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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 신앙과 성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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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77 - 경건한 성도가 되기 위하여 A

베드로후서 1:3-1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9-05-05

말씀내용
재작년인 2017년 4월 9일에 [신앙과 성숙] 시리즈를 시작하였으니 벌써 2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 이 긴 시리즈의 설교의 결론으로, 세 번의 말씀을 더 전하고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의 설교부터는 이 시리즈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경건은 이론이 아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경건한 성도가 되기 위하여>입니다. 이 제목은 우리 모두가 스스로에게 던져야하는 말입니다. 물론 성도가 되는 것은 우리 스스로 하는게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실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설교에서 다루는 문제는, 이렇게 거듭난 성도가 이제 어떻게 진짜 성도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경건한 사람으로 훈련되고 다듬어지고 완성되어 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거듭난 성도는 자기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과 동행하여 함께 그 거룩한 일을 이루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언제나 우리가 성화의 삶에서 넘어지지 않으려면, “내가 하는 만큼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매일 매순간 버려야 합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주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 착한 일을 내 안에서 이루시는구나”하는 고백이 가슴에서 나오지 않으면 우리가 열심히 주님을 섬긴만큼 우리 안에서 자기의가 괴물처럼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만큼, 우리가 하나님의 아름답고 은혜롭고 선하신 성품을 닮아가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언제나 ‘주님을 위해서 내가 한 일’에 주목하는 것이 우리 생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그래서 경건의 모양은 있어도 경건의 참 능력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딤후 3:5).
경건한 성도가 되는 것은, 이와 같이 혼자서 이루는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성령님의 주도적인 은혜 베푸시는 사역이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더불어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교회의 지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하여 아무 책임을 가지지 않아도 되는 관계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등록한 교인이라면, 여러분은 공동체의 지체들에 대하여 책임을 가지고 되고 그것은 관계를 통해서 나타나고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들로서 우리는 서로의 관계—신령한 교제—를 통해서 서로를 경건한 성도로 만드는 일에 쓰임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또한 교회를 통해서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입니다. 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서로를 향해서 그와 같은 영적 책임을 지닌 존재라는 겁니다. 이것은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도 일어납니다. 가령, 가정을 생각해보십시오. 싱글 라이프를 마감하고 부부가 되어 함께 산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면서도 동시에 서로를 책임져야 하는 무거운 일이기도 합니다. 자녀들을 낳아서 기르면서 부모들은 그것을 더욱 경험하게 됩니다. 경건한 부모들은 경건한 자녀들로 기르기 위해서 기도하면서 말씀을 가르치고 애를 씁니다. 이것은 의식적 노력입니다. 그러나 한편, 자녀들의 미숙함과 죄성에서 거침없이 흘러나오는 모습을 대면하면서, 부모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보게 되고 그로 인해 경건한 성도로 빚어져 가기도 합니다. 자녀들은 부모들을 빚어 가시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동일한 일들이 다 일어납니다. 심지어 우리의 미숙함과 죄성에서 비롯되는 말과 태도와 행동을 통해서까지도 말입니다. 그럼에도 안전한 것은, 그곳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가장이 되시고 성령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구속받은 성도들을 그 어느 것으로도 끊을 수 없는 사랑의 띠로 묶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이론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론과 현실의 차이를 수없이 많이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좌절한 나머지, 이론을 버리고 현실에 적응하고 살자는 결정을 내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런 이론이 아닙니다. 성도의 성화와 교회의 하나님 나라 구현은 단순히 우리가 취하고 버릴 수 있는 이론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묻은 복음이 그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이론을 버리는 것은 복음을 버리는 것이고, 성화와 교회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포기하는 것은 믿음을 배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향이 관념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경이 가르치는 모든 말씀은 단지 이론이 아니라, 죄인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인줄을 믿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은 죄인의 양심을 모든 죄책으로부터 자유하게 할 뿐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인생이 되게 만듭니다. 우리는 날마다 이 복음을 들어야 하고, 이 복음으로써 믿음이 강화되어야, 신자로서 걸어가야 하는 길을 제대로 걸을 수 있고, 주의 은혜로 말미암아 마침내 ‘경건한 성도, 경건한 어른’으로 빚어져가는 것입니다.

2. 경건한 성도는 균형을 갖춘 사람이다.
