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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언약과 구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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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과 구속 (14: 최종) - 언약 백성의 순종

마태복음 5:1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9-12-06

말씀내용
<언약 백성의 순종> 마 5:17


오해: 그리스도인에게는 율법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지금까지 우리가 상고해온 언약의 주제를 정리해보도록 하지요. 최초의 사람인 아담은 하나님께서 주신 행위언약을 범하였습니다. 그래서 죽음이 선고되었고 모든 인류가 그 안에서 죽음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성 삼위 하나님께서는 그 전에, 즉 창세 전에 죄에 빠지게 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구속언약을 이미 맺어놓으셨습니다. 그것은 성자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아담이 실패한 하나님과의 행위언약의 요구를 완전한 순종으로써 성취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아담이 실패한 모든 결과인 형벌을 모든 죄인을 대신하여 지시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구속언약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범죄하자마자, 최초의 복음인 창세기 3:15의 말씀을 주실 수 있으셨습니다. 여인의 후손이 와서 뱀의 머리를 깨뜨릴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것을 은혜언약 혹은 약속언약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범죄한 아담에게 네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하는 요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해주실 여인의 후손인 메시아,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모든 구원을 이루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을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다윗에게 특별한 방식으로 반복해서 주셨습니다. 비록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시고 이스라엘 백성과 행위언약을 맺으셨지만, 그 행위언약은 이스라엘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잠정적 원리였지, 구원의 원리는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국가 안에서도 구원받고 중생한 이들은 다 아브라함의 은혜언약을 바라보고 믿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때가 찼을 때, 그 약속대로 여자에게서 나셨고, 율법 아래 오셨습니다(갈 4:4). 그리고 율법에 비추어 완전한 순종의 삶을 사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것을 구분해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사람은 그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여기서 교회 역사 속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해를 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삶에서 있어서 더 이상 율법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오해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만일, 율법이 필요하고, 율법이 그리스도인의 행위 규정이라면 은혜언약 아래서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과 무엇이 다를 수 있단 말입니까?

주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시지 않고 완전케 하러 오셨다(마 5:17).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상속받지만, 구원은 먼저 가장 철저한 우리 구주의 순종, 곧 그리스도의 행위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고 철저하게 율법에 순종하심으로써 얻으신 율법의 의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거저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읽으신 말씀 그대로 주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왔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마 5:17). 주님께서는 도리어 이 구절이 들어있는 산상수훈에서 팔복을 말씀하셨고, 율법의 문자를 넘어 그 정신으로 지키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살인 행위 자체를 하지 않았어도 형제에게 노하고 미워하였다면 살인을 한 것이며, 간음 행위 자체를 하지 않았더라도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었다면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면 과연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며, 그리스도인의 삶에 주어진 자유라는 것은 무슨 의미이며, 그리스도인에게 율법은 어떤 구속력을 가지는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의 질문입니다.

율법은 그리스도인에게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의 삶의 규범으로 존재한다.
먼저 한 가지 분명한 원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규범으로서의 율법은 존재합니다. 이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전제는 행위언약 혹은 율법언약의 전제입니다. “이것을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율법언약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에게 구속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율법언약의 요구를 다 이루셨기 때문이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의를 은혜로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 자체는 성도의 규범으로서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율법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합니다. 율법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의 반영입니다. 우리가 새언약 하에서 율법의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서 율법의 세 가지 구분을 이해해야 합니다. 율법에는 도덕법이 있고, 의식법, 시민법이 있습니다. 물론 성경 자체에서 이것은 도덕법이고 이것은 의식법이다 라고 정의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율법의 내용 전체를 살펴볼 때 이렇게 구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각종 제사의식이나 음식과 관련된 의식법과 고대 이스라엘 국가에서 유효한 법률이 되었던 시민법은 신정 이스라엘 국가 안에서만 유효했습니다. 이것들은 다 그림자며 모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재요, 원형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시작한 이후에는 이제 더 이상 의식법과 시민법은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실재가 오심으로써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도덕법은 하나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양심 안에 이미 새겨져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앞서 말씀드린대로 도덕법의 요구를 축소하시지 않으시고 도리어 내적 의미를 강조함으로써 도덕법의 요구를 한층 더 강화하셨습니다.

율법의 세 가지 용도 중 세번째 용도를 생각하라.
이런 도덕법의 용도를 칼빈은 세 가지로 설명을 했습니다. 첫째는 범죄를 억제 하는 용도입니다. 이런 법이 있기에 사람들은 두려워하게 되고 이것은 범죄를 억제하는 효과를 가집니다. 둘째로 교육적 용도입니다. 죄가 무엇이며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줌으로써 사람을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법이 없다면 어찌 죄를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셋째는 규범적 용도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주목해야할 필요가 있는 부분입니다. 신자의 삶의 규범으로서 주신 도덕법, 율법의 저주가 제거된 신자들만을 위해서 주어진 기능인 것입니다.

