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오해에서 확신으로 11 - 선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 (11) -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

누가복음 15:11-3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3-07-28

말씀내용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 > 눅 15:11~32


기다리는 아버지의 이야기
주님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세 사람입니다. 아버지와 두 아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둘째 아들에 초점을 맞추어 이 이야기를 ‘탕자의 비유’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굳이 이 비유의 주인공을 꼽자면 아버지입니다. 주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서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주고 싶어하십니다. 그래서 이것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라고도 부릅니다. 물론 이 아버지는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줍니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집에 있는 아들과 집을 떠났다가 돌아온 아들입니다. 이 두 아들은 우리 모두를 대변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떠난 적이 없이 살아왔기에 은혜의 감격도,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도 없고, 모든 것이 은혜가 아니라 권리라고 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분명히 맏아들의 모습입니다. 한편 아버지를 떠났다가 결국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 품에 안긴 감격과 감사와 눈물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둘째 아들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 둘째 아들도 시간이 흐르면 어느 새 맏아들과 같은 마음으로 살지도 모릅니다. 아버지는 이런 두 아들의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이 두 아들 모두를 기다려주시는 아버지입니다.

둘째 아들: 사람은 쥐엄 열매를 먹어야만 회개하는가?
이 이야기에서 제일 먼저 말하는 사람은 둘째 아들입니다. 그는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라고 아버지에게 말합니다(12). 살아계신 아버지에게 유산을 청구하여 받아낸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유대법에는 유언을 쓴 사람이 죽기 전이라도 더 이상 내용을 고칠 수 없도록 mattenat bari 라고 하는 일종의 공증 같은 행정절차가 있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요구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면 변경이 불가능하므로 아버지의 생사와 무관하게 이미 확정이 된 것과 다름없고 자기의 몫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렇게 확보한 자기 몫을 가지고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미숙한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다 날려버리는 것도 시간 문제였습니다. 그는 먼 나라로 갔고 거기서 방탕한 삶으로 재산을 다 날렸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는 큰 흉년으로 경제적 위기를 맞았습니다. 무일푼 거지가 된 이 아들의 주변에서는 친구들이 하나씩 둘씩 떠나가고 손 벌릴 곳도 없게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 이 아들의 비참한 상태를 아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돼지와 쥐엄 열매입니다. 이 두 단어는 그가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을 만큼 내려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일자리도 줄어들었고 그는 가까스로 들에서 돼지 치는 일을 얻게 됩니다. 유대인들에게 돼지는 부정한 짐승이었기에 그가 돼지를 치게 되었다는 것은 유대인으로서 가장 피하고 싶은 모욕적인 일을 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제대로 된 품삯을 받는 조건도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그는 돼지나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려 하나 이나마 주는 이가 없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쥐엄 열매는 유대인들이 제일 배고플 때 죽지 않으려고 먹는 식량이었습니다. 열왕기하 6:25에 보면, 아람이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포위했을 때 성 중에 음식이 없어서 ‘나귀 머리 하나에 은 80세겔이고, 비둘기 똥 사분의 일 갑에 은 5세겔’이 되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아합의 아들 요람 왕 때 일이고, 당시 선지자는 엘리사였습니다. 나귀는 부정한 짐승이라 먹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머리 가격이 80세겔이나 했다니 그 비참한 현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참고로 1세겔은 당시 1개월의 급료였습니다. 그리고 비둘기 똥(개역성경에는 한자 ‘합분태’로 표기)도 사분의 일 갑에 5 세겔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비둘기 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것이 비둘기 똥 모양의, 콩과에 속하는 쥐엄 열매를 가리킨다는 해석이 있습니다(여기서 ‘갑’이라고 한 것은 고체를 재는 단위로서 한 갑이 1.2리터 정도됩니다). 유대인들의 문서인 미드라쉬에는 “어떤 유대인이 오직 쥐엄 열매를 먹을 정도로 궁핍한 상황과 고난을 겪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께 회개할 것이다”라는 말이 있을 만큼 쥐엄 열매는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말해주는 상징과 같은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의 요지는 둘째 아들이 먼 나라에서 더 이상 비참해질래야 비참해질 수 없는 상황에 처하였다는 것입니다. 돼지 틈에서 굶어 죽는 것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혼잣말을 되뇌입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17).” 품꾼은 매일의 양식을 보장받고 심지어 가족과 같은 대우를 받을 수도 있는 ‘종’보다 못한 존재로, 거의 일용직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고백은 그가 이 비참한 상태에서 자기 아버지를 생각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에 둘째 아들이 경험하게 될 은혜의 시작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은혜는 이미 전부터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단지 이 아들이 아버지의 은혜를 알았던 적이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권리라고 생각하던 것들이 다 자기 손에서 벗어나버렸을 때, 비로소 은혜를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는 이제서야 전부터 존재했던 아버지의 은혜를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일어나 아버지께로 가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가서 아버지께 이렇게 말하겠다고 합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18~19).”

