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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언약과 구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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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과 구속 (7) - 아브라함와 맺으신 은혜언약

창세기 15:1-2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9-10-04

말씀내용
<아브라함과 맺으신 은헤언약> 창 15:1~21



하나님께서 노아와 맺으신 언약은 일반은혜를 드러내는 특징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구원이나 구속에 대한 메시지가 담겨있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자기 백성들과 맺으신 언약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살펴보게 되는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 전형적인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은혜언약의 특징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1. 은혜언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 맺으시는, 맹세로 하신 약속(언약)이다.
은혜언약의 전형적 특징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 맺으시는 것이며 무엇을 하라는 조건이나 율법 조항을 가지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로 주어지는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언약은 하나님의 구원 사건과 가장 직접적으로 연관이 됩니다. 하나님은 구원하시려고 하시는 당신의 백성을 인도하고 구원하시는데 있어서 언약의 형식을 사용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 언약의 성격이 무엇이며, 왜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시기를 기뻐하시는가를 조금씩 살펴보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언약을 자기 백성에게 주실 때 자기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푸신 약속의 언약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은 아담 이래로 지금 우리들 그리고 주님 재림 전까지 동일할 것입니다.

2. 아브라함 언약이 주어지기까지 구원에 관한 소망은 원시복음(창 3:15)밖에 없었다.
여러분, 이런 생각을 해보십시오. 아담이 범죄한 후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그동안 아담부터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에 이르기까지 그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을 얻었겠습니까? 그들에게 주어진 그리고 그들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언약은 오직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아담의 범죄 직후에 하나님께서 뱀에게 저주하실 때 말씀하신 원시복음입니다(창 3:15). 이것은 인류역사에서 그리고 성경에서 처음으로 선포된 복음입니다. 여인의 후손이 와서 뱀의 머리를 깨뜨릴 것입니다. 그 여인의 후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들이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알지 못했지만, 그들은 여인의 후손이 오실 것을 바라봄으로써 소망을 가질 수 있었고 그들은 그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을 선택하셔서 그에게 매우 구체적인 언약을 주십니다. 이로써 우리는 오실 구원자인 여인의 후손이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오실 것과 가나안 땅에 오시게 될 것이라는 구체적인 사항을 얻게 됩니다.

3. 아브라함의 소명에서 죽음까지 아브라함에게 발생한 모든 사건은 언약의 특성을 설명한다.
그런데 아브라함 언약이라는 것은 단지 그 정도의 정보를 더해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을 선택하셔서 그를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언약의 특성이 무엇인지를 깊이 설명해주십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는 소명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의 성격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A. 부르심(행 7:2~3; 창 12:1~3): “내가 너를 축복하고 너를 통해서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이다.”
처음에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는 장면이 창세기 12장에 나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을 때였고 우리가 스데반의 설교를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은 아브라함이 하란에 오기 전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 영광의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를 부르셨다고 했습니다(행 7:2~3).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다른 신들을 섬기던 사람이었으니까(수 24:2) 아마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내가 보일 땅으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부분적으로 순종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데라를 모시고 대가족이 함께 하란으로 갔던 것입니다. 거기서 거하다가 아버지 데라가 죽었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 하란에서 나타나셔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창세기 12장에서 보는 장면입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과 후손을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심으로써 아브라함을 복주실 것이고, 또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아브라함의 전 생애는 결국 이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과 거기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더욱 구체적으로 보이시고 확증해주시는 이야기가 됩니다. 아브라함의 삶을 이해하는 열쇠는 바로 이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아직 정확한 방식으로 언약을 맺으신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인 창세기 15장에서 보게 됩니다.

B. 언약을 맺으심(창 15)
이것은 우리가 조금 후에 자세하게 살필 것입니다. 하나님은 15장에서 당시 일반 사람들이 하던 방식처럼 아브라함과 언약을 정식으로 체결하십니다.

C. 언약의 증거로 할례를 명하심(창 17)
그리고 17장으로 가게 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언약의 증거로 할례를 하라고 하십니다. 이 할례는 십계명과 같은 율법이 아닙니다. 이 말은 할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효력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기 때문에 그 증거와 표시로서 할례를 받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음으로써, 아브라함과 그 자손은 “우리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사람들이다”라고 스스로 상기하고 또 세상 앞에서 그렇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마치 결혼 반지와 같은 것입니다. 약지에 반지를 끼고 있음으로써 “나는 결혼한 사람입니다. 건드리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D. 언약을 확증하여주심(창 22:17~18)
아브라함의 삶의 절정은 그가 독자 이삭을 하나님 앞에 번제로 드리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시험하시려고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셨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바보 아브라함이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드릴 장소인 모리아 땅으로 가서 단을 쌓고 아들을 손수 묶어 제단에 올려놓고 아들을 향해서 칼을 들었습니다. 그때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 그를 부릅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리고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해주십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사자는 천사가 아니라 성육신하여 오실 예수 그리스도라고 많은 학자들은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1인칭으로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약 성경을 읽을 때 이런 부분을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눈을 들어 수풀에 뿔이 걸려있는 한 수양을 발견하고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립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제까지 하신 언약의 말씀을 더욱 구체적으로 확증해주십니다. 그것이 17~18절입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우리가 물을 수 있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독자를 번제로 바치라고 할 때 바칠 정도로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75세때 그를 부르셔서 100세에 아들 이삭을 얻고 이삭이 자라서 틴에이저가 된 이때까지 약 40여년을 그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의 믿음은 많은 시련을 거쳐서 견고하고 성숙해졌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 40년 믿은 사람 보면 그렇게 되는 것 봅니까? 여러분은 몇 년 믿으셨습니까? 그렇게 되셨습니까? 오늘 이 문제에 접근하는 한 가지 중요한 단서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읽은 본문 창세기 15장입니다.

