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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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에서 확신으로 7 - 선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 (7) - 과거의 은혜

신명기 8: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3-06-16

말씀내용
<과거의 은혜> 신 8:2


과거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과거와의 연속성 안에서 살아갑니다. 때로는 과거가 고통이 되기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지워버리거나 묻어버리고 싶은 과거들이 있지만, 그런 과거로부터 완전히 단절하여 자유로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과거는 현재의 삶에 발목을 잡아 끄는 불편한 실재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도 과거는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사람들은 과거에 대해서 취하고 살아가는 자기만의 태도나 방법을 터득하게 됩니다. 이 태도 여하가 사실은 우리의 신앙과 매우 중요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 오늘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상고할 주제입니다.

1. ‘과거’를 대하는 비신앙적 태도와 오해
많은 사람들이 가장 일반적으로 힘든 과거에 대해서 취하는 태도는 ‘묻어두자’입니다. 힘들었고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의 사건들을 묻어버리자는 것입니다. 가능한 덜 생각하고, 생각나려고 하면 기분 전환해서 그 생각을 지워버리고 거기에 관련된 생각이 날 수 있는 장소는 되도록 피하고 그것을 말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애를 쓸 수는 있지만, 완전히 그 과거의 사건들을 지워버릴 수는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이런 태도들이 일반적으로 우리가 과거에 대해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인 듯합니다. 또 이런 태도와 함께 우리가 가지게 되는 비성경적인 오해가 있습니다. “좋은 환경이 감사를 만든다”는 생각입니다. “나도 너 같이 좋은 환경 만났으면 너처럼 감사할 수 있고 너 같이 말할 수 있어. 네가 내가 겪은 것을 알아?” 하는 태도입니다. 어느 정도 공감되는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생각은 옳은 생각입니까? 결국 ‘나는 괜찮은데, 환경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하고 환경 탓을 하는 모습일 뿐입니다. 과거에 대한 이런 태도와 오해들이 우리 자신에게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이런 우리의 태도와 오해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혹 변화시켰는지도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그 믿음은 과연 우리의 과거에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과거는 어차피 되돌릴 수 없는 것이니까 믿음도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까? 이제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니 과거는 덮어두고 장래에 베풀어주실 은혜만 바라고 살면 되는 것입니까? 문제는 어떤 사람도 과거와 단절할 수 없으며 과거의 어떤 사건들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지워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과거가 없이는 현재의 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2. 신앙의 장애: ‘한(恨)’
사실, 과거의 문제는 신앙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중요합니다. 우리는 믿음이 삶을 변화시킨다고 말합니다. 옳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신자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어떻게 역사하는가 하는 질문을 할 때, 피할 수 없는 한 영역이 바로 과거를 보고 과거를 대하는 문제입니다. 20세기 후반에 심리학적 접근이 교회 안에서 보편적인 현상이 되면서, 교회 안에 유행처럼 번진 용어가 있는데 그것은 ‘상처’와 ‘내적 치유’라는 용어들이었습니다. 상처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상처는 주로 과거에 받은 상처들입니다. 그 상처들이 쌓여서 분노가 되고 증오가 됩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들을 보다 심리학적으로 이해하고, 겉으로 표출되는 분노나 증오의 이면에 있는 원인인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는 것이 내적 치유의 이론이 일반적으로 다루는 내용입니다. 이것을 좀 더 한국적 상황에 비추어 설명한다면, 한국 사람들에게는 ‘한(恨)’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민족 공동체적으로 느끼거나 이해하는 것이고, 개인적인 삶에서도 겪고 살아가는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은 사람을 건강하게 이끌지 못합니다. 매우 부정적인 과거 경험이고 깊은 상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해결되지 않은 ‘한’이 많이 남아 있다면 그 사람의 신앙은 결코 정상적으로 성장하지 않습니다. 신앙이 정상적으로 성장해간다면 그 사람 안에는 해결되지 않고 여전히 남아있는 ‘한’이나 상처들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한’과 상처는 사실상 신앙의 커다란 장애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극복할 수 없거나 넘을 수 없어서 장애물이 아니라, 반드시 넘어가야만 하는,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라는 점에서 장애물이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개인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는 과거에 맺힌 ‘한’이라고 할만한 것(들)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현재에 크게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발목을 잡는다는 느낌을 가질 만큼 여러분을 잡고 있는 상처(들)가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께서 지금까지 살아오신 동안에 정말 이것만은 내 삶에 일어나지 않았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일이 있습니까? 이것만 내 과거에서 지워버리면 정말 가벼워질 텐데 라고 생각하게 하는 사건이 있습니까? 혹시 너무 상처가 커서 지금도 생각하기가 두려운 일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과연 이런 우리들의 과거에 대해서 어떻게 일하는 것일까요?