“경건한 성도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정의해야 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라고 정의하시겠습니까? 많은 정의가 가능하겠지만, 저는 가장 먼저 “경건한 성도는 균형을 갖춘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를 먼저 설명드리지요.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을 가리켜 ‘아름다우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물론 ‘거룩한, 선하신, 영광의, 전능한, 전지한, 무소부재한’ 등등 많은 수식이 가능하지만, 그가 ‘아름다우신 하나님’이라고 묘사했을 때, 그는 하나님에게서 완전한 조화와 균형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삼위로 계시는 하나님의 조화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조화, 화음, 어울림, 균형의 원형입니다. 세상에서 우리는 수많은 부조화, 불협화음, 다툼, 불균형을 보면서 살아갑니다. 그 모든 것은 우리의 눈쌀을 지푸리게 하거나, 마음과 귀를 불편하게 합니다. 부조화 보다는 조화가, 불균형 보다는 균형이, 불협화음보다 화음이 아름답습니다. 비율이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지는 것을 가리켜 황금비(Golden ratio) 혹은 황금분할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경건한 성도를 균형을 갖춘 성도라고 할 때, 어떤 균형들을 말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경건한 성도에게서 어떤 균형들을 보기를 원하십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어떤 면에서 균형을 가진 경건한 성도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제일 먼저, 신앙과 성숙 또는 신앙과 성품의 균형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신앙과 성숙]이라는 시리즈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바로 이런 불균형을 너무나 많이 보았기 때문이고 또한 이 문제에 오해가 심각하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심지어 믿음이 좋다고 일컬어지는 사람들 중에서 성숙함이 없는, 성품이 다듬어지지 않은 채 거칠고 이기적인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은 언제라도 교인들의 이런 면을 더 예리하게 보고 비난할 준비가 되어 있는 듯 합니다. 신앙은 참되지만, 성품은 미숙하고 이기적일 수 있다”는 말을 우리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두 나라 시민으로 사는 신앙>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 신앙은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은 두 나라 시민으로 살아가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바른 방식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교회 안에서만 먹히는 신앙이라면, 그 신앙은 가짜이거나 심히 미숙하고 어린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도, 교회 안에서 보이는 모습과 가정과 직장 등 세상에서 보이는 모습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그 신앙은 거짓 신앙, 위선적 신앙일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주 어린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성숙함을 성품에서 드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와 장로, 집사와 권사 등 교회에서 직분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에서 그 신앙에 걸맞는 태도와 성품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영적으로 심히 위험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참 신앙은 참 성품을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경건한 성도는 신앙과 성품에서 균형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둘째로, 첫번째 내용과 비슷할 수 있지만, 믿음과 행위의 균형을 말해야 할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단정합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야고보서 2:17–26).”
믿음과 행위의 관계는 뿌리와 열매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뿌리가 없이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믿음 없이 행하는 선행은 뿌리 없는 열매와 같이 거짓된 것—죄인인 인간의 죄성에서 비롯된—이기에,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것을 말씀합니다.
셋째도 앞의 내용들과 비슷할 수 있는데, 과정과 결과의 균형입니다. 경건한 성도는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를 중시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기에 그렇습니다. 심지어 교회 일을 하면서도, 과정을 무시한 채, 결과만을 내려는 직분자들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법을 어겨도, 교회만 손해를 보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부정직한 것이며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결코 어울리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한 성도는 그렇게 행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동기와 과정을 모두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범사에 경건한 신자는 시작부터 끝까지 믿음에 부합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게 행하는 사람입니다.
넷째로 말씀과 기도의 균형입니다. 사람이 성경 지식은 강조하면서 기도는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기도에 많은 시간을 쏟는 것 같은데, 말씀을 배우는 것을 경시합니다. 이런 상태는 건강하지도 않으며 바른 영적 성숙으로 갈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반드시 이상한 교인이 되고 세상 사람들의 눈에도 아름답게 보이기는 커녕 기분을 상하게 하기 쉽습니다. 물론 교회의 지체들에게 영적 유익을 끼칠 수도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고 말씀합니다(딤전 4:5).“
다섯째로 홀로 있음과 함께 함의 균형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말씀하시고 그를 위하여 하와를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언제나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고 이야기나누는데 모든 시간을 다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그럴 수도 없지요. 사람에게는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혼자서 생각하고 고민하고 계획하고 또는 독서를 하며 보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또한 성도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독대하는 시간입니다. 만일 성도가 사람들과 하루 종일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하나님과 독대하는 시간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영적 건강을 유지할 수 없고, 위선적인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을 잠깐 만나더라도 그들에게 영적 유익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독대하는 시간이 충분히 주어질 때입니다. 이때 성도는 자신이 만났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구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홀로 있는 시간을 통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며 생각과 사상이 깊어지고 성숙해집니다. 경건한 성도는 홀로 있음과 함께 함의 균형을 가지는 사람입니다.
