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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신앙과 성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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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79 - 말씀, 기도 그리고 공동체

디모데전서 4:5, 시편 133:1-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9-05-19

말씀내용
사람은 어떻게 변하는가?
사람은 과연 변하는가?
신앙은 사람을 변화시키는가?
신앙은 성품과 인격을 변화시키는가?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자신의 신앙을 드러낼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이 신앙을 외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왜 중요한가?
그리스도인 신앙의 외적 표현(표출)은 드러나는 것인가, 드러내는 것인가?
예수를 믿는 나는 그 신앙으로 인해 변했는가?
어떻게 변했는가?
나를 변하게 한 요소는 무엇인가?

만일, 오래도록 신앙생활을 했음에도 변하지 않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들이 우리가 거의 지난 80주에 걸쳐서 상고한 [신앙과 성숙]이라는 주제의 말씀에서 던졌던 근본 질문들입니다. 여러분이 에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이런 질문들을 정직하게 던질 수 있어야 하며, 또한 던져야 마땅합니다. 물론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그 대답을 생각하며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우리의 경험이나 사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난 80여주에 걸쳐서 그 일을 해왔습니다. 이제 2주에 걸쳐 그동안 살펴온 대답을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신앙과 성숙] 시리즈에서 제가 다루어온 큰 주제들은 6가지였습니다. 이 6가지는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가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개념들입니다. 그것들은 순서대로, 공동체, 말씀, 기도, 고난, 시간 그리고 두 나라 시민으로 살아가는 상황입니다. 처음 다섯 가지 주제는 우리 신앙의 성숙에 필요한 요인들이라면, 여섯번째 주제인 두 나라 시민으로 살아가는 상황이라는 것은, 우리 신앙이 외적으로 표현되는 상황에 대한 세계관적 이해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여섯 가지 요소 중에서 3가지인, 말씀과 기도 그리고 공동체에 대해서 나누고, 다음 번에 이 시리즈의 마지막 설교로, 고난과 시간 그리고 두 나라의 환경을 다루고 이 긴 시리즈를 마치려고 합니다.


말씀
먼저 다룰 주제는 말씀입니다. 말씀은 신앙의 마스터키입니다. 말씀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중생하게 하시고(벧전 1;23; 약 1:18), 말씀으로 거룩하게 빚어 가십니다(요 17:17).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없다면, 우리 신앙은 존재하고 설 수 있는 모든 토대를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인 디모데전서 4:5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고 말씀합니다. 경건의 훈련과 다른 모든 은혜의 수단을 동원하고 열심으로 경건을 추구한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신앙은 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알리시려고 계시하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 자신을 알리시기 위하여 계시하여 주신 말씀인 성경을 떠난다면, 피조물인 우리는 하나님을 알 길이 없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창조 세계를 통해서도 당신 자신을 알리셨습니다. 이것을 자연계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연 계시는 우리가 구원에 이를 수 있을만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구속 사역—을 분명하고 충분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특별 계시인 성경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 등록한 교인 여러분에게 늘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을 매일 분량대로 읽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중 한 장은 좀 더 깊이 묵상하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백성에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b).”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생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살아난 사람은 영적 식욕을 느끼게 되고, 이 식욕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음으로써 채워집니다. 만일 여러분이 거의 이런 영적 식욕을 느낀 적이 없으며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을 필요로 한다고 느낀 적이 없다면, 여러분의 영혼은 매우 위험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비록 우리의 게으름과 육적 필요에 대한 민감함은 우리 영혼의 주림과 갈망을 위협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한 신자는 이 영적 싸움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필요로 하고 이 말씀을 먹으려 하며 먹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단순히 “말씀을 읽는다, 말씀을 묵상한다, 말씀을 공부한다. 말씀을 듣는다” 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런 행위들 자체가 우리를 기계적으로 변화시키지 않고 이런 행위들이 자동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만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은혜의 수단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단순한 행위 이상의 것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일상에서 쉬운 예를 들어보지요. 아이들을 기르면서 때때로 밥 먹이는게 힘든 경우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한마디로 단정해서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대개 배불러서 그렇지 않을까요? 저는 우리 역사에 배고프던 시절에도 과연 아이들 밥 먹이는게 힘들었을까 생각해봅니다. 부모들은 아이가 배고프지 않아도 밥 때가 되니 밥을 먹이려고 합니다. 며칠을 굶길 수는 없겠지만, 만일 아이들이 배가 고프면 밥 먹이는게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적용해봅시다. 영적으로 허기를 느끼지 않는다면 우리는 먹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고, 먹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충분히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그에게는 영적 양식에 대한 욕구보다 다른 생각으로 가득하고 다른 욕구가 많습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이 얼마나 허기, 갈증, 욕구, 욕망과 관계가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신앙생활에서 위험한 것은 허기, 갈증, 욕구, 욕망 없이 하는 영적 행위들이 아닐까요? 성경은 그래서 이런 표현들을 즐겨 사용합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사 44:3).”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 22:17).”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계 21:6).”
