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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언약과 구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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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과 구속 (9) - 어느 구약 성도의 언약 신앙

시편 89:1-5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9-10-25

말씀내용
<어느 구약 성도의 언약 신앙> 시 89:1~52



우리는 성경 말씀 전체를 이해하고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틀로서 주어진 언약이라는 주제를 몇 주간 연속해서 상고하고 있습니다. 혹시 이런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만일 ‘언약이 없다면?’ 언약이 없다면 성경은 무슨 의미며, 언약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지만, 언약이 없다면, 우리의 구속,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 대속, 칭의, 은혜와 같은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주제들은 다 무의미한 것들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언약이라는 주제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의 구원이 무의미해지고 가치가 없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과 십자가의 은혜와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설명하시기 위해서 정하신 언약이라는 내용과 그 틀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 구원의 풍성한 내용을 깨달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언약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무슨 의미를 가지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은 그저 주관적인 자기 강박적 확신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바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시인의 상황(38~51): 감각이 아니라 믿음이 노래해야만 할 때(1~2)
오늘 본문은 특별히 많은 시편 중에서 언약의 시라고 알려져 있는 시편입니다. 이 본문은 위태하고 신앙이 흔들리기 쉬운 상황을 살아가는 성도에게 있어서 언약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 시편은 아마도 다윗의 손자이고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 왕 때, 이스라엘이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로 갈라지게 되고, 북왕국으로는 10지파가 속하게 되고, 다윗의 왕통을 이은 남왕국 유다의 르호보암 왕에게는 유다 족속과 베냐민 족속만이 주어진 상황에서 한 성도가 쓴 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성도를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힘이겠습니까? 이때 이 시인이 한 것을 보십시오. 그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을 잘 보면, 앞 부분에서는 도무지 시인이 어떤 상황에서 이 시를 쓰고 있는지를 감을 잡을 수 없습니다. 도리어 읽는 이들로 하여금 아마 시인이 무척이나 좋은 일이 있는 모양이다라고 착각하게 만들 정도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시인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대대에 알게 하겠노라고 합니다. 또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굳게 견고히 하시겠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는 반복해서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언급합니다.

2. 시인이 기억한 것은 다윗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이다(3~4).
시인을 이렇게 하도록 만든 것이 무엇입니까? 그는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어주신 언약을 기억했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언약은 다윗과 맺으셨지만, 그 언약은 다윗의 혈통적 자손들인 왕들만이 아니라, 다윗 이후에 오게 되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에게 매우 중요한 신앙의 근거가 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시인은 다윗의 혈통적 자손도 아니었고 물론 왕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사람의 성도로서 그 언약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언약의 내용을 그대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내가 나의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왕위를 대대로 세우리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의 손자인 르호보암의 왕위가 견고해지기는커녕,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3. 신앙은 주관적인 느낌에 근거하지 않고 객관적인 말씀과 사실에 근거한다.
우리의 신앙이 위기를 맞는 순간은 어떤 순간인가 하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는데 상황이 그와는 정반대로 흘러가는 것을 볼 때가 아닐까요? 제가 말씀드리는 그 하나님의 말씀이란, 내가 주관적으로 그렇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같이 느끼거나, 주관적으로 듣는 말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쓰여진대로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분명한 뜻과 원리가 나타나 있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종종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하지만, 자기가 듣고 싶은대로 듣고서는 왜 하나님께서 상황을 약속대로 열어주시지 않는가 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런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이 들은 것도 주관적으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을 것 같은데 라는 것에 근거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시인으로 하여금 노래하게 만든 요인입니다. 시인이 가진 신앙은 주관적인 느낌에 의존하는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모든 성도들의 신앙을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성경이 일관되게 가르치는 신앙에 대해서 상고해보십시오. 거기에는 주관적인 느낌에 뿌리를 내리는 신앙은 찾을 수 없습니다. 객관적인 사실에 신앙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가지 내용이 바로 ‘언약 신앙’인 것입니다. 시인은 객관적인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 다윗에게 분명하게 선지자 나단을 통해서 주신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위기에 처할 때는 바로 그런 말씀을 붙들고 있는데, 상황이 그와는 반대로 흘러가는 것을 볼 때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그런 위기를 겪었습니다.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모세도, 다윗 자신도, 느헤미야도, 다니엘도 성경의 인물들은 다 그런 일을 겪었습니다. 그때 그들을 붙들어준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언약 신앙이었습니다. 여기 이 우리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에단이라는 구약의 성도를 붙들어주는 것도 무엇입니까? 언약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언약 신앙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감정이나 감각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노래하는 것을 배운 사람인 것입니다. 스펄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감각은 이따금씩만 노래하지만, 믿음은 영원토록 노래한다. 다른 사람이 노래하든 말든, 신자는 거기에 좌우되면 안 된다. 그들 안에는 늘 찬송이 있어야 한다. 만사가 잘 안 풀리는 듯이 보여도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의 선하심을 믿어야 함은 물론이요 그 안에서 영원토록 즐거워해야 한다. 주님의 사랑은 모든 우리의 기쁨의 원천으로서 결코 마르는 법이 없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이 처해 있는 형편 속에서 감각으로 하나님을 노래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믿음으로 노래하고 계신 것입니까?

