:16 말씀만 봐도 성부 하나님의 일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獨生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고 로마서 3:25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로마서 5:8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 구절들의 주어가 모두 성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십니까? 십자가의 사건은 성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들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 사실들을 주어진 본문을 통해서 더 분명하게 보아야겠습니다.

3. 본문의 의미
본문은 놀라우리만치 우리에게 십자가의 진실을 정확하게 드러내줍니다. 본문은 고난 받는 종으로 오실 메시아에 대한 놀라운 예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주님이 오시기 700년쯤 전에 이 말씀을 받아 예언하였습니다.

A. ‘그’와 ‘여호와’
10절에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그’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오실 메시야를 가리킨다는 것은 53장 전체를 통해서 본문이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는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 ‘여호와’는 성부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10절은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의 상함 받는 것을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삼위로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삼위일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 본문의 의미 속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어떤 관계입니까? 이미 우리가 몇 주 전에 살펴본 대로, 성 삼위 하나님의 관계는 영광 가운데 거하시고, 완벽한 행복과 최상의 기쁨을 누리시며 완전한 사랑을 하고 받으시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부께서 성자의 상함 받으심을 원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조금 더 단어들의 뜻을 살펴야 합니다.

B. ‘상함’
먼저 ‘상함’이란 단어입니다. 상함은 단순히 다친다는 뜻이 아닙니다. 히브리어에서 이 단어는 ‘으깨다, (즙을) 짜다, 박살내다’와 같은 대단히 강한 정도를 드러내는 말입니다. 그래서 많은 영어성경이 ‘crush’란 단어로 번역을 했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의 으깨어짐을 원하셨다는 말입니다.

C. ‘원하사’와 ‘뜻’
우리가 살펴볼 또 한 단어는 ‘원하사’입니다. 이 단어와 같은 단어가 10절 하반절에 명사 형태로 사용되었는데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에서 ‘뜻’이란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본래 뜻은 ‘기쁨’입니다. 보통 기쁨이 아니라 ‘큰 기쁨, 환희’와 같은 기쁨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10절 하반절은 ‘여호와의 기쁨을 성취하리로다’라는 뜻이 됩니다. 한글개역개정역은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라고 개역보다 정확하게 번역했습니다. KJV가 ‘the pleasure of the LORD’로 NASB는 ‘the good pleasure of the LORD’라고 번역한 것은 정확한 번역입니다. 그렇다면 앞에서 동사 형태로 사용된 ‘원하사’는 무슨 의미겠습니까?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받으심과 십자가에 죽으심을 ‘기뻐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KJV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를 상하게 하는 것은 여호와를 기쁘시게 했다(it pleased the LORD to bruise him).” 이것은 마치 십자가에서 성자 하나님의 고난과 죽으심이 인류를 창조한 이래로 성부 하나님의 가장 큰 기쁨의 순간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야 합니다. “왜 성부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고난과 죽으심을 기뻐하셨는가?”

