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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성숙 75 - 두 나라 시민으로 사는 신앙(18) - 신자의 사회생활 : 그리스도인과 정치 B

마태복음 6:33, 요한복음 17:1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9-03-31

말씀내용
75 신자의 사회생활-그리스도인과 정치B(마 6:33)
지난 주일 우리는 그리스도인과 정치라는 주제로 말씀을 상고했습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요점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정치적 이슈로 나뉘거나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한국교회의 현실은 정치적 진영 논리로 나뉨과 분열을 경험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이 문제는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를 혼동하는데 기인한다는 것도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제자들의 문제였으며, 지난 교회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답습해온 잘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하지만 세상 나라는 한시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실로 정치 이슈에 대해서는 열을 올리지만, 하나님 나라와 의에 대해서는 별 생각도 열정도 없는 교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이 진정 거듭난 신자라면,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정치에 관여를 하더라도 적당한 거리감을 가지고 관여하게 하며, 우리의 태도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소위 이 ‘적당한 거리감’은 불성실함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구별을 명확히 할 때,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가치를 부여하게 되고,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서로를 용납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는 자리까지 또는 그리스도의 몸을 찢어놓는 자리까지 정치가 우리를 끌고 가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말했습니다. 정치가 우상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직업 정치인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다운 관점과 태도를 드러내야 합니다. 직업이 그리스도인됨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자리까지 가는 것은 어떤 직업이라고 할지라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가치를 이 세상 속에 구현하면서 살아갈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정치인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고, 시민으로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 역시 이 책임에서 면제될 수 없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인과 정치라는 주제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좀 더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보수도 진보도 아니시다.
“하나님은 보수도 진보도 아니시다”라는 명제로 오늘 말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미국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교회사 교수인 칼 트루먼(Carl Trueman)은 9년 전 흥미로운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의 제목은 미국의 공화당원을 의미하는 Republican과 민주당원을 가리키는 Democrat의 합성어인 Republocrat 입니다. 우리 말로는 『진보 보수 기독교인』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공화당원이거나 민주당원이 될 필요가 없으며, 모든 점에서 보수적이거나 모든 면에서 진보적일 필요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가족, 공동체, 생명과 도덕적 가치의 문제에서는 보수적이면서도, 가난, 인종, 차별 문제 등에 대해서는 진보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어떤 정치적 입장으로 규정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한국교회에서는 이런 기본적인 개념 조차 받아들여지는 것 같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여러분은 신자로서 어떤 정치적 성향을 가질 수 있고 어떤 정당을 지지할 수 있으며 나아가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고 직업 정치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주장하는 이념이나 지지하는 정당, 즉 자신이 취하는 정치적 입장이 기독교이 취해야 할 입장이라고 생각하거나 주장하는 것은 성경에서 지나쳐 나간 그릇된 태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사람의 정치적 성향은 부모의 영향이 지대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이 속해있는 사회적 그룹에도 크게 좌우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사회적 그룹이라는 것은 사회, 경제, 정치적으로 규정된 그룹을 말합니다. 이것은 물론 역사와 지역의 영향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귀족이 진보적 정치관을 가지고 노동 운동에 뛰어들거나 노동자 계층이 보수적 정치관을 가지고 기득권을 지키겠다는 태도를 가지는 것은 드문 일입니다. 사람은 모두 자신의 부모의 영향, 자신이 속한 사회적 그룹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자기 중심성은 결국 자기가 속한 진영, 자기가 지지하는 정치적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강력한 확신으로 투쟁하듯이 싸우게 만듭니다.