3. 과거는 묻어둘 수 없다. 과거를 기억하라.
믿음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과거를 새롭게 보게 합니다. 우리가 인생의 한 순간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무한하신 지혜로 역사와 우리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난 것은 나이 40일지라도 하나님은 지난 40년의 인생 가운데 언제나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을 그는 알게 됩니다. 나는 하나님을 몰랐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나를 아셨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나는 하나님을 무시한 채 내 인생을 살아왔지만,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들에게는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지난 과거의 삶 전부를 새로운 관점 즉 믿음의 관점으로 보게 합니다. 이런 일은 모든 신자에게 일어나야 합니다. 참된 믿음은 그 일을 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여전히 과거에 매여서 고통을 받거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것을 봅니다. 왜 그럴까요? 그 믿음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사실 이 문제는 믿음 자체보다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무지에 기인합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단순히 그 아들을 보내사 십자가에서 내 죄를 위해서 대신 죽게 하신 것만을 붙잡고 믿습니다. 기독교 복음을 이만큼만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은 훨씬 더 크고 풍성합니다. 그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하나님 자신을, 그 선하신 하나님을 우리는 더 알아가야 합니다.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은 나의 현재와 과거와 미래와 모든 삶 속에서 당신의 전능하신 능력과 전지하심으로 일하시고 역사하시고 돌보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런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우리의 과거를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제공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말씀이 전해지는 상황을 먼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결코 짧지 않았던 40년의 광야 생활 막바지에 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가나안은 이제 그들의 눈 앞에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출애굽 당시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 20세 이상의 성인으로서 생존해 있는 사람들은 지금 모세를 제외하면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뿐입니다. 다 죽었습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불신앙과 반역 사건으로 출애굽 당시 성인이었던 사람들은 다 광야에서 인생을 허비하고 죽었습니다. 이제 남은 자들의 숫자는 처음 출애굽 당시와 크게 차이는 없지만, 모두가 당시 20세 이하였던 자녀들 세대입니다. 그들이 성장한 것입니다. 이제 가나안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하나님께서는 지난 40년간 그들을 인도했던 인간 지도자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 언약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선포하고 설명하여 주십니다. 그것이 신명기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신명기의 많은 부분은 지난 40년의 광야 생활에 대한 회상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관점에서 읽어야 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이제 너희들 눈 앞에 가나안 땅이 있지 아니하냐? 쓰디쓴 과거의 일들일랑 다 잊어버리고 이제 들어가 취하여라, 과거는 잊고 미래를 생각해라” 하는 식으로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많은 고생을 해서 이제 그 성취를 앞두고 있다면 사람들은 이제 지난 고생일랑 다 잊어버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대신 오히려 과거를 기억할 것을 명하십니다. 광야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그들의 과거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잊어버리고 묻어버리고 싶은 과거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 고통스러운 여정을 기억하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이때 나이가 50이 된 사람은 부모들의 죽음을 광야에서 보아야 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출애굽할 때 열 살이었는데 벌써 오십이 다 되었으니 인생을 광야에서 다 보낸 것이 아닙니까? 무슨 즐거운 추억, 무슨 기쁨의 시간들을 회상할 것이 있었겠습니까? 어쩌면 그들 대다수는 ‘내 인생을 광야에서 다 구겼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그들 마음 속에 혹시 쓴 뿌리 같은 것들이 생기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이제 주시려는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과거를 기억하게 해서 좋을 것이 없으실 텐데도 하나님은 지난 광야 40년의 삶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4. 믿음의 눈으로 묻어둔 과거를 다시 봐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지금 백성들에게 명하시는 것은 믿음의 눈으로 과거를 다시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달라집니까? 우리의 맨 눈으로 과거를 보고 이해하는 것과 믿음으로 과거를 보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과거를 보게 되면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의 손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백성들에게 과거 40년의 광야를 기억하라고 하시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들은 광야40년의 삶에서 하나님의 손을 봐야만 합니다. 