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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신앙과 성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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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80 - 고난과 시간, 그리고 두 나라 사이에서

로마서 8:17-25, 시편 105:19, 히브리서 12:5-1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9-06-02

말씀내용
우리는 지난 주일, [신앙과 성숙] 시리즈의 결론의 첫번째 말씀으로, <말씀, 기도 그리고 공동체>라는 주제로 말씀을 상고했고, 오늘로써 우리는 [신앙과 성숙] 시리즈의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결론으로 전하는 두번째 말씀의 주제는 <고난과 시간 그리고 두 나라 사이에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거룩하고 성숙한 사람으로 길러 가시는 데에는 5개의 중요한 요소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 다른 요소를 덧붙이거나 어떤 것을 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가령, 마르틴 루터는 좋은 신학자가 만들어지는 세 가지 조건을 말씀과 기도 그리고 고난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비단 신학자에게만 해당되는 조건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만들어지는 과정에도 말씀과 기도 그리고 고난이 중요합니다. 누구든지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의 탁월함이 드러나는 지점은, 그가 여기에 고난이라는 요소를 더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루터 자신이 겪은 것이기도 했지만, 실제로 성경에는 고난이 없었던 하나님의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물론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영신학에 매여있는 무지한 자들은 이 고난의 요소를 부인하는 비성경적 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저는 마르틴 루터의 말에 두 가지 요소를 더했습니다. 시간과 공동체입니다. 이미 지난 주일에 우리는 공동체의 요소를 간단히 살펴보았듯이, 교회—공동체 없이 성장하는 신앙은 없고, 공동체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성숙해져 갑니다. 이것은 단지 지역교회에 등록하여 속해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공동체의 삶 속으로 우리는 들어가야 합니다. 비록 여기에는 부딪힘이나 갈등. 기타 여러 어려움과 장애물들이 예견됨에도 불구하고 그 너머에 있는 은혜를 바라며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는 삶만이 참된 성숙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오늘 우리는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말씀과 기도 그리고 공동체의 요소에 더하여 시간과 고난의 요소를 결론적으로 살펴볼텐데, 고난과 시간이라는 두 요소는 신자가 살아가는 두 나라 사이라는 환경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함께 살펴볼 것입니다. 신자는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두 나라라는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이것은 자연히 긴장을 유발하고 신자의 삶에 지혜를 요구합니다. 성경적 원리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히면, 지혜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고 우리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영예를 드러내는데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의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에서 보여주는 모습처럼 말입니다.


