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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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에서 확신으로 9 - 선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 - (9) - 장래의 은혜 (2)

마태복음 6:24-3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3-07-14

말씀내용
<장래의 은혜(2)> 마 6:24~34



1. 과거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장래의 은혜에 대한 기대로 어떻게 연결되는가?
지난 설교에서 우리는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가 가져올 수 있는 왜곡 혹은 역기능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감사가 잘못되었다거나 문제가 있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감사는 우리 신앙에 너무나 소중한 가치를 지닙니다. 우리는 ‘범사에 감사해야’ 마땅하고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뜻입니다(살전 5:18). 하지만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감사와 관련하여 많이 일어나는 문제는 ‘무조건 감사하라’는 말과 관련이 됩니다. 신경질 나고 답답하고 억울하고 죽을 것 같지만, 그래도 감사하자라고 생각하고 넘어갑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감사는 이런 수준의 요구가 아닙니다. 억지 감사가 아니라, 진짜 감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주제는 몇 주 전의 설교인 <과거의 은혜>와 관련된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내 지난 과거의 사건들을 보면서, ‘진짜 감사한 일이었구나, 하나님의 은혜였구나’를 깨닫게 됨으로써 가슴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감사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은혜에 대한 이런 참된 감사는 자연히 장래의 은혜에 대한 믿음으로 신자를 이끌어갑니다. 이런 감사는 왜곡된 신앙이나 율법주의를 만들어내지 않고 우리 영혼에 참된 유익을 더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감사를 시험해 보려면, 과거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장래에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실 은혜에 대한 믿음으로 연결되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장래의 은혜에 대한 믿음, 장래에 은혜를 베풀어주실 선하신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신뢰로 연결되지 않는 감사는 율법주의일 뿐입니다. 이런 잘못이 바로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율법을 율법주의로 바꾸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없었을까요? 우리는 꼭 그랬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받은 과거 구원의 은혜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자, 이스라엘 백성의 존재 근거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전제, 즉 과거의 은혜는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 멈추고 말았습니다. 장래에 하나님께서 주실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리고 살아가는 삶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을 신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믿음의 결과로 주시는 평안과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힘으로 살기 시작했고, 인생의 행복은 자기 하기에 달렸다는 생각으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출애굽이라는 구원의 은혜는 분명히 보았지만, 과거의 모든 여정 속에서 언제나 최상의 것만을 주셨던 하나님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감사는 그들로 장래의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데려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가진 치명적인 문제였습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믿음으로 지난 과거의 모든 삶을 돌아볼 때 그간의 쓴 뿌리가 제거되고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보게 됨으로써 참된 감사의 열매를 맺게 된다면, 그 다음에 맺어지는 열매는 장래의 은혜를 베푸실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로부터 나오는 기대감입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신자들이 이런 동일한 문제에 봉착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감사함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구원은 은혜로 받았지만, 삶은 자기 노력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갑니다. 문제는 이런 삶이 과연 성경이 가르치는 그리스도인의 삶인가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신자는 믿음으로 성화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의 모든 동력은 믿음입니다. 구원을 받은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충분하게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 받은 것에 대한 감사의 결핍 때문이라고만 말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과거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장래의 은혜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괴리입니다. 이것은 사실 감사의 결핍이 아니라 믿음의 결핍입니다. 믿음으로 과거를 정리할 때 비로소 참된 감사가 일어나고 그 감사가 장래의 은혜에 대한 믿음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선하심의 완전함과 충분함을 못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가져오는 열매인 평안과 안식 그리고 기쁨도 누릴 수 없게 됩니다. 대신 염려로 가득한 삶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장래의 은혜’라는 관점에서 다루는 것이 바로 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자신은 과연 어떤 자리에서 신앙 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2. 본문 이해
이제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살필 단계에 왔습니다.

A. 염려의 문제
본문은 염려의 문제를 다룹니다. 염려는 우리 삶에 너무나 친숙한 주제이기 때문에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시간을 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염려는 우리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 일어납니다. 재정(돈)에 대해서, 성공과 성취에 대해서 또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염려는 다양하게 일어납니다. 주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 영역들을 보십시오. 재물의 문제(24), 의식주 일반(25,31), 음식(26), 몸(27), 의복(28~30)의 문제들이 아닙니까? 돈 때문에 염려하지 않아보신 분이 계십니까? 또 우리는 의식주 즉 먹고 사는 문제로 염려하게 됩니다. 몸의 문제는 어떻습니까?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겠느냐?”고 주님은 도전하십니다. 아마 당시에도 키가 큰 것을 선호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오늘날처럼 외모지상주의의 시대에 주님의 이 말씀은 얼마나 적절한 지적인지 모릅니다. 제가 아는 한, 과거 모든 역사 속에 더 예뻐지고 더 멋있어지려는 인간의 욕구는 늘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성형수술로 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것이 지난 시대와의 차이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고쳐 읽으며 좋아합니다. “너희는 염려함으로 키를 조금은 크게 할 수 있다”, “너희는 염려함으로 좀 더 예뻐질 수 있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들은 자신들의 외모로 인한 염려를 결코 끝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채워질 수 없이 분출하는 염려와 욕구의 포로가 되어서 결코 참된 만족에 이르지 못합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단순히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만이 아닙니다. 염려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밝히셨습니다. 무엇이 염려의 뿌리입니까? 30절을 보십시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 6:30).” 염려의 뿌리에는 믿음의 결핍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감사의 결핍이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믿음의 결핍입니다. 염려는 언제나 믿음의 결핍 때문에 일어납니다. 염려는 불신앙이 우리 마음을 제압해서 이기게 될 때 나타나는 결과 중 하나라고 다니엘 풀러는 말합니다. 염려의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신뢰하지 못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염려가 일어나는 것은 성실하고 열심히 살지 않아서가 아니고, 기도가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봉사나 성경 지식의 결핍 때문도 아닙니다. 염려는 믿음의 결핍이 맺는 열매입니다.

