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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신앙과 성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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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78 - 경건한 성도가 되기 위하여 B

베드로후서 1:3-1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9-05-12

말씀내용
영적 성숙, 성품이 주님의 아름다운 성품을 드러내야 하는 문제는 믿는 사람에게는 결코 가볍게 다루어질 사안이 아닙니다. 이 성숙의 문제는 우리가 매일의 신앙 생활 속에서 열심을 품고 이루어가야 할 중요한 과제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과연 이런 목표를 품고 살아가고는 있는지, 또 성숙의 과정을 의식하고 걸어가고는 있는지 우리 자신의 신앙 생활을 근본적으로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난 주에 이어 [경건한 성도가 되기 위하여]라는 같은 주제로 말씀을 상고하려고 합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경건한 성도는 균형을 갖춘 사람이며,균형을 갖추었다는 말은, 극단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아름다운 조화를 드러내는 사람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또 사도 베드로가 본문을 통해서 말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경건에 이르는 삶을 살기 위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주셨으며, 그것은 무엇보다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 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경건에 이르기 위해서, “한 순간도 놓치지 말고 받은 것을 의지해야한다” 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받아 누리는 길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통해서 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앎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낌없이 베풀어주신 모든 것을 누리며 경건한 성도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과 덕에 이르게 되고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게 됩니다.

1. 또 하나의 균형: 은혜와 책임 (5,10)
우리는 [경건한 성도가 되기 위하여]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또 하나의 균형을 생각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 베드로는 경건이 마치 우리가 하기에 달린 것인 양 강조합니다. 5절에서 ‘더욱 힘써’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대단한 열심을 강조하는 매우 강한 어조의 말입니다. 또 10절에서도 ‘더욱 힘써’ 라고 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신앙생활은 힘쓰고 애써야 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저절로 되는 게 아니며, 우리가 경건한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일은 아무 수고도 없이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얼마나 오래 해오셨습니까? 수십년에서 수년 혹은 수개월에 이르기까지 다양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우리의 경건이 그 시간에 비례하여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건을 위하여 수고하고 애써야 합니다. 사도는 그것을 여기서 강조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5절 이하의 말씀과 3~4절의 말씀이 연결되는 논리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3~4절에서는 경건한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했습니다. 성도가 이루어야 하는 경건은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모든 은혜와 선물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경건과 신앙의 성숙을 이루라는 명령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선행할 때 성도는 경건한 삶을 애써 추구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책임의 균형이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은혜가 선행하지 않고 우리의 수고로 이룬 경건이 된다면, 그 경건은 헛 것일 뿐 아니라, 우리 교만의 원천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은혜 없는 수고는 자기 의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우리의 수고와 책임이 전혀 따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참된 은혜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안에서 일하고 역사하고 우리를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책임은 언제나 함께 가며, 그 중에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언제나 선행합니다. 경건한 성도의 삶에서는 언제나 이 균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2. 참된 경건
우리가 좀 더 나아가기 전에, 경건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잠깐 짚고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경건이 무엇입니까? 영어로 경건은 godliness 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의미하는 God 에 ‘-liness’라는 접미사를 써서 ‘하나님 닮음’ 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말입니다. 본문에서 경건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도, 성경의 하나님을 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대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덕’에 이르는 삶이고 그 영광과 덕을 드러내는 삶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과 덕에 이르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신앙은 보이지 않지만, 그 신앙이 참된 신앙인지 거짓된 신앙인지, 또는 그 신앙의 성숙함의 여부는 삶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어 있고, 이점에서 신앙은 삶으로 보여지고 평가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와 모든 외양은 결코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닙니다. 특히 우리의 그리스도인됨이 세상에 더 널리 알려질수록 우리의 외적 태도와 삶의 모습은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외적으로 드러나는 목사나 장로나 전도사나 어떤 타이틀 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은, 경건함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경건함과 신앙의 성숙함을 직분의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음에도, 교회가 이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직분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를 채워주는 방식으로 행하게 될 때, 우리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결과를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라면 외적 직분이나 명예가 아니라, 참된 경건을 힘을 다해 추구해야 마땅합니다. 이제 참된 경건이 어떤 방식으로 세워져야 하는지,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3. 여덟 가지 덕목들(5~7) 그리고 그 결과(8~9)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의 기초 위에서, 성도는 경건을 더욱 힘써 추구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본문에서 8개의 덕목을 제시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경건의 출발점은 믿음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믿음으로 시작하는데, 이것은 매우 합당한 경건의 출발점입니다. 여기 제시되는 8가지 덕목들의 순서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학자들은 둘로 갈립니다. 사도가 만일 여기서 여덟 가지 덕목을 아무 순서의 의미 없이 제시하려고 했다면, 그는 갈라디아서에서 바울 사도가 성령의 열매를 제시했던 것처럼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그러나 본문의 표현들은 사도 베드로가 순서를 상정하고 서술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믿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믿음’을 기독교 신앙의 기본 교리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이해하지만, 여기서는 말 그대로 하나님께 대한 신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을 따라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기독교 신앙과 경건에 속한 모든 덕목의 기초입니다.
