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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언약과 구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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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과 구속 (13) - 언약 백성의 표지, 성례

마태복음 28:18-20, 누가복음 22:19-2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9-11-29

말씀내용
<언약 백성의 표지(sign), 성례> 마 28:18~20; 눅 22:19~20



표지(sign)라는 말은 실재는 아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실재를 가리키거나 의미하는 말입니다. 사전에 보면, 이렇게 설명합니다. “1)표시나 특징으로 어떤 사물을 다른 것과 구별하게 함. 2)[철학] 다른 대상과 구별하여 어떤 대상을 확정하고 그것을 인식할 수 있게 하는 표상적 또는 개념적 특성.” 주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너희는 내 백성이다’라고 하는 특징, 교회를 세상과 구별시켜 주시는 표시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례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읽은 말씀과 같이 두 가지 성례(the sacraments)를 명령하셨습니다. 바로 세례와 성만찬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가르치는 것과 같이 7가지, 즉 세례, 견진(입교), 성체, 고해, 혼인, 신품(사제안수), 종부 성사 가 아닙니다. 주님은 교회의 특징을 선한 도덕성이나 교양, 혹은 품위에 놓지 않으셨습니다. 얼마나 많은 교회 안팎의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교회를 세상과 구분해주는 것은 세례와 성만찬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표지입니다. 언약이란 말 자체가 상당한 법적 개념을 내포함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법적 의미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거기에 중요한 것은 서명입니다. 아무리 공문서가 잘 쓰여졌다고 해도 거기에 당사자 간의 서명이 없다면 그것은 효력을 지니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교회, 즉 당신의 언약 백성에게 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바로 이 표지이자, 도장(서명)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례를 행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먼저 서명하신 언약서에 서명을 하고 승인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례의 의미입니다. 성례는 언약 백성의 표지이고, 언약 백성의 서명(도장)입니다.

1. 성례를 이해하는 열쇠: 죽음에 대한 서약인 언약
이렇게 성례를 이해하는 열쇠는 언약이란 개념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으시는 관계의 핵심이 언약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의 믿음이 어디에 근거하겠습니까? 자기 열심이거나, 하나님을 설득하거나 감동시키려는 시도들이겠지요. 그러나 참 성도는 거기에 목을 매고 사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를 감동시키시는 하나님의 열심에 목을 매는 것입니다. 실상 우리가 할 것은 믿음으로 ‘아멘’하는 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언약, 그리고 심지어 그 언약의 내용을 지키지 못할 우리를 아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그 언약 파기의 결과로 죽어야 할 그 죽음까지도 대신하시겠다고 맹세하시는 하나님의 서약인 언약이 바로 성례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이 점에서 세례와 성만찬 이 두 가지 성례는 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떠나서는 세례도, 성만찬도 이해할 수도 없고 지킬 수도 없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2. 세례와 할례
언약이라는 개념을 열쇠로 하여 성경 전체와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이해하는 신학자들은 보통 세례를 구약 시대의 할례에 연결하곤 합니다.
A. 할례, 심판의 상징: ‘베어내다’, ‘잘라내다’(cut off)
할례가 처음 성경에 등장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일방적 맹세)을 맺으시고(창 15장) 그 언약의 표시로 명하신 창세기 17장입니다. 아셔야 할 것은 할례가 언약의 조건이 아니라, 언약을 맺은 것에 대한 인정이고, 표시로 주신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왜 할례냐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집안의 모든 남자는 다 할례를 받아야했습니다. 남자의 생식기 끝의 표피를 잘라내는 것입니다. 왜 이런 방식인가? 할례의 중요한 의미는 ‘잘라낸다’(cut off)는 말에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심판의 상징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잘라낸다, 베어낸다는 말은 심판을 받고 떨어져 나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의 행위언약을 어기고 타락한 인간은 그냥 그 모습 그대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지옥으로 떨어져야만 하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린 아이를 낳아 8일만에 할례를 행하는 전통 속에서 기억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갓 태어난 아이가 뭘 알고, 뭘 잘못 했겠습니까마는, 이 귀엽고 예쁜 아이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은혜언약)이 아니면 소망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B. 이삭의 할례와 그리스도의 할례(골 2:11)
아브라함 집안에서 태어나자마자 할례를 받은 인물은 이삭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의 표지로 할례를 명하신 것은 이삭이 태어나기 1년 전 일이었습니다(창 17:21). 이삭은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창 21:4). 제가 할례는 표지이며 상징이라고 말씀드린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삭이 받은 할례 역시 하나님의 심판의 실재가 아니라 상징이었습니다. 갓난 아이 이삭은 범죄한 아담의 자손이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자입니다. 할례는 육체의 일부를 베어버림으로써 이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삭이 할례를 통해서 보여준 하나님의 심판의 상징은 다음 장인 창세기 22장에서 소년 이삭이 번제단에 묶여 아버지 아브라함의 칼 아래 놓인 사건에서 실제로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사건이 아니고 이삭의 생명이 아버지의 칼에 죽어야 하는 실제 상황이었습니다. 이 상징과 실재로 보여진 이삭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성취됩니다. 이삭의 할례와 번제단 아래 놓인 사건은 예수님의 할례와 십자가에서 그대로 성취됩니다. 예수님도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데 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할례가 필요했겠습니까? 이 사건은 주님께서 번제단 위에 결박당하고 아버지의 심판의 칼 아래 놓인 이삭과 같이, 주님께서 십자가에 결박당하여 성부 하나님의 진노 어린 심판의 칼 아래 놓인 십자가 사건에 대한 하나의 상징일 뿐입니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준비해주신 수양으로 인해 살아났습니다. 그 수양, 하나님이 친히 준비해주신 수양은 바로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칼 아래 놓이셨을 때, 이삭과 같이 살아나지 못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 자신이 바로 하나님이 준비하신 수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을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말하였습니다(골 2:11). 그리스도의 할례, 곧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모든 언약을 성취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신 그 맹세를 이루신 것입니다.