둘째 아들을 대하시는 아버지의 은혜: “너는 언제나 내 아들이다!”
세월이 얼마나 흘렀을까요? 거지 행색을 하고 집으로 걸어오는 아들을 멀리서 알아본 것은 아버지였습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20). 아버지는 어쩌면 이 아들이 집을 나간 그날부터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매일 그렇게 동구 밖에서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멀리서 알아보고 달려가 안고 입을 맞출 수가 있었겠습니까? 둘째 아들은 말하려고 했던 대로,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21).” 아버지는 그의 말을 거의 무시하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종들에게 말합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22~24).” 우리 말 성경에는 생략되었지만, 아버지는 ‘속히’ 행하라고 재촉합니다. 옷과 가락지 그리고 신발은 신분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집에서 가장 좋은 짐승인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며 즐거워합니다. 둘째 아들은 인생의 그 어느 순간보다도 더 놀랍게 아버지의 은혜를, 아버지의 선함을 가슴 깊이 경험합니다. 그런데 정말 답답하고 슬픈 것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이런 은혜와 선하심을 가슴으로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왔던 이 자리까지 오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형인 맏아들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맏아들: 흥정과 계산은 은혜에서 점점 멀어지게 할 뿐이다.
맏아들은 이날도 어김없이 밭에 나가 일을 하다가 해가 질 녘,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게으르지 않았고 방탕하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 아들은 동네 안팎에서 둘째 아들과 비교되어 모범생 효자 아들로 소문이 자자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말처럼,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었던” 아들입니다(29).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맏아들이 얼마나 비참하고 가련한 사람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에서 기쁨은 짧았고 분노는 길었습니다. 의무감은 있었지만 기쁨은 없었습니다. 왠지 그가 명을 어기지 않고 아버지를 섬겼다고 하는 말에서는 자부심 대신 섭섭함이 느껴집니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분노만 쌓여갔습니다. 너무 심하게 비난하는 것으로 들리십니까? 하지만 이 맏아들의 반응은 이런 해석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는 아버지의 기쁨에 동참할 수 없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가는 것이 겉으로 볼 때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속에는 아무런 기쁨도 없고 의무감과 더불어 섭섭함과 분노만 쌓여간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여기에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아 보여도, 아무리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도 말입니다. 맏아들이 가진 문제는 무엇일까요? 그는 아버지와 흥정을 하는 관계에 서 있었습니다. 일종의 장부를 쓰는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 아버지의 명을 어김이 없이 순종을 하였는데, 아버지는 내게 이 정도의 보상은 해주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하는 태도가 맏아들의 말에서 드러납니다. 그는 많은 세월을 그런 계산 속에서 살아온 것 같습니다. 자기가 아버지께 한 것은 명을 어김이 없는 순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기와 친구들이 즐기도록 값싼 염소 새 끼 한 마리도 잡아 잔치를 열어 준 적이 없다고 그는 말합니다. 그는 자기 장부만을 쓰지 않습니다. 동생의 장부도 쓰고 있습니다. 자기가 볼 때, 동생은 아버지에게 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도리어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들과 함께 날려버림으로써 손해를 끼쳤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동생에게 배상을 요구하기는커녕, 도리어 그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고 있으니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 아닙니까? 저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은 불공평하다’는 불만을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화가 나 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선하신 아버지가 아니십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를 혹은 어느 정도는 해왔다고 여깁니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께 빚을 얹어놓으면서 사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빚을 갚아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들은 공로에 대한 보상을 기대합니다. 기도하고, 봉사하고, 성경 읽고, 교회 나오는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누리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자신의 공로가 됩니다. 