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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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에서 확신으로 10 - 선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 (10) - 나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시편 42:1-2, 마가복음 12:30-3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3-07-21

말씀내용
<나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시 42:1~2; 막 12:30~31

1. 하나님을 갈망함, 정상인가?
사람이 배고픔과 갈증을 느끼는 것은 정상적인 일입니다. 아무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사람이 그렇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를 쓴 시편 기자가 표현하는 하나님을 향한 영적 갈망은 어떻습니까? 정상적입니까, 아니면 이상하고 특이한 일입니까? 어거스틴은 회심 후 <참회록>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당신께서는 우리를 당신을 위한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이오며, 그리하여 주님 안에서 안식을 발견하기까지 우리 마음은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인간이 가진 영적 갈망은 사람이 원래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가지는 영적 갈망은 너무나 정상적이고, 시편 기자가 여기에 표현한 것은 지극히 정직한 외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가진 갈망이 본질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추구하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갈망이 궁극적으로 영적 갈망이고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갈망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들은 적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하나님을 찾는다는 말은 그가 얼마나 간절히 하나님을 갈망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뭔가 특별한 것이 먹고 싶다는 갈망이 아닙니다. 채워지면 좋고 그렇지 않아도 할 수 없는 갈망이 아닙니다. 이것은 거의 죽을 것 같이 바라는 갈망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갈망할 정도로 고통을 느낀다면 그것은 은혜이고 복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은 배고픔이나 목마름만큼이나 정상적인 일입니다.

2. 인간의 사용 설명서(막 12:28~31):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그것을 예수님은 대계명(the Great Commandment)으로 알려진 마가복음 12:28~31에서 설명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주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 두 가지 계명에 전체 율법이 걸려있다고 하실 만큼 이 두 계명은 율법 전체를 보여줍니다. 신명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시는 목적은 바로 이스라엘의 행복을 위해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 10:13).” 인간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보통 어떤 제품을 구입하면 그 안에 회사가 제공하는 사용 설명서가 있습니다. 제품의 의도와 사용법을 설명한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성경 안에는 인간의 사용설명서라고 할 수 있는 가르침이 있는데, 그 중 이 대계명만큼 인간의 사용설명서를 잘 보여주는 구절도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가장 행복할 수 있습니다. 벌써 여러분 중에는 이 말에 걸리는 분들이 있으실 겁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길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너무 똑똑하게 창조되어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하나님과 이웃이 아니라 자기만을 사랑하고 살아야 행복하다고 여기는 것이 문제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생각하는 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열심히 사랑하다가 상처를 받아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내가 해주는 것만큼 받지 못할 때 사람은 계속 사랑할 힘이 없습니다. 그리고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다신 그렇게 안 한다”고 다짐도 합니다. 그래서 “남 주는 것 소용없다. 자기만 잘 챙겨라”하는 식으로 삽니다. 또 나와 기질이 좀 다르기만 하면 그 사람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압니다. 자기 맘에 드는 사람만 사랑하고 삽니다. 사실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창조주의 사용설명서를 무시하고 살아가는 한,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3. 하나님은 어떻게 사랑할 수 있으신가?
인간은 그렇다 치고,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 4:8,16). 하나님처럼 오래 참으시면서 선을 베풀어주시는 분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세상은 독생자를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보다 더 큰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반역하는 사람을 그토록 오래 참으시고 사랑하실 수 있으신지 생각해보셨습니까? 그 대답은 하나님은 뭔가 필요해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삼위로 계셔서 영원토록 서로가 완전한 사랑을 나누시는 가운데 완전한 행복을 누리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행복을 채우시려고 사람과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은 내적인 완전한 행복과 충만함을 밖으로 확산하고 전달해주시려고 또는 흘려 보내주시려고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베푸시기 위한 자유로운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완전한 행복이 충족되고 계셨기에 어떤 조건에도 얽매이지 않고 사랑하실 수 있는 완전한 자유와 능력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심으로 끝까지 당신의 선하심으로 사람을 사랑하실 수 있는 이유입니다.