그러니 우리가 어떤 태도로 하나님의 말씀에 나아가야 하겠습니까? 주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39–40).” 그들은 성경을 연구했고 성경으로 나아갔습니다. 매일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성경으로 가면서도 주님께 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권면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습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열지 말고, 말씀을 열기 전에 여러분의 영적 배고픔, 목마름, 영적 갈망과 욕구를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만일, 정직하게 여러분의 상태가 그런 허기와 갈증을 느끼지 못한다면, 불쌍히 여겨주셔서 여러분에게 그런 허기와 갈증을 주시기를 간구하십시오. 사실 이런 기도 조차도 물론 형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이 영적 상태를 살피고 정직한 마음으로 은혜를 구해야 하는지를 더욱 면밀하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말씀을 통하여 주님 자신에게 나아가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의 영적 생명을 유지할 뿐 아니라, 여러분의 신앙이 성숙함을 향해 가게 하는 결정적인 열쇠가 될 것입니다.


기도
두 번째로 우리가 생각할 주제는 기도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고 했습니다. 말씀은 기도와 함께 짝을 이루어 우리 신앙을 받치는 두 축, 혹은 두 기둥을 형성합니다. 두 개의 기둥 가운데 하나가 무너지면 남은 한 기둥이 온전하다고 할지라도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기도 없는 말씀은 우리를 교만하게 할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게 해주는 기능을 합니다. 기도가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영혼은 없습니다.
이것은 기도가 하나님의 말씀과 독립적으로 설 수 없다는 것을 또한 의미합니다. 기도는 단순히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의 도움으로 얻어내는 알라딘의 램프나 도깨비 방망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없이 홀로 서는 기도 역시 우리의 신앙을 올바르게 지탱해주지 못할 뿐 아니라, 온전한 신앙의 성숙으로 우리를 데려가지 못합니다. 여기서도 균형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려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기도의 숨결 속에 흘러가야 합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한 예가 있습니다. 언젠가 말씀 드렸지만, 매튜 헨리(1662~1715)는 유명한 성경주석 가 입니다. 그는 분주한 목회의 일정 속에서도 하루 8시간을 성경연구에 보내면서 구약 성경 전체의 주석을 썼고 신약성경의 복음서와 사도행전 주석까지를 쓰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의 주석은 18세기의 조지 휫필드와 찰스 웨슬리 그리고 19세기의 찰스 스펄전이 즐겨 읽었고 극찬했던 주석이고 지금까지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을 받는 경건한 주석입니다. 그의 주석이 이토록 오랜 세월 속에서 경건함이 흘러 넘치고 하나님의 말씀의 영적 능력을 드러내는 주석일 수 있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그의 성경 실력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여 얻은 지식은 그의 기도로 승화되었습니다. 작년 여름 출판사로부터 『매튜 헨리 기도』라는 책의 추천사를 부탁 받은 적이 있습니다. 추천사를 쓰기 위해서 그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그의 주석에 담긴 경건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얻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그의 기도 속에 그대로 녹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추천사를 썼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릴 때 힘이 있다. 300여 년 전에 쓰인 매튜 헨리의 <기도>는 오늘날의 피상적 경건의 외양에 가해진 메스다. 성도에게 주신 은혜의 방편인 말씀과 기도가 이 책에서 하나가 되었다. 이 책은 나뉠 수 없는 것을 나눠 버린 우리 시대의 삐뚤어진 경건과 우리 신앙의 불균형과 부조화를 고발한다.
매튜 헨리의 <기도>는 어떻게 우리의 신학과 교리가 기도 속에 녹아들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우리가 배운 말씀의 교훈은 우리 삶과 경건이 되기 전에 먼저 기도 속에 녹아져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
매튜 헨리는 시편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그의 기도로 삼았다. 당신의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 되기를 원한다면 이 책을 들고 읽으며 기도하라. 인간의 말로만 무성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의 기도의 숨결 속에 고동치는 기도를 배우라.”
