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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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에서 확신으로 12 - 선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 (12) - 내 잔이 흘러 넘칠 때

시편 23:5-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3-08-04

말씀내용
< 내 잔이 흘러 넘칠 때: 그리스도인의 삶> 시 23:5~6


1. “내 잔이 넘치나이다.”
다윗은 그 유명한 시편 23편에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놀라운 고백을 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 고백을 공감하며 살까요? 다윗은 언젠가 그렇게 고백할 날이 올 것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시간에 그렇게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자기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자기에게 큰 잔치를 베풀어주실 하나님을 그는 압니다. 그는 장래의 은혜를 바라봅니다. 하지만 그가 하는 고백은 그 장래의 은혜 때문에 ‘바로 지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는 6절에서 이것을 조금 더 설명합니다. “나의 평생에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그가 잔이 넘친다고 고백하는 것은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미래의 결정적인 순간에만이 아니라, 자기가 느끼든 못 느끼든 평생 자기를 좇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사실 기독교 신앙의 요체가 있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다윗의 고백을 주님은 ‘풍성한 삶’이라고 하셨습니다(요 10:10). 그리스도인의 삶이 정말 잔이 넘치는 삶이라면 세상에 그보다 나은 삶은 어디 있으며, 그보다 행복한 삶이 어디 있습니까? 문제는 신자들이 참으로 그 삶을 알고 경험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2. 기독교 신앙과 삶에 대한 오해: ‘믿으면 가난해지고 고생한다.’
먼저 유독 한국교회에 뿌리내린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오해 하나를 다루려고 합니다. ‘믿으면 가난해지고 고생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난이 미덕이라는 생각과도 무관하지 않은 오해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교회 밖에서만 가진 오해가 아니라, 이런 생각에 오염된 채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오해는 이런 변명을 만들어냅니다. “성경말씀대로는 못 삽니다. 그렇게 제대로 세금보고하고 세금 내면 남는 것 하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예입니다. 말인즉슨 정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이 무엇을 명하고 무엇을 금하는지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몰라서가 아닙니다. 알지만 순종하지 않습니다. 이런 변명을 하는 이들 중에 교회의 직분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태도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뿌리깊은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이것은 본인 자신도 정확하게 명제적으로 진술할 수 없는 오해입니다. 제대로 믿으려면 가난해진다는 두려움 같은 것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이런 태도를 가지고는 참되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자신의 일생을 좇아오는 것을 결코 경험할 수 없고 따라서 다윗이 하는 고백, “내 잔이 넘치나이다”하는 고백을 결코 공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진짜 믿음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망할지언정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하는 태도지요. 물론 순종하면 반드시 망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신자라 하는 사람들이 불신앙의 태도를 가지고 사는 것은 비극입니다. 하나님과 그 말씀을 믿는다고는 하나, 자신이 만들어낸 오해 속에서 살고 있다면 도대체 무엇을 믿는다는 것입니까? 정말 예수 믿으면 가난해지고 고생합니까? 성경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이 가난해지기를 바라신다고 쓰여진 부분이 있는지 확인해보십시오. 어떤 분들은 제가 갑자기 번영의 신학/복음을 말하려는가 하고 이상하게 여기실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결코 저는 그런 거짓 복음을 주장하지도, 지지하지도 않습니다. 번영의 복음은 예수 믿으면 부자 되고, 건강해지고 문제가 해결된다는 거짓된 약속을 주는 거짓 복음입니다. 번영의 복음은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고백을 오해하는 가장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물질적인 차원에서와 이 세상적 차원에서 해석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가르침은 비성경적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거꾸로 성경은 예수 믿으면 가난해지고 고생한다고 말하고 있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오해는 조금 더 확장됩니다. 선교사님들이나 목사님들은 기독교 신앙에 더욱 헌신된 분들이기 때문에 더 가난해져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믿음이 좋을수록 더 가난해진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일반적인 기독교 신앙과 삶에 대한 오해가 선교와 복음 사역에 대한 오해로 확장되는 예입니다. 가령, 선교사와 고생은 거의 동의어로 여겨지고, 선교사의 고생은 그 자체로 미덕이라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성경이 고생과 미덕은 정비례한다고 가르칩니까? 제가 예전에 정신과 의사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스캇 펙은(스캇 펙의 책을 읽을 때는 그가 전하는 뉴에이지 사상 때문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에게 찾아온 한 환자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시중의 일반적인 생각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봅니다. 인용입니다: “호리호리하고 깡마른 체구로 키는 남편보다 작았는데도 보기에는 훨씬 커 보였다. 그녀는 예쁘게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 미소는 조금도 내 기분을 좋게 해주지 않았다. 어쩐지 그 미소는 입가에 번진 촘촘한 주름살에 풍겨지는 약간 쓸쓸한 표정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그녀는 철테 안경을 끼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내게 선교사 부인을 연상시켜 주었다 (『거짓의 사람들』, p.133).” 그 책을 읽고 있던 당시 저는 선교사였습니다. 선교사 부인 같다는 그의 묘사는 주름살, 쓸쓸함, 싸구려 철테 안경 등 고생스러운 삶을 보여줄 뿐, 우리는 그런 묘사에서 기쁨과 같은 요소는 찾아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3. 기독교 신앙과 삶에 대한 또 하나의 오해: “기독교는 금욕주의 내지 금욕적이다.”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하지요. 제가 선교지에 있을 때 경험한 것입니다. 단기선교로 선교지를 방문하는 많은 분들이 선교사의 경제적 생활 수준에서(잘 사느냐, 못 사느냐) 감명을 받거나 실망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선교사의 생활 수준이 그의 삶과 사역에 대해서 무언가를 말해 줄 수 있다는데 동의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것을 말해줄 수는 없습니다. 