여섯째로, 성숙한 성도는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 대한 균형을 가진 성도입니다. 즉 한시적 관점과 영원의 관점을 균형있게 견지하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을, 특별히 누릴 만 하고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주안에서 감사함으로 누리되, 그것에 자신의 모든 기쁨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영원의 관점에서 좋은 것이든 좋지 않은 것이든 다 지나가는 것임을 압니다. 이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가진 위치나 지위에 스스로 취하거나 압도되지 않습니다. 그런 것에 의해 거만하지도 않으며 주눅이 들지도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지금과 영원 사이에서 평안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일곱번째는 바로 앞의 이 세상과 오는 세상 사이의 균형과도 유사한 면이 있는 균형인데, 교회와 세상 사이의 균형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교회 안에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정에서, 그리고 직장에서 우리가 몸담과 시간을 보내는 모든 장소가 성소이고 예배의 자리이고 믿음을 사용해서 살아가야 하는 자리입니다. 교회일에 충성되지만, 자신의 일상의 직업에서 소홀하지 않습니다.
여덟번째이자 끝으로 한 가지만 더 언급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어쩌면 좀 지엽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요즘 이런 불균형을 특별히 국내정치에 대한 뉴스에서 많이 접할 뿐 아니라, SNS에서도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적잖게 볼 수 있는 일이기에,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유익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태도의 문제인데, 진리 혹은 신념의 주장과 태도 사이의 균형입니다. 종종 자신의 정치적 진영, 혹은 신학적 입장을 주장하기 위해 상대방에 대해서 지나치게 극단적이고 무례한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특히 소위 개혁신학을 주장하는 분들에게서 이런 사례를 많이 봅니다. 자신이 믿는 개혁신학과 조금 다르게 말하거나 다른 이해를 표명하는 분들에 대해서 너무 거칠고 무례합니다.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다른 분들의 인격에 대해서 무례할 수 있는 권리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또 우리는 성경에 대한 자신의 해석만이 옳다고 말할만큼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 앞에서 조금 겸손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리는 사랑과 함께 갑니다. 주의 말씀대로,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고전 13:5~6). 무례함은 경건한 성도의 덕목일 수 없습니다.
이런 일은 정치의 영역에서도 많이 일어납니다. 조심스럽지만, 한 분의 이름을 언급하겠습니다. 혹여 이 언급으로 기분이 상하는 분이 없으시길 바랍니다. 이것은 저의 개인적인 정치적 입장과 무관하게 드리는 말씀이니, 주의 가르침에만 집중하십시오. 이 것은 물론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많은 ‘교인—정치인’들에게서 보는 문제입니다.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전도사로도 교회를 섬기셨다고 하는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를 언급하려는 것입니다. 그분의 공개적 발언이나 태도에서 저는 극단적 무례함을 봅니다. 진리의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가 무례해서는 안 된다면, 정치적 신념을 주장하기 위해 경건한 성도의 정도를 넘어서는 것은 자신의 경건을 허무는 일이 되고, 많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상하게 하며, 주를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오해하게 만들기 쉬우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경건한 성도는 자신이 가진 진리와 신념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태도에 있어서 균형을 가진 사람입니다. 진리는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정치적 신념이나 그 무엇이든, 경건한 성도는 상대방의 인격에 대한 사랑과 존중을 가지고 행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부인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에게서 난 자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며(요일 4:7~8),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은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드러난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비록 성경을 나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는 사람일지라도, 비록 나와 정치적 견해를 달리 하고 대립하는 정치 진영에 속한 사람일지라도 말입니다.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균형을 갖춘 경건한 성도는 모든 면에서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흘러넘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지나친 것은 미숙함의 소치일 가능성이 쉽습니다. 자연스러움과 아름다움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한쪽으로 기울어지도록 지나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흘러넘침은 다릅니다. 흘러넘침은 균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것이 밖으로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름답고 자연스럽게 다가오게 됩니다. 그래서 경건한 성도는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닮아가는 균형을 갖춘 성도입니다.

