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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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에서 확신으로 4 - 선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 (4) - 기독교 신앙의 핵심(2)

예레미야 32:40-4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3-05-26

말씀내용
<기독교 신앙의 핵심(2)> 렘 32:40~41



신앙이 정체되어 있거나 그리스도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 때문이라는 것이 우리가 지금 계속해서 생각하는 중요한 명제입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이런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오해를 낳게 되어 있다는 것을 조금 다루었습니다. 기독교는 인간이 하나님을 감동시켜서 복을 받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감동시키시는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 삼위 안에서 누리시는 영원한 행복과 기쁨을 인간에게 주시기 위해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고, 그것을 주셔서 인간이 하나님 안에서 최고의 행복과 기쁨을 누리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천지 창조의 목적이라고 했습니다. 이 주제를 오늘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루면서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으로 결론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1. 인간의 최고의 목적: “인간의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The chief end of man is to glorify God and to enjoy Him forever.)
지난 주에 상고한 내용의 논리적 귀결로써, 우리는 인간의 최고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 사는 최고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개인에게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최고의 존재 목적을 이루고 살면 그 인생은 성공한 인생이고, 이와 상관없이 산 인생은 실패하고 망한 인생입니다. 400여 년 전에 영국에서 만들어진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1문과 답처럼 이 문제를 잘 다룬 문서는 없습니다. 그 대답이 이렇습니다. “인간의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The chief end of man is to glorify God and to enjoy Him forever.).”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존 파이퍼는 이 문장에서 영어 단어 두 개를 수정함으로써 그 의미를 놀랍게 드러내주었습니다. “인간의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The chief end of man is to glorify God by enjoying Him forever.).” 즉, 인간의 최고의 목적은 두 개가 아니라 하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을 즐거워함으로써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개념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봅시다. 그 뜻을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to enjoy God)’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to please God)’의 차이를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어려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매우 힘든 일이라는 사실을 직감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일들을 해야 하는데, 그 일들이 대부분 제가 좋아하는 것들과는 다른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주일 성수를 해라, 극장에 가지 마라, 기타 등등 제게는 어려운 것들이었고 저는 울며 겨자먹기로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그 일들을 해야 했습니다. 많이 실패했고 그때마다 좌절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는 것은 고역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취미나 기호는 저의 것과는 너무나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신앙 생활에 기쁨이란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한참의 세월이 지나서야 저는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의미를 배우지 못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말이나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말이나 그 온전한 의미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인간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는 말은 왠지 제가 찌그러지고, 원치 않은 일들이지만 의무적으로라도 해서 하나님께 기쁨을 드려야 한다는 부담감이 되어 저를 늘 짓눌렀습니다. 사실상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저의 무지의 결과였고 기독교 신앙에 대한 오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말은 그 자체로 이런 오해들을 불식시킵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면 그 대상만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주체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뭔가를 해야만 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자신이 기쁜 것이지요.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의무와 기쁨의 차이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는 십 수년 전, 제 아내의 생일에 무심코 잡아놓은 강의 일정 때문에 집에 늦게 들어가야 했던 날이 있었습니다. 참 미안한 마음에 오는 길에 꽃집에 들러 멋진 꽃다발을 하나 주문하였습니다. 그리고 카드를 하나 사서 아가서를 펴놓고 반은 옮겨 쓰고 반은 창작을 해서 썼습니다. 카드는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산 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구나(아 4:1)” 제가 개인적으로 아내를 위해서 꽃을 산 처음 경험이었습니다. 저는 늘 개인적으로 ‘꽃을 사느니 가족들이 그 돈으로 갈비를 먹는 게 훨씬 낫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꽃을 가지고 집으로 들어가는데 제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내가 “왠 일로 꽃을 다 사왔느냐?”고 물을텐데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리라 다짐했습니다. “여보, 당신에게 꽃을 바칠 수 있다는 게 내게는 영광이고 특권이며 기쁨이자, 행복이야.” 물론 아내는 그렇게 묻지 않았고 저도 대답할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여기서 깨닫고 배운 것이 있었습니다. 저는 단지 아내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는데, 그렇게 아내를 기쁘게 해줄 수만 있다면 그것이 또한 제게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아내가 제 생각대로 물어봐서 제가 그렇게 대답을 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도 힘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의무감으로 생각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만일 제가 무릎을 꿇고 아내에게 꽃을 바치며 이렇게 꽃을 바칠 수 있는 영광을 주어서 너무나 고맙다고 말을 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저에게 굴욕적이라거나 힘든 일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저는 압니다. 저는 아내를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었으며, 아내에게 기쁨을 더 해주고 싶어하는 마음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의무와 기쁨의 차이를 발견하십니까? 우리 신앙이 의무의 이행 정도로 이해된다면 그것은 기쁨을 다 질식시켜 버리고 말 것입니다. 제가 아내에게 꽃을 바치는 것이 다만 의무였다면 저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가 제 마음을 안다면 그런 꽃은 전혀 아내에게도 기쁨을 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도리, 신앙 생활의 도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여기서 발견하게 되는 한 가지 중요한 명제는 기독교 신앙의 시금석은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그 기쁨이 바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삼위 안에서 누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문은 인간 존재의 최고 목적이라고, 그 기쁨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기쁨이 성도의 모든 삶의 동기라는 사실입니다.

