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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언약과 구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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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과 구속 - (1). 두 언약

갈라디아서 3:15-25, 4:21-2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9-08-16

말씀내용
1. 왜 <언약과 구속> 설교 시리즈를 구상했는가?
먼저 요한복음 강해를 하다가 왜 갑자기 <언약과 구속>이라는 주제로 새로운 시리즈 설교를 하게 되었는가를 설명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일차적 대답은 금요예배에서 창세기를 강해하는데, 이 언약이라는 주제가 너무나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금요예배에서 다룰 수도 있었지만, 이 주제가 너무나 중요한 주제이다 보니 우리 교회 교인 모두가 들으시면 좋겠다 하는 생각에서 요한복음 6장을 마친 후, 잠시 멈추고 이 시리즈를 하게 되었습니다. 본래 시리즈 제목은 <언약>이라고만 하려고 했는데, 너무 싱거운 것 같아서, 그 언약이 우리의 구속을 위한 언약이기에 구속이라는 말을 붙여넣은 것입니다. 언약이라는 주제는 성경을 보는 렌즈, 구원을 이해하는 틀이라고 하겠습니다.

A. 기독교를 오염시키고 교회를 약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늘날 기독교를 오염시키고 교회를 약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무엇이냐고 하면 여러 가지를 지시할 수 있겠지만, 그 한 가지가 바로 율법과 복음의 구별을 무시하거나, 거기에 무지한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마찬가지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를 약화시켰던 문제가 바로 율법과 복음의 구별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복음이 율법과 섞이면 교회는 불교나 이슬람과 차이를 가질 수 없습니다. 기독교를 기독교되게 하는 것은 바로 율법과 구별되는 복음입니다. 이 차이를 잘 드러내기 위해서 언약이라는 주제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것은 여러분 개인의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과 구별되는 복음의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깨닫고 살면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구분이 명확지 않게 되면 우리는 육신의 힘으로 주님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설교 시리즈를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복음과 율법의 구분이 더욱 명확해지고, 복음의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길이를 앎으로써 하나님의 영광 앞에 엎드리고 그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여 섬기는 역사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B.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일관된 뜻을 발견하는 구조를 세우기 위해서
언약이라는 주제가 성경을 보는 렌즈, 구원을 이해하는 틀이라고 말씀드린 것은, 이 언약이라는 주제를 통해서 우리가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일관된 뜻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언약의 틀을 통해서 성경을 읽으시게 되면 여러분은 그 모든 성경에서 복음의 깊이를 발견하시게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언약은 복음의 문을 여는 열쇠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시리즈 설교를 통해서 이런 유익을 얻으실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이런 이유에서 이 시리즈설교를 구상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이 주제를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쉽고 명확하게 저 자신이 말씀을 이해하고 전달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이 이 메시지를 통해서 이제껏 신앙생활하면서 걸려있는, 뭔가 해결되지 않은 듯한, 그런 부분들이 말끔하게 정리되시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기대가 있습니다. 그런 은혜를 구하며 또 기대하십시다.

2. 언약은 성경의 중심 주제가 아니라 그것들을 이해하는 틀이다.
말씀드렸지만, 사실 언약이란 주제는 성경의 중심 주제라기 보다는 중심주제들을 이해하는 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중보적 사역,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과 세상의 관계, 인간,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구원과 교회, 세례와 성찬 등 성경의 주요한 주제들을 우리는 이 언약이라는 틀 속에서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과 이 주제들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지고 있는 한계는 다름아닌 언약에 대한 무지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3. 성경 전반에 나타나는 언약의 형식과 구조: 고대 근동의 2가지 조약 형태
이 주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구약성경이 처음 쓰여지던 당시 고대 근동의 국제법을 약간 아실 필요가 있습니다. 두 가지를 설명드릴 수 있는데, 하나는 종주권 조약이라고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왕의 하사라는 것입니다.

