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Home > 설교말씀 > 언약과 구속 (6) - 노아와 맺으신 은혜언약

주제설교 - 언약과 구속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언약과 구속 (6) - 노아와 맺으신 은혜언약

창세기 8:20~9:1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9-09-20

말씀내용
<노아와 맺으신 은혜언약> 창 8:20~9:17



1. 하나님은 왜 인간과 언약을 맺으시는가?
반미시위가 가열되면서 한미동맹이 위험하다는 인식이 있던 2004년, 어느 보수우익 목사의 인터뷰 내용입니다. “한미동맹 관계 약화로 인해 한국사회가 겪을 혼란에 대해서 더 자세히 설명해 달라”고 기자가 묻자 그는 “우선 국민들 정신상태가 매우 불안해 질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동맹이라는 형식의 조약이 없다면 약소국은 강대국의 눈치만 살펴야 할 것이고, 약소국의 국민들은 늘 불안에 떨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비슷한 정황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을 편케 하시기 위해서 언약이라는 형태로 관계를 맺으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이는 순전히 자기 백성에게 불안이 아니라 평강을 주시려는 의도입니다. 하나님은 변덕스러우신 분이 아니시며 그러기에 자신을 언약이라는 형식 속에 구속하심으로써 언약 당사자인 인간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이것이 언약의 의도입니다.

2. 두 언약
저는 이미 하나님이 인간과 맺으시는 두 종류의 언약이 성경에 나와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율법언약이라고 일컬어지는 행위언약과 약속언약이라고 일컬어지는 은혜언약입니다. 전자는 인간 편에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고, 후자는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일방적으로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전자는 율법이고, 후자는 복음이라고 구분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행위언약은 하나님께서 에덴에서 첫 사람 아담과 맺으신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죽고 먹지 않으면 생명나무 실과를 먹고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그 내용이었습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범죄하였고, 이 행위언약은 그대로 실행되어 아담은 하나님과 단절되는 영적 죽음을 경험하였고 에덴에서 쫓겨났으며 결국 육신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한 그 자리에서 은혜언약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창세기 3:15에 있는 원시복음이라고 불리우는 내용입니다. 최초의 은혜언약입니다. 그 내용의 골자는 여인의 후손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뱀의 머리를 깨뜨릴 것이라고 함으로써 인간을 죄로 몰고 간 마귀를 멸하시고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맹세이고 약속입니다. 여기서 아담이 해야만 하는 의무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은혜언약이고, 복음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은혜언약은 약속에 기초한 언약입니다. 이런 언약을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아브라함과 그리고 다윗과 맺으셨습니다. 은혜언약은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마치 큰 나라의 왕이 작은 나라의 왕을 사랑하여 조건없는 선물을 베풀어주는 ‘왕의 하사’와 같은 ‘선물 언약’의 성격을 가집니다. 은혜언약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신자들 그리고 그 자녀들과 맺으시는 언약이고 공로 아닌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회개와 믿음입니다. 이 은혜언약은 성 삼위 하나님 사이에 영원 전에 맺으신 구속언약이 있었기 때문에 그 기초 위에서 주시는 약속입니다. 이 은혜로운 하나님의 약속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첫 아담이 실패한 행위언약을 완전히 지키심으로써 주어지는 것입니다. 은혜언약의 모든 근거는 그리스도의 순종과 죽으심에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말씀에서 보게 되는 노아와 맺으신 언약은 분명히 은혜언약이라고 불리우기는 하는데, 약간 독특한 점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3. 노아와 언약을 맺으신 정황
한 번 이 상황을 생각해보십시오. 노아는 1년 2개월 동안을 동물원같은 방주에서 지냈습니다. 물이 모든 생명을 다 휩쓸고 간 땅에 나온 노아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어떻게 우리가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노아의 마음은 아마도 두려움과 불안이 아니었을까요? 하나님의 심판의 무서움을 그처럼 경험한 사람은 인류 역사에 없었을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을까요? 막연함이 그를 사로잡지 않았겠습니까? 땅에 나왔지만, 그는 아무 인간도, 아무 짐승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남아있는 초목 조차 없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또 그는 이제 방주에서 풀려나오게 될 사나운 짐승들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분명히 첫 사람 아담에게 주셨던 동물들과 자연의 피조물들에 대한 우월한 능력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아가 제일 먼저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께 단을 쌓고 번제를 드리는 일이었습니다(8:20).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예배를 받으시고 노아에게 언약을 주십니다. 이 언약은 분명히 노아의 불안함과 두려움 그리고 모든 막연함을 평강으로 바꾸어주었을 것입니다(8:22; 9:2~3). 이제 자연계는 홍수의 심판과 같은 예외적이고 두려운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며, 일정한 자연의 법칙 속에서 돌아가게 될 것이며, 모든 동물은 사람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고 사람에게 동물을 먹을 수 있는 육식이 허락되었습니다. 이로써 사람은 동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근거를 얻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셨다”는 구절을 보게 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복을 주신 이후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표현입니다(9:1). 사실 여기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주신 은혜언약은 전적으로 노아의 희생제사에 근거하여 주어졌다는 것인데 이 희생제사는 바로 그리스도의 위대한 속죄희생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에게 주신 언약 자체는 이런 구속에 대한 약속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것이 놀랍고, 이것이 노아언약을 독특하게 만드는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언약을 주시는 상황을 보면 노아는 비록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고 그래서 의인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방주에서 나온 후, 죄를 짓게 됩니다. 그의 아들들과 후손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언약을 맺으실 때,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셨습니다(8:21). 그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 일로 전과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사람들은 죄를 지을 것이고 하나님은 그것을 아시는데 홍수로 다시는 심판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시면서 언약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홍수 심판으로는 인간의 죄성이 치료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언약을 신뢰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무지개를 언약의 증거로 주셨습니다.