4. 인간 행복의 필요충분 조건은 하나님으로부터 채움 받는 것이다
문제는 사람에게도 이것이 가능하냐는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경험한 세상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첫째는 어떤 사람도, 어떤 것도, 또 어떤 조건도 인간의 행복의 조건을 완전하게 충족시켜줄 수 없기 때문이고, 둘째는 인간의 욕구라는 것이 결코 만족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만족과 행복은 늘 일시적이고, 상대적이고, 조건적입니다. 단 하나의 예외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채워주시는 경우입니다. 앞서 인용한 어거스틴의 말처럼,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에 하나님으로만 인간은 참된 만족과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에서 지내온 과거의 모든 사건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하심으로써 행복의 조건을 채워주십니다. 지난 삶을 돌아보면서 하나의 부족함도, 아쉬움도 남지 않도록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손길로 내 인생을 돌보아주셨음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쓴 뿌리가 없는 인생입니다. 두 번째로는 남은 인생의 미래를 향해서 조금의 두려움이나 염려도 없이 오직 기대감으로 미래를 바라볼 수 있게 하심으로써 우리 행복의 조건을 충족시켜주십니다. 셋째는 지금 내가 겪는 환난과 고통 속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게 하심으로써 은혜와 선하심을 풍성하게 나타내주십니다(롬 5:3~4). 하나님의 은혜는 그저 환경적이고 조건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가장 흡족하게, 가장 만족스럽게, 가장 따뜻하고 가장 충만하게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한 찬송시 작가는 이것을 이렇게 잘 표현했습니다.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 우리 맘이 평안하리니
항상 기쁘고 복이 되겠네 /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주의 팔에, 그 크신 팔에 안기세
주의 팔에,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가슴에 부어질 때 우리는 이런 고백을 하게 되고 참된 만족과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행복의 조건이 완전히 충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다른 찬송작가는 이 만족과 행복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 그 어디나 하늘 나라

너무나 많은 찬송시들이 바로 이런 행복과 만족을 노래한 것들입니다. 이것은 결코 억지로 꾸며낸 이야기들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채움을 받은 사람들이 자신이 누리는 행복감과 만족에 대하여 정직하게 한 고백들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행복, 이런 만족을 경험하여 아십니까? 인간 행복의 필요충분조건은 오직 하나님으로만 완전하게 충족될 수 있습니다.

5. 하나님은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기를 기뻐하신다.
하나님만이 인간 행복의 필요충분조건을 채워주실 수 있다면 남는 문제는 과연 하나님께서는 쉽게 그 일을 행하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와 그 동안의 많은 설교에서 강조해왔듯이, 하나님께서는 이미 삼위 하나님 안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리고 계시기 때문에, 아무 조건 없이, 더 행복해지려는 욕구 없이, 자유롭게 그 행복을 나누어주시고 사랑하시며 선을 베풀어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하나님을 그런 하나님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는 주제에서 살펴본 대로 하나님은 영원히 선을 베풀어주기를 결코 그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렘 32:40~41)”고 말씀하시고 그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6. 행복의 필요충분조건이 완전히 충족될 때 사람은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다.
사람이 이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충만하게 채움을 받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사람이 자신의 행복의 필요충분조건이 완전히 충족된다면 하나님께서 그러하시듯이, 그도 비로소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더 행복해지려는 조건 없이, 되받으려는 계산 없이, 오래 참음으로 베풀어주는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 어떤 조건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는 얼마나 여유롭겠습니까? 그는 얼마나 풍성할까요? 그는 얼마나 관대할까요? 또 그는 얼마나 상처를 받지 않을 만큼 강할까요? 그가 계산적이거나 인색할 수 있을까요? 그는 멋진 사람일 것입니다. 그는 받으려고 하는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라 주고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아쉬움이나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게 채움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런 반론을 제기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역사 속의 왕자나 공주들과 같이 모든 것을 채움을 받는 환경에서 살아왔다는 것이 반드시 그 사람의 인격을 보장하지는 않지 않는가? 그토록 좋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망가진 인격을 가진 사람들을 우리가 적잖이 보기 때문에 이 질문은 타당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채움을 받았다면 모든 물질적인 면에서 채움을 받았을 뿐이지, 결코 그들의 마음과 영혼은 완전한 채움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자칫 좋은 환경, 부족함이 없는 환경이 주어져도 사람을 망치는 경우가 일어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 영혼이 온전한 만족과 행복을 채움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최적의 환경은 왕궁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 내면을 완전하게 충족시켜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한 사랑을 받고 그 안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리게 되면 그 사람은 그 만큼 하나님뿐 아니라 사람을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서 살아야 하고 자기를 사랑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충만하게 채워주시고 만족시켜주실 뿐 아니라 미래에도 그리고 영원토록 그렇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시는데 말입니다.