A. 종주권 조약(Suzerain-Vassal Treaty)
종주권 조약은 종주-봉신 조약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종주는 황제와 같은 강대국 왕이라면, 봉신은 오늘날 속국이라고 불릴 수 있는 작은 나라의 왕입니다. 쉽게는 중세 유럽의 봉건체제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영주와 백성들이 맺는 조약은 영주가 백성들을 보호하는 대신 백성들은 영주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순종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점에서 종주와 봉신의 관계는 평등한 것은 아닙니다. 구약성경이 처음 쓰여지던 당시 힛타이트 제국의 조약문서들을 보면 이런 국제조약이 많이 발견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조약의 형식들이 성경의 형식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것을 성경학자들이 밝혀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으시는 관계를 설명하는데, 이것이 인간들이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사례였기 때문입니다. 이 조약의 형식은 처음에 조약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를 소개하는 전문(Preamble)이 나오고 이어 역사적 서문이 나오는데, 종주가 봉신을 보호해준 어떤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것입니다. 십계명도 이런 형식입니다. 출 20장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는 전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너를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는 것은 역사적 서문에 해당됩니다. 그 다음에 무엇이 나오겠습니까? 언약의 조항들입니다. 이것은 ‘하라’ 또는 ‘하지 말라’는 것들입니다. 그것이 일계명에서 십계명까지의 조항들입니다. 이어 상벌규정이 나옵니다. 순종하면 상을 주고 범하면 벌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 조항들은 대개 봉신에게 해당되는 것이지, 종주에게는 이런 의무조항들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 이어 수많은 율법의 규정들을 더하셨고 모세가 24장에서 언약서를 다 낭독하자 백성들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약속했습니다(출 24:7). 백성들은 언약에 동의했습니다. 이어지는 8절에서 모세는 짐승의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리면서 이것은 ‘언약의 피’라고 했습니다. 즉, 이 언약을 어기게 되면 백성들은 피를 흘리고 죽은 짐승처럼 쪼개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벌입니다. 그러나 보다 구체적으로는 신명기 28장이 그 상벌규정을 잘 보여줍니다. 순종하면 복입니다. 그러나 불순종하면 저주인 것입니다. 불순종하게 되면 종주는 봉신에게 그 비참한 댓가를 보여줄 것입니다. 이 언약이 맺어지면 이제 언약의 당사자들은 각각 언약의 사본을 만들게 되고 그것을 자기들의 신전에 보관을 하고, 그것을 정기적으로 낭독하게 됩니다. 이것이 십계명 두 돌판을 성막의 언약궤 안에 보관하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은 언약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고대의 종주권 조약이 맺어지려면 아직 한 가지 의식이 더 필요합니다. 그것은 현대식으로 말하면 싸인을 하는 조인식입니다. 당시에는 짐승을 반으로 쪼개서 그 사이로 언약 당사자가 지나가게 되는데, 봉신은 종주를 따라서 지나갑니다. 이것은 언약을 깬다면 이 짐승처럼 쪼개질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 쪼개지는 대상은 언제나 봉신이지 종주가 아닙니다. 그래서 종주는 결코 맹세를 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그 쪼갠 짐승 사이로 지나는 것은 봉신이라는 것입니다. 말이 조약이지, 사실 종주가 봉신에게 주는 명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언약 맺음을 기념하여 언약 당사자들이 식사를 하게 되면 모든 언약식이 마쳐지게 됩니다.

B. 왕의 하사(a treaty granted by a greater to a lesser power)
종주권 조약 외에 우리가 한 가지 더 살펴보아야 하는 고대근동의 조약형태가 있는데, 그것은 왕의 하사라는 것입니다. 종주권 조약이 조건적인 조약이고 봉신이 조건을 그대로 잘 수행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면, 왕의 하사는 종주 편에서의 무조건적인 약속이라고 할 수 있고 일방적입니다. 여기에는 봉신이 어떻게 해야한다는 조건이 없습니다. 그냥 자비로운 왕(종주)이 봉신에게 어떻게 해주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무조건적인 것이고, 이것은 그저 왕의 자비를 드러내는 행위인 셈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두 가지 형식을 골자로 하는 하나님과 백성이 맺은 언약의 형태들이 소개됩니다. 이 두 가지 언약의 형태는 결코 같은 것이 아닙니다. 분명하게 구별됩니다.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성경을 보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일관성있는 뜻을 볼 수 없고, 복음과 율법을 구별하는데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읽은 갈라디아서의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말씀한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살펴볼 수 있는 준비가 된 것 같습니다. 제가 과거에 이 본문을 상세하게 강해했었기 때문에 다시 그것을 설명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의 바램은 그 때 갈라디아서 강해를 듣지 못하신 분들은 물론이고, 들으신 분들도 이 본문에 대한 두 편의 설교를 다시 들으실 수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강해 7번과 10번 입니다.

