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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언약과 구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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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과 구속 (10) - 새 언약의 약속

예레미야 31:31-34, 히브리서 8:7-13, 9:15-1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9-11-01

말씀내용
<새 언약의 약속> 렘 31:31~34; 히 8:7~13; 9:15~17



1. 주님께서 말씀하신 새 언약(눅 22:19~20)
주님께서 잡히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430년 종살이를 마치고 해방되던 날을 기념하는 유월절 식사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떡을 나눠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녁 먹은 후 포도주 잔을 나누어주시면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특별한 밤에 제자들은 매우 특이한 말씀을 듣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그들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말은 새 언약이란 말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 언약이란 말을 이미 예레미야 선지자(렘 31:31~34; 32; 33:14~16)가 사용했고 에스겔 선지자(겔 34:23~26; 36:25~27)도 예언한 바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선지자들의 예언과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복음을 이해하는데 절대적으로 중요하기에 오늘 이 부분을 함께 상고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2.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한 새 언약(렘 31:31~34).
무엇보다도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한 새 언약에 대한 약속이 어떤 내용인지를 살펴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대 왕국 말기에 유대의 멸망을 선언한 선지자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소망의 약속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새 언약에 관한 약속이었습니다. 31절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고 했습니다. 33절에서는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과 유다가 혈통적인 의미로 쓰였는가, 영적인 의미로 쓰였는가를 규명하는 것이 이 새 언약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입니다. 이 문제를 숙제로 남겨놓고 다음의 내용을 보도록 합니다. 이 언약은 출애굽 때 맺은 시내산 언약과는 다르다고 말합니다(32절).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시내산 언약과 다르다고 말씀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을 가지고 계속 이 새 언약의 약속의 내용을 먼저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새 언약의 약속 안에는 네 가지 내용이 주어집니다.

