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오해에서 확신으로 8 - 선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 (8) - 장래의 은혜 (1)

마태복음 6:24-3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3-06-23

말씀내용
<장래의 은혜 (1)> 마 6:24~34



지난 주일에 우리는 과거의 은혜라는 주제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했습니다. 오늘과 다음 주일, 두 주일에 걸쳐서 우리는 장래의 은혜라는 주제를 상고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실로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다 덮고도 남는 은혜입니다. 이 은혜의 크기를 아는 것 역시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에 좌우됩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알며 그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아직 펼쳐지지 않았고 수많은 불확실성을 안고 있는 장래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그리고 장래의 은혜와 관련하여 하나님을 믿는 것은 우리의 현재에 어떤 힘을 주며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요?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바로 이런 모든 문제들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우리는 얼마나 알고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것일까요? 이것이 우리가 두 주일에 걸쳐서 생각하게 될 문제입니다. 특별히 두 주 동안 이 주제를 다루면서 저는 존 파이퍼의 <장래의 은혜>라는 책을 통해서 깨달은 것들에 기초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그리고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으셨다면 강력하게 이 책을 읽으실 것을 권합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본문 말씀에 대한 설명은 사실상 다음 주일로 미루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오늘은 그 말씀을 이해하기 위한 서론을 충분히 다룰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1. 어떻게 순종할 수 있는가?
제가 먼저 던지고 싶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주님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며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잘 아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이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하신 다른 말씀들도 한 번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가령,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아는 우리는 정말 주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여전히 누군가에게 받을 생각만 하고 그런 태도로 살아갑니까? 여러분은 내가 사랑할 사람을 찾고 계십니까, 아니면 나를 사랑해줄 사람을 찾고 계십니까? 또 주님은 부자 관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눅 18:22).” 이 사람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돈을 사랑했기 때문입니까? 분명히 누가복음의 본문은 그런 뉘앙스를 전합니다.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결국 그는 근심 속에 주님을 떠나가고 만 것 같습니다. 그가 부자였다는 것, 그가 돈을 사랑했다는 것이 그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충분한 설명일까요?

순종은 어려운 문제입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정말 어려운 문제, 진짜 싸워야 하는 문제는 바로 순종의 문제입니다.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는 것, 성경을 공부하고 새롭게 깨닫는 것 모두 그런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듣고 배우고 깨달은 말씀을 따라서 순종하고 살아가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더욱 큰 숙제요, 싸움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순종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믿음이 없을 때,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아니 우리가 이 땅에 두 발을 디디고 사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이런 말씀들에 순종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천사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이 밥 먹여준답디까?”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저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결코 불가능한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두 발을 이 땅에 디디고 사는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이 명령에 순종하여 살아갈 수 있을까요? 혹시 이 순종의 문제가 우리를 또 다른 의무의 포로가 되게 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이렇게 명령을 순종하는 삶 속에서 우리는 과연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을까요? 성경이 가르치는 순종의 동기 또 순종의 능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 순종을 할 때 어떤 동기로 순종을 합니까? 무엇이 우리를 순종하게 하는 힘입니까?

2. 왜 순종하지 못하는가?
이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가 왜 순종하지 못하는지 질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가지 가능한 대답을 우리가 먼저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과연 이 두 개의 대답들이 합당한지 여부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A.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결핍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순종할 힘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첫째로 가능한 대답은 ‘과거에’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결핍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감사가 없어서 순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네게 주신 은혜가 얼마나 큰데 너는 이것밖에 못하느냐?”하는 책망조의 질문입니다. 사실 이런 식의 말을 많이 하는 분들은 목사님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런 식의 말들은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방식이다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투의 말은 대개 죄책감이나 부담감으로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는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아무런 부담감도 가지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말씀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책감이나 부담감을 이용해서 우리를 다루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로 이단이나 복음의 은혜 보다는 율법의 정죄를 강조하는 비복음적인 지도자들은 종종 혹은 늘상 이런 방식으로 말하기를 즐겨 합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Francis Havergal의 찬송시가 자칫 이런 위험한 요소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소위 ‘채무자의 윤리’(이 용어는 존 파이퍼가 <장래의 은혜>에서 사용한 것입니다)를 부추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Francis Havergal의 그 찬송은 185장입니다.