이것은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신다면 반드시 이 일을 하셔야 합니다. 그냥 과거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믿음의 눈으로 과거를 보아야 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손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손이 나타나지 않은 순간은 한 순간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보면 볼수록 알게 됩니다. 이 일을 어떻게 시작할 수 있는가 하면, 여러분이 살아오신 과거 인생에서 가장 씁쓸하고 아팠던 그래서 지워버리고 싶은 한 사건을 떠올려보십시오. 그런 일이 없으면 감사한 일일 테지만, 억지로 억눌러왔기 때문에 없다고 느낀다면 끄집어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억하라’고 하시는 명령대로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 일은 나 자신이 결정하지 않은, 그저 나에게 주어진 환경의 문제일수도 있겠고, 어쩌면 나 자신의 잘못과 실수 혹은 죄로부터 연유된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그 과거의 일을 믿음의 눈으로 본다면,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손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손을 보기까지 하나님 앞에서 씨름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개 이런 씨름은 이런 말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그렇게 힘들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어요?” 우리는 이 대답을 얻어야 합니다. 모래 위의 발자국이라는 널리 알려진 시에서 말했듯이, “네가 그렇게 힘들어했던 그 때는 내가 너를 엎고 걸었단다. 모래 위에 한 사람의 발자국은 네 발자국이 아니라 내 발자국이야”라는 확인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확인이 없이, 그냥 묻어놓은 과거의 사건들이 여러분의 삶 속에 있으면 있는 만큼, 여러분은 결코 하나님의 인격을 그리고 그 선하심을 신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장래의 은혜를 누릴 수가 없게 됩니다. 여러분은 이 작업을 다소 힘들더라도 하셔야만 합니다. 여러분의 과거의 삶 속에서 한 맺힌 모든 사건들, 억울하고 힘들었던 모든 사건들에 대해서 이 작업을 하셔야 합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이 일을 여러분으로 하여금 능히 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난 40년의 광야 생활을 기억할 것을 명하시는 것이 바로 이 일을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앞만 생각하고 장래의 축복만을 바라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힘들었던 과거를 끄집어낼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 일이 없이는 믿음은 실재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작업이 없이, 그저 과거를 묻어놓고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고질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원치 않은 일이 일어날 때마다 ‘왜 하나님은 나에게 늘 이런 식으로 하시는가?”하고 불평과 원망을 반복적으로 쏟아놓게 된다는 것입니다. 과거를 묻어놓을 수만은 없습니다. 다 이런 식으로 표출되게 마련입니다.

오래 전에 읽었던 상담 관련 책에서 보았던 말입니다. 사람에게는 ‘30대의 위기’라고 불리는 현상이 있다고 합니다. 대략 26세에서 38세 사이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데, 인생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인생의 무게를 혼자서 감당해야만 하는 30대 전후의 시기에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그 동안은 아무 문제 없이 잘 지내왔는데, 갑자기 뭔가가 자신의 안에 묵혀두었던 것들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현상입니다. 저자는 이것을 3A 결핍증이라고 말합니다. 그 3A는 Acceptance(수용), Affirmation(인정), 그리고 Affection(애정)입니다. 과거의 삶 속에서 이 세 가지가 충분하게 채워지지 않았을 때, 자신도 모르고 살았지만 이런 것들이 한꺼번에 30대의 시기에 폭발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많은 젊은 부부들이 이 시기에 크게 위기를 겪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과거의 사건들을 묻어두고 간다면 언젠가는 터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금처럼 좋은 시기에 과거 40년 광야생활을 기억하라고 명하시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많은 사람들의 믿음이 성장하지 않고 정체되어 있는 한 가지 이유도 이것입니다. 과거를 묻어둔 채, 더 많이 그리고 더 열심히 기도함으로써 믿음을 끌어올리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이때 필요한 것은 믿음의 대상인 선하신 하나님을 성경에 계시된 대로 더 바르게 제대로 알아가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문제의 원인은 하나님의 인격,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결코 많이 기도하고 많이 울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이 우는 것이 신앙은 아닙니다. 눈물의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이 맺혀서, 억울해서, 자기 연민에 사로잡혀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우는 것이 곧 신앙이 아닙니다. 물론 신앙은 이런 과정을 지납니다. 이런 과정을 지나서 “아, 하나님께서 이런 이유 때문에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셨구나!”하는 깨달음으로 그리고 그 하나님의 선하신 은혜가 이 일 속에 충만하게 드러나는 것 때문에 우리는 감사와 기쁨으로 울 수 있는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우리를 이런 자리에 이르게 합니다.