3. 신자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1:3~4)
오늘 본문은, 베드로후서의 서론인데, 사도 베드로는 먼저 신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여주면서 서신을 시작합니다. 3절입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이 경건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모든 것, ‘모든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당신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신자에게 다 주셨습니다. 여기 ‘주셨으니’라는 단어는 받을만한 자격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이것이 무상으로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단어인데, 이로써 신자는 누구나 자신의 삶과 경건을 위하여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힘있으며 보배로운지, 그 약속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은 정욕을 채우는 썩어질 것을 피하고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성한 성품은 하나님의 성품, 신적 성품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온전한 경건한 삶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경건한 삶을 살려고 하지만 그게 안 돼요”라고 변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경건한 삶에 실패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 힘으로 경건한 삶을 이루어 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번번이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신앙 생활의 동력은 경건한 사람이 되겠다는 강력한 의지나 동기가 아닙니다. 성화의 엔진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그 중에서도 사도 베드로는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격없는 우리에게는 있을 수 없는, 감당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약속을 묵상하고 새길 때, 우리는 경건의 삶을 살아갈 동기와 의욕과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 성경에서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러니 한 순간도 놓치지 말고, 여러분이 받은 것을 의지하십시오.” ‘한 순간도’ 그리고 ‘받은 것을’ 말입니다.
이와 같이 신자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경건한 삶을 살아갈 수 없고 성숙과 아름다운 신적 성품에 참여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단지 종교생활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삶일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제일 먼저 자신의 편지를 읽는 성도들에게 이것을 말한 것입니다.

4. 하나님이 주신 것을 얻는 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자, 그렇다면 신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얻어 누리게 됩니까? 어떻게 그 모든 것의 효력을 누릴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의 경건을 위해서 그 능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까? 3절 하반절입니다.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벧후 1:3).” 이 말씀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의 질문들에 한 마디로 대답하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인하여 세상을 이기고 참된 경건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도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셨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한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과 덕에 이르도록 우리를 부르셨다는 의미로 혹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과 덕으로써(~통하여) 우리를 부르셨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덕이라는 말의 뜻은 나중에 5절에서 설명하겠습니다마는, 탁월함(excellence) 또는 선하심(goodness)로도 번역할 수 있는 아주 포괄적 의미를 담은 단어입니다. 대표적으로 공동번역, 새번역, 우리말성경이, 그리고 영역성경으로는 ESV나 KJV이 전자의 의미로 번역했습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오히려 문맥에 더 잘 어울립니다. 경건한 삶을 살게 하심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과 탁월하심(혹은 선하심)의 속성, 그 성품에 이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하나님이심을 앎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낌없이 베풀어주신 이 모든 것을 받아 누리면서 경건한 성도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과 덕에 이르게 되고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가 정말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을 아는 일에 전심전력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의 탁월한 주석을 펴낸 더글라스 무(Douglas Moo)는 오늘 본문에 해당하는 1:3~11의 소제목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기를 힘쓰라”고 붙였습니다. 실제로 사도 베드로가 베드로후서를 통해서 이 서신을 읽는 성도들에게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서신의 처음과 마지막에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후 1:2).” 그리고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8).”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참된 신앙과 참된 경건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아시겠습니까?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성부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실 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요한복음 17:3을 보지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영생은 죽어서 얻는 생명만이 아닙니다. 영생은 지금 이 땅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신자들이 누리는 생명입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삼위 하나님의 교제 속으로 들어가서 누리는 신적 생명인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누립니까?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지금 사도 베드로가 동일한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5. 참된 성도에게 경건은 선택이 아니라 결론이다.
오늘 말씀을 마치기 전에, 여러분과 함께 분명히 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경건은 성도에게는 선택이 아니라 결론입니다. 오늘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이제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경건에 이르는 진보가 있었습니까? 그것을 여러분의 남편이나 아내, 혹은 자녀들이, 혹은 교우들이 알고 인정합니까? 신앙은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신앙은 그 성숙함을 성품으로 나타냅니다. 그리고 성품은 주변에서 오래도록 나를 보고 나를 아는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당신의 영광과 덕(탁월함과 선하심)의 자리로 불러주신 분을 앎으로써, 참된 경건의 삶에 이르게 되고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경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에게 선택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구원 얻는 참된 신앙을 가졌다면, 그 신앙으로 오늘까지 살아오셨다면, 그것이 몇 년의 세월이든 간에, 혹은 빠르거나 더디거나 간에, 여러분은 신앙의 성숙함을 향해 가며 경건한 삶에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경건은 신자의 결론입니다. 거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다시 한 번 유진 피터슨의 번역으로 여러분을 도전합니다. “그러니 한 순간도 놓치지 말고, 여러분이 받은 것을 의지하십시오.”
여러분이 받은 것! 그것을 의지하십시오. 늘 그것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이 모든 유익을 누리는 길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은혜를 구하십시오. “주님, 경건한 성도가 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써 저희를 부르신 목적인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주님을 알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