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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언약과 구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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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과 구속 (4) - 아담과 맺으신 창조언약

창세기 2:16-1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9-09-06

말씀내용
<아담과 맺으신 창조언약> 창 2:16~17


우리가 오늘 상고할 말씀은 하나님께서 범죄하기 전의 아담과 어떤 관계를 맺으셨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이 됩니다. 이 문제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처음에 아담과 맺으신 관계는 결국 인류의 머리가 되는 아담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 모든 인류와 맺은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이고,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또한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누구인지를 밝혀주고, 미래에 우리의 영원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1. 하나님께서 아담과 가지셨던 최초의 관계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은 아담을 사랑하셨고, 그에게 모든 환경을 주셨으며, 최상의 조건을 허락하셨고, 이럼으로써 당신의 사랑에서 나오는 기쁨을 만끽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관계는 그저 막연하고 무책임하며 무조건적인 그런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마치 갓난 아이와 엄마가 커뮤니케이션하는 것 같은 일방적인 관계를 하나님께서 맺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아담을 성인으로 창조하여 하나님께 책임있게 존재로 반응하게 하신 이유일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과 언약이라는 조건 속에서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모든 부모들이 자식들이 자라감에 따라서 그렇게 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관계를 아직은 은혜와 자비의 관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은혜와 자비는 오직 율법을 어긴 자, 형벌을 받아야 하는 자에게만 주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아담은 범죄하지 않은 상태였고, 받을 형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처음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으셨던 관계는 율법과 사랑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전제에서 아담에게 반응할 수 있는 조건인 율법을 주셨고, 여기에 바르게 반응함으로써 아담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말씀하신 바, “내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는 표현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요 14:21). 우리가 첫 사람 아담을 생각할 때, 우리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잘못을 범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는 본성이 우리와 전혀 달랐던 사람입니다.

2. 하나님이 아담과 처음에 맺으신 창조언약은 행위언약이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처음에 맺으신 언약을 신학자들이 행위언약이라고 부릅니다. 다른 말로는 창조언약이라고도 하고, 율법언약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은혜언약도 아니고 약속언약도 아닙니다. 언약이라는 단어는 분명히 쓰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다는 내용이 나옵니까? 오늘 읽은 본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언약이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양편의 언약 당사자가 동등하게 맺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언약은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과 그 피조물인 인간이 맺는 언약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 세상에서도 종주권언약에서는 종주(큰 왕)가 봉신(작은 왕)에게 선포하는 것이 곧 언약이 되고, 그 언약의 준수사항을 지키는 것은 봉신의 몫이 되는 것이라면,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은 더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것이 바로 언약입니다. 이것이 2:16에 나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라는 말씀은 언약맺음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무엇인가 하면 동산의 각종 나무의 실과는 모두 마음대로 먹을 수 있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의 조건입니다. 아담은 이 언약의 조건을 순종함으로써 상을 얻을 수 있고, 불순종하여 깸으로써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벌의 내용이 이어서 나옵니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것입니다. 사실 본문에 감추어진듯 드러나는 것이 있는데 보상의 내용입니다. 그것은 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함께 있던 생명나무의 존재를 통해서 예시되었습니다(2:9). 이것은 단순히 지상의 생명이 연장된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완전히 의로운 상태로 확정되고, 영원한 천상의 기쁨을 누리며,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에 거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나오는 새예루살렘의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생명나무는 하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충성과 순종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이 과분한 보상은 아담에게 주어질 영생과 완전한 행복의 상징적 보증이었습니다. 아담은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볼 때마다 그 옆에 세워진 생명나무를 보면서 선하신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믿음을 더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3. 아담을 넘어뜨리기 위한 함정이었는가?
하나님을 잘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들어두셔서 아담이 죄를 짓고 타락하게 했느냐고 도리어 하나님께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경우를 봅니다. 선악과는 고약하신 하나님께서 아담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고안하신 함정이었습니까? 이런 식으로 성경을 보는 것이야말로 성경을 잘못 읽을 수 있는 최악의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그 말에 대한 증거를 성경 전체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다시 설명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통해서 언약을 주신 것은 아담과 책임있는 관계를 맺으심으로써 아담에게는 기쁨을 더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얻으시고자 하시는 의도였습니다. 언약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걷어버리십시오. 하나님은 막연하고 미지의 신으로서 그저 기분을 맞추어주는 인간에게 화대신 복을 내리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창조하신 인간과 언약으로 관계를 맺으심으로써 인격적이고 책임있는 관계를 맺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을 통해서 당신의 선하심을 우리에게 드러내시기를 좋아하십니다. 이것이 언약을 주신 이유입니다. 넘어뜨리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범죄하기 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담의 상태가 어떤 상태였는가를 이해함으로써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4. 아담은 시험 아래 있는 상태였지만, 순종하도록 창조되었기에 흠이 없는 존재였다.
아담은 지금 우리와는 아주 다른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는 죄를 알지 못했습니다. 죄를 지은 적이 없었습니다. 마치 주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셨으며”(고후 5:21), “시험은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셨다”(히 4:15)는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죄를 지은 후의 아담, 그리고 아담의 아들로 태어난 가인 이후의 모든 인류는 다 죄를 지은 본성을 가지고, 타락한 상태로, 죄를 지은 조상 아래서 태어났습니다. 즉 아담의 범죄 이래로 모든 인류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납니다. 그러나 아담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죄성 즉 타락한 본성이 없이 창조되었습니다. 죄된 조상도 없었습니다. 그는 죄와 그 결과인 비참함에서 완전하게 자유로운 상태였습니다. 부패가 없고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취약함이나 부족함이라고는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지혜와 거룩을 지녔고 부족함이 없는 최상의 환경에 있었습니다. 그는 미숙한 어린 아이로 창조된 것이 아니고 온전한 의를 성취할 수 있는 책임있는 성인으로 창조되었습니다. 또한 정직하게 창조되었습니다(전 7:29). 그는 한 마디로 흠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어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도 있었지만, 불순종하는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단지 그가 있었던 상태는 시험을 치루고 있는 상태였으며 그러므로 그의 합격 여부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의롭다고 확정되지는 않은 상태였다고 말합니다.