■고난
우리는 먼저 고난이라는 요소로 오늘 말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신자에게 주어지는 고난의 성격이 어떻게 불신자들이 당하는 고난과 다른가를 먼저 살펴보고, 우리는 고난이 어떻게 신자의 믿음을 자라게 하고 성숙하게 만드는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신자에게 주어지는 고난의 성격(히 12:5~11; 요 9:3; 11:4; 욥 42:5~6; 골 1:24; 딤후 3:12; 마 5:11; 벧전 4:12)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허락하시는 고난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해를 넘어서는 신비한 영역이 존재합니다. 고난이 죄의 결과로 시작된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신자들에게는 다른 측면이 있다는 것을 놓친다면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많은 유익을 놓칠 수 밖에 없습니다. 죄의 결과로 주어지는 성격의 고난이라면, 성육신하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신자들의 몫을 다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겪는 고난은 죄의 결과나 죄에 대한 형벌과는 분명히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징계라고 표현합니다. 히브리서 12장은,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모든 자녀들을 징계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징계는 형벌이 아닙니다. 죄와 형벌 사이에 인과율이 작동한다면, 잘못과 징계 사이에는 아버지의 사랑이 작동합니다. 제가 잘못이라고 표현한 것은 신자의 죄가 죄가 아니기 때문이 아닙니다. 신자의 죄는 불신자의 죄와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을 가진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불신자의 모든 죄는 예외없이 지옥에 가야할 죄입니다. 그러나 신자의 죄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자녀들의 잘못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죄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거나 가볍다는 말도 아닙니다. 도리어 신자는 불신자로 있을 때 죄를 인식하던 것과 비교할 수 없이, 자신의 죄를 깊이 아파하고 회개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렸을 뿐 아니라, 이 죄로 인해 아버지와의 관계가 상했으며 이것을 고통스럽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이 잘못을 충분히 깨닫고 고치도록 징계를 허락하십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징계로 고난을 받을 때, 신자들은 이것을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되고 반대로 지나치게 낙심하지도 않아야 합니다(히 12:5). 만일 징계가 없다면 자녀가 아니라고 히브리서는 말씀합니다(히 12:6~9). 그러나 징계는 신자에게 주어지는 고난의 한 가지 성격일 뿐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이 신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욥의 경우처럼 말입니다. 주님은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을 보시고, 그 원인은 누구의 죄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고(요 9:3), 나사로의 죽음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1:4). 분명히 신자들의 삶에는 이런 차원의 고난이 존재합니다. 엄밀히 말해서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은 이로 인하여 주님을 만나게 되었으므로 이전부터 신자가 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고난은 이와 같이 적극적인 차원이 존재합니다. 여기서는 인과율을 적용하면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욥의 경우나 이 맹인 그리고 나사로의 경우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나타내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시는데,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믿음을 자라게 하십니다. 그래서 욥이 고난을 통과한 뒤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들에게 허락하신 고난을 통하여 이와 같은 은혜를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브리서 12:11)”고 말씀합니다. 징계로 주어지는 고난도 동시에 이런 차원의 적극적 의미를 함께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주어지는 고난에서 우리는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하여 받는 고난과 믿음 때문에 겪는 고난입니다. 이것은 각각 적극적 차원의 고난과 필연적 차원의 고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절실하게 요구되는 차원의 고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바울 사도의 고백을 들어보지요.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사도의 이 고백은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하여 당하는 적극적 차원의 고난을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나 선지자 혹은 목사나 선교사와 같이 특정한 사람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이 적극적 고난은 모든 신자에게 열려있을 뿐 아니라, 모든 신자에게 요구되는 고난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더하여 이와 유사하지만 조금은 구분되는 고난이 있습니다. 신자가 믿음을 따라 경건하게 살고자 한다면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딤후 3:12). 그래서 필연적 고난이라고 부릅니다. 필연적이라는 말은, 신자가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려고 한다면 욕과 박해를 받을 것은 이상하거나 특별한 일이 아니고 당연한 일이라는 겁니다(마 5:11).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벧전 4:12)” 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두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만일, 신자가 끊임없이 믿음을 타협하고 살아가려고 한다면, 또는 신자가 믿음을 교회 생활에만 국한하여 사용하려고 한다면, 물론 고난을 피해갈 수 있을 것입니다마는, 그는 자신의 신앙이 참된 것인지를 확신할 수 없을 것이고, 형식적 신앙 또는 위선적 신앙에 머물 위험이 큰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하여 받는 고난도 얼마든지 피해가려고 한다면, 지옥에 가지 않을만큼의 최소한의 신앙생활을 하려고 한다면, 고난과 불이익과 손해가 싫어서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한 수고를 거절한다면, 이 또한 그 신앙의 진수를 맛보는데서 우리를 점점 더 멀어지게 하고 확신에 이를 수 없게 할 것입니다.


■고난이 신앙을 자라게 하는 방식(엡 1:18~19)
이제 본문이 고난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을 들어보십시오. 17절에서 사도는 말씀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예비하신 하늘의 영광스런 기업을 상속받을 상속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광을 상속받기 위해서 세상에 사는 동안 고난도 감당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고난은 영광의 기업을 받기 위한 준비이기도 합니다. 영광과 고난은 취사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닙니다. 성경은 언제나 현재의 고난을 신자가 누릴 영원한 영광과 대비시킵니다. 이것이 신자가 고난을 대할 때 가져야 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궁극적인 관점인데, 이 관점이 근본적으로 고난을 감당할 힘을 제공해 주기 때문입니다. 18절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이 말씀은 어떻게 현재의 고난이 신앙을 자라게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고난 중에서 장래의 영광의 크기를 바라봄으로써 우리 믿음은 성장합니다. 믿음은 당장 현재의 고난에서 벗어날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신자가 누릴 영광을 바라보는 소망입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유난히 믿음의 미래적 성격을 보여주는 단어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19절에 ‘고대하는’, 21절에 ‘그 바라는’, 23절에 ‘기다리느니라’, 24절에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그리고 ‘바라리요’, 25절에 ‘기다릴지니라’ 와 같은 단어들입니다. 이점에서 장래의 영광을 바라는 소망이 없는, 결여된 믿음은 참된 믿음일 수 없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고 엎드려도, 그가 구하는 것이 현실의 것이 전부라면, 금생에서 얻을 것들만을 구한다면, 그의 신앙은 참 기독교 신앙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번영 신학, 기복 신앙의 위험입니다.

장래의 영광, 장래의 은혜를 내다보는 것은 신자가 어떤 성격의 고난 가운데 있든지 신자로 하여금 그 고난을 능히 감당하게 하는 힘을 제공해줍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8~19).” 여기서 하나님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이나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먼저 나오지 않고, 오히려 부르심의 소망,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먼저 나오는 것을 주목해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 우리를 모든 환난에서 건져 주실 능력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무엇보다 먼저 부르심의 소망과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보게 하시기를 간구합니다. 현재의 고난을 감당하는 성도의 힘은 장래의 영광을 바라보는 소망에서 나온다는 것은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신자들이 고난 중에 있을 때, 믿음으로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언제나 이 비교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난을 감당할 때, 우리의 믿음은 고난 속에서 자라가고 성숙해집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고난을 피해가고 고난이 주는 괴로움을 경감시키는 데만 우리의 모든 관심이 쏠려 있다면, 우리 신앙은 결코 자랄 수 없을 것입니다.