하지만 때로는 어떤 사람이 인생에서 자신이 지키고 살아온 가치관과 정치관을 뒤흔들어 놓을 만큼 큰 변화를 경험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자신이 취해왔던 입장과는 정반대의 새로운 입장에 서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가치관과 정치적인 입장을 뒤흔들어 놓을 만큼 큰 변화를 겪을 수 있다면, 신앙은 과연 사람의 정치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입니다. 가령, 진보적 정치관을 가진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보수적 정치관으로 선회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할 수 있을까요? 이점에서 저는 “하나님은 보수도 진보도 아니시다”라는 명제를 먼저 여러분 앞에 꺼낸 것입니다. 혹시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자기와 같은 보수주의자일 것이라고 이해하거나 혹은 진보주의자로 오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파도 좌파도 아니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신앙은 우리의 정치적 입장을 새로운 방식으로 변화시킬 수 있고 변화시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선지자적 관점
그것은, 사람이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복음 안에서 자라가게 될 때, 그가 보수나 진보를 넘어 제3의 관점을 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관점이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은 죄인의 자기 중심성을 벗어나게 하는 힘으로 작동합니다. 참된 신자라면, 전과 같이 자신이 속한 집단 이기주의에 매몰된 사고와 태도에 자신을 바칠 수는 없습니다. 보수적 성향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거듭난 이후에도 여전히 보수적 성향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그는 더 이상 자기가 속한 집단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이기적 동기로 모든 사안을 바라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진보적 성향의 정치관을 가졌던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낙태와 동성애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이슈입니다. 낙태와 동성애에 대한 성경적, 기독교적 입장은 분명하고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문제에 대해서는 분명한 입장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는 이 두 가지 이슈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언약을 통해 세워진 일반 나라에게 요구하시는 기능적 가치는 정의를 시행하는 것입니다. 정의를 시행하는 것과 함께, 성경이 가르치는 약자들을 향한 긍휼도 무시될 수 없는 중요한 가치입니다. 고아와 과부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과 배려는 모세 율법의 곳곳에서 넘쳐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 생명의 존엄함은 경제, 지식, 권력 그 어떤 요인과 이유에 의해서도 억압되거나 박탈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33). 이런 이슈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명확하고 이것은 보수, 진보를 떠나 그리스도인이 취해야할 입장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도 모르게 한쪽 집단, 혹은 진영에 매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무의식적으로 자기 집단의 기득권을 지키거나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리에서 정치적 행위를 행하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야 합니다. 신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가를 늘 자기 비판적으로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세상에서 살아가는 신자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하신 말씀의 참 뜻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라고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요 17:14).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신자는 여전히 이 땅에서 시민으로서 살아가지만, 그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이 언제나 신자의 삶에 긴장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신자는 제3의 관점,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게 된 사람입니다. 이 땅에 살며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때로는 정치적 행위를 하지만, 그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하나님의 의를 최우선적으로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이 땅에서 소위 ‘왕따’가 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이 제3의 관점을 다른 말로, 선지자적 시각, 선지자적 관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교회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대변하는 유일한 기관으로서 언제나 선지자적이어야 하지만, 신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구약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이 신정 사회였음에도 왕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떠나 하나님의 정의를 시행하지 않을 때, 왕과 권력자들을 향해 준엄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꾸짖었습니다. 신자들은 어떤 면에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빛과 소금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새로워진 그 선한 양심을 따라 하나님의 편에 섬으로써,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양심, 행동하는 양심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물론 그 방식은 그들이 인정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만으로가 아니라, 자연법과 양심에 근거한 지혜로운 접근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당연히 정치적 이슈들과 연결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자는 자기 집단 이기주의에 매몰되어 정신을 잃는 자가 아닙니다. 자신이 손해를 보고 불이익을 당할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하나님의 의를 이 땅에 이루며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 이것이 거듭난 신자들이 취하는 근본적인 입장이며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 땅에 그리스도인이 인구 대비 1/10만 된다고 하더라도, 사회가 어떻게 이렇게 총체적으로 부패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 선한 양심을 가지고 정직하게 살아간다면, 어떻게 이 사회가 이렇게 건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자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보다 자기의 이익, 자기 집단의 이익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추구했던 것은 아닌지, 신자라고 하면서 이 세상의 진영 싸움에 더 깊이 말려 들어가서 싸움을 부추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지어 교회 안에서 조차, 정치적 입장에서 자기 편을 만드는 일에 마음을 쓰고 살아갔던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고, 하나님 앞에 통회 자복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 정치의 논리를 교회로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과 논리를 어떻게 이 세상 속에서 실현하고 살아갈 것인가가 우리의 고민과 과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신자는 언제나 선지자적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세상에서 숨겨지지 않고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신중하고 지혜로운 그리스도인
이런 선지자적 관점은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자로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정통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의 관점, 하나님의 관점에 의해 자신의 생각, 전제, 편견, 주장이 늘 교정되어야 합니다. 이런 일이 없다면, 우리는 무지함의 기초 위에서 미숙하고 성급하게 자신의 주장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는 일들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듣고 공부하는 태도는 언제나 시편 139편에서 보는 다윗의 태도와 같아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 139:23–24).”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에 정통할 때,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념 혹은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주장에 담긴 사상적 실체를 더 잘 분별하고 상대화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신중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자본주의는 우파, 우파는 기독교이고, 사회주의는 좌파, 좌파는 무신론 빨갱이 하는 식의 세상의 단순논리를 넘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자본주의에 기초한 소비주의가 우리 삶의 소유에 대한 욕망을 자극하여 만들어내는 허구의 실체를 볼 수 있어야 하고, 사회주의가 가진 이념상의 허구도 꿰뚫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본주의는 물질의 축적에 뿌리내린 인생관을 증대시키는 결과를 피할 수 없고, 이것이 영적으로는 번영신학이 자라나는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번영은 복음이 아닌데 말입니다.
