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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오해에서 확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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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에서 확신으로 5 - 선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 (5) - 죄의 핵심

창세기 3:1-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3-06-02

말씀내용
<죄의 핵심> 창 3:1~7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심각한 오해와 무지가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문제라는 것을 우리가 계속해서 상고하는 말씀들의 전제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신앙 생활에서 회복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과제는 당연히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이라는 명제를 가지고 이 문제를 접근하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오해하게 만든다는 것이 지난 두 주에 걸쳐 생각한 것이었고, 오늘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죄에 대한 왜곡된 이해도 가져온다는 것을 상고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죄를 바로 알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1. 죄에 대한 오해/불충분한 이해
죄는 무엇입니까? 가장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죄의 개념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하라/하지 말라’ 조항들을 범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나는 교회를 잘 다니고 있고 술 담배 하지 않고 기타 등등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이것은 죄에 대한 가장 심각한 오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수준에서 죄를 이해하고 있는 한, 그는 결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많이 넘어졌던 문제도 바로 이런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조항들을 범하고 범하지 않는 것으로 그들의 죄의 여부를 판단하려고 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보다 더 많은 적용 관련 조항들을 만들어놓고 그것까지 지키는 열심을 보였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극악한 죄인들로 나타난 것입니다. 사실 신약 성경에서 죄를 설명하는 가장 많이 사용된 헬라어 단어는 ‘하말티아’입니다. 이것은 과녁에서 빗나간 것을 의미합니다. 이 의미가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는 추상적인 단어로만 들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외에도 죄를 설명해주는 성경의 많은 방식들이 있습니다. 허물, 반항, 불순종, 불법, 적대감, 반역 등의 단어들이 성경에서 죄를 설명하는 개념들입니다. 우리가 이런 단어들의 의미를 공부하고 성경이 가르치는 죄의 개념을 바르게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르게 이 개념들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죄가 반드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죄에 대한 오해, ‘하라/하지 말라’의 목록을 지키는 것의 차원에서 죄를 생각하는 것의 문제는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죄를 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 최초의 범죄 상황에 대한 성경의 설명
오늘 본문은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최초의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상황을 매우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창세기 3장은 죄의 본질을 이해하게 하는데 매우 중요한 본문입니다.

A. 죄가 발생한 시점
먼저 우리가 이 본문에서 찾아야 하는 것은 죄가 발생한 시점입니다.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순간이 범죄가 발생한 순간일까요? 아니면 옆에 있던 아담에게 주어서 같이 먹었을 때 범죄가 성립된 것이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범죄가 발생한 순간은 어떤 순간이겠습니까? 사실 성경이 매우 정교하게 이 내용을 기술하고 있으면서 보여주는 것은 인류 최초의 범죄가 발생한 시점은 그들이 그 금단의 열매를 먹기 전이라는 것입니다. 언제입니까? 뱀의 유혹을 받아서 하와의 마음 속에 하나님에 대한 어떤 생각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시점입니다. 본문을 살펴보지요.