둘째로, ‘믿음에 덕을 더하라’ 고 말씀합니다. 두번째 덕목은 덕(virtue)입니다. 3절에서도 ‘덕’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이 말은 탁월함(excellence) 또는 선하심(goodness)으로 번역할 수 있는 아주 포괄적 의미를 담은 단어라고 설명 드린 바 있습니다. 이 단어는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단어였습니다. 이것은 어떤 사물이 가지는 기능, (존재) 목적, 본질과 관련되어서, 사람에게 적용될 때에는 덕목, 성품의 탁월함을 의미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덕’ 이라는 개념은 ‘~다움’ 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리스도인이 가장 그리스도인다운 것을 말하고, 믿음을 가진 사람이 가장 믿음을 가진 사람다운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믿음을 가진 사람 다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덕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를 (성품의) 탁월함 혹은 선함(혹은 유용함), 또는 덕이라고 번역을 합니다.
로이드존스는 이것은 단순히 성품의 탁월함을 넘어, 도덕적 능력, 영혼의 활동과 힘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덕은 믿음을 살아있게 만들고 능동적인 믿음이 되게 만드는 힘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성품으로, 삶으로 드러나게 하고, 믿음에 걸맞은 행동, 외적 태도로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여러분은 더욱 힘써 여러분의 믿음이 안으로부터 밖으로, 여러분의 성품에서, 태도에서, 말과 행동에서 드러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이미 여러분에게 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그것을 붙잡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알아감으로써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모든 자원들을 잘 사용하여 여러분의 믿음에 덕을 더할 수 있습니다.
세번째로 본문은, ‘덕에 지식을’ 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지식은 영적 이해력,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이런 지식이 결여될 때, 믿음이 삶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을 합당하게 조절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지식은 일종의 조절 장치입니다. 조절 장치가 없다면, 이것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넘치고 말 것입니다. 지식이 없는 행동, 지식이 없는 성품, 지식이 없는 덕은 불안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언제나 지식을 멸시하거나 거부하지 않습니다. 지식이 없는 신앙은 언제나 치우칠 수 밖에 없고, 그런 신앙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으며, 성품의 열매를 바르게 맺을 수 없게 하기에, 사도는 여기서 ‘덕에 지식을 더하라’ 고 말씀합니다.
네번째는, ‘지식에 절제를 더하라’ 는 것입니다. 절제는 자신의 욕망과 행동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지식을 토대로, 지식을 사용하여 적절하게 자기의 욕망과 행동을 조절하고 절제할 수 있습니다. 절제는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일입니다. 참된 지식을 따라서 행해져야 하는 절제는 또한 성령의 열매이기도 합니다(갈 5:23).
다섯번째는, ‘절제에 인내를 더하라’ 는 것입니다. 인내는 어려운 시련의 상황과 시간 속에서 지속적으로 믿음 안에 머물고 믿음을 지켜내면서 견디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광야의 백성들은 인내를 배워야 했습니다. 우리 역시 인생의 버거운 자리에서 인내를 배울 것을 요구 받습니다. 참된 믿음은 인내로써 그 존재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 인내와 믿음은 거의 동의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섯번째로, ‘인내에 경건을 더하라’ 고 말씀합니다. 여기 경건이라는 말이 또 나옵니다. 이미 이 단어는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라고 할 때 나온 단어임에도, 여기 신앙과 경건의 목록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3절에서 말씀한대로,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경건에 이르도록 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경건에 이르기 위하여, 경건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드러나고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서 힘쓰고 애써야 하는 우리 자신의 책임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일곱번째는, ‘경건에 형제 우애를 더하라’ 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믿음은 사랑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말씀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 그러나 참된 믿음이 만들어내는 사랑은 형제 사랑이라는 울타리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성도의 여덟 가지 덕목은 마지막으로,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는 말씀으로 맺습니다. 형제 우애가 헬라어로 ‘필라델피아’라는 말이 사용되었다면, 여기서 사랑은 ‘아가페’라는 말이 쓰였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만들어낼 뿐 아니라, 우리가 믿음 위에 세워가야 하는 사랑은 형제 사랑의 경계를 넘어 조건과 경계 없는 사랑으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경건은 진리로 까다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상이 사도 베드로가 그리스도인다움, 경건함의 덕목으로 제시한 것들입니다. 우리가 경건한 성도가 된다는 것은, 이런 덕목들을 하나 하나 우리 믿음 위에 더해가는 일에 힘을 써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 하나 쌓여가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사도는 계속해서 8절에서 말합니다.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벧후 1:8).” 이런 것들이 쌓이게 되면, 이 경건은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게으르거나 열매 없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지켜줄 것이라는 말입니다. 반면, 이런 경건을 지니지 못하게 되면, 그는 9절에서 말씀한대로, 영적인 맹인이 되어 자신의 죄용서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하고 되새기는 일에서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중요하지 않은 일에 삶을 드리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이 없는 사람은 그 있는 것 마저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4. 힘써 경건을 추구해야 할 이유(10~11)