만일,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셨던 것과 같은 행위언약을 주신다면 우리 중 아무도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수행이 불가능한 언약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완벽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아담에게 이 행위언약이 주어졌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는 지킬 수 있었고, 하나님은 지킬 수 있는 언약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이 행위언약을 깨뜨린 것은 전적으로 아담의 잘못이지, 그 언약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5. 왜 하나님께서 아담의 범죄를 허락하셨는가?
그렇다면 이런 질문도 가능할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담이 범죄하려는 순간, 막지 않으셨는가? 왜 비극을 허락하셨는가? 물론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실 때에도 우리가 잘못할 기회를 강제로 앗아가시는 방식으로 하시지 않으십니다. 온전한 자유의지를 가졌던 아담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수 있는 더 깊은 부분은 하나님께서 이미 영원 전에 맺어진 구속언약 속에서 둘째 아담의 더 영광스러운 순종의 길을, 구속의 계획을 마련해 놓으셨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원에서 영원에 이르는 계획을 이루어가시는데, 전능한 능력을 사용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미 계획하셨고 이루실 능력이 있으시기에 그 불순종의 범죄를 하락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선하심의 영광을 가장 놀라운 방식으로?어떤 인간도 계획하거나 생각할 수 없는 방식으로?이루어 가십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 삶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잘못 행할 때 하나님은 아예 죄를 짓거나 잘못 행할 수 없도록 강제로 우리 삶과 의지에 개입하셔서 우리를 막으시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그 결과로서 비참함과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나를 막지 않으셨는지 원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실수와 잘못을 하도록 허용하심으로써 그 일과 결과를 통해서 배우게 하십니다. 이것이 어쩌면 대다수의 부모가 자식을 기를 때 가지는 태도와 다른 점이 아닐까요? 왜 하나님은 그렇게 허용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신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 따위로 당신의 계획을 근본적으로 수정하셔야 할만큼 무능한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를 돌이키실 능력과 우리를 회복하실 능력 뿐 아니라, 우리의 잘못 조차도 하나님의 선으로 바꾸어내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기에 그렇게 허용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이 사실을 알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얼마나 놀라운 평안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실수를 수없이 저지른다고 해도,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이것이 한 사람의 삶에서가 아니라, 인류의 역사 전체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을 하나님은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6. 인간의 양심 속에 새겨진 행위언약의 증거(롬 2:15).
다시 핵심으로 돌아갑니다. 첫 사람 아담은 순종할 능력이 있었지만, 불순종했습니다. 실패했습니다. 그의 실패는 모든 인류의 실패였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의 양심 속에는 첫 사람이 그 조물주와 맺었던 행위언약의 증거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2:15에서 바울 사도가 말씀한 “마음에 새겨진 율법의 행위”가 의미하는 것입니다. 본성상 모든 인간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불쾌하게 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존재로서의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힘으로 자기의 수치를 가려야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종교이고, 도덕이며, 교양이고, 지식입니다. 그것을 양심이 증거합니다. 또 전도서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했습니다(전 3:11). 본래 첫 사람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에게 새겨진 것입니다. 영생에 대한 채워지지 않은 갈망이 있는 것입니다. 예외없이 모든 인간에게 말입니다.