2.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최고로 만족을 얻을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최고로 영광을 받으신다(God is most glorified in us when we are most satisfied in Him).”
이것을 존 파이퍼는 그의 기독교 희락주의로 표방되는 가장 멋진 문구로 정리해놓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최고로 만족을 누릴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최고로 영광을 받으신다(God is most glorified in us when we are most satisfied in Him).” 제가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최고로 만족을 얻는 대상은 무엇입니까? 만일 여러분 자신이 이루어놓은 성공 안에서 너무나 만족하고 기뻐하고 계신다면 ‘성공’이라는 가치는 여러분 안에서 최고로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성공’이란 저렇게 영광스러운 것이구나 하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족하고 기뻐하는 대상이, 돈과 같은 물질이거나, 화목한 가정이거나 그 무엇이거나 간에 여러분을 보는 이들은 그 가치가 너무나 영광스러운 가치라는 것을 볼 것입니다. 그 대상이 여러분에게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도리,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여기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최고로 만족을 얻고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길입니다.

3. 선하신 하나님의 사명선언문(렘 32:40~41): “나의 최고의 사명은 __________를 섬기는 것이다.”
자, 이제 드디어 우리는 오늘 본문으로 들어갈 시간입니다. 예레미야 32:40~41은 성경 전체에서 너무나 중요한 핵심적 복음의 내용을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이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한껏 계시하여 드러내심으로써 선포되고 있습니다. 본문은 예레미야 31:31 이하에 ‘새언약’의 주제의 연장선상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으시는 영원한 언약을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그치지 않고 자기 백성에게 선을 베푸셔서 마침내 그 백성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은 갈망을 심어주시겠다는 말씀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기쁨이라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좀 더 자세히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언약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40). 그 언약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을 위해서 선을 베푸시기를 절대로 그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이라는 말씀에 나타납니다. 왜 그렇게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나는 그렇게 해서 나를 예배하고 싶은 열망이 그들 마음 속에 일어나게 하고야 말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억지로가 아니라 가슴에 터져나오는 기쁨과 감사와 감격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싶어서 견딜 수 없을만큼 그렇게 선을 베풀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아무리 철면피 같고, 돌같이 굳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양심이 강퍅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선을 베풀어주시는 일을 그치지 않으심으로써 그런 사람의 마음이 움직여 감동을 받고 하나님의 그 사랑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점에서 하나님을 이길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누구라도 하나님께서 그 일을 시작하시면 그는 그 하나님께 그런 반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경외함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어하는 마음으로 표현됩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어하십니까? 여러분은 얼마나 하나님을 찬송하고 칭찬하고 그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하십니까? 경외함을 마음에 두겠다 하심은 바로 이런 마음을 부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여러분이 경험하고 누리시는 만큼 여러분은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 예배하고 싶은 마음이 속에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예배(worship)라는 영어 단어는 합당한 가치를 인정한다(worthy)는 영어 단어에서 온 말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고 누리고 있다면, 그분의 선하심에 만족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결코 그냥 있지 않을 것입니다. 시도 때도 없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그들 마음에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들에게 선을 베푸시기를 결코 그치지 아니하시겠다는 무조건의 언약을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언약으로 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까요? 그런 은혜와 사랑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결코 하나님을 떠나는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 성경에서 수도 없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가는 모습을 봅니다. 그들은 바알을 섬겼고 아스다롯을 섬겼고 그 외의 많은 이방 우상들을 섬겼습니다. 우리 자신들의 삶에서도 경험해본 일들이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처럼 당신의 선하심을 베푸심으로써 그들에게 경외함,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주심으로써 그들로 하나님을 떠나지 않게 하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고 경험하고 누리는 자가 어찌 하나님을 떠나겠습니까? 우리는 이어서 41절에서 성경 전체에서 가장 멋진 말씀을 듣습니다. 이 구절에서 다니엘 풀러(Daniel Fuller)라는 신학자는 하나님의 사명선언문이라고 할만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의 최고의 사명은 __________를 섬기는 것이다.” 이 밑줄 위에 여러분 각자의 이름을 넣어서 읽어보십시오. “나의 최고의 사명은 형익이를 섬기는 것이다.” 믿어지십니까? 이 약속이 믿어지십니까? 41절을 읽어봅시다.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정녕히 나의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을 베풀어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기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에게 선을 베풀어주시는 일을 하시는 것이 의무가 아니라 기쁨으로 하시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저 같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을 억지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하신다는 말입니다. 다니엘 풀러가 그의 탁월한 상상력으로 표현한 말이 있는데 우리는 경박함을 주의하면서 사용해야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것을 저의 말로 옮겨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셔서 책상머리에서 하루를 계획하시기 전에 그 사명선언문을 읽으셨다. ‘나의 사명은 형익이를 섬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한하신 지혜와 능력으로 그 일을 계획하셨고 실행하신다. 어제도, 이전에 모든 날들 동안에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평생에 그리고 영원토록 그렇게 하실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책상도 없으십니다. 그 하나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일어나기도 전에, 이미 오늘 하루의 하실 일을 당신의 이 말씀에 근거하여 결정하셨습니다. 그것은 자기 백성을 섬기시는 일입니다. 저는 이런 하나님을 성경 외에서 발견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누구에 비기며 누구와 짝하며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사 46:5).” 또 모세도 홍해를 가르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께 백성들과 함께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출 15:11).” 다윗도 노래했습니다. “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사오며 주의 행사와 같음도 없나이다(시 86:8).”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한 백성들의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즐거워합니다. 억지가 아니라,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치지 않고 자기들의 인생에 찾아오셔서 선을 베풀어주시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이 감동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히 지옥에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우리 인생을 찾아오셔서 이 무감동한 마음을 감동시키실 때까지 그치지 않고 선을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시고 그 일을 실로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런 하나님의 선하심에 마음 문을 굳게 닫아걸고 살아온 인생이 얼마나 하나님을 모욕하고 살아온 삶인지를 아십니까?