1.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2. 아버지 보좌와 그 영광 떠나서
밤 같은 세상에 만백성 구하려
내 몸을 희생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내 몸을 희생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3. 죄 중에 빠져서 영 죽을 인생을
구하여 주려고 나 피를 흘렸다
네 죄를 대속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네 죄를 대속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4. 한없는 용서와 참사랑 가지고
세상에 내려와 값없이 주었다
이것이 귀중하건만 날 무엇 주느냐
이것이 귀중하건만 날 무엇 주느냐

내가 너를 위해서 이렇게 했는데, 너는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하느냐는 것이 이 찬송시의 요지입니다. 저는 이 찬송을 좋아합니다. 이 찬송을 채무자의 심정으로 부르지도 않습니다. 또 많은 성도들이 그런 마음으로 부르지 않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작가 자신도 그런 의미로 이 시를 썼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말씀 드리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오해가 이런 찬송을 통해서 자칫 고정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왜 그렇게 배은망덕하냐고 하시면서 죄책감을 조성하시는 채권자가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순종이나 희생을 요구하신다고 할 때, 그 요구는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것에 대해서 갚으라는 식의 채권자의 요구가 아닙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성경은 감사가 우리의 순종의 추진력이라거나 감사하지 않는 태도가 우리의 부도덕성의 원인이라고 명백하게 지적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이 말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는 분명히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사랑하는 하나님께 순종하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만을 근거로 우리에게 순종을 강요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중에는 이런 반론을 제기하실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실 때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고 말씀하신 후에 십계명을 말씀하셨다는 것이지요(출 20:2).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구원하여 주신 ‘과거의’ 은혜에 근거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을 하고 계시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옳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를 강조하는 차원에서 하시는 말씀이지, 하나님께서 마치 채권자처럼 “내가 너희에게 이런 은혜를 주었으니까, 이제 너희는 내 말을 들어야 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일단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히 과거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결핍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가 순종하지 않는 또 하나의 가능한 대답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B. 주실 은혜에 대한 믿음의 결핍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대하여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한 두 번째 가능한 대답은 ‘장래에’ 주실 은혜에 대한 믿음의 결핍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성경이 일관되게 가르치는 순종의 동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실 때 일관되게 주장하시는 근거는 이제 내가 너희에게 베풀어줄 은혜를 믿는다면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즉 순종은 과거에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반응이라기 보다, 장래의 은혜에 대한 믿음, 즉 장래에 나에게 최상의 것을 언제나 베풀어주실 선하신 하나님의 인격과 약속을 신뢰함에 대한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순종을 요구하실 때 일관되게 지적하는 것은 언제나 믿음의 요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문제를 선지자들을 통해서 지적하실 때에도 믿음의 결핍을 지적하는 것은 언제나 일관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믿음’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은 본질적으로 과거에 대한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것입니다. 믿음은 이런 점에서 과거 지향적이 아니라 미래 지향적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성령의 영감으로 믿음을 정의할 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히 11:1a)”라고 했는데, 바로 이 장래의 요소를 말한 것입니다. 과거에 받은 은혜가 이미 경험한 것이라면, 장래에 받게 될 은혜는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전적으로 선하신 하나님과 그 약속을 믿음으로써만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순종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게 만드는 능력은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장래에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실 은혜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 믿음, 장래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에 대한 믿음은 우리가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믿음은 죄를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모세가 어떻게 애굽에서 죄악의 즐거움을 누리는 유혹을 이겼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모세가 하나님의 상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4~26).” 장래에 하나님께서 주실 상을 바라보는 모세의 믿음은 눈 앞에 있는 애굽의 모든 금은보화와 공주의 아들로서의 지위가 주는 유혹을 작게 여길 수 있게 만들었고 결국 죄를 이기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장래의 은혜를 믿는 믿음이 가지는 첫 번째 능력입니다. 이 믿음은 죄의 현실적인 유혹을 이기게 하는 실재이고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둘째로 이 믿음은 거기서 더 나아가 우리로 순종하게 하는 힘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성경의 예들을 들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을 예로 든다면 그는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땅으로 떠날 수 있었던 것, 이 놀라운 순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고, 그것을 보장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은 과거의 경험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과거에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보답이 아니라, 장래에 주어질 은혜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8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이것이 아브라함 최초의 순종의 이야기라면 그의 믿음의 순종의 절정을 보여주는 사건은 그가 아들 이삭을 번제로 하나님께 바치는 순종을 드린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순종할 수 있게 한 힘이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씁니다.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히 11:19a).” 이것도 장래에 베푸실 하나님의 은혜, 선하신 하나님의 인격을 확실하게 믿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참된 순종,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순종을 하게 만드는 힘이며, 그 동기라는 것입니까? 그것은 과거에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장래에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실 은혜에 대한 그리고 그 선하신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신뢰인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막연한 믿음이 아닙니다. 막연한 믿음은 역사하는 믿음, 행동하는 믿음이 될 힘이 없습니다.