4. 두 언약(갈 4:21~26; 3:15~25)
갈라디아서 4:24에서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고 했습니다. 매우 흥미롭고 특이한 비유를 지금 바울 사도는 하고 있습니다. 22~23절이 그 비유입니다. 아브라함의 두 아들 중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낳았고,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나은 아들입니다. 물론 계집종에게서 나은 아들이 이스마엘이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나은 아들이 이삭입니다. 계집종에게서 나은 것은 육체를 따라 낳은 것이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아 낳은 것입니다. 육체를 따라 낳았다함은 인간의 행위를 말한다면, 약속은 인간의 믿음을 가리킵니다.즉, 이스마엘은 행위로 얻은 아들이고, 이삭은 믿음으로 얻은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또 이 두 여인, 하갈과 사라가 각각 의미하는 바를 바울 사도는 두 언약이라고 했습니다. 이어서 하갈은 시내산,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에서 종을 낳은 것인데, 이 시내산이 가리키는 바는 곧 지금의 예루살렘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으로 들릴만한 말입니다.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은 유대인들이 볼 때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하지만, 결코 선택받은 백성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지금 그 하갈과 이스마엘을 모세가 율법을 받은 시내산에 연결시키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거하는 거룩한 땅의 중심인 예루살렘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5절에서 그 자녀들이라면 결국 당시 유대인 전부를 가리키는 말인데, 그들은 다 종노릇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자유하는 여인인 사라는 우리의 어머니라고 불리우면서 이는 곧 천상의 예루살렘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사라는 바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어머니이며, 이것은 지상에 있는 그림자로서의 예루살렘이 아니라 곧 천상에 이루어지는 완성된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는 지금 모세의 율법과 복음을 구분하고 있는 것입니다. 3장의 본문으로 가보십시오. 여기 약속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이 문맥에서 약속이 가리키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하신 약속입니다. 그것을 보통 아브라함 언약이라고 합니다. 무엇인가하면 창세기 12:1~3의 내용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실 것이고,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통하여 땅의 모든 족속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 약속을 하시고 430년이 지나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뒤에 생긴 율법이 앞서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취소할 수 없다는 것이 본문의 논지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것을 사람의 유언에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15절입니다. 여기 사람의 언약이라고 할 때 언약을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는 diatheke 인데, 이것은 보통 유언이라는 말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인간의 유언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당시 로마법에서는 유언을 한 사람이 죽기 전이면 언제라도 유언을 개정할 수 있었지만, 헬라법에서는 본인이라 할지라도 수정변경이 불가능했습니다. 유대법도 헬라법과 비슷해서 유언을 쓰고 mattenat bari라는 행정절차를 거치게 되면 수정이나 변경이 불가능했습니다. 인간의 유언도 그럴진대, 어찌 하나님께서 친히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이 430년 후에 생긴 율법으로 변경되겠는가하는 말입니다. 여기 대조되는 두 개념이 바로 약속과 율법입니다. 그것을 바울 사도는 4장으로 넘어가서 다시 하갈과 사라, 이스마엘과 이삭, 지상의 예루살렘과 천상의 예루살렘, 아라비아 시내산과 시온산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도록 아웃라인에 도표로 그려드렸습니다.

약속언약(Promise-covenant) 율법언약(Law-covenant)
아브라함 모세
무조건적 조건적
은혜언약(Covenant of Grace) 행위언약(Covenant of Works)
복음 율법
사라 하갈
새언약 옛언약
천상의 예루살렘 지상의 예루살렘
시온산(히 12:22~24) 시내산(출 24)

하나님께서 사람과 맺으신 언약은 대개 두 가지로 분류됩니다. 즉, 두 언약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서 3장과 4장에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구체적으로 두 개의 언약, 즉 모세의 시내산 언약과 아브라함 언약을 말합니다. 성경에 여러 언약들이 나오지만, 이 두 가지 언약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기 때문에 바울 사도가 그것들을 가지고 비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의 시내산 언약은 율법이고, 아브라함 언약은 약속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각각 약속 언약과 율법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앞에서 제가 고대근동의 두 가지 조약형태를 설명드린 것을 대입하면, 약속 언약은 종주가 무조건적으로 선물을 주겠다고 약속하는 왕의 하사에 해당하고, 율법 언약은 종주가 봉신에게 부과하는 명령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언약 형태는 이 두 가지 중 하나에 속한다고 보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과 율법의 구별입니다. 약속 언약이 복음이라면 율법 언약은 율법입니다. 율법은 “이것을 행하라. 그러면 살 것이다”라고 말하지만, 복음은 하나님께서 “내가 하겠다”고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맹세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과 같이 구약은 율법이고 신약은 복음이다라고 이해하면 그것처럼 잘못 이해하는 것이 없습니다. 초대교회 때에 그렇게 가르치던 말시온 이란 사람은 이단으로 정죄되고 말았습니다. 구약에도 율법과 복음이 있고, 신약에도 마찬가지로 율법과 복음이 있습니다. 율법은 완전한 순종을 조건으로 생명을 약속하지만, 복음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과 그것을 믿는 믿음을 조건으로 생명을 약속합니다. 율법은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고 복음은 하나님이 해주시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도 ‘해라’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율법인데, 나중에 자세히 살펴볼 것입니다.