이렇게 계산적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억울함, 섭섭함, 분노와 같은 감정들이 쌓여가게 됩니다. 여기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표징인 감사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은혜라기 보다 하나님께서 ‘당연히’ 갚아야 할 빚을 갚은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감사) 그리고 자기 계산법대로 계산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에, 늘 섭섭함과 분노를 느낍니다. 인생에서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의 탓으로 돌립니다. 자기 삶이 원대로 되지 않는 것이나, 배우자나 자녀들에 대한 불만족과 원망 등은 시간이 흘러가면서 자신의 장래와 관련하여 하나님께 아무런 기대도 갖지 않고 자포자기하듯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가 하나님의 집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심을 믿어서가 아닙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워서일 것입니다. 여기에 남는 것은 기쁨도 은혜도 아니고 오직 의무입니다. 그것도 최소한의 의무입니다. 남은 기대가 있다면 언젠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빚을 갚아주실지도 모른다는, 비신앙적이고 합당하지도 않은 생각입니다. 이런 흥정이나 계산의 구도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한, 그는 결코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선하심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장부를 찢어버려야만 합니다.

두 아들의 문제: 받은 구원의 가치를 잊어버리는 위험!
누구나 이런 흥정이나 계산의 자리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섬기기 쉽습니다. 언제 우리가 이런 자리로 들어가게 됩니까? 한 순간에 갑자기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서서히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자기의 마음을 살피는 일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예외 없이 우리가 받은 그 큰 구원을 잊어버리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지” 말라고 권면합니다(히 2:3). 이것은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일”입니다(히 12:16). 구원을 마땅한 권리로 얻은 사람은 없습니다. 맏아들을 보십시오. 그의 계산은 명백히 틀렸습니다. 공정하지 않은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자신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라고 말합니다(31). 무슨 말입니까? 이미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유산을 떼어줄 때, 맏아들에게도 유대 상속법에 따라 둘째 아들의 몫에 배에 해당하는 재산을 물려주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주었더니”라고 했습니다. 둘째에게만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말은 빈 말이 아니라, 이미 맏아들에게 다 물려준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유산은 권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은혜입니다. 아들들은 채권자가 아니라 수혜자인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받은 아버지 재산의 2/3을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받지 못한 염소 새 끼 한 마리를 마이너스로 계산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에서의 어리석음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맏아들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와 그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했을지라도, 세월이 흘러가면서 이 둘째 아들도 얼마든지 맏아들과 같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돌아올 때 가졌던 그 마음,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라는 마음을 견지하는 한, 결코 흥정과 계산의 관계로 들어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구원은 은혜다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은 모든 것을 능가합니다. 구원받기 전에 자신의 비참한 처지에 대해서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듣기를 그칠 때, 그 구원의 가치를 망각할 때, 우리는 착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때,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라고 기도한 것입니다(엡 3:18~19). 만일 우리가 이 사랑이, 구원의 선물이 자기가 하나님께 행한 수고와 공로에 미치지 못한다고 쉽게 단정하게 되면, 섭섭함, 억울함, 부당하다는 느낌, 쓴 뿌리와 분노가 시작됩니다. 감사와 감격과 기쁨과 은혜는 질식 당하고 맙니다. 이것은 실로 가련한 일입니다. 이런 일은 교회 밖이 아니라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교회 안에 있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자리에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 중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맛본 적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구원의 은혜를 맛본 사람들도 이런 자리에 설 수 있다는 것이 더 무섭고 답답한 일입니다.