B. 이방인과 신자의 기도의 차이
본문에서 주님은 이방인과 신자는 근본적으로 그들의 기도에서 차이가 난다고 말씀하십니다. 32절에서 주님은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방인도 기도합니다. 그들이 아는 신, 그들이 믿는 신에게 기도합니다. 그들이 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인생을 살면서 염려하는 모든 문제들이 그들이 신에게 구하는 모든 것들입니다. 재물을 얻고, 의식주 문제의 해결을 받고 음식을 잘 먹고, 몸이 잘 되고, 마음의 평안을 얻고 하는 것들입니다. 현세의 복으로 여겨지는 모든 것들이 그들이 구하는 기도의 제목입니다. 이기적인 것들입니다. 모든 종교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신자들의 기도는 이들과는 다르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신자의 기도는 무엇이 다릅니까? 33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신자는 최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신자와 이방인의 기도의 본질적인 차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온 세상을 주권적으로 다스리시기를 구하는 것이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와 영적으로 바른 삶,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 자신과 가정, 교회와 온 세상에 나타나 하나님께서 합당한 영광을 받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이것을 이렇게 잘 번역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실체가 되시고 하나님이 주도하시며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삶에 흠뻑 젖어 살아라.” 또 필립스 현대어 성경은 “너희 마음을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선하심에 고정시켜라(Set your heart on his kingdom and his goodness)”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이렇게 자신의 일상적이고 절실한 필요를 먼저 구하는 대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가 그 대답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세상에 있는 자녀들의 모든 필요를 돌보시고 채워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자녀들이 달라고 구하지 않아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세상을 사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시고 공급해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관심사를 그들의 최고의 관심사로 삼고 살며 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약속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32절 하반절에도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필요하다고 구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심지어 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이미 다 알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마치 성소의 떡상에 놓여진 12개의 진설병을 항상 바라보시며 백성들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보고 계시고 그 필요를 언제나 채워주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의 모든 필요를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책임지고 채워주시마 약속하십니다. 그러니까 이런 선하신 아버지의 약속을 믿고 너희는 없는 것을 가지고 염려하는 대신, 그것들을 달라고 내게 아우성치는 대신, 내 나라와 내 의를 최우선으로 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나에게 집중하고 살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믿고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장래의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을 알고 선하신 하나님의 인격을 신뢰함으로써 순종하는 삶입니다. 장래의 은혜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세상의 염려로부터 해방될 수도 없을 것이고, 오직 이 염려에 기초해서 신음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장래의 은혜에 대한 확신은 우리로 아버지의 모든 약속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게 하는 힘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자는 더 이상 자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아도 되는 힘을 가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속한 것들, 하나님의 관심사, 하나님의 목적과 소원에 최우선순위를 두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장래의 은혜에 대한 믿음은 기도를 변화시킵니다. 이 본문 앞에서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가 비로소 우리의 기도가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최우선적인 기도의 제목이 됩니다. 일용할 양식으로 대표되는 우리의 일상의 필요는 더 이상 우선순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 필요를 아실 뿐 아니라, 채워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C. ‘내일 일’(34) = 장래의 문제
주님은 이어서 3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 6:34).” ‘그러므로’라는 말은 34절이 주님의 설교의 소결론임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 구절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내일 일’은 장래의 일을 말합니다. 우리가 염려하는 모든 문제들은 사실상 과거나 현재의 일들이 아니라 장래의 영역에 속한 일들입니다. 지금 당장은 살아있지만, 장래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두려움에 대한 반응이 염려입니다. “나는 장차 암에 걸리지 않을까?” “어떤 사고를 당하지는 않을까?” “나는 장차 어떤 사람과 결혼할 것인가?” “내 자녀들은 장차 멋있게 내가 바라는 모습으로 자라줄 것인가?” “내 사업은 이 위기를 뚫고 장차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아직 펼쳐지지 않은 미래, 아직 결정되지 않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장래의 일들은 우리를 염려로 끌고 갑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내일 일 곧 장래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미래는 미래를 모르는 인간에게 언제나 두려움과 염려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장래는 선하신 너희 하늘 아버지의 손 안에 있으니 너희는 베푸실 은혜를 기대하면서, 미래의 문제,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는 미래를 염려가 아니라 믿음으로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아버지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교훈입니다.