7.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
여기에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 안에 심겨진 것에는 복음과 은혜, 자비에 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공의, 형평, 공평, 정의, 법의 개념들만이 소위 ‘행위언약’을 통하여 심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 증거를 대볼까요? 주님께서 말씀하신 포도원 품군의 비유를 생각해보십시오. 아침 일찍 포도원에 일하러 들어왔던 사람들은 나중에 들어와서 조금 밖에는 일하지 않은 일군들이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한 데나리온 씩을 받자, 자기들이 저들보다 더 많이 일했으니까, 비록 약속된 것은 한 데나리온이지만 분명히 저들보다 더 많이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생각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조금 일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한 데나리온을 주자, 그들은 불평을 하며 주인이 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가진 공평의 잣대로 잿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인의 은혜의 개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본성 안에 새겨진 것은 공평과 정의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자비와 은혜의 개념이 인간의 본성에 있었고 그들이 그것으로 주인을 잿다면 주인의 자비와 은혜에 감탄하고 그 주인을 오히려 칭송했을 것입니다. 복음 곧 자비와 은혜의 개념은 인간의 본성 안에 새겨져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밖에서 선포되어서 알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죄를 범하고 타락했을지라도 정부를 운영하고 법과 질서를 기본적으로 지켜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개념은 온전한 의미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들려져야 하고, 전달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최초의 아담에게 그가 범죄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주신 행위언약만이 인간의 본성 안에 심겨진 원리입니다.

8. 나쁜 소식
A. 행위언약은 성경 전체에서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고 지켜질 때까지 유효한 기준이다(마 5:20).
문제는 행위언약이 아담과 하와가 벌을 받고 나서 폐기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아담과 맺은 행위언약은 여전히 유효하고 성경 역사 전체를 통해서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으며 심지어 적어도 그 언약이 완전하게 지켜질 때까지는 유효한 것으로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씀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마 5:20)? “아무리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철저하게 율법을 행한다고 하더라도 율법이 요구하는 완전한 의를 성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그들의 의를 능가하는 율법의 의를 이루지 못하면 천국에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나쁜 소식입니다.

B. 최후 심판은 행위에 따른 심판이다(고후 5:10; 마 7:16~27; 행 17:31; 유 15; 계 20:13; 22:11~15).
나쁜 소식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인류는 다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날의 심판의 기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철저하게 행위에 따른 심판이 될 것이라고 성경은 여러 곳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고린도후서 5:10을 보십시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심판은 선악간의 행위에 의해서 베풀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자리에 설 준비가 되어있으십니까? 과연 이런 심판이라면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은 나쁜 소식입니다.

9. 좋은 소식
A. 그리스도의 적극적 순종과 죽으심은 율법의 모든 요구를 이루었다(롬 5:19; 갈 3:13).
그러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셔서 율법에 온전하게 순종하여 하나님을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셨고, 이웃을 사랑하시되 죄인을 사랑하셨고 당신을 못박는 로마군인들을 용서하시는 사랑을 통하여 적극적 순종을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왜 그냥 십자가에서 죽으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33년의 삶을 사시면서 철저하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나은 의, 율법 앞에서 완벽한 의, 그 마음 중심에서부터 조금의 거짓도 없는 의를 이루신 것입니까? 아담, 첫째 아담이 지키지 못한 행위언약을 둘째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그 언약의 조건을 완벽하게 이루신 것입니다. 이로써 아담이 할 수 없었던 것을, 모든 인류가 연약하여 할 수 없었던 것을 그리스도께서 대신 언약의 보증으로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의가 되시기 위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를 주시기 위해서 행하신 일입니다(롬 5:19). 또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 죽음을 통해서 주님은 아담이 행위언약을 깸으로써 받은 저주의 죽음을 완전히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으셨고, 하나님의 모든 진노를 다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끊어지심을 당하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입니다(갈 3:13). 우리를 대신하신 언약의 중보자로, 언약의 보증인으로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B. 우리는 모든 믿는 자에게 거저 주어지는(전가되는) 그리스도의 의를 가지고 하나님의 심판대에 설 수 있다.
이제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그에게 거저 주어지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완전한 의로움이며 이 의로움을 전가받은 자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담대하게 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첫 아담이 실패한 그 행위언약을 둘째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게 지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된 신자들이 이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선물로 받게 되고 그 의를 가지고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모습은 성부 하나님 앞에서 가장 의로우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될 것이며,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 그리스도의 신부의 아름다움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어떤 상태에 있든지, 여러분의 과거가 어떠하든지, 우리의 영원한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우리 가운데 아무도 이룰 수 없는 행위언약이 요구하는 의를 완전하게 이루신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 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날마다, 순간마다,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언약의 보증으로 붙잡으십시오. 그것만이 하나님의 완전한 요구 앞에서 흠없는 의로움을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날은 저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만큼, 예상했던 시간에 오지 않을 것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오늘 다시 한 번 그리스도를 붙잡게 하시고 그럴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시고 우리 모두를 초청하는 것입니다. 그 자비와 은혜의 부르심 앞에 응답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18-09-22 12:13:22 설교게시판에서 복사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