7. 내가 받아 누리는 모든 선한 것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약 1: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 이 말씀대로 우리가 받아 누리는 모든 선한 것은 다 빛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우리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받아 누리는 길입니다. 주님은 사실상 이 말씀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면, 우리는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누리는 최고의 기쁨과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의 행복의 필요충분 조건이 완전하게 충족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안에서 경험되는 내적 충만함으로부터 자유롭게 이웃을 섬기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내 몸처럼 진심으로 그리고 전심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한 가지 더 묻겠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주어집니까? 그것도 하나님께서 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한 일이나 공로가 있어서 받아 누리는 보상이나 대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런 행복을 누릴 자격이 없는 자에게 거저 주시는 은혜입니다. 모든 선한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이것이 성경과 하나님을 믿는 제가 할 수 있는 정직한 고백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8. 오직 믿음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마주 하면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랑하기 원합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그런 은혜를 주십시오. 저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저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알게 하여주옵소서. 제 가슴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은혜를 구합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평안과 만족을 오직 하나님으로만 채움 받기를 원합니다. 저는 다른 데로 제 마음을 돌리지 않겠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저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태도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이렇게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 시편 기자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서 고백했던 바로 그 심정일 것입니다. 오직 믿음! 이것 외에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이런 자에게 하나님은 어김 없이 은혜를 베푸십니다. 반면, 내 힘으로 이웃을 사랑하려고 한다면, 내 안에서 나올 수 있는 사랑은 이기적이고 조건적이고 한시적인 사랑일 뿐입니다. 내게 유익이 되고, 내게 어떤 보람을 주든지, 뭔가 돌아오는 조건 하에서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가르치신 사랑이 아닙니다. 아무도 자기 자신을 조건적으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이 점에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내적 충만으로부터 조건 없이 자유롭게 주는 사랑만이 나를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고 사랑할 수 있게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믿음을 요구합니다. 내가 지금 누리고 경험하는 현실 만이 아니라, 미래에도 여전히 이런 은혜로 날마다 순간마다 채워주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만이 이 사랑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faith working through love)입니다(갈 5:6).

9. 나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만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사랑 이시듯이, 저는 사랑이 풍성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인색하지 않고, 계산적이지 않으며, 돌아오는 것을 바라지 않으면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제 삶의 행복을 온전하게 충족시켜주시는 일이 없이 그런 사람이 되려고 하면, 저는 끊임없이 저 자신에 매여서 사랑하게 될 것을 압니다. 아무리 훌륭하다고 소문난 인격을 만들어갈지라도, 저는 여전히 사람들이 평가하는 저 자신의 인격에 대한 평판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이런 게 아닙니다. 우리가 참된 행복과 만족을 위해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랑을 넘치도록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누림으로써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향해서는 아무 조건에 매이지 않고 심지어 우리 자신에 대한 평판에 조차 매이지 않으면서 자유롭게 베푸는 사랑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창조주 하나님의 의도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이런 은혜의 자리로 다 함께 나아가십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딱 한 가지를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오, 이 고백의 참된 의미를 알고 우리 모두가 주님께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1820년 뉴욕주 작은 마을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6주가 될 때 의사의 실수로 실명하고 평생 95년을 맹인으로 살아야 했던 패니 크로스비는 평생 1만 개 이상의 주옥 같은 찬송시를 쓴 여류 시인입니다. 그녀가 85세 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85년 이상을 살아오면서 한 순간도 어느 사람에 대한 원한이나 분노를 품은 일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좋으신 하나님과 그분의 무한하신 자비를 항상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나를 성별시켜서 그분의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나에게 베푸신 그 많은 축복을 기억할 때 내가 어떻게 감히 불평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 말이 믿어지십니까? 이것이 신앙의 현실입니다. 그녀는 맹인이었음에도 평생을 다른 영혼들을 섬기고 사랑하면서 살 수 있었습니다. 아주 자유롭게 말입니다. 그녀가 쓴 찬송시 가운데 하나의 노래를 함께 부르십시다. 204장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입니다. 이 가사는 그녀가 하나님 안에서 누렸던 행복을 잘 묘사해줍니다. 하지만 이 가사는 그녀만의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모든 사람들의 고백이고 간증인 것입니다.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온전히 주께 맡긴 내 영 사랑의 음성을 듣는 중에 / 천사들 왕래하는 것과 하늘의 영광 보리로다
주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