4. 언약체결 의식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15장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정식으로 언약을 체결하시는 장면을 소개합니다.

A. 왕의 하사(선물, 1절)
본문은 1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시작됩니다. 이것은 강대국 왕이 약소국의 왕에게 은혜로운 선물을 하사해주는 것과 같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상급이라는 단어는 군사로 출정한 사람에게 왕이 주는 보상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아브라함은 바로 앞에서 메소포타미아 동맹 왕들과의 전쟁을 치루고서 롯의 가족과 사로잡혀간 소돔 백성들을 구해준 후, 소돔 왕이 주는 전리품을 거절한 바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소돔왕이 내가 아브라함을 치부케 하였다고 말하도록 허용치 않겠다는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다른데로부터 오는 것들에 눈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소돔 왕에게서 포기한 부보다 훨씬 많은 보상물로 특별한 하사품을 상급으로 줌으로써 언약적 의무에 충실한 아브라함의 주목할만한 행동을 인정해주는 강대국 왕의 이미지로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왕이시니 하나님의 선물을 하사받는 아브라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B. 언약을 자르다(cut a covenant, 렘 34:18~20)
본문에서 주목하게 될 가장 중요한 사건은 언약을 자른 사건입니다. 몇 번 말씀드렸습니다마는, 고대 근동에서 언약을 맺는 방식은 짐승을 반으로 쪼개서 벌려놓고 그 사이로 언약 당사자들이 지나가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언어에는 언약을 맺다라는 말이 ‘언약을 자르다’라고 표현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쪼개진 짐승 사이로 지나가는 행위는 언약을 어길 경우에는 자신이 쪼개진 짐승과 같이 될 것이라고 하는 맹세 행위였습니다. 렘 34:18~20에서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우리는 그것을 정확하게 보게 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대 말기에 하나님의 율법 언약을 범한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피로 맺은 모세의 언약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이 언약을 어겼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결과 저들이 그 쪼개진 송아지와 같은 신세가 되어 공중의 새들과 땅 짐승의 밥이 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을 자르는 언약체결의식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C. 이상한 종주권 조약(7~11절)
그런데 여기 아브라함과 언약을 체결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이 너무나 특이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상한 종주권 조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밤하늘의 별과 같이 자손을 많이 주시겠다고 하시는데, 그리고 이 땅을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서 유업으로 주시겠다고 하시는데 도대체 자기가 어떻게 그 말씀을 믿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8). 그러나 하나님께서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하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려는지 눈치를 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짐승들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습니다. 비둘기는 몸체가 작기 때문에 제사를 드릴 때와 마찬가지로 쪼개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해진 후에 아브라함은 깊은 잠이 들었는데,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400년 동안 이방에서 객이 되어 섬기다가 그 섬기던 나라를 하나님께서 징벌하셔서 큰 재물을 가지고 거기서 나오게 하실텐데, 4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와 이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아브라함의 눈에 연기나는 화로가 보이고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는 것을 그는 보게 됩니다(17).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그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라고 말씀합니다(18).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간 횃불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셨다는 것입니다. 만일 잠든 중에 환상을 통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아브라함은 그 몸이 자동으로 자신도 그 횃불을 쫓아서 쪼갠 짐승 사이로 지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언약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 은혜언약이었습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맹세로 되는 언약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다고 할지라도 아브라함은 언약을 지킬만한 신실함을 가지지 못한 인간이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에 수없이 실패를 반복하고 또 반복합니다. 만일 이 언약이 다른 종주권 조약과 같은 언약이었다면 하나님은 강대국 왕으로서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셔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약소국 왕이 지나가야 하는 자리입니다. 약소국 왕이 언약의 내용을 지키지 못하면 그는 짐승처럼 죽을 것입니다. 이 종주권 조약은 언제나 약소국 왕에게만 의무를 지우도록 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이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시는 조약은 정반대로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이 지나가지 않고 하나님이 지나가십니다. 이것은 약속을 지키는 모든 책임을 하나님이 끝까지 지시며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한 모든 저주를 하나님께서 직접 받으시겠다고 맹세하시는 행위였습니다. 이것은 형식은 종주권 조약과 같은 것이지만, 그 내용은 하나님의 일방적 맹세였습니다. 이렇게 강대국 왕이 자기 목숨을 걸고 맹세를 하는 형태의 조약은 고대 근동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여기서 당신의 생명으로써 약속을 지키실 것이라고 맹세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5. 하나님의 모든 자비와 용서의 근거는 아브라함 언약이다(출 2:24; 신 4:31; 왕하 13:23).
이 언약은 오직 아브라함 한 사람을 위해서 하신 약속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 모두가 다 이 약속의 은택을 경험하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이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을 어기고 잘못 행할 때 그들을 용서하실 때마다 바로 아브라함의 언약을 기억하심으로써 그렇게 하신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느 한 구석에서도 모세의 언약을 기억하셨다고 하시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모세의 언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이 짐승의 피를 흘려서 그 피뿌림을 받고 언약을 비준했기 때문입니다. 그 언약은 행위의 원리에 근거한 행위언약이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이 400년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나올 때에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셨다고 합니다(출 2:24). 또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도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 잘못 행하여 언약을 어기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실텐데 이는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신 4:31). 여기서도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의 근거는 모세의 언약이 아닙니다. 여호아하스 왕 치하의 북왕국 이스라엘을 아람 왕 하사엘에게 완전히 멸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을 인한 것이라고 말합니다(왕하 13:23).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언약을 기억하심으로써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자비를 베푸신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심으로써 약속하신 맹세이기 때문입니다.