약속 언약과 율법 언약, 복음과 율법 이 두 가지 언약은 각각 은혜언약과 행위언약이라고 불리우기도 합니다. 은혜언약은 무조건적이지만, 행위언약은 조건적입니다. 가나안 땅에 세워진 지상의 예루살렘은 율법 언약에 순종하는 한, 유지될 수 있는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을 어겼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앗수르와 바벨론의 손으로 심판하셔서 그 땅을 자기 백성으로부터 빼앗으셨습니다. 비록 지상의 나라는 빼앗겼을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아브라함 언약이 폐기된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아브라함 언약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씨인 메시야를 통해서 이루어주실 하나님의 나라, 천상의 예루살렘을 바라고 믿은 자들은 다 거듭난 하나님 나라, 천상의 예루살렘의 백성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왕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방자하게 행함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들을 보내서 심판의 메시지를 주시지만, 희망의 메시지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 희망의 메시지는 한 번도 “내가 모세와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을 기억하여”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한다”거나 “다윗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여”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 언약과 다윗 언약은 모두 율법 언약이 아니라 약속 언약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거기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순종해야 한다는 조건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해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두 가지 언약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이 두 언약으로 구성됩니다. 복음 아니면 율법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중요한 언약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언약들을 하나씩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언약의 형태들이 주님이 오셨을 때에는 주님께서 새언약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과거의 모든 언약들을 성취해주시게 됩니다. 비록 제가 새언약과 옛언약도 이 범주에 넣기는 했지만, 많은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고 나중에 별도로 살펴볼 것입니다.

5. 성경에서 발견되는 중요한 언약들
아주 간단하게라도 성경의 중요한 언약들을 이 두 언약의 관점에서 일별해보려고 합니다.

A. 아담
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으신 언약은 타락하기 전과 타락한 후의 언약,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i. 타락 전: “너는 먹지 말라”(창 2:17).
처음에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시고 나서 아담에게 하신 말씀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것이었고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최초로 맺으신 행위언약, 즉 형식상으로는 율법 언약입니다.

ii. 타락 후: “내가 여인의 씨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겠다”(창 3:15).
그러나 범죄하고 타락하자마자 하나님께서는 뱀을 저주하시며 말씀하실 때,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최초로 전해진 복음입니다. 여기는 아담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명령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이렇게 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언약이고 약속 언약에 속합니다.

B. 노아(창 9:9~17): “내가 다시는 홍수로 멸하지 않겠다”.
하나님께서 홍수로 심판하신 후에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자 노아와 그 후손 그리고 모든 생물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내용은 “내가 다시는 홍수로 멸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형식상으로는 약속 언약에 속하는 것입니다. ‘해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C. 아브라함(창 12:1~3): “내가 너와 네 후손을 통하여 땅의 모든 족속에게 복을 주겠다.”
아브라함 언약은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가장 대표적인 약속 언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D. 모세/시내산 언약(출 24:3,7~8; 19:5):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켜라.”
하나님께서 모세와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심으로써 이스라엘이라는 신정국가가 지상에 세워졌습니다. 이 나라는 철저하게 율법에 대한 순종으로 유지되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이 언약에서 하나님은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이라는 조건을 제시하십니다. 이것은 내용으로나 형식상 대표적인 율법 언약입니다.

E. 다윗(삼하 7:14~16): “내가 네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겠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영원한 왕위를 약속하셨습니다. 비록 다윗의 후손인 왕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율법 언약을 지키지 않을 것을 아시지만, 하나님은 다윗의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역시 약속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윗의 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셨습니다.

F. 새언약(렘 31:31~34; 32:38~41; 겔 37:25~27; 눅 22:20; 고전 11:24~25)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포도주를 주실 때,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새 언약은 이미 구약의 선지자 예레미야와 에스겔이 예언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돌비에 써주시는 언약이 아니라, 백성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법을 써주셔서 그들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주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들의 모든 죄를 사해주시고 기억도 하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들을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정결하게 해주시고, 마음에 성령을 주심으로써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겠다고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예언을 죽으심으로써, 보배로운 피를 흘림으로써 성취하셨습니다. 새 언약은 철저하게 주님이 행하시고 이루신 약속 언약입니다.

6. 헷세드: 하나님께서 이루신다!
말씀을 맺습니다. 헷세드라는 말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창조주께서 인간과 언약을 맺으신다고 하는 것 자체가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한 낮아지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을 인정하신다고 하는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와 인정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굳이 인간과 언약을 맺으셔야 할 아무런 의무도 없으시지만, 언약을 맺으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헷세드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주신 최초의 행위 언약을 지키는 일에 아담이 실패하자마자, 곧 은혜언약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실패한 자리에서 하나님이 대신 시작하시고 끝까지 이루시겠다고 약속해주신 것입니다. 성경은 온통 하나님의 헷세드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우리의 삶도 하나님의 헷세드 안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성공과 실패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헷세드로 우리를 이끌고 가시고 천성문까지 들어가게 하실 것이기에 우리는 마음에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율법 언약에 실패할 것을 아시기에, 하나님은 약속 언약을 우리에게 주시고, 친히 맹세하셔서 그 언약을 이루시는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은혜로운 사실을 알았기에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 3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