우리는 성도로서 세상의 정치와 이념의 실체를 이해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칼 바르트가 했다고 전해지는 말대로, “한 손에 성경, 한 손에는 신문”을 들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 중 하나는 ‘가짜 뉴스’의 이슈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가짜 뉴스를 만들거나 그것에 속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한 사람의 역사가가 완전한 역사적 사실만을 완전히 객관적으로 서술할 수 없듯이, 뉴스 매체들도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완전한 객관성으로 일어난 사실만을 전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의도를 가졌건 아니건, 일정한 관점으로 해석하며 보도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신중한 그리스도인에게 완전한 진리는 성경 밖에 없습니다. 성경의 빛에서 우리는 세상의 모든 뉴스들을 보고, 지혜롭고 신중하게 분별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두번째로 신자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견해에 관하여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치적 진영이 다르고 주장이 다르면, 서로 외국어로 소통하는 것만큼이나 소통하지 못하는 것을 국회와 정치의 현실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이며 이땅에서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범시민인 신자들은, 자신이 가진 주장이나 가치 또는 정치적 진영의 약점과 한계를 인정할 줄 알 뿐 아니라, 경청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신자는 이땅에서 어느 한 진영이나 주장이 절대선일 수 없고 반대로 절대악이지도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전적 부패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받는 성도들만이 온전하게 취할 수 있는 전제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온전한 성인(聖人)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바른 성도라면, 영적이든 정치적이든 아무리 뛰어난 지도자라고 해도 사람을 무분별하게 높이거나 따르는 자리까지 이르지는 않습니다. 어떤 주장이나 단체, 집단도 완전한 선이나 완전한 악이라고 보지 않은 이 입장이 성도로 하여금 보다 신중하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며 자신과 다른 정치적 입장에 서 있는 형제들을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을 나눌 형제로 대하는 바탕이 됩니다. 적어도 교회에서는 이것이 가능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신중한 그리고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입니까? 신중하고 지혜로운 신자는 세상에서 극단적 이념주의자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정치적 쟁점들에 관한 분명한 기독교적 입장은 존재하는가?
가끔 이런 말들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참된 신자가 과연 이 정당을 지지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이 이런 후보를 지지할 수 있는가?” 이것은 절대선도 절대악도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다소 위험한 말입니다. 신자는 언제나 진리의 편에 서야 하지만, 그 진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지, 역사 속에서 등장하는 이념이나 이데올로기 혹은 정치 집단과 완전히 동일시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느부갓네살이 통치하는 바벨론에서 정치에 참여했던 다니엘과 세 친구를 생각할 수 있고, 아하수에로가 통치하는 페르시아에서 정치에 참여했던 모르드개나 에스더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아합과 같이 악한 왕이 다스리던 북왕국 이스라엘의 궁중에서 대신으로 일했던 오바댜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신중하고 지혜로운 신자라면, 이런 극단적 흑백 논리에 빠져들어 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가령, 동성애와 관련해서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는 차별금지법을 한 번 생각해보지요. 차별금지법은 일반적으로 성별, 연령, 인종, 장애, 종교적 성적 지향, 학력 등의 이유로 차별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법안입니다. 이 차별금지법 제정의 시도는 번번이 보수기독교의 반대에 부딪혀 통과가 되지 못해왔습니다. 차별금지법에 대한 기독교적 입장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무조건 반대는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이 어떤 조건과 이유로 차별을 당해도 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우리가 바벨론에 나그네와 거류민으로 살고 있으며, 바벨론은 교회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법안이 담고 있는 성적 정체성과 관련된 동성애 이슈와 차별 금지를 이유로 전도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조항들은 그리스도인이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동성애 이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더라도 보수적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기독교는 차별 자체를 긍정하거나 찬양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이 땅의 교회는 고아와 과부처럼 사회의 다양한 약자들을 돌보고 그들의 이웃으로 그들이 차별받지 않고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할 소명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신자들에게 동성애 이슈까지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확장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동성애가 죄라는 성경적 입장을 신자들이 분명하게 가지더라고,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또 명백히 성경이 금하는 문제를 우리가 반대할 때, 어떤 방식으로, 어느 정도까지 반대를 표명할 수 있는가 하는 것도 간단한 문제는 아닌 것입니다.