율법은 참된 성도의 기쁨이다.
신자는 영생얻는 조건으로서 율법을 지킬 개인적 의무에서 해방되었고 율법의 저주에서도 해방되었기 때문에 비로소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섬길 자유를 얻게 되었는데 이것이 가장 깊은 의미에서 율법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저주가 두려워서 율법을 지키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의는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으로 얻었고, 율법의 저주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다 받으심으로써 더 이상 믿는 신자들에게 임할 율법의 저주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성령을 받은 성도들은 그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법을,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의 반영인 율법을 행하는 것이 소원이 되고, 즐거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무적 순종, 두려움으로부터 나오는 노예적 순종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사랑하는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좋은 자식의 당연한 마음이듯이 그렇게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행하는 순종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참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께서는 율법 전체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요약하셨습니다. 사랑이 과연 억지로 가능한 것입니까? 마음으로부터 하게 되는 것입니다. 새언약으로써, 성령을 믿는 자들에게 부어주심으로써, 성도의 마음을 변화시키심으로써 율법을 순종하여 사는 것이 비로소 가능해졌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만일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법을 지켜서 살고 싶은 생각이 없으시다면,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으시다면 여러분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며, 주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분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도 이 원리는 동일했습니다. “복있는 사람은……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 1:2).” 구약의 성도라고 할지라도, 은혜언약 아래서 거듭나고 구원을 누리는 성도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시 119:14).” “나의 사랑하는 바 주의 계명을 스스로 즐거워하며(시 119:47).”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시 119:92).” “나로 깨닫게 하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시 119:34).” 여러분들에게도 이 시편 기자와 같은 고백이 마음 가운데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거듭난 성도요, 새언약의 백성입니다. 이보다 더 분명한 증거는 없습니다.

새언약의 순종은 공동체적이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더 상고해야 하는 원리가 있습니다. 새언약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여 사는 것은 개인적 경건의 추구가 아니라 공동체적 경건의 추구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성도들과 새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교회는 새언약의 백성이라고 칭해집니다. 이 백성은 단순히 믿는 개인들의 집합이 아니라 공동체요,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여기에는 개인주의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물론 개인의 신앙의 고백을 통하여 언약의 백성이 되었지만, 언약의 백성이 된 후에는 공동체의 삶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율법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정의될 때, 이 자체가 공동체적 순종의 삶, 공동체적 경건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단지 성경을 열심히 읽어라, 기도를 많이 해라 하는 차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본래 우리 죄인들의 본성 안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성도들의 심령 속에 성령을 주셔서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내 본성이 아니라 내 안에 오신 주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진정 구원하는 믿음이라면 우리 안에 이런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살게 되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이런 일이, 내 안에 내 것이 아니던 사랑이 흘러나오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분명한 믿음의 증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 사도는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라고 말씀할 수 있었습니다(롬 13:10). 새언약의 백성들은 단지 외적 행동이 아니라, 태도, 성향, 동기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하고, 서로가 책임을 지는 존재들로 묶여진 존재들입니다.

