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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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에서 확신으로 2 - 선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 (2) -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십시오

시편 34: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3-05-12

말씀내용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십시오> 시 34:8


1. 기독교 신앙에 대한 치명적인 오해는 하나님에 대한 것이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오해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입니다. 다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성경을 통해서 계시하여 주신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오해들 속에서 하나님을 믿게 되고, 이런 오해들과 뒤섞인 하나님 개념 속에서는 참된 믿음이 자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이들은 자기 목적에서 비롯된 신을 섬깁니다. 성공과 번영이라는 목적을 이루는데 도움을 주는 신입니다. 소위 번영 신학이라고 일컬어지는 모든 류의 가르침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또는 미국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좋아하는 God bless America! 라는 구호도 사실상 이런 신 개념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이들이 말하는 하나님은 성경에서 찾을 수 없는 하나님입니다. 또는 자기 이해에서 비롯된 신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단 하나의 공식으로 모든 성경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공의도, 거룩하심도, 하나님의 진노 개념도 다 거부합니다. 그들은 자기 정의의 기준, 자기 사랑의 기준에서 만들어낸 하나님을 섬깁니다. 또는 자기 체험에서 비롯된 신도 있습니다. 자기가 추구하는 뜨거운 체험이나 두드러진 은사를 주시는 하나님, 혹은 상처 치유의 경험을 주시는 하나님을 그들은 섬깁니다. 이처럼 다 나름대로 자기 중심으로 만들어낸 하나님, 믿고 싶은대로 믿는 하나님을 믿는 일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거짓 선지자와 거짓 교사들이 득세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소위 시장의 필요를 잘 읽어서 그 필요를 채워주는 사람들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들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평강하다 평강하다고 거짓 평강을 외친다고 지적했습니다(렘 6:11). 사실은 죽을 상처인데, 반창고 하나 발라주며 괜찮다고 말했다는 것이지요. 오늘날에도 이런 목사들은 많고, 이런 메시지에 길들여지기 시작하면 그들은 결코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게 됩니다. 믿는다고는 하지만, 실상은 성경의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얼마나 바르게 알고, 경험하십니까?

2. 하나님은 선하시다.
그렇다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속성들 가운데 어떤 것들을 말씀하실 수 있으십니까? 거룩하심, 의로우심, 사랑, 무한하심, 지혜, 지식, 전능하심 등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기를 바라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성경적 근거가 있습니까? 출애굽기 33장의 배경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산에 올라간 사이에 아론과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긴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패역한 백성과 함께 가시지 않겠다고 선언하시면서도, 천사를 보내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모세는 자신의 성공?가나안 땅에 백성들을 데리고 들어가는 일?을 구하는 대신,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가시는 길이 아니면 자신도 안 가겠다고 기도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후에, 마지막으로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기도합니다(출 33:18). 이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셨는지 아십니까? 출애굽기 33:19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지나게 하시겠다는 말로써 응답하셨습니다. 영광을 보여달라고 구했는데, ‘모든 선한 형상’을 지나게 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당신의 모든 선하심(all my goodness)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하심이라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속성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영광스러운 속성들을 다 포괄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성품의 본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하나님이 선하시다고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신앙의 근본적인 오해를 다루는 전체 이야기를 이 하나님의 선하심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시작하려고 합니다.