이 사실을 놓치면 시험에 들게 됩니다. 이것은 중요하지만 본질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질은 선교사가 자신이 복음을 전해야 하는 대상들과 얼마나 동화되며(동화된다는 것은 경제적인 문제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그들을 사랑하며 그들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는가 입니다. 또 우리가 선교사님들을 향해서 가져야 하는 합당한 태도는 그들에게 가난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우리 중 아무도 그것을 형제에게 요구할 수 있는 권리는 없습니다), 그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제가 특별히 민감한 예를 들면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고생과 미덕이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금욕주의가 아니고 그것을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도리어 성경은 우리 안에 있는 많은 욕구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가르치고,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한계 안에서 그것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리는 길이라고 가르칩니다. 성욕이나 식욕과 같은 욕구들은 억눌러야 하는 욕구가 아니라, 그 욕구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 안에서 누리라고 주신 선물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욕구를 억누르는 삶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절제라는 덕목과 자기 부인을 강조한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이 아닙니다. 진정한 더 큰 기쁨을 얻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예로 들었듯이, 보통 신자와, 목사나 선교사 같이 헌신된 사람들을 구분하는 것도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바쳐졌고,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입니다. 헌신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사실상 모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더 이상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해 죽지 않습니다. 이제 그가 사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입니다(롬 14:7~9). 그러므로 헌신한 그리스도인과 헌신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구분은 비성경적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가르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4. 그리스도인의 삶과 기쁨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은 ‘잔이 흘러 넘치는 삶’으로 표현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고통이나 어려움이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실제로 많은 고난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에 있었습니다. 사도들의 삶이 그랬고, 구약의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의 삶을 보아도 그들에게 고난이 넘쳤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들의 삶의 상황은 다 달랐을지라도 그들이 삶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고난을 겪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믿는 자들이 환난을 당할 것이고(요 16:33), 주님 때문에 욕과 박해를 당할 것이라고 하셨고(마 5:10~11) 사도 베드로는 불 시험을 당할 때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벧전 4:12). 이 모든 일을 만날 때 우리가 행할 바에 대한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2).”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3).” 다윗도 많은 시편에서 자신의 깊은 고뇌와 심적 괴로움을 토로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환난을 당한다는 것은 다 실패하고 가난하고 건강하지 않다는 잣대로 측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 사는 동안 겪는 환난은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고백했듯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부에 처할 수도 있고 가난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싸워야 하는 영적 싸움은 피할 수 없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하는 환난도 피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여러분이 처해있는 삶의 형편이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살아야 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핑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환난, 고뇌, 두려움, 염려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각각의 상황들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고백을 앗아가지 못합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그래서 가능한 것입니다(살전 5:16). 그러므로 우리가 때로 염려와 고뇌와 두려움에 빠질 때마다 스스로 물어야 하는 것은 내가 지금,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주실 상을 바라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지금도 내 뒤를 바짝 좇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A. “하나님은 물통이 아니라 샘이다.”(존 파이퍼)
우리가 여러 번 살펴보았지만, 신앙 생활이 의무만으로 이루어진다면 거기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믿음은 반드시 하나님을 참된 기쁨과 즐거움의 대상으로 여기게 하고, 거기서 참된 기쁨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중요한 원리입니다. 이 기쁨은 의무감으로만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않습니다. 의무감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의 근저에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존재합니다. 존 파이퍼는 이것을 한 비유로 잘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물통이 아니라 산 속의 샘이다. 샘은 스스로 채워진다. 그러나 물통은 펌프나 두레박으로 채워야 한다. 물통을 영화롭게 하려면, 그것이 가득 차고 유용하게 될 때까지 열심히 일해야 한다. 그러나 샘을 영화롭게 하려면 그냥 마셔서 힘과 원기를 얻으면 된다. 계속 강에서 물을 길어 샘을 채움으로써 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물통이 아니라 샘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를 많이 해야 하는 의무감으로 열심히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께 나아와서 “아버지, 제가 목이 마릅니다. 저로 마시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구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강수를 마시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 삶에는 만족과 기쁨이 있습니다.

