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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언약과 구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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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과 구속 (5) - 시내산 언약

출애굽기 24:1-1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9-09-13

말씀내용
<시내산 언약> 출 24:1~11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시내산 언약이라고 불리우는?을 맺으시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건져내시고 시내산에 오게 하셨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십계명을 주시고 기타 율례와 명령들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언약의 형태로 주어진 것입니다. 출애굽기 19:4~6을 보면,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이라는 조건이 나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복주실 것입니다. 이제 이 언약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로부터 다 듣고 한 목소리로 그렇게 하겠노라고 두번이나 말했습니다(3,7). 그리고 모세는 번제와 화목제를 하나님께 드려서 피를 취하여 절반은 단에 뿌리고, 절반은 백성에게 뿌리면서 이것은 ‘언약의 피’라고 말했습니다. 이 언약의 피는 언약을 비준하는 표시였고, 백성들을 하나님과 하나로 연결시켜주는 표시였습니다. 결과, 하나님은 당신의 모습을 모세와 아론, 아론의 아들들 그리고 이스라엘 70장로들에게 산에서 보이셨는데, 놀랍게도 그들이 죽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셨습니다. 언약의 피 때문에 그들은 죽지 않은 것입니다. 이 내용의 중심에 있는 것이 소위 시내산 언약입니다. 이후, 이스라엘이란 국가의 운명은 언제나 이 언약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에 의해서 결정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시내산 언약이 성경의 구속 역사 전체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1. 오해
먼저 사람들이 가지기 쉬운 오해를 다루려고 합니다. 구약 시대 사람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구원을 얻었습니까?

A. 구약 시대 사람들(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았다(옛 세대주의).
어떤 신학자들은 구약 시대 사람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았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을 옛 세대주의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복음을 심각하게 오해하게 만드는 우를 범한 것입니다. 구약 시대 사람들, 아니 아담 이래로 주님 재림 전의 마지막 구원얻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믿음 외에 다른 구원의 방도는 주어진 적이 없고 없을 것이라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B. 구원은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으로 이루어진다(synergism, 언약적 율법주의).
또 하나의 오해는 무엇인가 하면,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으로 이루어진다는 가르침입니다. 이것을 언약적 율법주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역시 일관되게 가르치는 것은 구원은 율법을 행하는 것 혹은 행위로서의 믿음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독단적인 행위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협력해서 작품을 만드는게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독자적이고 주권적인 행위라는 것입니다.

2. 시내산 언약의 특징: 시내산 언약은 아브라함 언약의 문자적 성취다.
왜 제가 이런 오해들을 다루는가 하면 오늘날 이 시내산 언약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세 율법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이렇게 잘못된 오해들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적으로 여러분이 구약성경을 읽으실 때,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됩니다. 이디오피아 내시처럼 가르쳐주는 이가 없으니 내가 어찌 이해하겠느냐는 식으로 성경을 읽는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시내산 언약은 일차적으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주신 언약에 대한 문자적인 성취라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뭐라고 약속하셨습니까? 창세기 12:1~3에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고 하셨고, 또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후손에게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창 15:7,16). 그러므로 하나님은 약속대로 애굽에서 그 백성을 건져내시고 가나안땅을 기업으로 주셨으며 거기에 나라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성취였습니다.

A. 모형적 언약: 종말적 낙원의 모형으로서 창조언약의 반복이다(호 6:7).
이 시내산 언약은 모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지상 천국을 가나안 땅에 세우려는 계획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의 모형입니다. 하나님이 장차 세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모델 하우스와 같은 것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종말적 낙원의 모형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시내산 언약은 하나님이 아담과 에덴에서 맺으신 창조언약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이 두 언약 사이에 유사점이 많은지 모릅니다.