B. 뱀과의 대화 속에서 하와의 생각의 변화?과장과 왜곡
뱀과 하와의 대화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두 가지 큰 문제는 과장과 왜곡입니다. 여기에 진리는 없습니다. 그래도 진리에 가깝다거나 절반의 진리는 되지 않는가 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절반의 진리는 비진리라고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과장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왜곡이 이 대화 속에서 그리고 하와의 생각 속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첫번째로 보게 되는 왜곡은 뱀의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1절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뱀이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매우 지능적으로 던져진 질문입니다.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목적으로 던진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서 뱀은 간교하게 하나님을 왜곡하고 있고,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을 왜곡하여 보도록 유혹합니다. 그것은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라는 말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아담에게 하신 말씀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라는 것이었습니다(2:16). 하나님은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마음대로 먹으라고 말씀하셨지만, 뱀은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는가 묻습니다. 이것은 달라도 너무나 다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나쁘고 인색하고 너희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는 그런 분이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와는 뱀의 말을 부인하고 나섰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라고 먼저 말했습니다. 여기서 하와가 무엇을 생략하고 있습니까? ‘모든’이라는 말과 ‘임의로(마음대로)’라는 두 단어를 생략했습니다. 이 생략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와는 비록 뱀의 말을 부정했지만, 이미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것이 모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그의 대답 속에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뱀의 질문이 전면적인 하나님에 대한 왜곡이라면 여기 하와의 대답에서는 부분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왜곡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더 말했습니다. 3절입니다. 하와는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고 대답했습니다. 여기서 세번째 왜곡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생략이 아니라 과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2:17). 하와의 말에서 어떤 과장이 나타났습니까? 그녀는 ‘만지지도 말라’는 말을 더했습니다.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하와는 이 단어를 더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금하신 명령이 의미하는 것 보다 하나님을 매우 인색한 분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와의 말이 풍기는 하나님에 대한 뉘앙스는 이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동산 중앙에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셨다고 창세기 2:9은 기록합니다. 동산 중앙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생명 나무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생명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는지 정확히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의 이야기 전개를 통해서 볼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않는 테스트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주권에 대한 온전한 신뢰를 통해서 테스트를 통과했을 때 주실 상급이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테스트를 주시면서 내가 이런 상을 주려고 하는거야 하고 아담과 하와에게 그 상을 미리 보여주신 셈입니다. 그러나 하와의 말 속에 표현되는 그녀의 마음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기 보다는 하나님이 자신이나 아담에게 완전히 선하시지 않으며 오히려 최선의 것은 당신만이 홀로 가지시고 자기들에게 주지 않으신다는 느낌을 충분히 보여줍니다. 이쯤 되자, 뱀이 이제 확실하게 그 과장과 왜곡의 마침표를 찍습니다. 이것이 카운터 펀치였습니다. 4~5절을 보지요.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뱀은 교만하게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하나님의 의도까지도 왜곡하여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과장과 왜곡의 절정입니다. 하와가 어느 정도 자신의 유혹에 틈을 제공하기 시작하자 뱀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서 결국에는 죽을 수 있을만큼 독을 뿌려놓는 일에 성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지만, 뱀은 정면으로 부인하여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이제 하와는 두 가지 약속 사이에서 어느 것을 믿어야 하는가 하는 곤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오직 한 가지 약속만이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두 개의 약속이 있습니다. 뱀이 준 약속, “먹으면 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선악을 알게 되어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진 것입니다. 자, 누구의 약속을 믿을 것입니까? 어느 약속을 믿을 것입니까?

C. 하와의 태도의 본질
우리가 죄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뱀과 하와의 대화에서 하와의 마음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보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본문이야말로 성경이 죄에 대해서 설명하는 가장 최초의 원초적인 설명이기 때문입니다. 하와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축복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필요를 채우시기 위해서 자신들을 만들어 자신들을 이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을 법합니다. 하와의 말들이 그 방향으로 조금씩 이동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하와는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그리고 언제나 자신들의 최선만을 공급해주시는 선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의심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적어도 지금까지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최적의 환경 속에서 그리고 최적의 배우자와 함께 하나님의 주신 모든 은혜를 누려왔습니다. 그리고 그 선하신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기며 즐거워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왔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신뢰에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하와와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기 전에 이미 그런 변화가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결과, 자신과 남편은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매우 바람직한 목표를 달성하는 도구가 될 수는 있을지라도, 결국 하나님의 장기판의 말들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 최초의 범죄가 발생한 시점이 언제냐 하는 질문에 답을 한다면, 그것은 하와의 마음 속에서 이 생각,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생각이 일어나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인류 최초의 범죄가 발생한 시점이 되는 것입니다.

3. 죄는 무엇인가?