C. 언약 백성은 그리스도의 할례와 죽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된다(롬 6:4; 갈 3:27).
그렇다면 죄인이 예수님을 믿을 때 세례를 받게 되는데, 세례를 받을 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담 아래서 범죄한 우리를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 아래서 모든 죄의 형벌을 받아 의로운 자로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아담 안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롬 6:4). 이것이 믿고 세례를 받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지낸 바 되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합된다는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세례를 통해서 세례 받는 자를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도합니다. 만일 믿음이 없다면 이 세례는 하나의 상징으로 실재를 전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믿음 없이 세례를 받으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아무런 느낌도, 아무런 은혜도 없었을 것이고, 아무런 실재,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깊은 의미를 전달해주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명목상의 신자요, 교회의 세례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믿음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실재로 우리를 인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D. 세례는 은혜언약의 도장이다.
세례는 앞서 설명드린대로 하나의 도장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은, 내가 아담 안에서 범죄한 자요, 구약의 할례라는 상징이 의미하듯이 하나님의 심판의 칼 아래 놓여 베어짐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 나아갑니다. 그리스도께서 은혜언약 아래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칼 아래 놓여 피흘리고 죽임을 당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당신의 맹세를 신실하고도 완벽하게 성취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세례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이 모든 사실을 인정하고 세례로써 자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요, 하나님의 새 피조물이 된 것에 서명하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피로 그 언약서에 서명을 마치셨습니다. 이것 뿐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법적 대리인으로서 서명을 하셨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그 서명이 바로 나의 서명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서명하셨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서명하신 이 언약은 결코 파기될 수 없으며 취소될 수 없는 것입니다.
3. 성만찬과 유월절
이제 우리는 또 하나의 성례인 성만찬을 상고해보겠습니다. 세례가 구약의 할례와 연관이 있다면 성만찬은 유월절 규례와 연결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양을 잡아 자기 집의 문인방과 문설주에 그 피를 발랐을 때, 죽음의 사자가 그 집을 넘어간 그 밤의 일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날 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오랜 애굽의 노예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하나님이 주시는 땅을 향해서 가는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A. 행위언약을 범한 죄인에게 (하나님 자신의) 피흘리심이 없으면 생명의 길은 주어질 수 없다.
이 유월절의 유래 역시 어린양의 피와 죽음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유월절은 할례나 세례와 같이 하나의 표지이고 상징이었습니다. 다시 여기서 우리가 던질 질문은 왜 또 피를 봐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역시 애굽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죽어 마땅한 자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사람보다 더 도덕적이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더 교양이 있었느냐? 그것과 상관없이 다 죽어야 하는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담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의 행위언약을 깼을 때, 우리가 다 아담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깨어진 행위언약의 결과로 주어지는 형벌인 죽음을 아무도 피할 자는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의 피를 흘리심으로 그것을 갚으시지 않으시고 당신 자신의 피를 흘리시고 죽으심으로 죄인에게 생명의 길을 주시는 은혜언약이 있는 것입니다. 피흘림이 없으면 죄사함(죄용서)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법칙입니다(히 9:22). 이것이 유월절에 양을 잡아 그 피를 문 좌우와 위에 발라야 했던 이유입니다.