우리의 사랑을 받으시기에 너무나 합당하신 선하신 아버지
신앙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주님은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행복의 조건이기도 합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를 맺으면서 성령님의 감동으로 이렇게 썼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 16:22).” 성령님의 감동이 아니고서야 누가 이렇게 담대하게 말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이 말씀에 ‘아멘’하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섬김은 맏아들의 자리에 머물러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돌이켜 아버지의 즐거움에 참여하고 잔치자리에 들어가기를 거부한다면, 그의 결국은 마지막 심판날에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선고를 받지 않는다고 어찌 자신할 수 있겠습니까(마 7:23)? 오늘 이 이야기에 나오는 아버지의 모습은 얼마나 사랑스러운 모습입니까?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건방진 요구를 수용하는 아픔을 짊어지면서 그 아들이 참된 은혜의 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너무나 커서 강요와 힘으로 밀어붙이거나 속박하지 않습니다. 오래 참음으로 기다립니다. 그러나 아들의 죄로 인한 슬픔을 느끼는 아버지입니다. 아버지의 눈은 멀리 집 나간 아들이 자기 시야에서 벗어난 그 자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돌아온 아들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아들의 신분으로 회복시켜 주시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잔치를 벌이시는 아버지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고 자기 식으로 계산하면서 분노하는 맏아들에게는 어떻습니까? 아버지는 잔치 자리에서 밖으로 나와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자”고 맏아들을 설득합니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맏아들이 놓치고 있는 은혜를 다시 상기시켜 주십니다. “너는 머슴이 아니잖아, 내 아들이잖아! 언제나 그리고 지금도 말이야!”라고 말씀하는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를 떠나 비참함에 빠져 고생을 했던 둘째 아들을 생각할 때, 아버지와 항상 함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맏아들은 알아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내내 그들과 함께 계셨다는 사실을 정말 감사한 적이 있었습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것이야말로 모든 복의 근원이 아닙니까? 이렇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믿는 집안에서 성장한 분들은 믿는 집안에서 자라난 복이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그 사실을 감사했던 적이 있습니까? 다 둘째 아들처럼 비참한 고생을 하고 쥐엄 열매를 먹어야만 회개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은 자들은 얼마나 복을 얻은 자들입니까? 아버지는 맏아들의 분노를 받아주십니다. 그에게 마땅히 혼을 내고, 마땅히 진노할 수 있음에도 아버지는 그를 참아줍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라는 말로 오히려 권하고 타이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것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고하지 않은 영원한 기업을 얻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삶이 아닙니까? 누가 이런 아버지를 미워할 수 있습니까? 이런 아버지를 비난할 수 있는 부분이 어디에 있습니까? 누가 이 아버지에게 분노할 자격이 있습니까? 맏아들입니까, 둘째 아들입니까? 이 아버지는 모든 아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기에 너무나 합당한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이처럼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선하심을 경험하는 길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선하심을 경험합니까? 먼저, 이 아들들이 어떻게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고 또 경험하지 못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권리를 주장하고 내가 가지고 누리고 살아가는 모든 것이 나에게 너무 당연하다고 여길 때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심과 은혜를 경험할 수 없고 감사할 수 없으며,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만일 둘째 아들이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자기를 용서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다면 아버지의 용서는 결코 은혜와 선하심으로 그에게 경험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맏아들의 문제였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선하심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깨닫고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은혜와 선하심을 경험한 것은 자기가 저지른 죄와 그것 때문에 자기가 처하게 된 비참한 상황을 충분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들은 자신이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이야기 속에 한 번은 독백으로, 또 한 번은 아버지께 드리는 말에서 두 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18,21). 그는 자기가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19,21).” 이렇게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을 가슴으로 느끼고, 삶으로 경험하는 길입니다. 둘째 아들에게 이 일은 비교적 쉬웠습니다. 그는 처절한 실패를 맛보았고 쥐엄 열매를 먹는 자리까지 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맏아들에게 이것이 과연 쉬웠을까요? 이야기 속의 맏아들은 주님께 나아왔던 부자 청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상태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부자 청년은 자신이야말로 율법을 어려서부터 다 지킨 괜찮은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워지지 않는 한 구석이 있었기에 주님께 나아왔던 것이지요. 이렇게만 할 수 있다면 그래도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하는 말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는 좀 더 정직해야만 했습니다. 자신 안에 채워지지 않는 마음을 인정하는 것 뿐 아니라, 아버지가 주는 즐거움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마음을 살피는 일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맏아들과 같은 자리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심과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아버지가 주신 구원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아버지의 것이 다 나의 것이 되는 구원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할 때 우리는 은혜와 선하심을 누릴 수 없습니다. 둘째 아들은 자기 권리로 주장할 수 없는 제일 좋은 옷과 가락지와 신이 주어질 때 이것이 은혜임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형은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아버지로부터 이미 물려받은 엄청난 유산의 가치를 생각하지 않고 동생과 비교하면서 염소 새 끼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를 내어 주사 우리를 율법의 모든 저주에서 속량하여 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으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을 보지 않은 채, 왜 나에게는 돈 좀 한 번 주시지 않느냐고 불평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자리에서는 결코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심과 은혜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을 선한 아버지로 변화시킨다.