5. ‘그런’ 과거를 주시는 하나님의 의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과거 광야 40년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시는 시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 가나안에 들어갈 것입니다. 평생의 시간을 보냈던 지긋지긋한 광야는 끝났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의도는 ‘좋은 환경이 감사를 만든다’는 생각을 교정해주시려는 것이 분명합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를 묻어버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면 그들은 결코 그 좋은 환경 속에서도 감사를 할 수 없게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들이 먼저 짚고 가야 하는 것은 광야 40년이라는 과거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손과 그 선하심을 보고 감사할 수 있는가 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문 말씀에 왜 그들로 광야 길을 걷게 하셨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를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2절과 3절에 나오는 낮추신다는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자신이 어떤 존재들인지, 얼마나 부패한 죄성을 지닌 자들인지를 깨닫고 알게 해주시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명기 9:6~7에 설명됩니다.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케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부터 이곳에 이르기까지 늘 여호와를 거역하였으되.” 광야에서 그토록 하나님을 불신하고 거역했던 일들을 기억할 때 그들은 낮아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낮아진다는 것은 죄인의 부패한 본성에게는 절대로 어울리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너무나 당당하고 자격이 있고 합당하다고 스스로를 여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언제나 하나님을 잘못된 분으로 만들곤 합니다. 내가 맞고 하나님이 틀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자신들의 이 죄성을 보게 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상처 치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들의 죄성과 죄악을 알고, 회개할 때 해결되는 문제인 것입니다. 내적 치유가 가진 문제는 죄까지도 상처로 이해한다는 점입니다. 내가 회개할 문제를 하나님이 내게 회개하실 문제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자신을 보게 함으로써 그들을 낮추시려고 광야 40년을 기억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묻어버리고 싶은 과거의 일들을 돌아볼 때 낮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믿음으로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주시려는 의도로 하나님은 광야 40년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광야에서 백성들은 농사를 지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살기 위해서 의존해야 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40년 동안 기적적으로 매일의 삶에 필요한 양식을 하늘에서부터 공급하여주셨고, 그들을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모든 위험으로부터 지켜주셨습니다. 4절 말씀은 놀랍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에 광야를 걷는 동안 의복이 해어지지 않았고 발이 부르트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영양소를 공급하셨을 뿐 아니라, 옷이 40년 동안 해어지지 않게 하심으로써 그들의 일상적인 필요, 즉 의식주의 문제를 완벽하게 공급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을 모든 조건과 환경 속에서 책임지신다는 것을 이보다 더 잘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내가 내 노력으로, 내 힘으로 산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라고 말하는 삶이 여기 있습니다. 바로 40년 동안 그들이 광야에서 경험한 삶이 그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가르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과거를 기억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충해주는 말씀이 17~18절입니다.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들이 풍족함을 누리게 될 때, ‘내 손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고 말하는 교만에 빠지게 될 것을 하나님은 염려하십니다. 그들이 광야의 삶을 기억하는 한, 그들은 믿음으로 사는 삶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의도는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정녕히 멸망할 것이라(신 8:19).” 이것은 하나님을 깊이 경험적으로 알고 신뢰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하나님께서 지난 광야 40년의 세월을 기억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궁극적 의도를 여러분이 깊이 알고 느끼게 되기를 바랍니다. 16절을 봅니다.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 이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궁극적 의도입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광야 40년의 세월을 허용하셨고, 이제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 40년을 기억하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선을 베풀어주시기를 결코 그치지 않으신다고 하는 영원한 약속을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것을 기억하십니까(렘 32:40~41)? 여기서 하시는 말씀도 그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선을 베풀어주기 위해서 광야를 허용하였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광야 40년을 잊지 말고, 묻어둘 생각 말고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6. 나의 지난 삶은 하나님께서 나만을 위해서 특별히 디자인하신 노정(course)이다.