■시간(시 105:19)
고난을 감당하게 하는 힘이 장래의 영광을 바라는 것이라는 말은, 자연히 우리를 시간이라는 주제로 데리고 갑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시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시간에 매이시거나 제한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데 시간이라는 요소를 사용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로마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듯이, 한 사람의 성도도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인생이라는 시간을 통해서 그의 신앙은 자라가게 되어 있고 성숙을 향해서 가게 됩니다. 시간이라는 요소를 거스를 힘이 사람에게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고난은 언제나 시간이라는 요소와 함께 작동한다는 사실은, 고난이 올 때 우리가 “언제까지입니까?” 라고 기도한다는 사실이 잘 보여줍니다. 고난의 시간과 기간은 하나님께서 주권 가운데 결정하십니다. 이것을 시편 105:19이 잘 보여줍니다.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시편 기자는 요셉의 고난을 설명하면서 그 고난이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고 말합니다. 이 때는 17세부터 30세까지 13년이다라고 정해진 시간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는 말이 하나님의 주권적 시간인 카이로스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당신의 자녀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성취되는 시간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고난은 시간과 함께 우리의 믿음을 만들어갑니다.

우리가 시간이라는 요소를 생각할 때 보통 느긋함 보다는 조급함을 느끼곤 합니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이 없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시간을 낭비했다고 느낄 때도 적지 않습니다. 시간을 낭비했다고 느끼는 것은 거의 언제나 우리의 성취를 생각할 때입니다. 하지만, 신자에게 시간은 좀 다르게 작동합니다. 성취한 것이 별로 없기 때문에 낭비했다는 느낌을 갖는 것은 자연스럽긴 하지만, 여기에는 다른 요소도 있습니다. 우리의 실패, 고난으로 채워지는 시간 조차도,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시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삶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소위 잃어버린 13년이라고 불릴만한 요셉의 시간은 애굽의 총리로 성공하기 위해서 요셉이 의도하고 준비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요셉에게는 무의미해 보이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도를 갖고 당신의 시간표에 따라 요셉을 인도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신자에게는 의식적으로 성장한다고 생각하는 시간만이 아니라, 낭비라고 생각되는 시간 조차도, 하나님께서 빚어 가시는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정확히 같은 것을 말씀합니다. 19절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때를 가리킵니다. 21절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때,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 노릇하는데서 해방되는 때를 가리킵니다. 23절은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의 때를 가리킵니다. 이 모든 것은 다 같은 때를 가리킵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때입니다. 우리의 영화로운 구원이 완성될 때입니다.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성가심을 받지 않게 되는 때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고난으로 점철된 시간입니다. 현재의 시간이 고난으로 점철되었기에, 미래의 시간을 기다리는 우리의 갈망과 소망은 더 깊어지고 뜨거워집니다. 본문의 동사들이 그것을 보여주는데, 먼저 19절에서 ‘고대한다’는 단어는 무엇인가를 매우 강렬하게 열망하고 기대하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23절에 ‘기다질지니라’라는 단어 역시 강렬하게 기다린다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고 25절에 ‘기다릴지니라’도 같은 단어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24절에서 아주 명확하게 표현합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믿음의 미래적 요소, 시간적 요소를 드러내기 위해서 바울 사도는 믿음을 소망이라고 표현합니다. 믿음에서 시간의 요소를 제거하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고난의 현재에서 영광의 장래를 기다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기다림의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동안에도 우리의 믿음을 장성하게 빚어가십니다.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고 신학책을 읽으며 기도에 전념하여 보낸 의식적인 시간들을 통해서만 우리의 신앙이 빚어지고 성장하는 게 아닙니다. 이런 시간은 모두 소중하지만, 우리 신앙은 우리가 만들어놓은 시간표대로 진행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배우는 것이 우리 신앙에는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내 뜻대로 진행되지 않고, 예기치 못한 고난으로 말미암아 내 시간표에 큰 지장이 생기게 되고, 의미 없이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는 것 같을 그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시고 자라게 하시려고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낙심과 절망에 가까운 시간을 보낼 때, 그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시간을 지내면서 조급함이나 조바심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보내기를 배우십시오. 여러분이 오늘 처해 있는 바로 현재의 시간에 그것을 배워 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영원의 관점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은 영원의 관점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영원의 관점에서 현재의 모든 것,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상대화하여 바라보는 것입니다.