3.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선하심은 번영 신학이 말하는 선하심이 아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사실상 다윗의 입을 빌어 하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맛보아 알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과 앞에서 나름대로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정의하여 믿는 사람들이 말하는 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것이 어떤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선하시고 사랑이시므로 내가 원하는 것들을 해주셔야 하고, 내 인생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가셔야 하며, 내 문제들을 해결해주셔야 하는 것입니까? 그런 차원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말하는 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태도이고 접근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고 다윗이 말할 때, 그는 “비록 지금은 힘들지만, 하나님께서 좋은 날을 주실거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하시니까.”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도 당신의 ‘모든 선한 형상’을 지나게 하신다고 하셨을 때, “네가 원하는 것은 내가 다 들어주마. 나는 선하니까.”라고 말씀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무엇인지 좀 더 알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을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4. 본문의 상황?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삼상 21:10~22:2).
본문 1절 앞 [ ] 안에는 이 시편이 쓰여진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사무엘상 21장과 22장으로 향하게 합니다(삼상 21:10-22:2). 다윗은 사울로부터 죽음의 위협을 받으면서 쫓기고 있었습니다. 그는 너무 다급해서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피합니다. 가드는 블레셋의 성읍으로 이스라엘과 다윗의 원수였습니다. 그들은 그를 그냥 놓아두지 않습니다. 신하들은 왕 앞에서 말하기를, “이 사람이 바로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하던 바로 그 다윗입니다”라고 합니다. 블레셋 왕의 말 한 마디에 죽을 수도 있는 절박한 상황에서 다윗은 미친 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침을 수염에 흘리고, 문에다 끄적거리면서 살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자존심을 팽개치고 미친 척을 했고 이 행동은 성공했습니다. 왕 아기스는 그를 쫓아냅니다. 시편의 설명에서 아기스라 하지 않고 아비멜렉이라고 했는데, 아비멜렉이라는 것은 애굽 왕을 바로라고 불렀던 것과 같은 블레셋 왕의 칭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윗는 그때 아둘람 굴로 피했습니다. 거기서 그는 일단의 적지 않은 무리들을 만납니다. 다윗은 형제와 아비의 온 집, 그리고 환난 당한 모든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모든 자가 그에게 나아왔다고 합니다. 400명이나 되는 수였고 졸지에 다윗은 그들의 지도자가 됩니다. 아마도 다윗이 국가의 반역죄의 혐의를 받고 쫓기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가족들도 결코 무사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다윗이 아둘람 굴에서 쓴 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의 마음이 어떠했을지를 짐작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가뜩이나 서럽고 원통하던 차에 가족들을 만나고 원통한 사람들을 만났으니 한풀이나 했어야 했을지 모릅니다. 그는 이제 겨우 20대 약관의 나이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는 이 시를 지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는 한 편의 시일 뿐 아니라 놀라운 설교입니다. 이 설교의 가장 중요한 대목, 요지가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구절입니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는 것입니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여기 “복이 있도다”라는 히브리어는 ‘행복하다’는 의미입니다. 보통 생각하듯이, ‘복을 받을 것이다. 전화위복이 될 것이다. 상황이 좋아질 것이다.’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자는, 그 하나님께 피하게 될 것이고, 그 하나님께 피하는 자는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9절에 보면, 선하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결코 부족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또 “젊은 사자가 궁핍하여 주릴 수 있을지는 몰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결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지금 다윗이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 말은 자기는 지금 부족함과 서러움과 원통함과 같은 것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에게 피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자기 연민과 같은 모습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원통한 자들에게 뭔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상황을 보십시오. 그는 지금 사울에게 쫓겨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으며, 숨을 곳이 없어 블레셋까지 숨어들어갔다가 목숨을 부지하고자 창피함을 무릅쓰고 미친 척을 해서 살아남았고 이제 간신히 아둘람 굴에 숨어 있습니다. 자기 한 몸도 부지하기 힘든데 400 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것도 환난 당하고 빚지고 마음이 원통한 사람들이 몰려와서 자기들을 책임지라고 하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으로 하여금 이런 고백을 하게 하는 힘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한 번 우리의 처한 현실에 비추어서 생각을 해보십시오. 우리도 그렇게 느낍니까? 우리도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말합니까?