A.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중생
첫째로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한다는 것입니다(33절).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십계명을 주실 때 돌비에 기록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새 언약은 돌비가 아니라 심비에 기록하여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3장에서 비교한 것과 같이 이 구절은 중생 곧 죄인의 마음 속에 행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B.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화해(하나님과 죄인의)
두번째는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33절). 32절에서 옛 언약 하에서는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다”고 하였는데, 이제 새 언약 하에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의 관계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일어나게 될 화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 사이에 전격적인 화해의 사건이 일어나게 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C.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사랑과 신뢰와 복종을 가져오는 지식
셋째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입니다. 이것은 특별한 차원의 하나님 아는 지식을 말합니다. 새 언약에 속한 모든 자에게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지식이 주어질 것이기에 그들은 아무에게도 여기에 대해서는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요한일서 2:20,27의 말씀이 바로 이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지적인 개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흔들리지 않는 분명한 확신을 의미합니다. 즉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고 예배할 수 있는 지식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기본적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지만, 확신에 속하는 것이고, 이 지식으로 인하여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고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순종하는 지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한 것은 바로 이 지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고 탄식했을 때의 의미가 그것입니다(호 4:6). 그러나 새 언약의 백성들은 사랑과 신뢰와 복종을 가져오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D.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언약 백성의 속죄
넷째는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34). 이것은 새 언약의 백성들의 죄를 속하는 것이 얼마나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인지를 약속하는 것입니다. 옛 언약인 시내산 언약은 죄를 지을 때마다 반복적으로 속죄의 제사가 필요했을 뿐 아니라 양심을 깨끗하게 해줄 수는 없는 것이었지만, 새 언약은 그 백성들을 양심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며(히 9:14) 영원히 온전케 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히 10:14).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한 가지는 이 완전한 속죄가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 곧 새 언약의 백성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3. 새 언약에 대한 히브리서 기자의 해석(히 8:7~13)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새 언약의 약속이 의미하는 바가 대략 이런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다 더 중요한 단서를 히브리서를 통해서 얻게 됩니다. 히브리서는 바로 지금 우리가 상고한 이 구절들을 해석하는 열쇠를 제공해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8:7~13을 봅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거의 정확하게 예레미야 선지자의 새 언약의 약속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A. 첫 언약과 새 언약의 비교
히브리서 기자는 첫 언약인 시내산 언약과 새 언약을 비교함으로써 새 언약의 우월성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을 것이라”는 말은 첫 언약이 무슨 잘못이 있거나 그 내용이 그릇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앞서 던진 두번째 질문, 새 언약이 어떤 의미에서 옛 언약과 다르다는 것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에서 뭔가 전혀 다른 내용을 가지는 새로운 법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기 백성에게 한 새 마음을 주신 것이 다르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법의 거룩하고 의로운 요구들과 일치하는 마음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고 말할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롬 7:22). 이것은 단지 지적인 이해의 수준이 아니라 우리의 깊은 정서와 의지의 영역까지를 차지하여 하나의 성향(inclinations)이나 경향(tendencies)이 형성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하나님의 뜻에 대한 참된 순종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앞서 말씀드린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곧 성령께서 죄인의 내면에서 행하시는 중생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고 복종하게 하는 지식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옛 언약인 시내산 언약은 순종을 보장할 아무런 대책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새 언약과 옛 언약의 본질적 차이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새 언약은 결코 옛 언약의 갱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앞서 제가 제기한 이 새 언약의 약속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부분인 첫번째 질문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 새 언약의 약속이 누구에게 주어진 것인가? 혈통적 이스라엘인가,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인가 하는 것입니다. 첫 언약인 시내산 언약은 자연적이 것 즉, 혈통적 이스라엘 백성에게 관련된 것이지만, 새 언약은 영적으로 얻어지는 것,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적 이스라엘이 된 교회에게 주어지는 약속이었다는 것입니다. 옛 언약은 외부적인 것으로 행위에 속하는 것이었지만, 새 언약은 내면적인 것 즉 마음에 속한 것입니다. 주님은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미워하지 말라는 것이며, 간음하지 말라는 것은 여자를 보고 음욕도 품지 말라는 것이라고 해석하셨습니다. 이처럼 새 언약은 내면의 마음에 관계된 법이라는 점에서 다릅니다. 셋째로 옛 언약은 국가 이스라엘에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예수를 믿는 모든 신자 개개인들에게 주어진 언약입니다. 옛 언약은 일시적인 것이었지만, 새 언약은 영원한 언약입니다. 시내산 언약은 온 땅에 임하게 될 하나님의 종말론적 나라를 예기하는 일시적이고 과도기적인 질서로서 의도된 것이었습니다. 이런 조건적이고 모형으로서의 시내산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그 사명이 이미 성취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쇠하여 없어지는 것이라고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것입니다.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가는 것이니라(히 8:13).”

B.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믿는 자와 맺어진 은혜언약의 총체다.
결국 히브리서 기자가 예레미야 선지자의 새 언약의 약속을 해석하는 것을 이렇습니다.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믿는 자와 맺어진 은혜언약의 총체라는 것입니다. 이 새 언약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대로, 범죄한 후 아담과 하와에게 간접적으로 주어진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약속, 아브라함에게 주신 은혜언약의 약속, 그리고 다윗에게 주어진 영원한 은혜언약의 약속의 성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새 언약은 어느 미래의 천년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루어질 남아있는 약속이 아니라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10:16~17에서도 반복해서 히브리서 기자가 예레미야의 약속을 인용하는 이유입니다.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믿는 자와 맺어진 은혜언약이라는 것입니다.