■두 나라 사이에서(빌 3:20; 막 3:35; 벧전 2:11; 롬 8:29)
고난과 시간이라는 요소는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환경은 신자가 두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신자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지만(빌 3:20), 다른 한편으로 신자는 이 땅의 한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갑니다. 물론 신자의 영원한 정체성은 하늘에 속한 자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구속의 나라를 대표하는 교회의 멤버로서 우리가 가지는 정체성이 세상에서 우리를 규정하는 모든 정체성 보다 우선임을 가르칩니다. 심지어 혈연으로 묶인 지상에서 가장 끈끈한 가족이라는 정체성 보다도 우선하는 것임을 주님은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막 3:35). 세례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제임스 K.A.스미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세례를 통해 새로운 폴리스, 사회 계급과 혈연 귀족이 폐지된 새로운 종교적, 정치적 실체를 이루는 특별한 도성을 만드신다.” 이렇게 교회는 모든 신자에게 있어서 기존의 모든 소속 보다 우월하고 우선되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두 나라 시민으로 산다는 것은 자연히 긴장을 유발합니다. 우리가 믿음 때문에 겪는 손해와 불이익이라는 고난은 우리가 두 나라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믿음이 교회라는 울타리에 한정되지 않고 교회와 세상 두 영역 모두에서 일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신자들은 여기에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신앙과 세상에서의 신앙 사이의 불균형, 부조화를 빚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은 가정과 직장과 모든 삶의 영역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그리고 신자는 세상에서 우리 신앙이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고 표출 되어야 하는지를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신자는 타락한 세상에서 주인이거나 지배자로 살지 않습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거류민과 나그네로 존재합니다(벧전 2:11). 그러므로 신자는 물리적 힘이나 영향력 또는 일방적 소통이 아닌, 섬김과 낮아짐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세상에 드러내야 하고,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인 자연법의 근거에서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을 배워야 합니다. 또한 선한 양심에 우리 믿음을 담아 세상에서 선한 양심의 사람으로 행동함으로써 우리 믿음을 드러내야 합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의 영역을 포함하는 이야기입니다. 정치인, 교사, 의사, 율사, 공무원, 자영업자, 피고용인, 그 어떤 자리에서 살아가든지 신자는 자신의 신앙을 타협하지 않고 드러내되 조심스럽고 지혜롭게 드러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 없는 사람들과 언제나 함께 살아가면서도, 그들이 빠질 수 있는 극단적 논리에 휘말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자가 두 나라 사이에 산다는 것은 교회와 세상에 속하여 살아간다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이 세상(this age)과 오는 세상(the age to come) 사이에서 살아간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오는 세상은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시작되었고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는 이 세상은 끝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고 우리는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또한 이 세상에 살아갑니다. 이렇게 시간적으로 두 나라에 끼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신자입니다. 본문은 그 나라의 도래를 기다리는 바울 사도의 마음을 잘 보여줍니다. 왜 사도 만이겠습니까? 신자들 모두가 그 나라를 바라보고 사모합니다.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공사 중인 우리는 고통 중에 탄식하며 그 나라를 바라보고 기다립니다. 이것이 22절에서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언젠가 두 나라 시민이 아니라, 오직 한 나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으로 삼위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하며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 때가 올 것입니다. 그 나라에 넉넉히 들어감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오늘이라는 시간에 우리가 두 나라 시민으로 살아가면서 고난을 받으며 그날을 기다리게 하십니다. 그러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하고 가녀린 믿음을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빚어 가시고 우리를 성숙하고 경건한 어른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 가는 복된 삶입니다(롬 8:29).


■결론: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닮고 (요일 5:21; 시 115:8; 고후 3:18; 벧후 1:4)
[신앙과 성숙] 시리즈를 맺으면서 저는 요한일서의 마지막 구절을 떠올립니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 하라(요일 5:21).”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닮아가지만, 우상을 섬기는 자는 우상을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시 115:8).” 라는 말씀은 우상 숭배자가 우상처럼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반면 하나님을 섬기며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뵈올 때, 신자는 하나님을 점점 닮아가고 신성한 성품에 참여한 자로 빚어져 갑니다(고후 3:18; 벧후 1:4). 참된 신앙은 참된 성품을 낳습니다. 참된 신앙은 성숙의 길로 가는 신앙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자리에 계시든지, 돈, 권력, 명예, 성공, 그것이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고 사랑하게 된다면, 여러분의 인생은 비참해 질 것입니다. 여러분이 평생의 삶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함으로써 우상을 내어버리는 이 싸움을 제대로 감당할 때, 여러분은 참되고 아름다우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그런 성품을 열매로 맺어가게 될 것이고, 이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입니다. 신앙과 성품은 하나임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이런 복된 은혜를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