목회를 하면서,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이 깨달을 수 있도록 설교하고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에 대한 성경적 교훈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기도하도록 여러분의 무릎을 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을 기도의 골방으로 강제로 밀어 넣을 수도 없습니다. 기도회라는 이름으로 모여서 여러분의 심령에 기도의 불을 붙일 수 있는 능력도 제게는 없습니다. 그러나 제게 한 가지 소망은, 제가 전하고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심령에 불을 던지고, 배고픔과 목마름을 모르는 여러분의 영혼에 진정한 영적 허기와 갈증을 불러일으키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심령에 이런 은혜를 허락하셔서, 여러분의 심령이 가난해지고 여러분의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러 골방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해 지는 은혜를 입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설교와 가르침을 통해서 깨달은 모든 말씀이 여러분의 기도 속에 녹아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깨달은 은혜가 여러분을 더 깊은 기도의 자리로 데려가고 전에 알지 못했던 새롭고 더 큰 은혜를 주님과의 독대 속에서 누리게 되기를 저는 바랍니다. 이렇게 되어야 진짜가 아니겠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배우는 일에 열심이고, 또 모든 설교와 가르침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닫고 배우고 알게 될 때, 여러분의 삶에 기도가 없다면, 그 모든 것이 여러분의 기도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모든 지식은 도리어 여러분을 교만하게 하고 자기 의에 가득하게 만들 것이며 여러분의 영혼에 조금의 유익도 주지 못하는 독소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여러분의 영혼에 심히 위험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과연 저는 여러분의 영혼을 위하여 선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의 영혼이 저의 목회와 말씀 사역을 통하여 유익을 얻고 누리는 것이 맞습니까? 아니면 도리어 여러분의 영혼은 이로 인하여 더 악화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지만, 모든 신앙의 위인들이 고백했듯이, 기도는 신앙 생활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기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낮추는 것이고, 우리의 곧은 목을 꺾고 우리의 죄 성을 죽이는 일을 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자기 자신에 대하여 죽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의 죄 성, 우리의 육신과 더불어 싸우는 영적 전투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기도가 정녕 이런 것이라면, 말씀을 대할 때와 같이,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 없는 기도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이 없는, 오히려 자기 긍정과 자기 의로 충만해지는 기도가 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기도가 많아지고 오래 가면, 그 영혼은 점점 더 영적 피폐함과 함께 경건한 어른으로 가는 게 아니라,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에도 조심하고 주의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고 말씀하십니다(막 14:38). 바울 사도도 에베소 교인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18).” 그냥 기도가 아니라, 깨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가 참된 기도가 되기 위하여, 자기의 죄를 죽이고, 육신과 싸우며, 자기를 부인하며 주님께 나아가는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욕구를 죽이고 그것을 주의 기쁘신 뜻 앞에 복종시키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그렇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뜻을 주장하고 고집을 부리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내 고집이 하나님을 이긴다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기도가 아닙니다. 소위 ‘믿음으로 드리는’ 모든 기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가 이것이 아닙니까? 내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 내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한 가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기도 자체에 초점을 맞추면 기도 속에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하나님을 만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아십시오. 우리는 기도의 능력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알고 믿기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초점은 기도가 아니라 거룩하고 선하신 하나님 자신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 대화를 나누는 상대방의 인격 보다 도 대화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옳지도 합당하지도 않은 이치와 같습니다.
실제적 권면을 드립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은혜, 지상에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감미로움과 기쁨과 감격과 영광을 맛보고 누리기를 사모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시간을 정하십시오. 일정한 시간에 우선순위를 두고 그 시간에는 방해할 만한 모든 것을 뒤로 제쳐 놓으십시오. 새벽, 밤 혹은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방해 받지 않을 수 있는 가능한 시간대를 정하십시오. 만일 새벽을 선호한다면, 새벽기도회에 나오기를 결정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결정하는 것은 여러분이 오늘 아니 지금 해야 하는 가장 우선적인 일이고, 기도의 여정으로 들어가는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공동체, 교회의 삶
이것은 시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집니다.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비록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거나 날마다 그 말씀을 읽고 있고 모든 예배에 참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때 가만히 있는 것은 가장 위험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이 자리를 벗어나 은혜를 받으려고 애를 씀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심령이 계속해서 혹은 오래도록 영적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끼지 못하고 도리어 마음이 은혜에서 멀어지고 굳어지는 날들을 경험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기도도 합니다. 하지만, 1분도 집중하지 못하며, 영적 어두운 밤을, 침체를 경험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여기에 공동체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혼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천로역정은 혼자 걸어가는 길이 아닙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는 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믿음의 친구들과 함께 걸어가는 여정입니다. 여러분은 결코 혼자 신앙의 경주를 완주할 수 없습니다.