4. 무지개: 하나님 자신을 위한 언약의 증거(sign)
이 무지개는 어떤 기능을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무지개에 대해서 가지는 오해가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주신 이유는 사람에게 무지개를 보고 물로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라고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주의깊게 보면, 이것이 사람이 보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보시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9:15). 무지개를 보고 언약을 기억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9:16).” 무지개를 보고 맹세를 지킬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무지개는 마치 하나님께서 언약을 잊어버리시기라도 할까봐 그것을 맹세로 주신 확실한 증거입니다. 사실, 사도 요한이 본 환상 가운데, 하나님의 보좌를 두른 무지개는 하나님께서 그만큼 신실하게 언약을 지키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하는 것입니다(계 4:3).

5. 노아언약의 특징: 일반은혜(Common grace)
하나님이 노아와 맺으신 언약에는 구속에 대한 내용이 담겨져 있지 않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이 언약은 일반은혜에 가장 가까운 언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은혜라는 것은 창조계 전체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8:9~10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누구와 언약을 맺으신다고 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육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노아언약은 노아 혹은 그의 자손들과만 세우신 언약이 아니라, 노아와 함께 배에서 나온 모든 생물들과 맺으신 언약이란 점에서 매우 독특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9:13).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자연의 법칙들을 말씀해주신 것을 보면 자연계 모두에게 미치는 언약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노아언약은 자연언약이라고 불리우기도 합니다. 이것은 다른 은혜언약들 가령, 아브라함 언약이나 다윗 언약과는 매우 다른 독특한 부분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이나 다윗 언약과 다 특별은혜에 대한 것입니다. 특별은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를 말합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노아언약이야말로 형식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된 은혜언약이지만, 일반은혜에 가까운 언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이나 메시야에 대한 약속이 없습니다. 노아언약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지요. 첫째는 자연법칙이 있습니다(8:22). 자연이 인간을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는다는 보증이 또 있습니다(9:11~16). 둘째는 악의 세력이 통제될 것입니다(9:5~6). 이것은 정부의 기능이 있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세째는 인간은 짐승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것입니다(9:2~4). 그 내용들이 모두 일반적인 질서에 관한 것들인 것입니다.

6. 일반은혜의 한계
잠깐 처음으로 돌아가서 아담의 이야기를 생각해보십시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인류는 더 이상 거룩하지 않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인류의 머리요, 대표로서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주어진 형벌은 모든 인류에게 미쳤습니다. 타락의 결과는 신자, 불신자를 막론하고 모든 인류에게 미친 것입니다. 인류가 아무리 하나님이 주신 문화명령을 열심히 수행한다고 해도 그것은 잃어버린 낙원으로 그들을 인도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직 현세적 복으로만 나아갈 뿐입니다. 이것이 일반은혜의 한계입니다. 인류가 영원한 안식과 완성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여인의 후손에 대한 약속을 믿는 것 뿐입니다(창 3:15). 이것은 특별은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입니다. 여기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오해가 있습니다. 바로 일반은혜와 특별은혜를 구분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생기는 오해들입니다. 그 오해 가운데 두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A. 종교적 근본주의: 신자는 항상 옳고 불신자는 항상 틀렸다.
첫째는 종교적 근본주의입니다. 보수적인 신자들일수록 이런 오해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이들이 믿는 것은 이렇습니다. “세상에는 신자와 불신자가 있고, 신자는 항상 옳고 착하고 불신자는 항상 그릇되고 범죄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태도는 그리스도인이 불신자인 배우자나 직장 안의 불신자를 대할 때 나타나기 쉽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니까 옳고 상대는 불신자이기 때문에 다 틀렸다고 보기 쉽습니다. 성경적으로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또 정치적 태도나 투표에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한국에서는 이런 예가 많았습니다. 장로와 불교신자가 대통령 후보가 되면 무조건 장로를 뽑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신자인지,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인지, 그리고 지혜와 능력이 있는 사람인지를 살피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만일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종교적 근본주의는 언제나 위험하고 지혜롭게 행동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일반 세계의 긍정적 측면들을 도무지 인정하지 않고 모두 싸워야 할 마귀의 세력으로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불신자들 가운데서도 지혜와 능력을 가진 자가 많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언제나 불신자 보다 공부를 잘하고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공부를 한만큼, 그리고 그 사람이 가진 지적 능력에 달린 문제이지, 여기에 신앙 때문에 나는 더 낫다고 말할 여지는 없는 것입니다.