B. 성만찬은 언약을 승인하는 식사이고 성만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은 언약 백성이 된다(엡 4:5; 고전 10:17; 12:12~13).
주님은 요한복음에 의하면 유월절 양이 잡히던 그 시간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잡히시기 전 날 저녁,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하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주님께서는 매우 의미심장한 행동과 말씀을 하셨습니다.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고 하셨고, 이후에 잔에 포도주를 나눠주시면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22:19~20). 주님은 이제 십자가에서 벌어질 실재가 무엇인지를 이 성만찬이라는 상징을 통해서 설명하신 것입니다. 이날 저녁의 식사는 하나의 언약 조인식의 마지막 순서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구약 시대에 언약을 맺게 되면 당사자 간에 식사를 함께 함으로써 일종의 언약 승인 혹 조인식을 대신하게 된다는 것을 설명드린 적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바로 이것을 하신 것입니다. 모든 교회,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대신하여 제자들과 그 새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이로써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신약성경에서 성만찬이 언급될 때,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됨이라는 주제가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 것을 우리는 주목할 수 있습니다. 가령 바울 사도는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고 했습니다(고전 10:17). 성만찬 뿐 아니라 세례도 그렇습니다. 한 몸에 많은 지체가 있지만,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라고 할 때도 성령세례를 언급하는 것이지만, 세례가 한 몸, 한 백성됨과 깊이 연관됨을 보여줍니다(고전 12:12~13).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엡 4:5). 세례 뿐 아니라, 성만찬은 교회의 하나됨을 경험하게 하고, 한 백성을 만드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방법입니다. 주님의 살과 주님의 피를 인하여, 혹 그것을 먹고 마심으로써 우리는 다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되며 한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언약을 맺은 공동운명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 언약공동체의 전제는 주님께서 당신의 죽으심과 피흘림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심판의 칼 아래 들어가셨다는 변개할 수 없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의 피로 하신 맹세인 것입니다.

C. 성만찬의 선포: “그리스도는 죽으셨습니다. 그는 살아나셨습니다. 그는 다시 오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고전 11:25). 바울 사도는 성찬식에 대한 규례를 고린도교회에 설명하면서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 설명합니다(고전 11:26). 성만찬을 교회가 행할 때마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서, 그리고 세상을 향해서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죽으셨습니다. 그는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오실 것입니다”라는 내용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행위언약을 파기한 죄인을 위해서 그리스도는 죽으셨습니다. 그의 받을 영원한 죽음의 형벌을 대신 받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살아나셨습니다.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들이 다시 영광의 몸으로 살게하시려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 오실 때까지 성만찬을 통해 주님을 기념하는 자기 언약 백성을 위하여 다시 오실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성만찬을 받으신다는 것은, 여러분이 바로 이 내용을 다 하나님 앞에서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세례가 먼저입니다. 세례 받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의 표지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 성만찬에서 주님을 온전한 의미에서 기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만찬도 마찬가지로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 믿음으로 성만찬을 받는 모든 자들을 성령께서는 성만찬의 상징이 가리키는 실재인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영광의 재림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시는 것입니다.