D. 성부 하나님께서 아들의 고난과 죽으심을 기뻐하신 이유
성부께서 성자의 고난과 비참한 죽으심을 기뻐하셨다는 표현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설명입니다. 왜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의 죽으심을 기뻐하셨을까요? 아들의 고난과 죽음을 기뻐할 아버지가 어디에 있습니까? 본문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일을 기뻐하셨기에, 그 아들로 질고를 당케 하셨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아들을 슬픔과 비애 가운데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슬픔과 비애를 뜻하는 ‘질고’라는 단어는 죄가 없으시고 알지도 못하시는 성자 하나님에게는 어울릴 수 없는 단어입니다. 왜냐하면 질고는 죄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것을 아들로 짊어지게 하셨고 그것을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아들을 속건제물로 삼으셨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의 성취였습니다. 왜냐하면 성자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심으로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시면 그 씨를 보게 될 것이고,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기쁨’을 성취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씨가 가리키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성자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서 죽으신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의 속죄와 자비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께 나아와 그 죄의 씻음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요, 새 피조물이 된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요, 계획이었으며 성자께서는 자발적인 순종과 죽기까지 보여주신 순종을 통해서 성부 하나님의 기쁨을 성취해드린 것입니다. 아들의 고난과 죽으심 자체가 기쁠 수는 없습니다마는, 성부 하나님의 기쁨이 된 것은 바로 성자 하나님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성취된 자기 백성들의 구원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설명드리지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들에 대한 영원한 사랑 안에서 너무나 즐겁고 기쁘셨으며 만족스러워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믿는 모든 사람들과 그 기쁨과 영광을 나누기를 정말 원하셨습니다. 아들을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아들에 대한 사랑을 자기 백성과 너무나 나누기를 원하셔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까지 하신 것입니다. 즉, 세상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아들에 대한 전능하신 사랑의 흘러 넘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셨던 하나님의 목적과 동기는 사실,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구원 역사에서도 완전히 동일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 뜻이 완전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대제사장 기도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요 17:22).” 이 말씀의 엄청난 의미를 과연 누가 다 헤아릴 수 있을까요? 주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저희에게 주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라고 선언했습니다(사 42:8).” 이 구절의 의미는 앞에 있는 구절들을 볼 때 성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성령을 주신 분 성자 하나님 외에 어느 누구와도 그 영광을 나누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사 42:1~7).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모든 영광과 사랑과 축복과 바로 당신 자신을 오직 아들에게만 주십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만 주신 영광, 그것을 지금 아들께서 자기를 믿는 자들에게 주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의도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주신 그 영광을 충만하게 우리에게 나눠주시고 우리가 가질 수 있도록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아들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와 가지시는 그 즐겁고 복되고 사랑스러운 교제 속으로 우리들을 데려가시기를 그토록 원하신 것입니다. 아들을 향해서 베풀어주시는 무한한 사랑을 이제 아들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동일하게 무한히 베풀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든지 아들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는 약속에 나타납니다(요 1:12).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한 기쁨의 대상이신 성자 하나님과 같이 우리가 동일한 유업,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유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들을 향하신 아버지의 그 무한하고 완벽하고 전능하고 전지한 그 사랑과 선하심을 어떻게 가늠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백성들이 그 아들을 동일하게 기뻐하고 사랑할 수 있게 하시고 자기 아들의 영광을 나누어 주시는 것, 곧 그들로 자기 자녀를 삼으시는 것이 바로 아버지의 기쁘신 뜻이었고 성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당신의 손으로 성취하셨다는 것이 본문의 의미입니다.

E. 성부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
하나님 아버지께 있어서 이 기쁨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그 아들의 고난과 죽으심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아무리 값비싼 대가를 지불한다 할지라도 죄인들이 구원받고 그들이 당신의 아들을 기뻐하고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라면 그 값을 지불할 뜻을 가지셨으며 결국 아들의 죽음으로 죄인들을 향하신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성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잠깐 멈추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쉽게 예단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말하기 전에 먼저 보아야만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볼 때 예수님의 사랑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 쏟아 부어진, 죄인들의 불경건과 불의를 향하신 성부 하나님의 진노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성부 하나님의 진노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 남김 없이 쏟아 부어졌기 때문에,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3:25~26절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십자가에서 일차적으로 나타내려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이었습니다. 죄와 죄인들은 반드시 죄에 상응하는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의 모든 죄에 대한 심판을 완전히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발적인 순종과 죽으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기쁘신 뜻을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십자가에서 당신의 거룩과 의를 조금도 양보하지 않으시면서 동시에 당신의 사랑을 온전하게 드러내고 성취하셨습니다.