4. 언약 때문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5~14)
이처럼 더 이상 자신의 주관적 감정에 의해서 휘둘림을 당하는 대신, 하나님의 언약,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를 기억하기로 한 시인은 비로소 차분하게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인하여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 하나님을 기억하는 시인의 마음에는 찬송이 더욱 넘칩니다. 과연 누가 하나님과 같은 신이며, 하나님과 같이 언약을 기억하시고 신실하게 그것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신가 하는 생각 때문에 시인은 자기 혼자의 찬송이 아니라 온 세상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의 모든 회중이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외칩니다. 그의 노래와 찬송은 기어들어가는, 자기의 마음을 설득하는 찬송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 찬송은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비참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신 언약을 기억함으로써 힘을 얻고 언젠가 그 언약을 기막히게 이루실 하나님을 보며 기대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은 참으로 두려운 하나님이심을 그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7). 그가 지금 기억하는 사건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출애굽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힘을 내어서 쟁취한 구원이라거나, 그들의 힘으로 이룬 독립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로 말미암은 구원이었습니다. 그 구원 사건의 모든 공로는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9절은 홍해가 갈라졌던 사건을 보여줍니다. 10절은 그 홍해 바다에서 멸망 당한 애굽 제국의 바로와 군대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라합이란 말은 바다 괴물에 대한 당대의 이름인데, 애굽의 세력이 워낙 강대하고 교만하여 애굽을 라합이라고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출애굽의 구원 사건이 왜 일어났다고 시인이 생각하는 것일까요? 그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편의 본문에는 물론 아브라함의 언약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단어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입니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 신앙을 표현하는 한 가지 방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에 대해서 성실하시다는 것입니까? 신약 성경에도 ‘하나님은 미쁘시다’는 표현이 개역성경에 있습니다. ‘신실하시다’는 표현입니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하신 언약의 말씀에 대해서 이루지 않으시고 넘어가시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을 설명하는데 ‘의와 공의’ 그리고 ‘인자함과 진실함’을 말하는 것입니다(14).

A. 의와 공의(14)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고 시인은 말한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의와 공의의 다스림입니다. 여기서 "의(righteousness)"는 하나님의 속성을 가리키는 것일 것입니다. 그리고 "공의(justice)"는 심판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일을 행하실 때 의로운 속성에 따라 공평하게 처리하신다는 뜻일 것입니다. 종종 하나님의 성품인 의로움을 말할 때 이것은 성도들의 구원의 근거였습니다(시 71:2). 주님의 의로우심이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된다는 말은 주님의 언약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주님이 의로우시지 않으시다면 주님은 당신의 언약을 기억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도 보장될 수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의와 공의를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의로우신 성품을 따라서 의로우신 판단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B. 인자함과 진실함(14)
그 다음에 시인이 쓰는 표현은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를 앞서 행한다고 말합니다. 헤세드와 에메트입니다. 사실 앞에서 반복적으로 언급한 인자하심과 성실하심도 같은 말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그리스도를 설명할 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는 것도 같은 말입니다. 모두가 다 무엇을 전제로 한 말입니까? 바로 언약입니다. 시인은 지금 다윗에게 하신 언약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주장하면서 그는 하나님의 의와 공의 그리고 인자함과 진실함의 성품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하는 이해가 이 시인의 마음 속에 분명합니다.

5. 다윗에게 허락하신 영원한 언약(19~37)
이어지는 19~37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허락하신 영원한 언약을 다시 언급하고 있습니다.

A. 인자함을 영구히 지키고 언약을 굳게 세우며 그 후손을 영구케 하시리라(28~29).
특별히 28~29절은 그 언약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저(다윗)을 위하여 나의 인자함을 영구히 지키고 저로 더불어 한 나의 언약을 굳게 세우며 또 그 후손을 영구케 하여 그 (왕)위를 하늘의 날과 같이 영원하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다윗에게 하신 약속언약이며 은혜언약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과연 이 시인이 바라보는 것이 다윗과 그의 자손 왕들 그리고 지상의 이스라엘 나라에 대한 약속이라고만 이해를 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구약의 거듭난 성도들이 그랬듯이 이 시인은 다윗의 언약의 영적 의미를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의 절정이 어디서 나타나는가? 그것은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서 한 말씀에서입니다.

i. 영적 다윗, 그리스도(눅 1:31~33)
어느날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요셉이란 청년과 약혼을 한 처녀 마리아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임신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소식을 전합니다. 누가복음 1장 31~33절을 보십시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에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좃아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천사 가브리엘이 지금 주님에 대해서 하고 있는 말은 정확하게 다윗에게 주신 영원한 언약의 내용입니다. 그 언약이 이제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하고 충만하게 성취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 언약의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의미입니다. 다윗 자신을 포함하여 구약의 성도들은 그 언약의 의미를 그렇게 믿었습니다. 저는 지난 주일에, 다윗 자신이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의 의미를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이해했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인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거듭난 구약의 모든 성도들 역시 이 언약의 의미를 육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영적 다윗이고, 다윗은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는 것입니다.