A. 죄=하나님께서 언제나 자신들에게 최상의 것을 공급해주신다는 것을 의심하는 것
그렇다면 죄는 무엇입니까? 이 최초의 범죄 사건에서 설명해주는 죄는 무엇입니까?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죄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습니까? 죄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자신들에게 최상의 것을 공급해주신다는 것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니엘 풀러(Daniel Fuller)가 자신의 『성경의 일관성』에서 내린 죄의 정의입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제가 알고 있는 어떤 죄에 대한 정의나 설명보다도 가장 성경의 내용에 충실한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정의보다 더 죄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이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즉, 죄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않는 것, 그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입니다. 결국 죄는 불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보혜사 성령님께서 행하실 사역을 설명하시면서, 죄에 대하여 책망하시는데 그 죄는 바로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라고 하신 말씀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요 16:9). 죄 중의 죄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지옥에 간다면 그가 행한 죄질이 나쁘거나 죄의 무게가 심해서가 아니라, 그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죄를 범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는 한은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조금 더 나아가 참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삶 속에서 선하신 하나님이신가를 물으면 사람들은 주저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와가 넘어졌던 바로 그 대목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결핍, 상실, 왜곡이 바로 죄입니다. 이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불신은 한없는 사랑과 자비, 그리고 완전한 기쁨?하나님께서 삼위 안에서 누리시던 기쁨?과 행복을 나누어주시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영광을 가장 효과적으로 경멸하는 태도인 것이기에 죄입니다. 이 불신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동기를 완전히 모독하는 것입니다.

B. 죄=영적 독립선언
죄는 또한 영적 독립선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와는 뱀과의 대화 속에서 잔뜩 왜곡되어 버린 하나님, 그런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뻐하고 의지하여 살아가야 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말하자면 그녀는 마음 속으로 독립,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셈입니다. 그녀 자신의 창조주, 그리고 그녀가 존재하고 살아가는 모든 환경과 세상의 창조주로부터 이 피조물은 감히 독립을 선언한 셈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약속하신 것을 믿지 않고 뱀이 준 약속을 믿고 행동을 취할 수 있었겠습니까? 뱀의 말을 듣고 그 나무의 실과를 보자, 정말 놀랍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6절입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그래서 그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서 먹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와 계속 옆에 서서 침묵으로 일관하던 남편 아담에게 주어 그도 먹게 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아담의 속에서도 하와의 속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이렇게 행함으로써 영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였습니다.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도 구속력도 지니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주인은 그들 자신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모든 인간이 죄인으로서 가지고 태어나는 본성인 것입니다.

4. 복음서에서 죄의 본질을 설명하는 두 극단적인 케이스
복음서는 죄가 영적 독립선언이라는 사실을 두 개의 예로써 보여줍니다.

A. 부자 청년(마 19:16~22)
첫째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부자 청년의 예입니다(마 19:16~22). 여기서도 우리는 부자 청년의 생각을 추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나아와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마 19:16). 예수님께서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켜라”고 말씀하시자(17), 그는 자신이 십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말합니다(18~19). 그리고는 아직도 뭔가 더 부족한 것이 있는지 묻습니다(20). 예수님은 정확하게 그가 말한 것, 그에게 부족한 것 하나를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21).”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여 가니라”고 성경은 슬픈 결론을 제시합니다(22). 이 청년의 마음에 숨겨진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는 죄를 자기가 알고 있는 계명들?‘하라/하지 말라의 목록’이라고 여기고 있었고, 자신은 그것들을 어느 정도 완벽하게 지키고 있었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만하면 과녁도 잘 맞추고 살아가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문제는 무엇일까요?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자기가 그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주님을 따르게 되면 자기가 가게 될 길이 고생길이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을 움직일 수 있는 중요한 가치는 돈이었습니다. 그는 돈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인 탐내지 말라는 것을 범한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은 예수님의 인격을 신뢰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자기에게 최상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게 했습니다. 그는 어쩌면 하나님은 자기가 기껏 모아놓은 재산을 빼앗아가실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생각, 그리고 하나님을 자기 재산이나 노리는 하나님으로 왜곡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자기의 갈 길을 간 것입니다. 그의 문제는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었습니다. 그가 무엇을 행했고 행하지 않았고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모든 선한 것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B. 어린 아이(마 19:13~15)
두번째 케이스는 어린 아이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셨고(14), 마태복음 18장에서는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8:3). 무슨 말씀입니까? 어린 아이는 자기를 낮춥니다. 자기가 어린 아이에 불과하다는 것, 부모가 없으면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어린 아이는 자신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만일 아이가 자기를 의지하기 시작하게 되면 그 아이는 이미 주님이 말씀하신 어린 아이가 아닌 것입니다. 어린 아이의 철저한 의존성을 주님은 여기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어리니까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어린 아이는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로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말입니다. 정상적인 어린 아이가 부모가 자기에게 좋은 것을 줄지, 독약을 줄지 의심하고 있겠습니까? 어린 아이는 부모가 자기를 위해서 모든 것을 행하시는 분임을 압니다. 그리고 믿습니다. 믿음이란 독립 선언이 아니라, 의존 선언입니다. 어린 아이들처럼 말입니다.