함께 간다는 것은 때로는 혹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불편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저 교회에서 이름 정도를 알거나 가벼운 인사 정도 나누는 관계를 의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이고, 우리는 가족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서로를 향하여 가지는 존재로서 살아갈 것을 요구 받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벧샬롬교회 라는 한 지역교회의 멤버/교인으로 등록을 했다는 것을 바로 그것을 의미하고 여러분은 거기에 동의를 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모든 형편과 사정과 상황을 모두에게 전부 오픈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때로는 순진하게 이상적이어서 감당하기 힘든 모든 것을 다 오픈 하고 상처를 받는 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서로 다름으로 인하여 또 미숙함으로 인하여 부딪히기도 합니다. 교회에는 영적 어른도 있지만 아무 것도 감당할 수 없는, 혹은 다른 형제들에게 짐과 부담을 주는 영적으로 미숙한 어린 아이들도 있습니다. 교회가 든든해지는 것은, 교회 안에 경건한 어른들이 많을 때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숙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일도 물론 아닙니다. 우리 교회의 코이노니아는 형식적 소그룹이 아닙니다. 벧샬롬교회의 교인이 코이노니아에 참여하는 것은 선택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코이노니아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여러분이 “나는 가족이 아닙니다. 아무도 내게 간섭하지 마세요”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은 여러분의 영적 형편과 사정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형제들과 나눌 수 있어야 하고,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혼자서 고민하고 갈등하고 싸우지 말고, 형제들의 도움과 기도를 요청해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 가족의 의미입니다. 여기서 시작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우리에게 명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
서로 돌아보고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는 명령을 우리는 받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또 이렇게 권면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2–13).”
여러분의 가족 중에 누가 심각하게 방황하고 있고 망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 몰라라 할 수 있다면 그건 가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가족은 이와 같이, 서로를 돌아보고 혹시 누가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어서 악한 마음의 상태에 이르지 않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매일 피차 권면하여야’ 할 책임을 우리 모두가 가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유혹은 놀라울 정도로 무섭고 그 어느 때라도 우리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불을 켜십시오. 내 형제 중에 누가 시험에 들지 않았는지, 내 형제 중에 누가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지 않은지 살피십시오. 사실, 이것은 어쩌면 우리에게 낯선 요구일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은혜를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거의 정상적이고 보편적인 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이것은 비정상의 상태입니다. 여러분이 은혜를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비정상의 상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신자의 정상적 상태는 매일 은혜를 받고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중요합니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게 아닙니다. 교회는 우리 신앙 성숙에 필연적으로 중요합니다. 시편 133편을 함께 읽겠습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1–3).”
함께 연합하여 사는 삶, 이것이 영생입니다. 교회의 삶이 영생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자기 몸을 주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사랑을 따라, 서로에게 우리 자신을 줌으로써 영생을 누리고 경험합니다. 이것이 천국의 삶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는 삶, 삼위 하나님의 영원하고 완전한 기쁨의 교제 속에 들어가 그 사귐의 영광과 행복을 누리는 삶입니다. 성도가 교회의 멤버가 된다는 것은, 바로 이 영광스러운 삶을 누리도록 초대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공동체 없이 성도의 영적 성숙은 없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그렇게 강하고 그렇게 완전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은혜, 은혜, 은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는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주신 은혜의 방편, 은혜의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은혜를 받으십시오.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를 받아 누리십시오. 이 은혜가 여러분을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으로 빚어가게 될 것입니다. 은혜를 받지 못할 때,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히 채워진 공동체는 여러분을 다시 은혜의 자리로 들어오도록 부르고 붙잡아주고 격려하고 그 은혜를 흘려 보내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은혜를 받지 못하고 살아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배고프고 목마른 심령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그리스도께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주의 약속대로, 채워 주시고 배부르게 하시며 갈 한 심령에 은혜의 단비를 주실 것입니다. 지금 그런 마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십시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