B. 그 자손이 범죄할 때에도 언약을 폐하지 않으시리라(30~37).
이것이 그리스도 자신에 대한 예언이었기 때문에 이 언약은 결코 다윗의 자손 왕들이 범죄한다고 해서 폐하여 질 수 있는 성질의 언약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약속언약, 혹 은혜언약이라고 불리우는 복음의 특성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복음은 우리 인간의 의로움과 신실함에 근거를 두지 않습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인자와 진실, 의와 공의에 근거를 둔 하나님의 행위인 것입니다. 그것이 30~37절의 말씀입니다. ‘만일 그 자손이 내 법을 버리며 내 규례대로 행치 아니하며 내 율례를 파하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이라고 가정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지팡이와 채찍으로 징계를 하시겠지만, 하나님의 인자함과 성실함을 다 거두시거나 폐하시지 않으실 것이며 언약을 파하지도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더 높은 맹세하실 자가 없으시므로 당신 자신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하신 것이며 다윗에게 거짓을 행치 않으실 것입니다.

i. 징계는 일종의 언약적 축복이다(31~33).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징계는 언제나 언약적 축복입니다. 그 언약이 없다면 징계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의 후사로 정하시고 그 의를 상속받기에 합당한 자로 만들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종 하나님의 언약에 부합하는 것 같지 않은 상황과 환경을 주시기도 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깊은 고민과 좌절을 겪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그냥 놔두시지 않으십니다. 징계를 받을 때에는 하나님이 내게서 멀리 계시다고 느끼는 것이 일반입니다. 그러나 그 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가까이 계시기 때문에 내가 징계를 받는 것이고, 하나님의 언약이 있기 때문에 내가 매를 맞는 것이란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징계는 일종의 언약적 축복이란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6. 언약이 없다면?: 믿음으로 부르는 노래(52)
우리가 이 사실을 알 때, 우리의 신앙이 주관적 확신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언약의 말씀과 그 언약으로 인한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주목함으로써 얻는 성령의 확신이 될 때 우리는 감각으로는 노래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믿음으로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감각은 일시적이지만, 믿음은 영원합니다.

저도 때로는 시인이 경험한 것과 같은 마음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는 씨가 말라 죽는 것 같고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도 씨가 마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과는 다르게 가는 현실을 경험합니다. 그때 저의 마음 속에서 감각적으로 부를 수 있는 노래는 없습니다. 기분이 좋을 때, 저도 모르게 제 자신 안에서 흘러나오는 찬송이 그때에는 없습니다. 저는 힘들고 비참해짐을 경험할 때 “내 맘 속에 한 노래 있어. 나 즐겁게 늘 부르네”라고 부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때 저는 저의 영혼을 향해서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 시인이 했던 것입니다. “언약을 기억하라. 하나님께서 쪼개진 고기 사이로 홀로 지나가심으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라.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으신 영원한 언약, 확실한 은혜를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방적 선언이며, 맹세였습니다. 나의 불성실함과 나의 고집스런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하나님을 저는 봅니다. 그리고 나의 순종이나 나의 선함, 나의 올바름과는 전혀 무관하게 그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시기 위해서 그 아들을 이 세상에 육신을 입어 보내사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신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믿음으로 노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언약이 없다면? 언약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헛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도 헛 것이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붙잡고 의지할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언약이 없다면 아마 역사적 위기 속에서 이 시인은 될대로 되라 하는 식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때는 우리가 하나님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중요한 원리는 하나님을, 혹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을 불신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길을 판단치 못할 때, 하나님을 판단하려고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하신 말씀과 다르다고 여겨질 때, 하나님의 언약을 여전히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분께서 기어이 그 일을 행하실 것을 기대하십시오. 불합리해 보이고, 부당해 보이며, 하나님께서 도무지 이렇게 하실 수는 없다고 생각이 되는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복되신 하나님이 되시며, 언제나 그리고 영원토록 그러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하신 자와 언약을 맺으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분은 다윗이기 전에 영적인 다윗 바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시며,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그리스도 사이에 맺어진 구속의 언약은 견고히 설 것이고 말씀하신 대로 폐기되거나 무효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예수를 믿는 모든 성도들과 은혜의 언약을 맺으셨는데, 그것이 바로 다윗과 맺으신 언약이었습니다. “저로 더불어 한 나의 언약을 굳게 세우며”(28)라고 하신 말씀에서 저는 곧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이것을 알았던 시인은 역사와 자기가 처한 모든 참담함 속에서도, 결국은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아멘, 아멘”이라고 외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