5. 나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나에게 최상의 것을 공급해주신다는 것을 믿는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언제나 여러분에게 최상의 것을 공급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하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여러분의 삶의 모든 상황 속에서 그 신앙은 어떻게 표현되고 있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천지를 창조하신 무한 광대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그 무한하신 능력과 지혜로 언제나 최상의 것을 공급해주고 계시다는 것을 안다면, 믿는다면 그 신앙은 어떻게 표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과거에 대해서도, 여러분의 현재에도 그리고 여러분의 미래를 향해서도 여러분은 그 전능하신 선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고 믿는다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여러분은 과거 지나온 여러분의 삶 전부를 돌아볼 때 과연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과거의 모든 순간에 선하셨으며 최상의 것을 주고 계셨다는 것을 아십니까? 현재에도 그렇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은 감사하십니까? 여러분의 미래에 하나님께서 역시 당신의 선하심으로 최상의 것을 주시리라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래서 미래를 생각할 때 마음이 벅차오르고 기대가 되십니까? 저는 아직 복음을 말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복음을 알기 전에는 결코 하나님의 선하심을 제대로 알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제대로 깊이 받아들이기 전에는 결코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죄의 개념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되신 성품, 그 선하심을 말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뿌리 깊은 오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언제나 최상의 것을 주신다는 것을 의심하는 것, 이 죄의 뿌리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복음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과 믿음도 이 뿌리에 걸려 넘어지게 되어 있는 법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인류는 마귀가 하와에게 심어놓은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인상, 하나님께 대한 근본적인 오해로 지금까지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고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을 일삼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가 가진 모든 고통의 원인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와 신뢰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담의 후손이 지닌 비극입니다. 이 죄는 결국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라 마귀의 약속을 믿고 마귀의 약속을 선택하여 따르는 행위로 나타납니다. 죄도 약속을 준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기쁨과 소유, 행복과 명예 그 외의 많은 것들을 약속합니다. 뱀이 하와에게 말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그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손상시키고, 영적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비참함이요, 무서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믿음을 실망하게 하지 않으시고, 우리 인생에 참으로 최상의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비록 그것이 다양한 방식의 고통의 형태로 주어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내게 지금 줄로 재어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시 16:6). 하나님은, 성경에 당신 자신을 계시하여 주신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하여 언제나 최상의 것을 공급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선하신 하나님을 의심하고 믿지 않는 것이이야말로, 죄의 본질이고 핵심이며, 선하신 하나님을 최고로 모독하는 적극적인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 자신의 믿음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과연 이런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는가?” 만일 여러분이 아직 믿고 있지 않다면, “참으로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이시라면 내가 이 하나님을 만나야 하지 않겠는가? 믿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습니까? 이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로 알고 믿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복된 일이라는 사실을 아시겠습니까?

**인간 불만족의 실체?세 개의 욕구
일상적(casual) 욕구
기본적(critical) 욕구
근본적(crucial) 욕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