새언약의 백성인 교회에는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사랑이 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근본적으로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가끔 우리는 ‘교회에 사랑이 없다’는 말을 듣습니다. 정말 그런 것일까요? 교회에 사랑이 없으면 사실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새언약의 백성의 본능은 사랑입니다. 새언약의 백성 안에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성도가 구원받은 증거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못박아서 강조했던 것입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이런 저런 프로그램을 돌리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새언약의 백성은 비로소 사랑하게 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다소 민감하지만 집고 넘어가야 하는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지상의 교회는 믿는 자, 참된 성도들만 모인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적지 않은 불신자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일반적으로 교회 안에 용인되는 오해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다 신자다’라는 오해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가장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동창회도 아니고 동호회도 아닙니다. 그들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명목상으로는 다 믿는 것 처럼 되어 있습니다. 또 다 믿는 것으로 인정하고 들어가는 전제까지도 공공연하게 받아들여집니다. 심지어 교회의 지도자들 조차도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결코 주님이 말씀하신 새계명, 서로 사랑이 깊이 경험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라면 교회야말로 조직적으로 사랑 사역을 시작하고 행하지 않는 한, 세상에서 가장 사랑이 없는, 인정이 없는 단체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할 수 있는대로 이런 구분을 의식하고,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한다면 점점 그 안에서 형제들의 서로 사랑이 경험되기 시작할 것이고 깊어지고 넓어지게 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지상에 사는 동안, 완전한 의미에서 그런 교회의 형제 사랑을 경험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천국에서 우리가 영원히 누릴 몫입니다. 하지만, 이런 형제 사랑이 깊어지게 되면 될수록 교회는 세상을 감당할 수 있는, 이웃, 아니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더 큰 능력과 힘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새언약 백성으로서 교회가 세상을 향해서 가지는 사랑입니다. 이런 교회에서는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그리고 설명도 불가능한 그런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성도의 규범이 되고 새언약은 옛언약을 폐한다(히 8:13).
이렇게 율법, 하나님의 법은 성도에게는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마음의 법이 됩니다. 성도의 삶의 규범이 됩니다. “해라. 그러면 살리라”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의 기쁨을 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살아있습니다. 율법은 폐하여 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율법언약 혹 행위언약은 구원의 조건으로서는 폐하여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라고 썼습니다(히 8:13). 율법이 폐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율법 언약이 폐하여 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삶과 죽음으로 율법의 모든 요구를 다 이루셨기 때문에 율법언약은 폐하여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은 하나님의 도덕법으로서 모든 성도의 삶의 규범, 원칙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거듭난 성도만이 율법을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교회,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에 속해있다고 할지라도, 만일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마음이 여러분 안에 없다면 구원은 여러분의 것이 아직은 아닙니다. 저는 이것보다 무서운 현실이 없다고 늘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정직하게 여러분이 자신을 살핀 후,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은혜언약의 약속을 붙들고 나를 구원해주시기를 간청해야하며, 믿음을 주시기를 구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최신 장비를 갖춘 돛배의 이야기
최신 GPS와 각종 최신 장비들로 무장된 배가 있습니다. 온갖 수신장비를 통해서 날씨, 바람의 방향과 세기 등 만이 아니라 이런 저런 항해 정보와 조언들까지 다 수신이 됩니다. 바다로 미끄러지듯이 나가 멋지게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돛을 활짝 펴고 전력 항해를 하다 점점 바람이 줄어들고 고요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동쪽에서 돌풍이 오고있다는 예보가 수신됩니다. 이런 저런 조언들도 수신이 됩니다. 모든 정보와 조언이 다 있지만,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바람이 불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이 이와 같다고 마이클 호튼은 말합니다. “우리는 미끄러지듯이 항구에서 나와 우리 죄가 용서되고, 우리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아는 기쁨으로 흥분된 채 전력으로 항해한다. 우리 구주에 대한 사랑으로 감사로 가득한 마음을 가지고 구주께서 자신의 말씀 가운데 우리에게 지정해 놓은 길을 열심히 따라가려한다. 그러나 넓은 바다로 나갔을 때, 영적인 침체를 만난다.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이 방향을 제시해 주지만 능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는 이 책을 읽거나 저 세미나에 참석하거나 또는 영적 승리를 위한 이 계획을 따르거나 죄를 극복하기 위한 이런 단계들을 따름으로써 배를 다시 바른 방향으로 가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안내자들은 흔히 율법도 아니고 복음도 아니다. 단지 동료 선원들의 유익한 조언들이다. 이런 조언들은 복음보다는 더 율법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공을 위한 조건으로서 요구사항을 부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언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여러분이 영적으로 죽어 있다는 느낌을 더 깊게 받게 된다. 완전히 지쳐 포기하고 다시는 항해를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든지, 여러분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신선한 강력한 바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 바람은 언제나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다. 여러분이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누구시며, 하나님이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해서 무엇을 하셨으며, 신실하지 않은 항해자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을 새로운 세계에 대해서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드는 일이다. 이것만이 돛에 바람을 잔뜩 받게 해서 바람이 거세게 불 때, 여러분을 안전하게 항구로 다시 돌아가게 할 수 있다.”

복음의 직설법(indicative)을 기억하라.
행위언약 아래서 주어지는 율법이 명령법이라면, 은혜언약 아래서 주어지는 복음은 언제나 직설법입니다. 율법은 ‘하라’고 명령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것을 할 수 없는 것을 아시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습니다.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모든 것을 다 하셨다’고 말하는 직설법입니다. 이 복음의 직설법을 기억하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율법의 명령을 행할 수 있는, 율법을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 힘을 주는 바람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 그 복음의 직설법을 우리가 주장하고 선포하지 못한다면 율법은 우리를 위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기껏 율법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절망 아니면 자기 의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창세 전에 우리를 사랑하여 맺으신 구속 언약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무능함을 아시고 은혜언약 아래서 그리스도를 주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바라보십시오. 이것만이 우리로 하여금 새언약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능력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