4. 선하신 하나님은 알라딘의 요술램프의 ‘지니(Genie)’가 아니시다.
혹시라도 여러분 중에서 하나님이 선하시다고 하는 것을 알라딘의 요술램프에 나오는 지니와 같은 개념으로 오해할까 저는 염려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섬기십니다. 자기 백성을 위해서 일하시고 그 백성에게 선을 베풀어주시기를 기뻐하시고 그 일을 결코 그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잔잔한 물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평생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한시도 떠나지 않고 그들을 추적하게 하십니다. 결국 그 은혜와 그 사랑을 진정으로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기들의 종으로 삼지 않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복한 자들은 하나님을 결코 종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진하여,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 은혜로우시고 선하신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 은혜를 경험한 자들은 결코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려 들지 않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은 결코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이기적으로 기도하며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출애굽기 21장에 있는 주인을 너무나 사랑해서 그 주인을 위하여 자원하여 평생 종이 되는 사람과 같이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그들의 삶의 최우선순위로 놓고 살아갑니다. 하나님께 그것을 제일 먼저 구합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이 중요하고, 자신들의 번영과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고, 자신들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성취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살아도 죽어도 주를 위해서 그렇게 하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고전 10:31). 그들은 결코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고 싶어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당신의 무한하신 능력과 지혜로 이 세계와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전능하신 능력과 무한하신 지혜로 당신의 이와 같은 선하심을 나타내 알게 하십니다. 오, 얼마나 놀랍고 놀라운 일입니까?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어디서 이보다 더 좋은 기쁨의 소식을 들을 수 있단 말입니까?

5. 종교 대 기독교: 종교에서 인간은 먼저 신을 감동시켜야 하지만 기독교에서 하나님은 먼저 인간을 감동시키신다.
저는 지난 주에 이어 오늘까지 전하는 이 주제의 말씀을 기독교 신앙에 대한 오해로부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는 의무로 가득찬 종교다,’ 혹은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감동시키려고 노력하는 일은 고되고 힘든 일이다’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대로, 기독교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인간이 하나님을 감동시켜드려서 복을 받고 잘 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를 이렇게 이해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일 뿐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이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인인 인간을 감동시키심으로써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열쇠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서 의무감의 노예로 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섬깁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를 사모합니다. 예배하고 싶어합니다. 예배가 기쁨이고 즐거움이 되는 경험을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오래도록 교회를 다녔다고 할지라도 단지 종교인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지 못하면 온전하고 참된 순종을 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와 기독교의 차이입니다. 이것은 땅과 하늘, 죽음과 생명의 차이만큼 큰 것입니다. 종교에서 인간은 먼저 신을 감동시켜야 하지만 기독교에서 하나님은 먼저 인간을 감동시키십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놀라운 복음의 도리를 설명하다가 깊은 감동을 받아서 하나님을 이렇게 찬송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롬 11:33~35).” 누가 과연 하나님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결코 없습니다. 우리는 그의 충만한데서부터 오로지 받을 뿐입니다. 모든 것이 다 주께로부터 왔습니다. 이 기독교 핵심,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놓치지 마십시오. 이것을 놓치면 우리는 종교의 길로 들어서는 종교인일 뿐입니다. 이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를 종교가 아닌 복음으로 인도해주는 길입니다. 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기를 더욱 구하십시오. 그 선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그치지 않고 베풀어주시는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의 은혜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예배하고 또 예배하고 평생에 그리고 영원히 그 하나님을 예배하십시오. 그 하나님 안에서 최고의 만족을 누리십시오.하나님을 즐거워하십시오. 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