이제 10~11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다시 한 번 ‘더욱 힘써’하는 말로 성도들을 재촉하면서 일단의 결론적 권면을 줍니다. 무엇보다 경건한 성도들이 되기 위하여 더욱 힘써야 하는 일은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는’ 일입니다. 결국 성도의 경건은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해줍니다.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참된 경건을 추구하지 않고 살아감으로써 영적 맹인이 되고, 또한 확신을 상실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참된 경건과 확신은 비례합니다. 또한 경건이 가져다 주는 확신은 성도의 넘어짐을 방지해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와 같이 ‘더욱 힘써’ 경건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주실” 것입니다(11).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단어가 있습니다. ‘주시리라’ 는 단어입니다. 조금 전에 사도 베드로는 이 단어를 썼는데, 그것이 우리말 성경에서는 7절에, ‘더하라’ 라는 단어입니다. 헬라어 성경에는 어순상, 이 단어가 “너희 믿음에 덕을” ‘더하라’ 는 말로 5절에 나옵니다. ‘더하라’ 는 말과 11절에 ‘주시리라’ 는 말은 같은 단어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함으로써, 경건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에게, 경건의 덕목들을 자신의 삶에 공급하여 주는 성도들에게,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행위 구원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와 같은 확신이 힘써 경건을 추구하는 성도들에게 열려져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경건을 힘써 추구하는 삶이야말로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불확실성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이런 신앙의 확신을 갖고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이런 확신을 안고 살아갈 때, 성도는 이 세상에서 시련을 만날 때에도 흔들리지 않고 강할 수 있는 것입니다.

5. 적용적 교훈
이제 말씀을 맺기 전에 이 말씀을 토대로 몇 가지 적용적 결론을 생각해보겠습니다.
A. 최소한의 기준으로 만족하는 신자?
오늘 본문의 말씀과는 반대로, 교회의 현실을 보면 최소한의 영적 수준에서 만족하고 살아가는 신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즉, 많은 교인들이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으로 만족하고 지옥에 가지 않게 된 것에 만족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과연 참된 성도가 그런 삶에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할까요? 이것은 중요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의 대답 여하는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를 판단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더욱 힘써’ 경건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 이런 경건에 대한 열망이나 욕구가 있습니까? 여러분은 영적 성숙에 이르지 못하는 데 대한 안타까움과 답답함이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에게 이런 생각은 지나치게 영적인 생각으로 느껴집니까? 여러분은 교회를 다니고 있으며, 오래 다녔으며, 오래도록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었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경건은 과연 참된 믿음 위에 세워진 경건입니까, 아니면 인간의 의로움 위에 세워진 좋은 성격입니까?
성경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참된 지식을 가진 사람은 결코 이런 자리에 머무를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더욱 힘써 그리스도를 알고 싶도록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의 경건을 위해서 베풀어주신 모든 것들을 사용하고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정직한 말씀의 거울 앞에서 여러분 자신을 비추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야고보서의 말씀대로, 말씀의 거울로 자신을 보고서도 곧 잊어버리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약 1:23–24).”
B. 경건의 열쇠—은혜
두번째로 생각해볼 적용적 교훈은, 경건의 열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평생 신앙 생활을 하는 동안, 손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열쇠입니다. 최초에 한 번이 아니라, 매일 매일 우리는 이 열쇠로 경건의 삶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 열쇠는 은혜입니다.
토머스 슈라이너는 베드로후서 주석에서 1:3~11절 본문의 제목을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경건의 삶을 위한 토대(GOD’S GRACE: THE FOUNDATION FOR A LIFE OF GODLINESS).”
우리가 경건을 추구하고 우리의 믿음 위에 경건의 모든 덕목들을 더하여 공급하는 일을 힘써 행한다고 할지라도,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사도 베드로가 3~4절에서 밝히 말씀한 대로,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라는 말씀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힘써 행할 모든 토대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의 열쇠를 손에서 놓치는 순간, 우리의 모든 수고와 애씀, 우리의 모든 경건은 무너질 것입니다. 물론 가시적으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가시적으로는 더 견고하게 세워지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경건은 헛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토대를 두지 않은 경건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의 자기 의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거짓 경건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신의 영혼을 무너뜨리며 사람들을 멸시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이 서신을 마치면서도 이렇게 권면해야 했습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8).” 신자의 성장과 성숙의 절대 조건은 반드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안에서의 자라감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복된 은혜가 우리 벧샬롬교회의 모든 성도들과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