아담의 창조언약의 조건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조건을 제시했듯이, 시내산 언약도 십계명 그리고 많은 율례와 명령들의 조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두 언약에서 요구되는 조건은 둘 다 순종입니다. 그 보상이나 형벌이 무엇입니까? 두 언약 모두 삶과 죽음이 각각 보상과 형벌의 내용으로 주어집니다(레 18:5). 아담이 창조언약을 어기고 에덴에서 추방되었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 언약인 율법을 어기고 멸망당하고 다 앗수르와 바벨론으로 추방되었습니다. 에덴 동산이 모든 부족함이 없는 곳이었다면, 성경은 가나안 땅에 대해서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에덴을 연상하게 합니다. 아담이 언약을 어긴 후에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낸다고 하였듯이, 이스라엘 민족이 율법언약인 시내산 언약을 범하고 추방을 당하자, 이스라엘 고토는 가시로 뒤덮였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모세를 통해서 맺어진 시내산 언약은 모두 그 자체로 지상 낙원 건설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모형을 하나의 신정체제를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B. 국가적/조건적 언약: 외적 순종에 따른 지상 나라 유지
뿐만 아니라 우리는 시내산 언약이 국가적 언약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시내산 언약은 이스라엘이라는 역사 속에 실존한 국가 그리고 그 민족과 하나님이 맺으신 언약입니다. 국가와 맺으신 언약이라는 말은 시내산 언약이 요구하는 순종은 외적 순종이며 이 외적 순종에 의해서 지상의 나라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이 언약의 범위는 국가적, 민족적이고, 언약의 목적은 이스라엘의 일시적인 사건들을 신적 통치 아래 통제하기 위함이었고, 이 언약의 결과는 결국 순종과 불순종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시내산 언약은 형식상 율법언약이고 행위언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국가를 잘 유지하는 것은 율법?시내산 언약?에 순종하는 것에 달린 문제입니다. 천국을 얻는 문제가 아니라 지상 국가를 유지하는 차원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행위언약은 아담언약 처럼 엄격하게 시행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선악과를 먹었을 때, 하나님은 가차없이 아담에게 벌을 주셨고 에덴에서 내쫓으셨습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었고 영적으로 이미 죽었으면 육체적으로 죽음을 경험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언약의 실행은 엄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내산 언약은 그렇게 엄격하게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시내산 언약 안에 이미 용서와 속죄의 규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레위기를 중심으로 나오는 제사규정들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왜 그런 규정들이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대로 순종할 수 없고 죄를 지을 것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런 규정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시내산 언약에 있어서 하나님의 용서와 속죄가 행해지는 근거는 시내산 언약의 자비로움이 아니라 아브라함 언약에 근거해서 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시내산 언약은 그 형식상으로는 행위언약이기 때문에 용서와 은혜와 자비가 설 형식적인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26:40~42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짓게 되고 형벌을 받게 될 때, 하나님은 야곱, 이삭,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심으로 그 땅에 다시 찾아오시고 회복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시내산 언약 자체에 있는 속죄의 규정은 근본적으로 아브라함 언약에 기초해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 언약은 다음에 살펴보겠지만, 은혜언약인 반면에 시내산 언약은 형식이 행위언약이기 때문입니다.

이 행위언약으로서의 시내산 언약이 요구하는 순종은 외적 순종이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약간은 질문을 가지고 이 부분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시내산 언약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외적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그 보상도 지상적이고, 일시적이며 외적인 것이었습니다. 즉, 자싱의 모형적 안식을 얻는 것이지, 이 순종을 통해서 영원한 안식을 얻는 것, 천국을 얻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가령, 십계명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는 명령에서 순종의 보상은 그 땅에서의 장수입니다(출 20:12). 영원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시내산 언약은 천상의 안식이 아니라 지상의 모형적 안식을 보상으로 약속하고 있습니다. 시내산 언약은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언제까지 말입니까? 더 좋은 언약이 올 때 이 시내산 언약은 더 좋은 언약으로 대치될 것이라는 말입니다(히 8:13). 그러므로 시내산 언약은 일시적, 혹은 잠정적 언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이스라엘 백성이 어디서 넘어진 것은 시내산 언약을 복음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넘어진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그들은 시내산 언약을 복음이라고 오해한 것입니다. 시내산 언약과 그 율법에 대한 그들의 착각과 무지가 그들을 넘어지게 한 것입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자기들만이 가지고 있는 이 율법을 외적으로 지키기만 하면 그것이 영원한 복을 주고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착각을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선조들이 오늘 본문에서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들은 이 언약이 더 좋은 언약이 올 때까지 잠정적 기능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넘어진 것입니다.