4. 성례의 효력과 교훈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성례는 교회의 표지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표지입니다. 교회를 세상과 구분하는 것은 이것 말고 없습니다. 성례는 눈으로 보는 그리고 감각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듯이, 성례를 통해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굳게 세워주십니다.

A. 성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은혜의 수단이다.
그러나 특별한 의미에서 성례는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이 됩니다. 가령, 기도나 성경읽기, 성도들의 교제, 복음전도 등도 은혜의 수단이지만, 이것들은 울기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들이지만, 선포되는 말씀과 함께 성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로 향하여 다가오시는 은혜의 수단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이 차이를 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열심과 우리의 봉사, 우리의 헌신의 차원에서가 아닙니다. 성례는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의 헌신, 하나님의 자비를 언약이라는 틀 속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뿐 아니라, 성례를 행함을 통하여 우리는 그 하나님의 행하신 것을 알고 기억하고 기념하는 가운데 믿음이 견고해지는 것입니다. 성례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믿음을 견고히 세워주시려고 행하라고 하신 은혜의 수단인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을 것입니다.

B. 성령님은 과거 십자가에서 일어난 실재 속으로 그리고 장래에 완전히 실현될 실재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이셔서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한다.
또한 성례를 통하여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과거 십자가의 사건, 그 실재 속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영광 중에 재림하실 장래에 완전히 실현될 흠도 점도 없는 완벽한 그리스도의 신부로 단장될 그 영광의 실재 속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십니다. 그래서 비록 지금은 우리가 실패하고, 좌절하며, 범죄하고 실수가 많으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 중에 그리스도와 함께 설 날을 바라보고 기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십자가에서 이미 이루어진 언약 가운데 있으며, 아직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이루어지고야 말 너무나도 확실한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 사이에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깨닫게 하며 감사하고 믿음으로 바라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례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C. 세례는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서약하시는 하나님의 표시이고, 성만찬은 굳은 맹세로 하나님이 주시는 보증이다.
한 가지 오해만은 다시 한 번 짚고 마쳐야겠습니다. 세례는 성실한 제자가 되겠다는 신자의 서약이 아닙니다. 물론 세례 받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주요, 구주가 되시며 나는 그의 백성이며 종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제 나는 그리스도 한 주만을 섬기겠다는 고백이 거기에 담겨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세례는 그런 의미이기 전에, 하나님께서 세례를 받는 자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서약하시는 하나님의 보증입니다. 우리 차원의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 차원의 무엇이라는 것입니다. 성만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만찬은 이제 나를 위해 돌아가신 주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하는 우리의 헌신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고백과 헌신은 귀하고 귀합니다. 그러나 성만찬이라는 상징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의미는 굳은 맹세로 하나님이 주시는 보증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세운, 서명날인하신 하나님의 맹세를 기억하게 하고 인정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 의미를 분명히 깨닫고 세례를 받으며 성만찬을 행하여 주를 기념함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은 승인되고 확고해지고 지속성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D. 성례를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목회자로서 여러분을 섬기는 동안, 여러분에게 주님이 하라고 명하신대로 세례와 성만찬을 베풀 것입니다. 이 상징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믿는 자에게 세례를 베풀 것이며, 성만찬을 베풀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성례를 주님께서 의도하신 것보다 지나치게 강조하여 마치 그 의식 속에 구원의 효력이 있는 것과 같이 강조하는 것은 삼가야 합니다. 또한 그 의식을 가볍게 여기는 것도 두려워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로마 카톨릭이나 세례가 구원의 조건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처럼 성례를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성례를 거부할 수 있습니다. 혹 오늘날 많은 개신교회가 하듯이 너무나 쉽게 세례를 베풀고 누구나에게 성만찬을 베풀어 성례를 가볍게 취급함으로써 성례를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더하셔서 주님 오시는 날까지 세례와 성만찬을 주님이 가르치신 대로 행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은혜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뿐 아니라 온 교회가 강건해지는 역사가 있기를 구합니다. 교회는 세례와 성만찬, 하나님의 언약의 표지로 세상과 구별되는 존재임을 기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