4. The Passion of God, the passion of the Christ
이제 우리는 이 본문이 십자가 사건에 대해서 말씀하는 내용을 정리해야겠습니다. 그것은 The Passion of God, the passion of the Christ 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는 성부 하나님의 passion 과 성자 하나님의 passion이 모두 충만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 말로 어떻게 번역할 수 있을까요? 열정을 의미하는 단어인 passion은 중세 영어에서는 열정이 아니라 고난을 의미했습니다. 이 단어가 현대에 열정을 의미하는 단어로 뜻이 변화되었습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것을 너무나 열망(passion)하는 나머지, 그것을 갖기 위해서라면 어떤 고난(passion), 어떤 대가라도 피하지 않고 지불하더라’는 것이 passion이란 단어의 의미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고난을 의미하던 말이 그 어떤 고난을 당해도 포기할 수 없는 열정으로 그 뜻이 변한 것입니다.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입증해 보이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에게 죄인들을 향한 진노를 아낌없이 쏟아 부으셨습니다. 더 이상 남은 것이 없도록 다 쏟으셨습니다.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성부 하나님의 passion(열정)이 성자 하나님의 passion(수난과 죽으심)을 있게 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이요, 십자가의 진실입니다. 십자가는 성부 하나님의 포기할 수 없는 열심인 passion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어떤 대가라도 감당하셨던 고난과 죽으심의 passion으로 성취된 일입니다.

5. 만족하시는 그리스도
11절에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기신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이루셨습니까? 성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다 성취하신 것입니다. 고난과 죽으심(passion)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아버지의 열정(passion)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도 하신 일을 보고 만족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부께서는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였다’고 기뻐하십니다(11b). 그래서 그 아들을 높여 존귀하게 하시고 승리한 자에게 주시는 전리품을 주십니다(12).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받으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을 성취하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열정(passion)에 자신의 삶을 복종하여 죽기까지 드리심(passion)으로 인간이 살 수 있는 최고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수고를 보고 마지막에 만족하는 삶입니다. 마땅히 감당할 수고를 회피함으로 지금 만족을 누리지만 마지막 날에 지옥으로 가면서 울며 이를 갈게 되는 삶이 아닙니다.

6. 십자가, 복음의 핵심
십자가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을 보기 전에 먼저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독생 성자를 못박아 죽이시는 성부 하나님의 희생과 헌신을 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우리를 아무 기준도 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당신의 공의의 기준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심판하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주시고 흠 없고 의롭게 만드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봅니다.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서 죽게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높은 장대에 매달린 놋뱀을 그저 바라보는 자마다 살았던 것처럼(민 21:9) 하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그리고 십자가에 그 아들을 매달아 하늘의 진노를 쏟아 부으신 하나님을 그리고 그렇게 해서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그 선하심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날마다 십자가로 나아가십시오. 십자가는 모든 죄인들로 하여금 기독교 복음의 핵심,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게 합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는 것이 신앙의 열쇠입니다.

7. 하나님은 선하시다!!! 당신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passion은 다함이 없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그분의 선하심을 믿지 못하는 치명적인 질병을 본성 안에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믿을지언정, 하나님은 믿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너무나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지 못하는 일 들 속에 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에게 최상의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안식을 누리지를 못하고 늘 불안해 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바울 사도는 십자가 사건을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인할 수 있는 확고하고도 충분한 증거로 제시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여러분은 무엇으로 여러분의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인하십니까? 사업이 잘 되고, 자녀들이 잘 자라주고, 내가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그런 것으로 당신의 선하심을 증명하지 않으십니다. 이미 2000년 전에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그 사랑하시는 아들을 못박아 죽이심으로써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넘치도록 충분하게 증명하고 나타내셨습니다. 당신의 아들을 기뻐하고 사랑하는 즐거움과 만족과 행복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우리로 알게 하시려고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당신의 선하심을 결코 그치지 않게 하시겠다고 하신 영원한 언약 그대로 하나님은 신실하게 그 일을 이루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무한 선하심을 불신함으로 하나님날마다 모독하고 살아가는 인생들을 오래 참으심으로 기다려주시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고 신뢰하게 되기까지 선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어디서 만날 수 있습니까? 바로 십자가에서 우리는 그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사건을 경험한 자들, 이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자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안 자들은 그 인생의 모든 여정에서 흔들림 없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붙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내게 선을 베풀어주시는 일을 결코 그치지 아니하심을 이미 십자가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못박으심으로써 내게 알게 하셨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18-09-22 12:21:11 설교게시판에서 복사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