A. 오늘날 ‘형통 복음(prosperity gospel)’의 원조
저는 오늘날에도 이런 식으로 넘어지는 자들이 적지 않은 것을 봅니다. 소위 형통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서 유래한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넘어진 자리에서 그들도 넘어진 것입니다. 시내산 언약이 외적 순종을 요구하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외적 축복을 약속하는 점을 그들은 붙잡은 것입니다. 시내산 언약이 이스라엘 국가와 맺어진 언약이며 잠정적이어서 더 좋은 언약으로 대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 언약을 붙잡고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인 지상에서 누리는 형통의 복을 율법 순종으로 얻고자 하는 것이 바로 형통 복음의 출생입니다. 복음 시대에는 더 이상 이런 특성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붙잡습니다.

B. 율법을 지킬 수 있다는 착각과 자신감(출 24:3,7)이 복음과 은혜의 장애물이다.
율법을 지킬 수 있다는 착각과 자신감이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육신으로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바울 사도가 말했을 때, 바로 이런 태도를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다’는 생각처럼 복음과 은혜의 장애물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내가 해주겠다”라고 말하는 복음은 매력이 없을 뿐 아니라 불쾌하기까지 합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이렇게 해라”라고 요구하는 율법이 매력이 있는 것입니다. 뭔가 할 일을 주니까, 신이 나는 것입니다. 정작 그들에게는 그것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수준으로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여러분, 복음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고 수고한 것들을 가지고 그 토대 위에서 여러분을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율법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 하나로, 여러분이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악하고 연약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으로 변함없는 사랑으로 여러분을 바라보시고 대하신다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자신감이 문제입니다.

4. 시내산 언약 속에 숨겨진 진리
그러면 시내산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고자 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메시지가 이 시내산 언약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입니까? 몇 가지 시내산 언약 속에 숨겨진 진리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사실은 숨겨졌다기 보다는 담겨졌다고 하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율법의 원리는 지상의 땅을 유지하는 것이 기초입니다. 그러나 약속의 원리는 천상의 땅에 들어가 영생을 누리는 것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시내산 언약은 그 형식에 있어 행위언약으로서 율법의 원리를 대표합니다.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 백성 중에도 중생한 자들은 시내산 언약 안에서 내적이고 영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것을 보고 알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지자들이 지적했던 바, 마음에 할례를 받으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진실한 신자들은 시내산 언약 아래서도 아브라함에게 주신 은혜 언약을 믿었고 성령의 능력으로 영적 순종을 나타낼 때, 구원과 영적 축복이 주어짐을 알았습니다. 은혜언약은 구원의 길을 약속하지만, 시내산 언약은 국가적 순종에 기초한 가나안에서의 국가적 보존의 길을 약속한다는 차이를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은혜언약은 하나님과 진실한 신자들 사이에 개인적으로 맺어졌고, 거룩한 마음과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영적인 순종을 나타낼 때 그들에게 영적인 축복들을 보장하고 확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도 시내산 언약 아래서 약속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말입니다. 또한 그들은 시내산 언약을 순종함으로써 지상 나라의 복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그는 하나님이 주시는 일시적이고 지상적인 나라에는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브라함의 씨인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에는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 곧 그의 멸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어 영원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갔습니다.

5. 교훈과 적용: 땅의 약속(율법)과 영원한 안식(복음)을 구별하라. 우리는 약속-복음을 필요로 한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땅의 약속을 보장하는 시내산 언약을 영원한 생명과 안식을 약속하는 복음과 구별해야 합니다. 시내산 언약은 일시적이고 과도기적인 질서로서 구속 역사에 있어서 막간과 같이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이럼으로써 시내산 언약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결코 하나님과 인간이 각각의 의무를 다함으로써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시내산 언약은 쌍무적 계약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를 결코 구원하지 못합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인 맹세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오직, “내가 이루리라”라고만 말씀하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약속을 기억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을 아브라함과 다윗에게서 나게 하셨습니다. 그분이 지키겠다고 두 번이나 단언했지만, 실패한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시내산 언약의 모든 율례와 명령을 다 완전하게 지켜행하셨습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지상에 구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상에 구현되는 것은 모형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안식과 구원이 우리의 행위에 속하는 순종을 통해서라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없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이 잠정적인 시내산 언약의 율법 규정들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후손인 그리스도, 율법의 마침이 되신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연약하여 할 수 없는 율법을 다 지키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신구약 시대를 통틀어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구원은 저와 여러분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만이 우리의 구원의 근거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 때문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구원을 사람의 행위에 두지 않으시고 믿는 모든 자에게 주시는 은혜를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모세, 다윗 그리고 바울과 같이,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