레미제라블은 성경적인 명제 하나를 우리에게 던져줍니다. 그것은 “은혜가 죄인을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빵 하나를 훔친 것 때문에 19년이라는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던 장발장을 변화시킨 것은 마리엘 주교를 통해서 경험한 은혜였습니다. 변화시키는 것은 죄책감이나 지옥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닙니다. 본질상 죄인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저는 오늘 둘째 아들과 같은 비참함의 실존을 경험하고 계신 분들이 계시다면 주님을 대신하여 권면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돌아오는 아들을 큰 기쁨으로 용서하시는 아버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하나님을 싫어했고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자기 마음대로 살아왔던 여러분을 오래 참으시고 지금도 여러분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여러분이 돌아올 그 자리를 바라보시는 아버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돌아오는 아들을 결코 내쫓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이 바로 여러분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행하신 일임을 알 때 여러분은 용서해주시고 받아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아버지께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혹 자신이 맏아들의 입장과 비슷하다고 여기는 분들에게 권면합니다. 순종적으로 보이는 여러분의 삶은 결코 여러분을 참된 만족과 기쁨으로 인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쓴 뿌리와 불만과 분노가 일어날 것이고 여러분은 그저 최소한의 의무로 신앙 생활을 하게 되든지 어쩌면 그것마저 뿌리칠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자기 중심적이고 공정하지도 않은 장부를 찢어 버리셔야 합니다. 그 장부에 의존해서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다고 하는 불평을 내려놓으십시오. 그 장부를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하는 한, 순종이 얼마나 많든지 간에 여러분은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이런 태도가 무너지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의 관계 속에서 결코 영광을 얻으시지 않습니다. 잘못하면 하나님이 치시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이 여러분의 신앙 생활의 주된 동기가 되고 있지는 않은지 묻습니다. 이것은 참되고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몰라도 너무나 모르는 것입니다. 맏아들은 한 집 안에서 사는 아버지를 너무나 몰랐습니다. 맏아들의 자리에서 신앙 생활을 하는 분들의 굳어진 마음을 오늘 하나님 아버지께서 만져 주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부드럽게 해달라고 구하십시오.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이미 베풀어주신 그 은혜를 생각하십시오. “너도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자”는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나도 잔치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씀 드리십시오.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사 나를 율법의 모든 저주에서 속량하셨고 나의 모든 죄를 사하셨으며 영생의 복을 주신 은혜를 알게 해달라고 구하십시오. 이런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는 한 번 알기만 하면, 우리가 어떤 자리에 있든지 우리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됩니다. 이 은혜는 은혜를 모르던 아들들을 선한 아버지로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우리의 모든 이기적 본성은 이런 아버지의 은혜와 선하심을 경험하면 할수록 변화되고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심을 닮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심을 깊이 경험하고 누릴수록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심은 우리를 통해서 은혜를 모르는 수많은 아들들에게로 흘러가게 되고 그들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오, 우리 모두가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런 복된 자녀들, 그 선하심과 은혜와 사랑에 흠뻑 취하여 살고, 그 선하심을 풍성하게 흘려 보내주는 그런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로 살 수 있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