우리의 과거의 사건들 그리고 삶을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우리가 거기서 하나님을 손을 보아야 하기 때문이고, 하나님을 선하심을 확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우리의 장래에 아무리 좋은 삶이 펼쳐진다고 할지라도 과거 광야의 삶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인하지 못한 사람은 결코 그 좋은 삶 속에서도 선하신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그 은혜를 누리면서 감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에 들어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소와 양이 번성하며 은금이 증식되며 소유가 풍부하게’ 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12,13). 이것을 6장에서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신 6:10~11).” 그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12절에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과거 광야의 삶을 기억해야만 우리는 이런 부요한 삶 속에서도 하나님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그 선하심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의 싸움입니다. 우리의 과거의 모든 사건과 모든 삶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마음 깊이 확인할 때까지 하나님 앞에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선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우리의 과거의 모든 순간 순간들 속에서 보고 확인해야 합니다. 아,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얼마나 복된 인생들로 변화되어 갈까요? 이렇게 자신의 과거를 믿음의 눈으로 정리하게 될 때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지난 삶은 하나님께서 나만을 위해서 특별히 디자인해 놓으신 과정이었구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될 때 과거와 연관된 나의 열등감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하나님께 대한 감사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이 깨달음과 고백에 이르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과거의 한과 과거의 슬픔과 고통이 말할 수 없이 선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며, 변장한 축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이 자리로 여러분을 데리고 오시기 위해서, 그리고 지금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영광의 자리로 우리를 데리고 가시기 위해서, 그리고 그 영광의 자리가 우리에게 정말 유익하고 복된 자리가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지금까지 이 길로 인도하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 이것이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나를 사랑하셨으면 내게 이런 광야를 주셔서 나로 하여금 이런 복되고 귀한 깨달음의 자리에 서게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혹시 지금까지 여러분이 인생을 살면서 광야 같은 시절이 없었습니까? 그러면 감사하십시오. 그러나 언젠가 그런 광야의 삶이 내게도 주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지금 현재 혹시 여러분의 삶이 광야를 걷는 과정이라면 기억하고 아십시오. 선하신 하나님께서 최상의 것을 여러분에게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과정을 통해서 여러분을 데리고 가시는 복되고 영광스러운 자리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이 과정에는 끝이 있다는 것도 아십시오. 그것도 영광스러운 끝입니다. 현재의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또 과거의 광야를 기억하면서 선하신 하나님을 고백하십시오. 이런 일이 우리 삶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믿음의 정체를 경험하게 될 것이고 늘 온전한 믿음으로 반응하기 보다는 양다리를 걸치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더욱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게 될 것은 자명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선하신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없을 것이며, 하나님 안에서 만족을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의 믿음은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 성경적 믿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과거의 삶에서 선하신 하나님을 고백할 수 없으면 우리의 인생에 아무리 좋은 것이 주어진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참된 감사와 믿음으로 사는 삶을 결코 살지 못합니다. 그리고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 신자에게는 사실상 억울한 일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 맺히는 사건들도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삶에 하나님의 손을 떠난 사건, 시간은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 인생의 전부는 다 선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닿아있는 복되고 은혜로운 사건들이요, 시간들인 것입니다. 아, 세상에 이보다 복된 인생은 없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섬기는 사람보다 복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을 부르시는 것은 바로 이런 자리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왜 이런 복되고 복된 삶으로 나아가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 복된 삶 속에서 어찌 감사함이 메마를 수 있습니까? 선하신 하나님을 찬송합시다. 그 하나님을 높이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