6. 아브라함이 언약의 영적 의미를 바라보다(히 11:8~19).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을 영적으로 이해했다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A. 외부적이고 일시적인 것은 영적이고 영원한 것의 상징과 예표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 땅을 주리라고 가나안 땅을 지명하셨을 때에도 이것이 다가 아니라 이 외부적이고 일시적인 것은 영적이고 영원한 것의 상징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랬다는 것입니다(히 11:10). 그는 또 나온 본향 갈대아 우르가 자기가 돌아갈 곳이라고 생각했다면 얼마든지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텐데, 그가 바라본 것은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이었다는 것입니다(히 11:16). 그는 외부적이고 일시적인 것이 영적이고 영원한 것의 상징과 예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타난 언약 체결의식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B. 아브라함의 믿음의 근거는 ‘구약성경의 골고다’이다.
다시 본래의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독자 이삭을 번제로 하나님께 드릴만큼 하나님을 신뢰하게 만든 요인이 무엇인가? 오늘 본문에 그 중요한 핵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맹세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쪼갠 짐승 사이로 지나심으로써 스스로 죽음을 댓가로 약속을 지키실 것을 맹세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셔야 했을까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셔야만 할 의무가 있는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역사상 어떤 강대국 왕도 그렇게 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맹세로써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하심으로써 아브라함의 믿음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믿음이 만들어지는데에는 바로 이 사건, 하나님의 맹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의 의미는 아브라함이 세월을 보낼수록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비록 이 사건 후에 바로 아브라함은 육체를 따라서 이스마엘을 낳게 되는 실패를 경험하지만, 이런 모든 사건들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맹세를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독자 이삭을 하나님게 바치게 되는 자리까지 가게 되는 것입니다.

7. 우리의 신앙의 근거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이다(갈 6:14).
어느 신학자는 이 언약체결 사건을 구약성경의 골고다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스스로를 율법 파기의 저주 아래 두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골고다 언덕의 그림자입니다. 실제로 언약을 범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주어진 은혜언약이 믿는 자들에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언약 파기에 대한 댓가를 지불함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눈 앞에서 쪼개진 짐승 사이로 지나가신 하나님께서는 그로부터 2000년 후에 인간의 육신을 입고 땅에 오셔서 그 언약 파기의 책임을 홀로 다 당하신 것입니다. 주님 자신이 아브라함이 쪼개서 피흘리고 죽게 한 그 짐승들과 같이 십자가에서 그 몸이 찢겨지고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아브라함 앞에서 하나님이 쪼개진 짐승 사이로 지나가신 일은 하나의 퍼포먼스(performance)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뿐 아니라 그 약속의 언약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들이 될 모든 사람들 가운데 아무도 하나님과의 언약 조항들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얻을 자가 없다는 사실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사실을 아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가 쪼갠 짐승 사이로 지나가심으로써 언약 파기의 저주 아래 홀로 들어가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갈보리 언덕 십자가에서 2000년 전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의 책임을 지시고, 죽어야 할 아브라함의 아들 대신에 당신의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율법의 저주 아래 두신 것입니다. 처음 아담이 범죄함으로 실패한 행위언약의 저주를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 담당하게 하심으로써 누구든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구원하시는 은혜를 무한히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이 이렇게 밖에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말입니다(갈 6:14). 아브라함의 신앙의 근거가 그가 보았던 하나님의 저주 맹세였듯이, 오늘 우리의 신앙의 유일한 근거는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봄으로써 독자를 번제로 바치는 믿음의 자리에까지 이른 아브라함과 함께 그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당신의 맹세와 성취라는 한없는 은혜로 이루어주신 성 삼위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