5. 본문 이해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본문을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절은 다윗의 확신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그는 연민 어린 어떤 표현으로 이 시적 설교를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는 항상 여호와를 찬송하겠다고 하며 그 찬송이 자기 입에 계속될 것이라고 합니다. 2절에서 다윗은 여호와를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이 곤고한 자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었는지를 설명합니다. 곤고한 자들이 듣고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곤고한 자들에게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곤고한 자 중에 가장 곤고한 자였던 다윗은 여전히 그 곤고함이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지금도 여전히 그는 어둑어둑하고 침침하며 축축하게 음습한 아둘람 굴에 있으며 사울은 여전히 그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자랑하고 있으며 이것은 그에게 나아왔던 환난 당한 모든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에게 기쁨이 되고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정말 놀라운 설교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이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신 분이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듯이(히 4:15), 그는 아둘람 굴로 모여든 그 많은 곤고한 자들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런 설교자가 된다는 것은 신학교를 나와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길을 걸어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열려있는 설교자의 강단은 바로 여러분의 인생의 아둘람 굴인 것입니다. 3절은 그의 확신이 너무나 머리와 가슴 속을 가득 채운 나머지 견딜 수 없어하는 심정을 보여줍니다. 단순히 곤고한 자들이 기뻐하는 것이 그의 설교의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습니다. 이제 자기와 함께 노래를 부르자고 청합니다. 하나님의 광대하심, 그 위대하심을 노래하자는 것입니다. 그는 혼자서 찬양하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고, 자기 가슴에 담아둘 수 없는 그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400명의 사람들과 함께 코러스로 노래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은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아니라 ‘히브리 원통한 자들의 합창’이었을 것입니다. 4~7절에서 그는 댓구법으로 표현을 하는데, 자기의 경험(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으로부터 원리를 도출해냅니다. 말하자면, 그는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배워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적용하여 자기 인생의 장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4절,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고 하는 것은 과거의 경험입니다. 5절,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라고 한 것은 미래의 은혜를 기대하는 신앙적 원리입니다. 다시 6절은 과거의 경험이고 7절은 미래의 기대로 이어지는 신앙의 원리입니다. 다윗은 곤고할 때 하나님께 부르짖어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든 환난에서 건지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6). 그래서 그는 지금 “여호와의 사자(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라는 신앙의 원리를 자기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 구조를 잘 보십시오. 다윗은 자신의 과거 경험에서 미래에 나타날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는 현실을 부인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6절에서 자기뿐 아니라 자기와 함께 한 사람들이 곤고한 자라고 인정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곤고한 인생을 살아가는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우리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시는 선하신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제 설교는 절정에 이르러 다윗은 이렇게 외칩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행복하다.”