3. 감사의 역기능: 채무자 윤리와 율법주의
저는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문제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많은 오해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소위 ‘채무자 윤리’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채무자 윤리는 감사의 역기능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저는 감사가 옳지 않다고 말씀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감사만으로 되지 않으며 감사만 가지고는 우리의 신앙이 왜곡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채무자 윤리가 어떤 것인지 몇 가지 상황들을 생각해 보지요. 첫째로 과거에 거저 받은 것에 대하여 갚아야 한다는 부담감이나 의무감이 작용하게 될 때 이것을 채무자 윤리 의식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선물이 빚으로 여겨지기 시작할 때입니다. 이미 마음이 이런 상태에 이르게 되면 우리는 그 빚을 한 번 갚을 기회를 찾게 되고 한 번 갚았다 싶으면 그것으로 채무의식에서 해방되게 되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섬길 동기를 얻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또 세월이 지나 채무 의식이 생기면 또 뭔가를 하게 되겠지만, 이런 식으로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바른 신앙의 삶이 아닌 것입니다. 이런 경우, 값없이 주어진 은혜가 왜곡된 감사 때문에 그 가치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왜곡된 감사는 언제나 자기 의와 관련되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신앙을 이해하게 되면, 신자의 삶은 하나님께 진 빚을 갚는 삶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여기서는 더 이상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떤 채무자도 채권자를 즐거워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식으로는 우리가 결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없으니까요. 그리고 이런 신앙은 결국 하나님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베풀어드려야 하는 대상이 되는 왜곡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악한 왜곡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자리에 머물러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저는 봅니다. 이런 신앙은 결코 자라지 않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의 인격을 알아가는데서 자라가는 것이 신앙의 성장인데 여기는 더 이상 알아갈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자기가 생각하는 왜곡된 신 개념으로 하나님을 섬길 뿐입니다. 거기에는 막연한 두려움이 존재할 뿐 자유함도, 사랑의 기쁨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거짓된 신앙의 양태인 것입니다.

이런 왜곡된 신앙이 가져오는 또 다른 나쁜 열매가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주의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도리를 하고 있는데 즉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대해서 감사를 표하고 빚을 갚고 살아가는데, 너는 왜 갚지 않고 사느냐?”고 하는 태도가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자신이 행하고 있는 적용을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고 그것에 따라서 사람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빚을 갚으면서 산다는 행위가 자기 의로 연결되기 때문에 이런 식의 정죄를 가능하게 합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 하는 생각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가 왜곡되는 최악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는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할수록 그 사람은 점점 더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로 똘똘 뭉친 아주 보기 싫은 모습으로 변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이런 자리에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리고 혹시 여러분 자신이 이런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이 말씀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4. 감사의 순기능: 과거의 은혜에서 장래의 은혜로
지금까지 과거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역기능으로 작용할 수 있는 위험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가지는 순기능 또한 분명히 강조되어야 합니다. 본질적으로 믿음은 미래지향적인 성격을 가진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미래 지향적인 그 믿음은 과거의 은혜에 기초합니다. 과거의 은혜란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지난 세월 모든 순간에 나에게 최상을 것을 주셨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주일에 과거의 은혜라는 주제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과거에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가 견고할 때, 과거의 은혜는 우리를 장래의 은혜로 안전하게 데려갑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지난 모든 인생의 순간 순간에 언제나 내게 선을 베풀어주셨던 하나님이다라는 감사의 고백 위에서 우리는 우리 장래에 일어나게 될 모든 일들 속에 풍성히 드러나게 될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는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만일 여러분이 과거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면서도 여전히 억울하고 한맺히고 해결되지 않은 상처들을 안고 살아가신다면 그만큼 여러분은 여러분의 장래에 베풀어주실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마음에 참된 안식과 평안과 기대감을 누릴 수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은혜가 우리를 장래의 은혜로 인도할 때, 과거의 은혜에 대한 감사는 순기능으로 작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관계를 다음 주일에 계속해서 상고할 것입니다.

5.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확인하십시오.
말씀을 맺으면서 제가 여러분에게 도전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이 서 계신 자리를 확인하시라는 것입니다. 과거의 은혜에 대해서 정리되지 않은 상태입니까? 그래서 여전히 장래에 내 삶은 모든 순간에 최상의 것을 공급하여 주실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습니까? 그래서 불투명한 장래를 생각하면 두렵습니까? 마음이 복잡하기만 하십니까? 하늘 아버지께서 나를 돌보실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평안과 안식을 누리기 힘이 드십니까? 혹 여러분은 감사의 역기능인 채무자 윤리 의식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늘 하나님을 생각하면 뭔가 갚아드려야 할 대상으로 밖에 인식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죄송하고 늘 마음이 불편하십니까? 이런 의식이 너무나 깊어져서 율법주의적 신앙이 된 것은 아닙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 열심을 내는 것만큼 열심을 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는 대신,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에 어느 새 익숙해지지는 않았습니까? 참 위험한 일이고 정상적인 신앙 생활이 아닙니다. 돌이켜야 합니다. 내 신앙에 무엇이 고장 났고 어디서 잘못 되었는지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무한히 선하신 하나님께서 남은 인생 가운데 베풀어주실 장래의 은혜를 기대하고, 선하신 하나님 안에서 참 평안과 안식을 누리는 복된 은혜의 자리에 서게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