B. 종교적 자유주의: 신자와 불신자의 구분이 불필요하고 무의미하다.
일반은혜와 특별은혜를 구분하는 일에 실패한 결과 일어나는 또 하나의 대조적인 오해가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적 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자와 불신자의 구분이 아예 불필요하고 무의미하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하나의 축복받은 공동체입니다. 이것은 노아언약 하나 만을 극단적으로 강조하고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이들은 세상의 미래에 대해서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견해를 가집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언약 공동체인 신자들과 불신자들의 구분을 무시합니다. 그리고 죄로 말미암은 일반적인 저주를 무시합니다. 그냥 노아로 말미암아 다시 시작한 재창조의 역사, 그리고 열심히 인간의 능력을 발휘하여 문화를 창조해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죄의 문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사역도 다 무의미합니다.

7. 교훈과 적용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A. 신자와 불신자 모두 일반적 저주 아래 있고 일반은혜 가운데 살고 있음을 알라.
먼저 우리 신자들이 알아야 할 것은 인류가 다 신자와 불신자를 막론하고 일반적 저주 아래 처해져 있고 일반은혜 가운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그 순간에 우리는 아담의 죄로 말미암은 일반적 저주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신자와 불신자 모두에게 해당하는 공통의 범주가 있습니다. 그것은 고통, 질병, 죽음과 같은 부정적인 것들과 세상 지혜와 창조적 능력과 같은 긍정적인 것들이 있고, 또 자연이 주는 비, 바람 그리고 해와 같은 천혜입니다. 신자는 고통과 질병과 죽음을 피해가는 것이 아니며, 신자에게만 세상 지혜와 능력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신자에게만 비, 바람, 태양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다 동일하게 주어집니다. 또 노아 시대 이래로 수많은 범죄가 자행되어 왔지만, 하나님께서는 노아 시대처럼 홍수로 멸하시지 않고 오늘까지 오게 하셨습니다.

B. 일반은혜만으로는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없다(히 11:7).
그렇다면, 우리가 신자되었다는 것, 하나님의 자녀 되었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물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가 노아를 하나님의 관점으로 평가하는 것을 보아야겠습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배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히 11:7).” 구약의 모든 다른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노아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그 약속은 오래 전 아담이 범죄한 후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었습니다.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깨뜨릴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살려두신 것은 바로 여인의 후손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며 섭리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전율했을 것입니다. 방주 밖의 모든 생명이 다 죽어넘어간 후에, 방주에서 나온 노아는 그 사실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노아는 오래 전 아담에게 주신 그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그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자기의 것으로 받는 상속자가 되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단지, 예수를 믿어서 병이 낫고, 부자가 되고, 세상 지혜가 더 많아지고, 승진하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일반은혜 가운데서 건강하고 부유하고 지혜롭고 직위가 높아져도 그것은 우리의 영혼의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영원한 천국을 기업으로 얻는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속의 드라마 속에서 이제 노아의 언약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장차 오게 될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신자를 존중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있을 수 있는 지혜와 덕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가 여러분의 가장 사랑하는 배우자이든, 자녀들이든, 부모님이든 말입니다. 비록 주님을 알지 못하지만, 그들이 다 틀리고 내가 다 옳다는 생각을 가지지도 말고, 보이지도 말아야 합니다. 둘째는 내가 신자라는 사실 때문에 정당하지 않은 요구와 기대를 가지고 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신자이기 때문에 남보다 더 유리한 조건에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도 모든 불신자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원칙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것은 ‘심은대로 거두는 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단지, 우리가 심는 것은 이 세상에서 거둘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사는 것이 신자입니다. 영원 속에서 거두게 될 것, 하나님께서 기억해주실 영원한 가치를 위하여 심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돈 그 자체를 위해서 살지 마십시오. 돈이 목적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세상에서의 성취와 성공 그 자체를 위해서 살지 마십시오. 그것들이 여러분의 인생의 목적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그 위에 있는 목적, 영원 속에서 거두게 될 목적을 생각하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신자로서 살아가는 방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