6. 다윗이 알았던 것?인간 행복의 조건은 하나님이다.
여러분, 여기서 잠깐 멈추고 생각해봅시다. 다윗이 알았던 것이 무엇입니까? 다윗은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행복의 조건이 충족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의 상황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소망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선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하십시오. 그는 자신이 쫓기고 있는 신세이고, 짓누르는 곤고함의 상황에 있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는 지금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이런 상황이 나아진다고 해서 자기가 행복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결국 그가 말하는 것은 인간의 행복의 조건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 행복의 조건은 의식주의 보장이나 좋은 관계들로부터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고 그는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알고 있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채워지는 만족은 어떤 상황에서도 누릴 수 있으며 상황이 빼앗아가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이것을 배웠고 알았습니다. 비록 상황은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지만, 하나님은 결국 이 상황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 당신의 선하심을 나타내신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7. 다윗이 했던 것?경험으로부터 장래의 은혜를 위한 원리를 도출했다.
다윗은 자기의 과거의 모든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배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온 모든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주십니다. 문제는 우리 삶의 과거를 해석하는 열쇠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십자가 복음입니다. 십자가 복음이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해석하는 열쇠입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의 과거 삶을 해석하게 될 때, 우리는 놀라운 신앙의 원리를 도출해낼 수 있게 되고, 그것을 우리의 장래에 하나님께서 주실 은혜를 바라보게 하는데 적용할 수 있습니다. 저는 믿는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경험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이런 경험적 지식이 과거로부터 배워진 적이 없기 때문에, 현재의 상황에 의해서 짓눌려지게 되고, 미래는 생각만 해도 암담한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사는 삶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현재의 상황 속에 완전히 짓눌려 계신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또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가지는 문제는 무엇입니까? 과거의 경험은 많지만, 그 경험을 하나님의 눈으로, 성경의 원리를 가지고 해석하는 능력이 약하지 않습니까? 바르게 해석되지 않은 경험은 우리의 신앙에 유익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피하는 자는 행복하다는 사실을 누리지를 못합니다. 다윗은 “그에게 피하는 자는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피하는 자만 그분의 선하심을 맛보아 압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 외에 어떤 다른 사람이나, 다른 것들에 의존하여 여러분의 곤고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그만큼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경험을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다윗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8.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내일 의사에게서 여러분의 몸에 암이 이미 많이 퍼져있다는 말을 들었다면 여러분은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시겠습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그 상황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것입니까? 먼저 가장 일반적인 가능한 대답은, “하나님께서 나를 고쳐주셔서 영광을 받으실 거야.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하시니까!”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하나님의 영광이 병고침을 받는 상황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치유되지 않고 죽는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자기 방식 속에 제한하고, 하나님을 강요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결과에 국한해서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선하심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고, 어떻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시는 것이겠습니까? 다윗이 한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내 행복의 조건은 치유를 받는 것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시고, 하나님은 여전히 나의 아버지시며, 이 일은 하나님의 실수로 빚어진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여 일어난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 상황은 전적으로 전지전능하신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통제 하에, 주권 하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자명합니다. 하나님께 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피하는 자는 행복합니다. 병이 나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피하는 자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지금 맛보아 알 것이기에 그는 행복한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다는 것은 지금 나의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적으로 맛보아 아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결과가 일어날 것을 바라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 속에서 어떻게 하시든지, 하나님은 오직 선하신 의도로, 나의 영혼의 유익을 위해서 이 일을 허락하셨으며, 그 일을 이루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직 하나님 안에서 만족을 누리는 것이고, 하나님 자신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행복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런 기쁨과 행복을 맛보아 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삶의 모든 극악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고 신뢰하게 해달라고 구하는 것은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기도 제목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일어나고 있고 여러분이 겪고 계시는 그 어떤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것보다 더 우선되고, 더 큰 가치가 된다면, 여러분은 이미 불신앙의 자리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상황을 제가 원하는 상황으로 풀어주십사 기도하는 것이, 여러분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된다면 여러분은 이미 불신앙으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것, 하나님의 선하심을 머리가 아니라 경험으로 아는 것 보다 더 중요한 인생의 과제는 없는 것입니다.

9. 아둘람 굴은 성도들이 서 있는 최고의 강단이다.
오늘 본문은 단순히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는 것만이 아닙니다. 조금 더 나아가서 본문은 우리를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설교자로 부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런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르는 다윗의 마음을 얼마나 공감하십니까? 그는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 이름을 높이세.” 그는 혼자 이 노래, 이 찬송을 부르는데 만족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마음에, 하나님의 영광과 선하심을 노래하고 싶어하는 열정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것이 참된 전도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사람들이 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당위감 속에서 행하는 의무가 되겠지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것은 우리 안에 참된 신앙의 힘을 경험하게 합니다. 선하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사랑, 기쁨과 감격을 우리 마음 안에 불러일으켜 줍니다. 이 시편이 바로 그런 다윗의 마음을 우리에게 충분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를 가만 있게 만들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둘람 굴에 서서 400명의 곤고한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그리고 교회 밖에는 말할 것도 없이 세상의 염려와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과연 줄 것이 있습니까? 예수를 믿는 것은 선하신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이 우리 안에 잠잠하게 그러나 지배적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때로는 그것이 우리 속에서 가슴을 치고 올라옵니다. 우리는 그 때 세상을 향한 설교자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원튼 원치 않든 설교자로 이 땅을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여러분의 얼굴에서, 말에서, 행동에서, 품위에서 무언가를 듣습니다. 메시지는 언제나 전달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지식이 시험을 받는 장소는 바로 우리가 다윗과 같이 아둘람 굴에 들어가게 될 때입니다. 우리가 고통 가운데 있을 때입니다. 다윗은 아둘람 굴에서 최고의 설교를 했습니다. 우리가 가장 멋진 설교를 세상을 향해 할 수 있는 최고의 강단도 역시 여러분의 인생에 찾아오는 아둘람 굴입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십시오. 그렇게 할 때 여러분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주변의 곤고한 심령들을 향한 탁월한 설교자로 서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더 많은 사람들이 맛보아 아는 자리에 이르기를 기뻐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