4.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언으로 주어졌다(히 9:15~17).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야만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9:15~17이 독특하게 이 언약을 유언이라고 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전에 한 번 언급했습니다마는, 신약성경이 언약을 의미하는 구약의 히브리어 단어 ‘베리트’를 의미할 때, ‘신데케’라는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언을 의미하는 ‘디아데케’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단지 신약성경만이 아니라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주전 3세기의 서기관들도 언약을 번역할 때 그 자체로 언약을 의미하는 ‘신데케’대신 보통 유언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디아데케’라는 단어를 썼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의도적인 번역입니다. 신데케라는 말은 계약, 언약을 의미하지만, 이 말이 전달하는 강력한 뉘앙스는 ‘쌍무적’인 계약이란 점입니다. 두 동등한 당사자의 계약이란 점인데, 이것이 구약의 언약을 번역하기에는 부적절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유언을 의미하는 ‘디아데케’를 선택했는가? 이 단어가 비록 언약을 설명하는데 한계를 지니는 점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약의 본질적 성격을 드러내는데 더 합당했기 때문입니다. 유언은 결코 쌍방적 계약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유언한 자의 의지이며, 유언한 자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온전하게 집행되는 법적 효력을 지니는 계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오래도록 강조했던 은혜언약의 성격이 무엇입니까? 범죄후 아담에게 주신 언약,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 다윗에게 주신 언약이 다 은혜언약이었습니다. 그 성격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이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겠다, 내가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홀로 쪼개진 고기 사이로 지나가셨습니다. 다윗의 자손이 아무리 범죄해도 다윗의 언약은 깨어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율법이 아니라 복음이었습니다.

A.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심으로 새 언약의 효력을 발생시키셨다.
이것이 히브리서 10:16의 의미입니다.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디아데케라는 단어를 신약성경의 모든 곳에서 언약, 혹은 계약 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 전체를 통틀어 유일하게 10:16과 17절에서만 유언이라고 번역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본문에서는 분명하게 히브리서 기자가 유언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모든 믿는 자는 그 새 언약의 수혜자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해하기 쉽게 유언의 수혜자가 되었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B. 유언의 수혜자(beneficiary)
어떻게 유언의 수혜자가 됩니까?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죽으셨고 그 죽으심의 효력으로 유언이 발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히 10:17), 이 말씀의 의미가 그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죽으셨습니다. 새 언약의 중보로 첫 언약 때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들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고”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15절 말씀의 의미입니다.

C. 유산 상속의 권리는 빼앗길 수 없다(롬 4:14,16).
그러므로 성경이 강조하는 단어 가운데, ‘기업’이라든지, ‘유업’ 혹은 ‘상속자’, ‘후사’와 같은 단어들이 의미하는 바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산 상속의 수혜자가 되는 것은 그 사람의 노력 여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유언의 수혜자가 되는 것은 유언한 사람의 유언장의 내용에 따르는 것입니다. 유언한 자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유언의 수혜자가 되기 위해서 선행을 얼만큼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유언장에 쓰여진대로 법이 집행할 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유언의 수혜자들이 유산 상속의 권리를 빼앗길 수 있는 길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로마서 4:14,16의 말씀의 뜻입니다.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상속자)이면 믿음은 헛 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그러므로 후사(상속자)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이 유산, 생명보다 귀한 기업은 결코 빼앗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5. 새 언약의 백성들의 특징은 중생으로 얻어진 새 마음이다.
옛 언약으로 대표되는 시내산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내가 내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라고 했습니다. 돌비가 아니라 우리의 심비에 기록하시겠다는 말씀은 중생,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이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선한 의지, 선한 성향을 창조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새 언약의 약속이 어디서 이루어졌습니까? 그리스도의 오심과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믿는 모든 자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게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그 마음 속에 주셔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마음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렘 32:40). 이것이 예레미야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새 언약의 약속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됨으로써 이미 모든 믿는 자에게 빼앗길 수 없도록 주어진 유산인 것입니다. 중생, 거듭남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없는 중생은 없습니다. 거듭남은 우리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게 만들며,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여 살고 싶은 성향을 우리 속에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의 죽으심을 통해서 믿는 자에게 주어진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알지 못하시는 분들은 그 확실한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그 은혜를 맛보신 분들은 그 확실한 은혜 가운데 거하시기를 구하십시오. 이것이 우리로 하늘의 유업을 얻게 하는 거저 주어진 자격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