제가 이 복잡한 문제를 꺼낸 이유는 이것입니다. 과연 이런 다양한 정치적 쟁점마다 뚜렷하게 성경적 혹은 기독교적 입장이 존재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성경은 동성애는 죄라고 말씀하고 신자들은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한편 신자들은 이 땅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사회가 도덕적으로 붕괴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최후 보루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의 존재 때문에, 도덕적으로 무너지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주 세밀한 차원까지 들어가게 될 때, 이것이 성경적 입장이고 기독교적 주장이라고 쉽게 말할 수 없는 문제들이 많습니다. 게다가 아주 기본적인 차원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서있으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믿지 않는 세상에서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관철하며 그 기준을 세우며 살아가는 일에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역사 속에서 아주 극단적 상황이 벌어질 때에는, 정부나 위정자에 대한 성경적 판단과 입장이 분명하게 주어질 경우가 있습니다. 가령,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 존 녹스가 처했던 16세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상황은 그런 극단적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참된 기독교를 말살하려는 매리 여왕과 그 정권을 향해서 저항할 권리를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여하는가? 이 문제는 당시 존 녹스와 그리스도인들이 고민했던 문제였습니다. 또는 20세기 중반 아돌프 히틀러가 주눅이 든 독일 국민을 호도하여 독재적 권력을 확보하고 유럽에서 정복전쟁을 일으키고 유태인을 대량 학살하는 일을 했을 때도 극단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천재적 신학자요 경건한 신자였던 디트리히 본회퍼는 미국의 유니온 신학교에 남아 연구하고 가르치던 일을 계속할 수 있었지만, 자신에게 보장된 개인적 안정을 뒤로 하고 조국으로 돌아가 히틀러 암살 모의에 가담하였다가 체포되어 히틀러가 자살하기 얼마 전인 1945년 4월 9일 플로센뷔르크 수용소에서 처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극단적 상황이 아닌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정부와 위정자의 선과 악에 대한 판단 그리고 정치적 쟁점들에 대한 성경적 입장을 주장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성경과 함께, 우리의 많은 신앙고백서들이나 교리문답서는 이런 문제들을 다루지 않습니다. 이것은 많은 정치적 쟁점들을 다루는데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의견을 달리 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 영역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하고, 하나님의 뜻에 거슬러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며, 또한 여러 입장과 견해들을 경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원칙, 생명 존중, 가족, 공동체, 정직, 약자들을 돌봄과 같은 가치들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성경적 관점을 견지하면서, 지혜롭게 그 가치를 잘 구현해내는 정책들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경이 다루는 윤리적 주제들을 다룰 수 있으나 현실 정치의 쟁점이나 공공 정책의 차원에서 무엇이 성경적이고 무엇이 비성경적이거나 반기독교적이라고 쉽게 판단을 내리거나 그것을 개인 신자들에게 강요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실제적 고려 사항들
정치는 정치입니다. 일반 나라의 정치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지 않습니다. 국가와 정부가 제 역할을 감당하도록 기도하며 시민으로서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일반 국가를 하나님 나라로 바꾸는 것은 아닙니다. 그 나라는 위로부터 주어질 나라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과 정치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몇 가지 민감하면서도 사소할 수도 있는 실제적인 권면을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어떤 형제들은 교제의 자리에서 혹은 SNS에서 자신의 정치적 견해와 입장을 지나칠 정도로 강하게 표현합니다. 이때, 자신과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의 마음이 공격을 받는다고 느끼거나 그 양심이 불편하게 느끼도록 표현하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언젠가 선거철에 어떤 교회에 말씀을 전하러 갔다가, 선거운동을 하던 분들이 저녁 집회에 참석하면서 선거운동원들이 입는 조끼를 걸치고 여기 저기 앉아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이것도 교회에서는 조심해야 할 문제입니다. 자신의 정치적 입장으로 형제 사랑을 희생하는 것은 합당한 태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경청하십시오. 정치적으로 다른 견해를 가진 형제들의 말을 경청하되, 형제 사랑과 진실한 마음으로 그렇게 할 때, 여러분은 정치를 우상으로 삼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교회의 친교 자리에서 정치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까? 네,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금지된 사항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할 때, 다툼으로 가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뜻을 형제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살피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언제나 무례하지 마십시오. 전도를 할 때에도 신앙을 지나치게 강요하는 무례함을 피해야 하듯이, 정치에 있어서도 신자는 그런 무례함을 나타내지 않도록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여쭙고 하나님의 뜻을 물을 줄 아는 신자는 겸손한 태도를 지닐 것입니다. 직업 정치인이든 시민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진영 논리, 자기 집단 이기주의를 벗어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사람입니다. 이것은 온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효과적인 증거가 될 것입니다. 세상 나라와 세상 정치는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영원하지 않으며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 오지도 않습니다. 이 땅에 사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속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우리가 최우선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이며 하나님의 의’라는 사실을 세상이 알게 하십시오. 정치가 여러분의 우상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알게 하십시오. 그리고 우리 신자들의 존재 때문에, 이 세상이 더 정의롭고 더 정직하고 더 긍휼함이 많은 따뜻한 세상이 되도록 지헤롭게 세상의 정치에 참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말입니다.