B.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자가 누리는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
아담이 범죄하여 타락했을 때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셔서 누리던 기쁨을 상실했습니다. 대신에 근심과 고통이 가득한 인생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주시는 선물이 성령님입니다.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후에 성령을 부어주시는 오순절의 사건이 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과 동기를 너무나 잘 보여줍니다. 또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성령님을 주시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께서 상호 간에 누리시던 기쁨의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에게 성령님을 주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타락할 때 잃어버린 그 기쁨,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 상호 간에 누리고 계셨던 그 동질의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기쁨은 완전한 사랑과 행복에서 흘러나오는 완전한 기쁨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 5:5에 이렇게 썼습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5).” 성령님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 마음에 넘치도록 부어진 것을 알고 경험하게 됩니다. 바로 여기서 기쁨이 솟아오르게 되고 성도는 최초로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C. 내 잔이 흘러 넘칠 때 하나님의 선하심이 흘러나간다.
이 기쁨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지배하는 원리입니다. 이 기쁨이 그리스도인의 미덕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미덕은 고생이 아니라 기쁨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을 측정할 때, 내가 얼마나 주님을 위해서 고생하나 혹은 내가 얼마나 주님을 위한 의무감을 가지고 행하고 있나 가 아니라, 내 안에 하나님 한 분으로 인한 기쁨이 있는가, 내가 그 기쁨으로 즐거워하고 만족하고 있는가로 판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누리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이 커질수록 우리의 잔이 넘친다고 우리는 고백하게 되고, 우리의 잔이 넘치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선하심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흘러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전도요, 선교의 모습입니다.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전도를 의무로 생각합니까?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선교를 부담감으로만 여깁니까? 그러나 참된 전도와 선교는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하는 이들을 통해서 그들이 정직하게 느끼고 경험하고 누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밖으로 흘러 넘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선하심이 주변과 멀리 땅끝의 사람들에게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내가 느끼지 못하는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 없습니다. 내가 경험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다른 사람들에게 거짓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하나님 안에서 느끼는 기쁨,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인하여 만족하는 즐거움은 정직하게 내 삶을 통하여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즐거워하는 이 기쁨이 우리의 고난 속에서, 우리의 환난과 박해 속에서도 일어날 때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기이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또 다양한 삶의 환경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환경과 아무 상관없이 동일한 고백,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세상은 놀랄 것입니다.

5.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은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을 생각해보십시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박국 선지자의 이 고백을 공감합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아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누리는데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떤 자리에 처해 있든지 이것을 알았고 누렸습니다.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선하심을 묵상하고 또 묵상하십시오. 성경에 쓰여져 있는 모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배워가십시오. 다윗이 시편 34편에서 말한 것처럼 그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십시오(시 34:8).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부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것은 모든 환경 속에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하게 합니다. 비교하고 불평하며 결코 만족을 모르는 이 세상을 향해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교회 공동체의 고백은 흘러나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전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고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선하심을 누리는 것이 교회의 교제를 풍요롭게 합니다. 가난하고 고생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 또는 금욕적으로 사는가 살지 않는가가 문제의 핵심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며, 모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내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합니다”라고 노래하는 것이고, 모든 것이 풍족한 가운데서도 “내 기쁨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 선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하심을 누리고 즐거워하게 하사 우리로 하여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다윗처럼, 하박국처럼, 우리의 모든 믿음의 선배들처럼 고백하게 하시고 그 삶을 세상에 드러내주셔서 모든 영광을 받으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