3. 장래 일이 의미하는 바가 아닌 것=번영신학이 가르치는 것
여기서 우리가 잠깐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 자녀들의 장래에 모든 필요를 공급해 주실 것이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심으로써 장래에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약속이 의미하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오늘날 복음주의 기독교 안에 만연한 번영 신학 또는 기복 신앙이 의미하는 것과의 차이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장래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혹은 우리가 바라는대로 하나님께서 해 주실 것이라고 듣고 싶어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동안에, 번영과 성공, 성취라는 관점에서,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관점에서 이 말씀을 해석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여기서 의미하신 것, 소위 성경이 일관되게 가르치는 장래의 은혜가 이것을 말하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성공이 물질과 관련이 있는가 없는가는 성경이 가르치는 핵심이 아닙니다. 핵심은 우리의 관점이 이 세상이나 인생이라는 시간에 한정되어 있는가, 아니면 영원의 관점에서 보는가에 있습니다. 세상에서 잘 되고 안 되는 것은 잠깐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인생의 시간 안에서 다 증명되지 않습니다. 장래의 은혜가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주시는 모든 것은, 그들이 부하거나 가난하거나, 그들이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상관없이 모든 일이 그들의 영원한 삶에 그리고 그들의 영혼에 참으로 유익이 되게 만드시는 사건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고통스러운 일을 겪을지라도 그 고통이 아니었다면 결코 배울 수 없었을 교훈을 얻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바라는 장래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일을 통해서 내 영혼이 영원히 누리게 될 영원한 유익을 주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장래의 은혜를 내가 원하고 바라고 기도하는대로 이루어주시는 것으로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그리고 장래의 은혜를 확인하는 증거는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주셨다는 십자가의 복음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신자는 성경이 가르치는 궁극적인 장래를 믿음의 눈으로 보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했던 것이 그것입니다. 히브리서 11:8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히 11:8~10).”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바라본 장래의 기업이 무엇인지 히브리서 기자는 이어서 13절부터 설명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3~16).”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 인생을 살아가면서 믿음으로 바라보았던 장래의 은혜는 가나안 땅이 아니라 더 나은 본향, 하나님께서 하늘에 예비해주신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순종으로 행한 믿음의 여정에 일어난 모든 일들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최상의 은혜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신자들의 영광이 여기 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모든 신자들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4. 믿음으로만 가능한 순종 그리고 장래의 은혜라는 엄청난 축복
어떻게 우리는 염려 대신 믿음으로 장래의 은혜를 기대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장래를 생각할 때, 염려가 생기십니까 아니면 기대감이 생기십니까? 이 기대감은 장래에 은혜를 베풀어주실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부터 나오는 반응입니다. 이 믿음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이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모든 약속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님은 약속하십니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26)?” 이것은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삶 전부를 돌보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30)!” 이것도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33)”는 말씀으로 그 모든 약속들을 확정하십니다.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을 향하여 주시는 은혜롭고 자비로운 약속들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참으로 우리 주님의 이 약속을 믿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의 장래에 은혜를 주시고, 언제나 최상의 것을 주시는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든 장래가 그리스도 안에서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책임지시고 돌보시고 공급해주시는 모든 보장 가운데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들의 펼쳐지지 않은 장래에 대하여 가지는 것은 암이나 교통 사고나 기타 나쁜 일들이 벌어지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과 염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은혜를 베풀어주실까 하는 기대라는 것을 아십니까? 나의 장래에 선하신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실 은혜를 기대하는 것이 바로 참된 신앙입니다. 이 신앙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선을 베풀어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강한 자신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실력이 있거나 믿을 구석이 있어서 자신에 대해서 가지는 거만한 자신감과는 전혀 다른 영적 자신감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책임지시는 나의 선하신 아버지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내가 가지게 되는 자신감인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이 믿음이 바로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게 하는 동력입니다.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로 염려하며 살아가지 않을 힘이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우리 삶의 최우선순위로 삼고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 누리는 복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섬기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세상의 어느 것으로도 빼앗길 수 없는 복입니다. 신자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잘못될 일은 없습니다.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은 제로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들어와도 복이고, 나가도 복이며, 그의 행하는 모든 일이 복이며, 존재 자체가 복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를 믿는 모든 신자들에게 보장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장래의 은혜가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장래의 은혜를 주시는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기뻐하고 찬양하십시오. 아직 주 안에 있지 않은 모든 분들은 이 장래의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구원하시는 은혜와 긍휼을 구하십시오. 주 예수님의 자비로운 약속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그리고 장래의 은혜를 맛보고 누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